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명량대첩 벽파정 앞바다인가 우수영 앞바다인가?|

백삼/이한백 2014. 8. 27. 11:37

명량대첩은 어디에서 벌어진 싸움일까요?

선조실록에서 이순신이 올린 장계를 보면 벽파정 정자 앞바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순신의 일기는 첫싸움이 벌어진 곳은 명량 즉 울돌목을 지난 북쪽 바다 즉 우수영 앞바다로 나옵니다.

이순신의 명량해전 당일 일기, 이 일기는 무술년(1598) 일기의 앞부분에 다시 작성되어 있는 것으로 정유년 일기를 다시 상세히 작성한 것입니다. 이 일기를 보면 명백히 적은 명량(울돌목) 을 지나 왔습니다.

 


 

 

 (우 2행)

十六日甲辰 晴 早朝 別望進告內 賊船不知

其數  鳴梁由入直向結陣處云 卽令諸

船 擧碇出海 卽賊船百三十餘隻 回擁我諸

船 諸將等自度衆寡之勢  便生回避之計 

​16일 갑진 맑음 이른 아침 별망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이 헤아릴 수 없이

명량을 거쳐 바로 진을 치고 있는 곳을 향해 들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즉시

여려 배에 명해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바로 적선 ​130여척이 우리 여러 배를

둘러쌌다. 여러 장수들은 스스로 적이 많고 우리가 적은 세력을 헤아리고 회피할 꾀를 내고 있었다.​

(6행)

右水使金億秋所騎船 已在二馬場外 余促櫓

突前 亂放地 玄 各㨾銃筒 發如風雷 軍官等

麻立船上 如雨亂射 賊徒不能抵當 乍近乍退 

然圍之數重 勢將不測 一船之人 相顧失色 

余柔而論解曰 賊船雖多 難可直犯 小不動心 

更盡心力 射賊  射賊 顧見諸將船 則退在遠

海 欲爲回船 軍令 則諸賊乘退扶陞 進退惟谷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이미 2마장 밖에 있었다. 나는 노를 재촉해

앞으로 돌격하며 어지러이 지자, 현자등 여러 총통을 어지러이 놓아 바람과 우뢰같이 발사되었다. 군관등은

배위에 삼대같이 서서 비처럼 어지러이 쏘았다. 적의 무리는 저항하지 못해 잠시 다가왔다 잠시 물러났다 했다.

그러나 포위의 숫자가 엄중하니 세력을 장차 예측할 수 없었다. 배안의 모든 사람은 서로 돌아보며 실색했다.

나는 부드럽게 논리적으로 풀어말하기를 적선이 비록 많으나 바로 우리를 범하기는 어렵다. 조금도 동요하지 말아라. 

다시 마음과 힘을 다해라. 적을 쏘아라. 적을 쏘아라. 여러 장수의 배를 돌아보니 물러나 멀리 있었다.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려하니 여러 적이 물러나는 틈을 이용해 올라타려해 진퇴유곡이었다. ​


 

(우1행)

令角立中軍令下旗 又立招搖旗 則中軍將彌助

項僉使金應諴船 漸近我船 巨濟縣令安衛船

先至 余立于船上 親呼安衛曰 安衛欲死軍法乎

安衛欲死軍法乎 逃生何所耶 安衛慌忙突入賊

船中 又呼金應諴曰 汝爲中軍而遠避 不救

뿔피리를 명하고 중군에게 명을 하달하는 깃발을 세웠다. 또 초요기를 세웠다. 즉시 중군장 미조항

첨사 김응성의 배가 점차 우리배에 가까이왔고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먼저 도착했다. 나는 선상에 서서 친히 안위를 불러 말했다. 안위야 군법에 죽으려 하느냐?

안위 군법에 죽을 욕심이냐? 도망가서 어느 장소에서 살겠느냐? 안위가 황망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또 김응성을 불러 말했다. 너는 중군으로 멀리 피해 대장을 구하지 않았다.

(6행)

大將 罪安可逃 欲爲行刑 則賊勢又急 姑令立

功 兩船先登之際 賊將指揮其麾下船二隻

一時蟻附安衛船 攀緣爭登 安衛及船上之人

死力 或持稜杖 或握長槍 或水磨石塊

無數亂擊 船上之人 幾至力盡 吾船回頭直入

如雨亂射 三船之賊 幾盡顚仆 鹿島萬戶宋汝

平山浦代將丁應斗船繼至 合力射殺 無一 

죄에서 어찌 도망가겠느냐 형을 집행하고자 하나 적의 세력이 또 급하니 우선 공을 세우기를 명한다.

두배가 먼저 전투에 오른 때에 적장은 그 휘하의 배 두척을 지휘했다.

일시에 개미처럼 안위의 배에 붙어 모서리를 잡고 경쟁적으로 올랐다. 안위와 선상의 사람들은

각각 죽을 힘을 다했다. 혹은 모난 몽둥이를 들고 혹은 긴 창을 잡고 혹은 호박돌로

무수히 어지럽게 때렸다. 배위의 사람들이 거의 힘을 다했을 무렵 우리배는 머리를 돌려 바로 들어가며

비처럼 어지러이 쏘았다. 세 배의 적은 거의 뒤집히고 녹도만호 송여종

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가 계속 도착했다. 힘을 합쳐 사살하니 

 

 

 

(우 1행)

賊動身 降倭俊沙者 乃安骨賊陣投降來者也

在於我船上 俯視曰 着畫文紅錦衣者 乃安骨陣

賊將馬多時也 吾使無上金乭孫 要鉤釣上船頭

則俊沙踴躍曰 是馬多時云 故卽令寸斬 賊

氣大挫 諸船知不可犯 一時皷噪 齊進 各放地玄字

한명의 적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항왜 준사라는 자는 안골포 적진에서 투항해 온자인데

우리 배위에 있었다. 바다를 내려보고말하기를 그림무늬 붉은 비단옷 입은자는 안골포

적장 마다시입니다. 나는 무상 김돌손을 시켜 갈고리로 건져 뱃전에 두도록 하니

준사가 날뛰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마다시 입니다했다. 그래서 즉시 마디로 자르도록 명하니

적의 사기가 크게 좌절되었다. 여러배는 감히 범할 수 없음을 알고 일시에 북을 울리고 소리치며 일제히 나가며

각자 지자 현자 총통을 방포했다.

 ​

(6행)

聲震河岳 射矢如雨  賊船三十一隻撞破 賊船避

退 更不近我舟師  欲泊戰海 則水勢極險 風且逆

 勢亦孤危 移泊唐笥島經夜 此實天幸  

소리가 강과 산을 움직이고 쏜 화살이 비와 같았다. 적선 31척이 충격으로 부숴졌다. 적선은

도피해 물러났다. 다시 우리 수군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 전장터에서 정박하고자 했으나 수세가 극히 험하고 바람도 역풍으로

불었다. 세력 역시 외롭고 위태로웠다. 당사도로 옮겨 정박하고 밤을 세웠다. 이는 실로 천행이었다.

 

 

 

앞에서 소개한 첫 일기와 비교하면 상당히 상세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다시 쓴 정유일기에서 어디에서 명량대첩을 벌인것인지에 대한 단서가 남아 있습니다. 원 일기에는 없던 정보입니다. 명백히 우수영 앞바다입니다. 진도대교 북쪽 바다죠. 그런데 왜 이순신은 장계에 벽파정 앞바다에서 적을 무찔렀다고 보고한 것일까요?

진도대교 북쪽에서 전투를 시작했고 물길이 바뀜에 따라 전선이 진도대교 아래 울돌목을 지나 벽파진 근처에서 끝이 난 것이라 보아야 합니다.

 ​조류는 현재 시각으로 표시하면 새벽 6시 50분에 바뀝니다. 남으로 흐르던 물이 북으로 흐릅니다. 그후 13시 02분에 북으로 흐르던 물이 남으로 역류하게 됩니다. 다시 19시 17분이 되면 물길이 바뀝니다.

​전투상황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날 낮 1시 남에서 북으로 흐르던 물길이 북에서 남으로 역류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닻을 내리지 앟고 멈춘채 싸움을 하게 되면 7노트에 달하는 조류에의해 진도대교북쪽에서 남쪽 벽파나루 쪽으로 흘러가게 되겠죠.   

 

 

 

 

<명량해전 전날 일기>

十五日癸卯 晴  乘潮水 領諸將移陣右水營前洋

碧波亭後有鳴梁 數小舟師 不可背鳴梁爲陣故也

招集諸將約束曰 

兵法云 必死則生 必生則死 

又曰 一夫當逕 足懼千夫 今我之謂矣 

爾各諸將  小有違令  則卽當軍律  小不可饒貸 再三嚴約 

是夜夢有神人 指示曰 如此則大捷 如此則取敗云

15일 계묘 맑음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의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숫자가 적은 수군으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를 불러 모아 약속하며 말하기를

병법에 말하기를 반드시 죽고자하면 바로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바로 죽는다

또 말하기를 한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족히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지금 우리를 말하는 것이다.

너희 각 장수들은 작게라도 령을 어김이 있으면 즉시 군률을 당하고 작은 용서도 불가하다. 재삼 엄히 약조했다.

이날 밤 꿈에 신인이 있었다. 지시해 말하기를 이렇게 하면 대첩을 거두고 이렇게 하면 패배한다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