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역사, 소식

읍淸樓 음청루 현판일기

백삼/이한백 2014. 1. 8. 14:38

挹淸樓 읍청루

설명판

읍청루소재지 : 충북영동군 매천리 산4-4 산6-1

구 황간현의 아문루(衙門樓)인 황악루(黃嶽樓)가 퇴락하여 1925년에 영동군수 최지환(崔志煥)이 당시의 지방유지와 협의하여 군(郡)소재지인 영동읍 매천리로 이건(移建) 신축(新築)하고 읍청루(挹淸樓)라 편액하였다 이는 매천의 맑은 기운을 따서 이름한 것이라하며 이때 비용은 이당 손재하(二堂 孫在夏)선생이 100만원을 희사하여이루어졌다. 그후 1971년 임혁재(任赫宰)군수가 다시 용두산 중간봉으로 이전하였으며 6.25전쟁당시 없어진 현판은1971년 효연 이철순이 다시 썼다. 이누각의 규모는 청색기와. 정면 3칸, 측면2칸 팔작지붕의 중층건물(重層建物)로 36m이다.

 

挹淸樓韻 읍청루 운 挹과 淸과 樓를 운자로 짓다

國譯 李揆三

二水俯臨鏡面淸 이수부림경면평

風常淸矣月常淸 풍상청의월상청

三淸兼備長淸挹 삼청겸비장청읍

天地中間我亦淸 천지중간아역청

丹陽后人 梅潭 禹用濟 稿

단양후인 매담 우용제 고

 

두 물을 굽어 보니 거울 같이 맑은데

바람이 항상 맑고 달도 항상 맑아라

맑은 것 셋을 함께 갖추고서 길이 맑을 읍청루여

하늘과 땅 사이에 나 또한 맑도다

단양후인 매담 우용제 지음

 

一曲龍頭起一樓 일곡용두기일루

半空高出挹淸樓 반공고출읍청루

行人屈指南州最 행인굴지남주최

不讓岳陽黃鶴樓 불양악양황학루

永山后人 蓉軒 金東杓 稿

영산후인 용헌 김동표 고

 

용두봉 한구비에 누각하니 일으키니

공중에 높이 솟은 읍청루로다

행인이 손으로 가리키며 남쪽지방에서 최고라하고

악양의 황학루에 양보하지 않으리라 하네

영산후인 용헌 김동표 지음

 

從古擅名區 종고천구명

龍頭壓永州 용두압영주

人家芳草岸 인가방초안

驛路落花洲 역로낙화주

明月千秋在 명월천추재

淸風百世留 청풍백세류

開胸多爽氣 개흉다향기

知是挹淸樓 지시읍청루

恩津后人 靜齋 宋在郁 稿

은진후인 정재 송재욱 고

 

옛날부터 이름을 드날리던 곳

용두봉은 영동을 내려다 본다

인가 가에는 풀들이 꽃다웁고

역로에는 꽃이 지고 있구나

밝은 달은 천년에 그대로 있고

맑은 바람은 백년에 머물렀어라

상쾌한 기운에 가슴이 열리니

이곳이 읍청루임을 알겠도다

은진후인 정재 송재욱 지음

  註 : 擅名;이름을 드날림

崔志煥郡守 記文 國譯 李揆三

永山水淸麗,古稱爲名州,而地居湖嶺之喉,重而要實南道之保障也,往歲擧黃之全疆得沃之半界,皆屬於永爲其地之不可輕也,有事則師象往來,雖無事之時,車盖交道舃堞堆,當劇無旁午,故守土之吏皆謹其治.然治亦無術,治劇之道,要在導民使安淸淨而鎭之也,志煥不才太守,惟恐不稱于職莅,治數歲明法,守令輕役寬賦勸農課桑,一以安民爲務亦不以爲不使,乙丑秋郡人告,黃之黃嶽樓久而圮,雖若無與於民事而修擧,頹廢以資休歇以待,賓客亦爲政之一事也,是在黃則爲郡樓,太守之所可朝暮至也.亦賓客之所興有事,今距郡治頗遠非永之所可暇息也,請移之以新,耳目以篤風流實太守之美事也,乃相地於治南三百步梅川之口得一高邱,山明而水淸,洞開而野闊,可以供眺望而資宴遊,遂命工集事材瓦用舊,丹韄從新,不日而樓成畵榭層,樑高明敞豁,爲永之眉目,遂扁以挹淸取,其映帶梅川而納其淸也,每勝日良辰,官淸吏閒,乃命酒約客履舃瓢,然御天風而坐白雲霞,盞交暎羽觴迭飛,或雅歌或高咏,以至高軒月上曲檻,水明則滿眼玲瓏,渾是湧金流玉,令人心骨俱淸灑然,若攬江海,而濯臟腑安有汚濁之滯於其間也,儘乎其淸矣,切聞吏道,尙淸淸則廉廉則公公則民服苟能以得吾樓者,以加臨民之際則永之治亦庶可圖矣,昔孔子弟子宓子賤,爲地名單父宰,彈琴不下樓,而縣大治,非其有道術之妙,別有化之也.直由子賤之賢,素有以服於民,而不擾民不害民,有淸德及民也,顧志煥之不德,雖不敢猥擬於古人之事以取,擧步之譏,然若其心,則亦不欲勞民以求肥,自列於世也,此挹淸之所以扁,吾樓而玆樓有亦爲厲精之一云爾,

西紀一九八一年十月 仲秋佳節

 

최지환 군수 기문

영산은 물이 맑고 곱다, 옛날부터 이름난 고장으로 호서지방과 영남지방의 목과 혀같은 중요한 위치에 있어, 실로 남도를 보호하고 막아주는 요지이다. 수년전에 황간의 전지역과 옥천의 경계 반을 들어 모두 영동에 속하게 하였다, 그 땅을 가벼이 보아서는 안된다, 사건이 있을 때 군사들이 왕래하고, 비록 일이 없을 때에는 덮개수레가 교통하는 큰길이며, 성첩을 잘 쌓으면 남쪽의 사고에 걱정이 없는 곳이다,

그래서 땅을 지키는 관리는 모두 그 다스림에 정중해야 한다, 그러나 다스림에 술수는 없는 것이다, 治道(치도)의 요체는 백성들로 하여금. 편안하고 맑고 조용하게 진정하도록 인도 하는데 있다. 志煥(지환)은 재주 없는 太守(태수)이나 오직 두려워하고 직위를 내세우지 않고 治世(치세)에 법을 밝히려 하였다, 수령은 부역을 가볍게하고 조세를 너그럽게 하고 농사와 길쌈을 권장하고, 한결같이 백성들이 편안하게 하도록 힘썼고, 또한 시켜서 하게 하지는 않았다,

을축년 가을 군민이 고하기를 “황간의 황악루가 오래되어 허물어지고, 만약에 백성들과 더불어 수리하지 않으면 무너져 못쓰게 될것인데, 그냥 쉬면서 기다릴 것인가? 賓客(빈객) 접대는 또한 정치의 한가지 일이다, 이에 황간에 있는 군루는 태수가 아침저녁으로 거닐어야하고, 또한 빈객도 접대해야 하는 곳이다. 황간은 군청과 자못 멀어서 영동이 아닌데 어느 여가에 쉴 수 있겠는가?, 청하건대 새로운 곳으로 옮겨 풍류로서 이목을 높이는 것도 태수의 아름다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땅을 찾아보았더니 군청 남쪽 삼백보 거리, 매천리 입구에 한 높은 언덕을 얻었다, 산은 밝고 물은 수정 같으며, 골이 열려 들이 멀리 틔었고, 가이 함께 바라볼만하고 宴會(연회)를 열만한 곳이었다. 드디어 명을 내려 工人(공인 匠人장인)을 모집하고 재료와 기와는 옛것을 쓰고 단청을 새롭게 하니, 얼마 안되어 누대가 완성되고 층대를 그렸다, 대들보는 높고 먼곳까지 밝아 휑하게 바라보이니 영동의 얼굴이 되었다. 드디어 挹淸(읍청)을 취하여 현판을 걸으니 그것은 梅川(매천)을 빙둘러 비치는 그림자가 맑게 드리웠다는 뜻이다, 매양 경축일이나 경사스러운 날, 관청에 일이 없고 관리들이 한가할 때 이에 술을 준비하게 하여 손님을 청하여 오게하고 표주박으로 따른다, 하늘에 바람이 불어오고 흰 구름 노을에 앉아 술을 따르면 잔은 가벼이 나르는 듯 오고간다, 어떤이는 우아한 노래를 부르고 어떤이는 소리 높여 시를 읊을 때, 높은 마루에 달이 떠오면 둘레는 어둑해지고 물은 밝아 영롱하게 눈에 가득 석이어 금방울로 튀어 오르고 옥물결로 흘러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과 몸을 함께 씼은듯이 맑게 한다. 강과 바다를 보는것 같고 오장육부를 씻어내는듯 하여 그동안에 더러움으로 막혔던 것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 편안함으로 간절히 관리의 도리를 생각하게 한다, 관리는 맑고 맑아야 하고, 청렴하고 청렴해야하며, 사사로움이 없이 公的(공적)으로 일을해야 백성들이 승복한다. 진실로 능히 내가 이 읍청루에서 얻는게 있을 것이고. 더하여 백성들이 올라 보면 영동의 治政(치정)에 또한 함께할만하다고 할것이다,

옛날 공자의 제자 宓子賤(복자천)이 單父(단보;선보)의 태수가 되어 누각에서 거문고만 뜯고 내려오지 않았는데도 현이 크게 잘 다스려 졌다, 거기에는 도술이 있거나 별난 덕화가 있는것은 아니었다. 바로 복자천의 어짐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열복하였기 때문이다 백성을 해롭게 하지 않으면 동요하지 않고, 청렴하고 덕이 있어 백성에게 미쳐야 한다, 志煥(군수 최지환)을 돌아 보건대 덕이 없는데 감히 외람되게도 옛사람의 고사를 취하여 비기어 말한것은 비웃음거리가 되지나 않을런지?

그러나 그 마음은 곧 또한 백성을 수고롭게 하지 않으면서 잘살고 세상의 대열에 스스로 참여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 挹淸樓(읍청루)에 내가 편액을 하면서 이 樓(루)에서 정성을 다하고 힘쓰겠다는 한 말씀을 할 뿐이다.

 

서기 1981년 10월 중추가절

*위의 일자는 처음 편액일자가 아니고, 잃어 버리고 뒤에 다시 새겨서 건 날자임)

 

註(주) *湖嶺(호령)=호서지방과 영남지방 *永山,永(영)=영동 *黃(황)=황간 *沃(옥)=옥천 *賦(부)=부역과 조세 *桑상=뽕나무로 누에를 쳐서 길쌈을 함 *眺望(조망)=널리 바라 봄 *丹韄(단획)=단청하고 장식함 *榭層(사층)=루각의 층계 *不日(불일)=며칠이 걸리지 않아 *敞豁(창활)=높이 멀리까지 뚤림 *眉目(미목)=눈썹과눈, 얼굴 *扁(편)=현판, 현판을 걸다, *良辰(양신)=佳節=경사스러운 날 *約客약객=손님과 약속 *履舃=신이,신석 *瓢(표)=표주박 *檻(함)=우리함 *玲瓏(영롱)=광채가 찬란함 *灑(쇄)=뿌리다, 씻다 臟腑(장부)=五臟六腑(오장육부) *儘=다할진,멋대로진 *宓子賤(복자천)=공자의 제자, 선보의 현령 *單父(단보 또는 선보, 고을 이름) *擬(의)=빗기어, 본떠서

挹淸樓沿革記 (읍청루 연혁기)

湖西의 勝地인 永同에 一樓가 稽山 龍頭에 飛聳하여 이고장의 面貌를 갖추고 있으니 名曰 挹淸樓라 한다 이 樓亭은 西紀 一九二七年丁卯에 當時 郡守 崔志煥氏가 地方有志와 協議하여 옛날 黃澗縣廳의 衙門이었던 黃嶽樓를 怡堂 孫在夏氏의 特志贊助로 移建費를 全擔하였고 基地는 求禮張氏 宗山인 바 그宗中의 寄贈으로 이루어 졌던 것이다 移建 後 三年이 되자 공교롭게도 旱災가 極甚하여 郡民의 怨聲이 藉藉하였음은 樓亭을 龍頭에 세웠음으로 비가 내리지 아니하니 挹淸樓를 撤去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數次의 祈雨祭와 市場을 一時 梅川里 入口로 옮겨보기도 하여 마침내 洽足한 甘雨가 내려 撤去 當해야 할 運命에서 難을 免하게 되었으니 많은 波瀾曲折을 격었던 것이 이 樓亭이다. 現 邑事務所가 新築 되기前에 梅川里로 通하는 道路工事로 因하여 또다시 移建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西紀一九七十年의 일이다 當初에는 木造이었으나 風雨로 老朽하여 不得已 現代式 鐵筋 콘크리트로 옛모습 그대로 지은 것이다 現位置로 옮길적에 누구의 所致인지 挹淸樓라는 大字 懸板을 비롯하여 亭內에 있었던 崔志煥 郡守 記文과 當時 名筆로 이름 높았던 龍岡 金應淵先生의 詩韻 또는 金敏洙 金永薰 朴性立 崔芝翰 洪鍾経 諸氏의 詩를 板刻하여 걸었으나 그 行方을 감추어 찾을 길이 없어 拾年이라는 星霜을 無名樓로 내려 왔으니 어찌 住民으로서 面愧스럽지 않으리요. 樓亭에 懸板이 없어 地方의 羞恥心을 禁치 못하던 中 永同郡守 禹用濟氏 永同邑長 裵貞赫氏와 東園 林漢榮氏의 快贊으로 再製하여 懸板하니 그 뜻을 讚揚하며 感謝함을 禁치 못하는 바이다. 이 樓亭을 黃澗에서 이곳으로 옮기고 邑淸樓라 이름함은 梅川里 誠齋 姜友永先生의 所定한바이며 글씨는 梅谷 浩堂 南復元先生의 쓰심이였다. 多幸히 崔志煥 郡守 記文은 傳해져 있음으로 아래에 記하여 後世에 傳하고자 한다 初筆者 南先生은 故人이 되어 다시 글씨를 받을길이 없어 曉淵 李哲純氏의 揮毫로 挹淸樓라 다시쓰고 本記文은 湖亭 河萬春씨의 솜씨이다.

西紀一九八一年十月 仲秋佳節

永同郡 文化財 保護協會 運營委員

永山后人 金東杓 謹識

註주 *稽山계산=永山,吉同 영동의 이칭 *飛聳비룡=나르는듯 높이 솟았다 *衙門아문=관청의 문루, 양쪽으로 성이 있었으므로 누각과 돈대를 겸하였다, *波瀾曲折파란곡절=많은 어려움의 비유 * 老朽노후=오래되어 썩음 *鐵筋=철근 *星霜(성상)=해,年 *快贊(쾌찬)=기쁜 마음으로 찬조함 *揮毫(휘호)=붓을 휘둘러 글씨를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