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역사, 소식

爲國忠臣 賣國奴 權重縣(한말 매국노 권중현이 영동사람)

백삼/이한백 2014. 1. 8. 14:43

권중현[ 權重顯 ]을 영동에서 알고 기억하는분이 몇이나 될까 하는 의구심에 올립니다.
한말 을사 오적의 한 사람으로 영동사람입니다.  을사 오적 암살단에게 저격을 당하였으나 용케 모면하고,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과 조선사편수회의 고문 등을 지내다 여생을 마친 매국노로 그의 묘가 당곡리 삼빙이 골작 명당이었겠지만 오적의 불명예의 여론을 못견디고 그 아들이 야간에 파묘하여 화장후 날려버렸다한다. 한 때 세상을 주름잡던 권력자의 사후 염라대왕의 극형을 못 면한 것 같다.  당시로서는 영동의 최고 인물이 틀림 없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인물평이 내려질지?            * 아래 글 참조 바람
 

1854(철종 5)∼1934. 조선 말기의 관리.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재형(在衡), 호는 경농(經農). 충청북도 영동 출신. 일찍부터 일본어를 배워서 일본 정계의 사정에 밝았다. 그후 이런 능력이 인정되어 1883년 부산감리서서기관에 임명되었다. 1888년에는 조정의 명을 받고 직접 일본을 방문해 각종 문물을 시찰하고 귀국하였다.

1891년부터 주일공사로 동경에 재임 중, 오스트리아와 수호통상·항해 등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였다. 1894년 한성부윤, 1895년 내각총서(內閣總書), 1896년 법부협판(法部協辦), 이듬해에는 농상공부협판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칙명으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육군 대연습을 참관하였으며, 고종의 황제위호(皇帝位號) 상소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 공을 인정받아 정2품에 올랐다. 1898년 의정부의 참찬·찬정(贊政)을 거쳐 농상공부대신으로 승진했고, 1899년에는 법부·농상공부대신을 겸임하였다.

1904년 육군부장(陸軍副將)으로 임명되어, 당시 러시아와 전쟁을 하고 있던 일본군의 위문사(慰問使)가 되어 요양(遼陽)·여순(旅順)을 순방하였다. 그 공로로 일본에서 훈일등서보장(勳一等瑞寶章)을 받고, 다시 훈일등팔괘장(勳一等八卦章)을 받았다.

1905년 8월에 군부대신, 이어 9월에는 농상공부대신이 되고, 1906년 다시 군부대신을 역임하다 1907년 5월 박제순(朴齊純) 친일내각이 총사직할 때 함께 물러났다. 그 뒤 중추원고문에 임명되었으며, 칙명으로 일본박람회를 시찰하였다. 거기서 같은 해 12월 훈일등태극장을 받고, 1908년 다시 훈일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을 받았다.

일제로부터 많은 훈장을 받고, 친일활동을 적극적으로 행한 사람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인물이다. 특히, 1905년 농상공부대신으로 있을 때 을사조약 체결에 찬성, 을사오적의 한 사람으로 규탄을 받았다.

1907년 을사오적 암살단인 나인영(羅寅永) 등에게 서울 사동 어귀에서 한낮에 저격을 당했으나 요행히 화는 면하였다.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과 조선사편수회의 고문 등을 지냈다. ≪태사권공실기 太師權公實記≫·≪국재실기 菊齋實記≫ 등의 편서(編書)가 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참고문헌≫ 大韓季年史
≪참고문헌≫ 大韓帝國官員履歷書(國史編纂委員會, 1972)
≪참고문헌≫ 駐韓日本公使館記錄―韓末官人의 經歷一般―(崔永禧, 史學硏究 21, 1969)
≪참고문헌≫ 朝鮮貴族列傳(大村友之丞 編,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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