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는 19세 때,
18세의 얀 리벤스와 함께 고향인 레이덴에 작업실을 열었다.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젊은 화가들의 명성은 급속도로 퍼져갔다.
그래서 총독의 보좌관이자 미술애호가였던 콘스탄틴 호이헨스까지
그들을 찾아올 정도였다.
레이덴 시절에 렘브란트는 주로 성경을 비롯한 역사화를 그렸고,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으로 역사화를 새롭게 창조했다.
그는 역사 속의 한 순간을 전달하는 것에 매우 뛰어났고,
그 사건을 통해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을 유감없이 전했다.
그가 1628년에 그린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논쟁>은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유감없이 전한 대표적인 그림이다.
개신교에서는 종교개혁 이후에 사도들에 대한 중요성이 바뀌기 시작했다.
1526년에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가 그린 <네 사도>에는
요한과 베드로, 마르코와 바오로가 그려졌는데,
그림의 배치에서 베드로가 뒤에 있고,
요한과 바오로가 앞에 있다.
개신교에서는 베드로보다 바오로에 대한 존경이 훨씬 컸기 때문이다.
가톨릭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면서 수위권을 인정해주셨고,
교황이 이를 계승한다고 주장하지만,
개신교는 교황의 수위권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이 칼뱅(John Calvin, 1509-1564)이다.
그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기본교리인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가르쳤다.
“베드로는 열두 제자 중 하나이고 수제자가 아니며,
우리는 바오로의 사도직에 대하여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성령이 두 사도에게 다른 역할을 주셨는데,
베드로는 유대인을 위하여 말씀을 전하고,
바오로는 우리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신교 교리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17세기 네덜란드 그림에서 두 사도에 관한 새로운 묘사로 나타난다.
가톨릭을 대변하는 루벤스가 1612년경에 그린 <사도 베드로>에서는
제의를 입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는 모습으로 베드로를 그렸지만,
개신교를 대변하는 렘브란트가 1631년에 그린 <성 베드로의 회개>에서는
감옥에서 연약하게 기도하는 모습으로 베드로를 그렸다.
또 네덜란드 화가들은 베드로보다는 주로 바오로를 소재로 그림을 그렸고,
렘브란트는 말년의 자화상에서 사도 바오로를 자기와 동일시하기도 했다.
가톨릭에서는 베드로를 으뜸 사도로 생각하지만
개신교에서는 바오로를 가장 중요한 사도로 생각하였고,
바오로는 개신교 교리의 핵심인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그의 서간에서 밝혔기 때문이다.
그 결과 논쟁중인 두 노인은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래서 등을 보이며 어둠 속에 있는 사도는 베드로이고,
빛을 받으며 손가락으로 성경을 가리키는 사도는 바오로일 것이다.
그림에는 여기저기에 필사본들이 널려 있고,
바오로 사도는 필사본을 보며 편지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가 찾아왔다.
베드로는 무릎 위에 놓아 둔 성경 속 몇 부분에 손가락을 끼워놓고 있다.
이는 베드로가 성경을 토대로 자기의 주장을 피력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러나 바오로는 성경을 가리키며 베드로를 바라보는데,
그의 시선이 베드로를 압도하고 있다.
이로써 화가는 가톨릭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승리를
사람들에게 공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 속의 대조적인 빛은 화가가 카라바조의 추종자임을 나타내준다.
그러나 그는 명암대비를 이용해 형태만 표현한 것이 아니라,
인물의 성격도 암시하고 있다.
이성의 빛으로 밝혀진 바오로는 학구적이고 이성적이며 열정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림자에 가려진 베드로는 단순하고 감성적이며 고집스럽게 보인다.
그런데 2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이처럼 예리한 심리적 통찰력으로
두 사도를 묘사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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