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오스카 코코슈카의 생애와 그림

백삼/이한백 2014. 8. 27. 11:27

오스카 코코슈카는 프로이트와 클림트 쉴레 말러 비트겐슈타인이 활약하던 빈에서 예술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그래픽적인 윤곽선을 토대로 풍자만화를 닮은 자신의 초기 초상화를 발전시켜갔다. 베를린시기 동안 표현주의 화가들과 교류한 코코슈카는 색채기법연구에 몰두했다. 또 티치아노, 틴토레토 , 엘그레코에 대한 존경을 밑거름 삼아 성숙한 양식 발전을 일구어갔다.  코코슈카는 감각경험이 이론에 우선한다고 믿었다. 미각과 촉각, 후각과 청각, 그리고 시각은 그에게 곧 지식을 의미했다.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는 1886년 오스트리아의 푀힐라른에서 태어났다. 1905년 빈 미술공예학교에 들어가 회화를 공부했으며, 당시 유행한 아르누보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빈 분리파에 가담하여 1908년과 1909년의 분리파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했다. 또한 빈에서 격렬히 일어난 표현주의 운동에 참여해 내면의 심리를 관통하는 독특한 표현양식과 이미지를 선보였다. 시인이며 극작가로도 활동한 그는 희곡 《살인자, 여인들의 희망》을 발표해 표현주의 연극의 창시자라는 평을 얻기도 했다.

코코슈카는 1909년 근대 건축가이자 작가인 아돌프 로스(Adolf Loos)를 만나면서 분리파의 장식적인 양식을 포기하고 대신 표현주의 예술 및 문학 운동에 더 깊이 경도되었다. 그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왜곡된 형상을 제시했고, 현실세계를 바탕으로 삼되 실제적인 묘사를 배제하고 통념적인 모든 요소를 멀리한 표현양식을 구축했다. 불규칙하고 굴곡이 심한 선과 차갑고 어두운 색채, 그리고 강하고 거친 붓 터치는 그의 작품의 특징이다. 특히 초상화를 그릴 때 인물의 외형적 생김새에 치중하기보다는 심리적이며 정신적인 내면을 중시하여 이를 나타내려고 애썼다.

코코슈카는 1914년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의 미망인 알마 말러(Alma Mahler)와의 격정적인 사랑을 소재로 한 《바람의 신부(폭풍우)》를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굳혔다. 그는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 기병에 자원입대하여 머리에 총상을 입는 큰 부상을 당했다. 회복 후에 그는 드레스덴으로 이주하여 1919년부터 1924년까지 드레스덴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로 활동했다. 이후 유럽과 북아프리카, 중동지방을 여행했고, 1931년 나치가 집권하면서 히틀러 독재정권의 탄압이 심해지자 프라하로 옮겨갔다. 독일에서는 그의 작품을 퇴폐미술로 간주하여 전시는 물론 작품 활동조차 금지되었다.

코코슈카는 1938년 영국으로 망명해 제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1년 올다 팔코프스카(Olda Palkovska)와 결혼했다. 그리고 1946년 영국 시민권을 얻었다. 이 시기에 그는 주요 도시의 전경과 초상화, 나치주의에 항거하는 정치적 이념이 담긴 포스터를 제작하며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코코슈카와 올다는 1953년 스위스 레만 호수 근처의 빌뇌브에 정착했으며, 이곳에서 레만 호를 그린 평화로운 풍경화를 남겼다. 코코슈카는 1980년 스위스 몽트뢰에서 9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대표적인 회화 작품으로는 《아돌프 로스의 초상 Portrait of Adolf Loos》(1909), 《바람의 신부(폭풍우) The Bride of the Wind(The Tempest)》(1914), 《기사 수행자 Knight Errant》(1915), 《템스 강의 풍경 View of the Thames》(1959) 등이 있으며, 희곡 작품에 《살인자, 여인들의 희망 Murderer, the Hope of Women》(1909), 《히오프 Hiob》(1917),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Orpheus und Eurydike》(1923), 시집으로 《꿈꾸는 소년들 Die träumenden Knaben》(1918)이 있다.

 

 

 

 

                    미망인 말러와의 사랑을 다룬 폭풍우(바람의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