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조지아 오키프 꽃 시리즈

백삼/이한백 2014. 8. 26. 09:11

 

 

 

 

 

 

 

 

 

 

 

 

 

 

 

 

 

 

 

 

 

 

 

 

 

 

 

 

 

 

 

 

 

 

20세기 낳은 미국 최고의 여성화가 조지아 오키프의 꽃 그림을 보다 보면 마치 여성의 가장 핵심적인 성징을 보는 것 같다. 이런 시선에 대해 오키프는 "만약 내 그림에서 성적 상징을 봤다면 그것은 감상자가 자신의 집착을 본 것일 뿐"이라고 응수한 바 있다.

 

오키프의 이와 같은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꽃에서 성적 이미지를 보려는 비평가들의 입장이 완전히 소멸된 적은 없다. 물론 이런 프로이트적 접근에 대한 오키프의 반감이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다. 그 같은 시각은 자칫 예술 감상에 있어 본질적인 측면은 간과하게 하고 주변적인 것에만 지나치게 매달리게끔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평면적이고 즉물적인 도상 분석을 넘어 오키프라는 작가의 예술세계 전체에 깊이 침잠해보아도 우리는 그의 꽃이 결국 일종의 여성성을 드러내보이는 작품이라는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비록 그것이 보다 높은 차원에서 바라본 것이라 해도 말이다.
 
오키프는 평생 2백 점이 넘는 꽃 그림을 그렸다. 그의 꽃은 대부분 매우 가까이 다가가 그린 꽃이다. 마치 벌이 꽃에 접근하듯 그렇게 다가간 시선이다. 꽃을 그린 그림치고는 화면 사이즈가 큰 편이다. 그만큼 꽃도 확대되어 있다. 한 지인이 왜 그렇게 꽃을 크게 그리냐고 물으니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하지만 당신은 내게 강을 그릴 때  왜 그렇게 강을 실물처럼 크게 그리지 않고 작게 그리냐고 묻지 않잖아요?"
 
그는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
 
"사람들은 다양하게 꽃과 접촉한다. 꽃을 만지거나, 앞으로 몸을 기울여 꽃 냄새를 맡거나, 아무 생각 없이 입술을 꽃에 갖다대거나, 남을 즐겁게 하려고 꽃을 선물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저 꽃을 바라만 보기 위해 시간을 내는 경우는 드물다. 나는 하나하나의 꽃이 나에게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내가 그 꽃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크게 꽃을 그려왔다.
 
대상이 꽤 확대된 탓에 꽃잎 하나하나의 디테일과 그것들이 어우러져내는 조화가 무엇보다 돋보이는 오키프의 꽃 그림.  오키프의 꽃이 왜 이전의 무수한 화가들이 그린 꽃과 그렇게 다른가에 우리는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양 미술사 속의 꽃 그림은, 꽃 자체가 잠시 피었다가 지는 존재라는 점에서, 대체로 무상함의 상징이었다. 금새 피었다 지는 인생이었다. 과거의 화가들은 바로 그 뉘앙스를 충실히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 (이것은  서양화의 오랜 알레고리였다)
 
오키프의 꽃 그림이 처음 그려진 해가 1924년. 바야흐로 여성들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인식이 한창 제고되던 시점에 오키프의 꽃 그림이 나온 것이다. 오늘날의 공격적 페미니즘 미술과는 성격이 무척 다르지만,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새삼 진지한 조형언어로 되돌아보고 그 자연법적 정당성과 위엄, 아름다움을 절묘하게 표현해낸 오키프의 꽃 그림은 마땅히 그런 역사적 맥락 위에서 파악될 필요가 있다.
 
오키프의 꽃은 '성적 정체성에 대한 근대적 반성'위에 핀 꽃인 것이다. 오키프가 유명한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치와 결혼한 뒤에도 자신의 성을 그대로 사용한 데는 바로 이런 정신적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당시에는 그 같은 행위가 무척이나 파격적이고 대담한 사회적 일탈이었다.
 
조지아 오키프는 1887년 11월 15일 위스콘신의 선 프래어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부농이었으며 집에는 온갖 가축이 뛰놀았다. 옥수수밭, 야생화밭은 그의 감수성을 늘 자극하는 이미지였다. 호방하고 우스갯소리를 좋아하는 성격의 아일랜드계 아버지와 달리 오스트리아 지배를 무너뜨리려 했던 헝가리 저항민의 딸인 어머니는 지적인 성향에 내성적이며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일찍 미술에 대한 재능을 드러낸 오키프는 시카고 미술학교를 거쳐 뉴욕의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 입학했다. 뉴욕에서 공부하면서도 오키프는 그 곳에 그다지 매력을 못 느꼈다. 첵사스, 뉴멕시코 등 광활한 들판을 그는 선호했다. "명료함, 그게 내가 이곳(뉴멕시코)을 좋아하는 이유"라고 한 친지에게 그는 말한적이 있다.
 
오키프가 당대 최고의 사진작가이자 전위적인 미술가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데 남다른 안목과 영향력을 보였던 스티글리츠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전적으로 오키프의 재능 때문이었다. 오키프의 재능을 우연히 발견한 스키글리츠는 오키프에 대해 깊은 애정을 느꼈고 둘은 1918년부터 동거관계에 들어가 1924년에 결혼했다. 이때 둘의 나이는 37세와 61세. 스티글리츠가 24세 연상이었다.
 
둘은 워낙 개성이 강해 스티글리츠가 사망할 때까지 늘 '따로 또 같이' 식으로 살았다. 하지만 서로의 능력을 무척 존중했고, 스티글리츠는 처음부터 오키프의 모습을 자신의 앵글에 담는 일에 대단한 정열을 쏟았다. "이제껏 어느 여성도 겪어보지 못한 여성 형상화의 과정"을 드러내보인다는 스티글리츠의 오키프 사진에는, 그녀의 다양한 표정과 감정, 내적 지향이 잘 드러나 있다.
 
여성으로서의 은밀한 부분까지 포함해 오키프의 온몸을 때로 현미경적 시선으로까지 훑은 스티글리츠의 카메라는 오키프에게 "스티글리츠만큼 인물의 성격과 진실을 잡아낼 수 없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고, 그녀로 하여금 사람 그리기를 포기하게 하는 이유의 하나가 됐다. 또 꽃을 바라보는 오키프의 시선에는 사실 스티글리츠가 오키프를 바라보는 시선이 오버랩되어 있다는 평가가 있을 만큼 오키프를 향한 스트글리츠의 눈은 그의 예술에 나름의 영향을 끼쳤다.

 

오키프의 꽃은 어쩌면 오키프 자신의 모습일지 모른다.

화려하면서도 은은한 아름다움, 꽃이란 늘 바라봄을 당하는 존재이고 그것을 의식해 더욱 바라봄에 몸을 맡기는 존재이다.

어쩌면 여성에 대한 지나치게 일반적이고 일방적인 관념일지도 모르지만, 여성의 힘은 '밀어붙이는'데 있지 않고 '끌어당기는'데 있다는 점에서 그의 꽃 그림은 다시 여성성의 정수로 화한다. 감상자는 어쩌면 그 여성성의 훔쳐보기(핍핑)를 공개적으로 허용하는 오키프의 당당한 태도에 새삼 경이로움을 느끼게 되는지 모른다.

 

오키프는 꽃 이외에 동물의 해골 등 뼈, 평원 풍경 따위를 많이 그렸다. 이 가운데 특히 동물 뼈 그림은 남성성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꽃 그림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오키프 자신은 "위대한 미국 소설 등 '위대한' 미국을 외치나 '실제로 미국을 잘 모르는 남자'들이 싫어" 붉고 푸른 바탕 위에 해골 뼈를 넣은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남성 중심의 가치에 조용히 저항하며 자기 정체성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을 보여주는 그런 일화이다.
 
이런 오키프에 대해 문명 비평가 멈포드는 "미국에서 가장 오리지널한 작가"라는 찬사를 보냈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1958년의 미국대가 14인전 카탈로그에서 "오늘날의 응용미술과 심지어 건축에까지 미친 그의 심대한 영향은 의심할 바가 없다"며 "오키프는 현존하는 최고의 여성화가"라는 헌사를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