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선인 내조기(朝鮮人來朝記)’(古朝51-나205). 통신사를 일본에 대한 조공사로 간주하고 있음이 문헌의 제목에서 두드러진다. 사진 왼쪽의 ‘청도(淸道)’ 기는 통신사 행렬에 앞장세우던 것이다. 근세 일본의 우파 인사들은 이 깃발에 대해, 조선이 일본에 대해 보여주던 고압적 태도를 상징하는 것이라며 불쾌해 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지난 회에는 러시아와 조선이 일본을 협공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반영한 19세기 초 일본의 가상 전쟁소설 ‘북해이담’을 소개했다. 여기에는 조선이 파견하는 통신사 속에 러시아 스파이가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대목이 있었다. 1902년에 연해주를 탐험한 러시아인 블라디미르 클라브디예비치 아르세니예프가 나나이인 사냥꾼 데르수 우잘라를 처음 만났을 때, 그에게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냐고 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처럼 극동 시베리아의 선주민 계열 러시아인을 한국인 사이에 섞어두면 일본인이 구별을 못할 수도 있을 터이다. 하지만 19세기 초기까지 일본인이 오호츠크해 연해에서 만난 러시아인은 전형적인 유럽인 혈통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북해이담’의 이러한 설정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19세기 들어 일본에서는 내셔널리즘이 고조되는 한편으로, 여러 나라의 외국인을 구별하지 않고 통틀어서 적개감을 드러내게 되었다. 하야시 시헤이가 ‘해국병담’에서 청나라와 러시아가 연합해서 일본을 공격하려 한다고 주장한 것처럼, 아마도 외국인이라면 조선이든 청나라든 러시아든 모두 일본을 노리고 연합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적었을 터이다. 아무튼 19세기 초기의 일본 일각에 조선이 파견하는 통신사 일행을 정치 군사적 목적을 띤 스파이로 보려는 경향이 있었음은 확실하다. 현대 한국에서는 통신사가 근세 한·일 양국 간의 문화사절로서 활동한 사실을 부각시키려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애초에 조선이 통신사를 파견한 것은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목적에서였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을 되돌려오는 것이 그 일차적 목적이었다. 또한 임진왜란으로 인해 발생한 만주 지역의 힘의 공백 상태를 이용하여 누르하치가 급속히 여진인 세력을 통합하고 있던 상황을 반영하여 남북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르지 않기 위해 일본 측을 달래면서 군사적 움직임을 감시하고자 했다. 일본 측에서도 조선과의 국교를 정상화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을 꺾고 새로이 일본의 권력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새로이 수립된 정권을 외국으로부터 인정받아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자 한 것이다. 한편 쓰시마섬을 지배하던 소 가문(宗家)으로서는 조선과 일본 양국 간의 교역을 통해 섬 주민들이 생존할 수 있다는 현실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일이 있어도 양국이 국교를 정상화해야 했다. 조선 측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투항해서 활동하다가 다시 조선에 귀순한 손문욱,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부터 조·명·일본 간의 협상을 맡고 있던 사명당 유정이 물밑 교섭에 나섰다. 특히 손문욱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공훈을 세우기 위해 조·일 양국의 국교 재개에 필사적이었던 것 같다.(KBS 역사스페셜 2010년 7월 3일 ‘이순신 대장선의 미스터리-손문욱’ 참조) 당시 조선 정부와 도쿠가와 막부는 상대편이 먼저 국교 재개를 요청해야 한다는 기싸움을 벌였다.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 가문은 양국의 국서를 위조하는 무리수를 두었고, 이 국서 위조 사건이 훗날 소 가문의 존망을 위협하는 일대 사태로 발전하게 된다. 이처럼 조선과 일본의 국교를 정상화하고자 한 쓰시마 측의 협상가로서의 수완과 절박함에 힘입어, 조선과 일본은 17~19세기에 정치 군사적 안정을 유지하게 된다. 조선 측은 소 가문이 국서를 위조했음을 짐작하면서도 일본과의 안정적인 관계 유지가 북방정책의 성공을 보장한다는 안보상의 이유를 중시하여 1607년에 정식으로 사절단을 파견한다. 조선의 통신사가 도쿠가와 막부의 소재지인 에도(江戶)까지 가기 때문에 일본 측의 사절단도 한양에 가야 한다는 일본 측의 요구가 있었으나, 조선 전기에 한양을 드나들던 일본 상인과 승려들이 임진왜란 당시 길 안내를 했다는 전례가 있어서 조선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그 대신 쓰시마 사람들을 위무한다는 뜻에서 부산 지역에 왜관을 설치해 주고 여기까지만 오게 했다. 이에 대해 근세 일본의 많은 사람들은, 조선인이 에도까지 오고 일본인은 한양까지 가지 않으므로 일본이 조선보다 우위에 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왜관을 중세 동남아시아 각지에 만들어졌던 일본인 마을(日本人町)과 같은 일종의 해외 식민지로 간주했다.
-
- ▲ 부산의 40계단 문화관에 전시되어 있는 용두산 신사 유구. 왜관의 존재를 전하는 흔치 않은 유물이다. 김시덕
이러한 엇갈리는 시각은 통신사에 대해서도 똑같이 확인된다. 조선 측에서는 국교를 정상화해 준 것이 일본 측의 간청에 따른 것이므로 시혜를 베푸는 것이며 국교 정상화의 결과로 파견되는 통신사는 임진왜란 당시의 포로를 데리고 오는 김에 일본의 국정도 엿보아 후환을 대비하는 역할을 한다고 하여 조선 측이 우위에 서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반대로 근세 일본의 많은 사람은 ‘일본서기(日本書紀)’ 이래 일본 사회에서 ‘역사’로 간주된 이른바 ‘진구코고(神功皇后)의 삼한정벌(三韓征伐)’ 전설에 따라 한반도 국가들은 대대로 일본의 번국으로서 조공을 바쳐왔으나 고려시대가 되면서 횟수가 뜸해졌고 일본이 전국시대의 혼란기에 접어들자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분노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결과, 조선의 조공사 파견이 재개된 것이 통신사라고 간주했다. 일본 측에서 극단적 사례로 드는 것이, 도쿠가와 막부의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덤이 있는 닛코에 조선종 등의 물품을 기증한 1643년의 제5회 통신사 일행이다. 일본 측의 끈질긴 요구로 이루어진 닛코 방문과 물품 기증이, 일본 국내의 정치적 맥락에서는 조선 측의 복속을 상징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당시 일본 측은 현대 한국의 일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한류 스타’로서 통신사를 맞이한 것이 아니라, 자국의 정치적 맥락에 유리하게 조선의 통신사 파견을 해석했다. 그 맥락이란 곧 서쪽의 조선, 남쪽의 유구(오키나와), 북쪽의 아이누, 그리고 바다 건너 네덜란드가 일본에 복속하고 있다는 일본판 중화(中華)의식이다. 유구왕국의 사신과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상관장 그리고 조선의 통신사가 에도에 오는 것은, 일본이 중국과는 또 다른 세계의 중심이라는 일본 측의 세계관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받아들여졌다. 그야말로 동상이몽의 통신사였다. 한편 통신사 일행은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여 일본의 침략을 사전에 막아야 한다는 애초의 파견 목적에 충실했다. ‘북해이담’의 저자가 우려하던 바로 그러한 스파이로서의 행동이다. 신숙주가 “일본과 화의를 잃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해서 일본의 동향을 탐색하는 것을 게을리했기 때문에 임진왜란이 발생했다는 판단을 류성룡은 저서 ‘징비록’의 첫머리에서 하고 있다. 통신사 측의 그러한 노력을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가 ‘일본지세변(日本地勢辨)’과 ‘격조선론(擊朝鮮論)’이라는 일본 문헌의 조선 유입이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군과 일본군이 충돌한 1593년 1월의 벽제관 전투를 군사학적으로 검토한 이들 문헌은 고사이 시게스케(香西成質)라는 후쿠오카 번의 병학자가 집필했다. 고사이의 스승인 가이바라 엣켄(貝原益軒)은 류성룡의 ‘징비록’ 일본판을 1695년에 교토에서 출판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침략자라고 비난하는 내용의 서문을 붙인 바 있고, 조선의 초등 입문서인 ‘유합(類合)’이 지닌 교육적 가치를 높이 평가해 ‘조선국 정본 천자유학(朝鮮國正本千字類合)’이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하는 등 조선에 우호적인 인사였다. 아마도 이 엣켄이, 제자가 쓴 초고(草稿) 상태의 원고를 조선에서 온 통신사에 전달한 것 같다. 이후 조선에서는 이익의 ‘성호사설’, 한치윤의 ‘해동역사’ 등에 이 문헌이 수록되어 일본 측의 군사 정보를 조선의 지식계급이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김시덕 ‘조선후기 문집에 보이는 일본문헌 격조선론에 대하여’ 참조) 이처럼 통신사는 일본의 동정을 파악하고 정보를 입수하고자 하는 애초 목적을 잊지 않았다.
-
- ▲ 1643년에 파견된 제5회 통신사가 닛코 도쇼구에 기증한 조선종. 이승연
일본 측도 통신사와 관련된 사항은 아니지만 조선의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스파이 활동을 했다. 본초학(本草學)에 관심을 갖고 있던 제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조선의 ‘동의보감’을 읽고 감탄하여 조선의 약재를 입수하고자 했으며 특히 인삼을 국산화하는 데 열심이었다. 그리하여 한반도의 동식물 표본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쓰시마 측에 내린다. 쓰시마 측은 왜관에 파견되어 있던 관리들을 통해 조선인을 매수, 한반도 구석구석의 동식물 표본을 입수하고 이를 도록으로 제작한다. 1718년에서 1751년까지 30여년간 이어진 일본 측의 이러한 작업은, 같은 시기 유럽이 세계 각지의 동식물지를 제작하던 것에 비견된다.(田代和生 ‘江戶 時代朝鮮藥 材調査の究’ 참조) 이처럼 조선과 일본 양측은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 추구하기 위해 국가 간 관계를 지속했으며, 현대 양국의 시민사회 일각에서 상상하는 것처럼 선의에 넘치는 우호적인 관계가 지속된 것만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안정된 관계이되 평화로운 관계는 아니었다. 그러나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전쟁이 발생하던 17~19세기에 유라시아 동부에서 몇백 년 동안 안정적인 상태가 지속된 것은, 조선·청·일본 등 중앙집권적인 3개 국가가 상호존중하에 안정에의 의지를 관철한 결과였다. 조선이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는 이러한 안정에 이바지한 중요한 축 가운데 하나로서 평가받을 만하다. 통신사 파견의 목적은 정치·외교적인 것이었지만, 드물게 오는 외국의 상층 계급 지식인에게 당시 일본 사회가 바라는 바는 컸다. 통신사 일행이 올 때마다 조선의 제반 사항은 물론 중국과의 관계 등의 질문을 쏟아붓고 통신사 일행의 글씨와 그림을 청했다. 임진왜란 후 100여년이 지나 조·일 양국 간의 정치적 긴장이 완화되기도 했기에, 18세기가 되면 통신사 일행의 구성은 정치적 인물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지식인들로 점차 바뀌게 된다. 이들은 왜구·히데요시 등으로 상징되는 야만적인 일본이 조선·청과의 교류를 통해 문명화되고 있음을 기뻐하는 한편으로, 당시 일본에 주자학뿐 아니라 양명학·고학 등 주자의 가르침에 배치되는 학문이 공존하고, 나가사키를 통해 유럽의 지식까지 들어와 있음을 우려했다. 그리하여 통신사 일행은 주자학의 가르침을 일본에 전파하는 일종의 선교사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게 된다. 같은 시기 일본에서는 조선의 통신사를 일종의 조공사로 간주하는 경향이 우세했으니, 18세기 들어 통신사에 대한 견해는 ‘선교사 vs 조공사’로 극단적 동상이몽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통신사들은 앞서 소개한 엣켄,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포로였던 강항과의 교류를 통해 주자학자가 된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그의 제자 하야시 라잔(林羅山) 일파 등과 주로 교류했다. 이들 일본의 주자학자들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조선에 대한 우호적 입장을 견지했다. 반면 근세 일본의 모든 지식인들이 조선에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다.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라는 하급 무사 집안 출신의 주자학자는 자신의 학문적 능력만으로 일본 정치의 최상위에 올라간 입지전적 사례의 주인공인데, 이 사람은 막부가 조선의 통신사를 후대하는 것에 반대했다. 통신사 접대에 따른 재정 낭비가 심하다는 것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집안을 멸망시켜 ‘준’ 도쿠가와 막부에는 조선의 복수를 대신 해준 은혜가 있는데 조선이 이를 모른 척하는 것은 ‘배은망덕’하다는 주장을 했다. 또한 일본에 잠입한 이탈리아인 선교사 조반니 바티스타 시도티(Giovanni Battista Sidotti)를 심문한 경험 등을 통해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있던 그는, 통신사와 만난 자리에서 세계 지리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조선의 주자학과 중국 중심적 세계관을 비판하기도 했다. 한편 오사카의 상인들이 세운 학교인 회덕당(懷德堂)의 제4대 교장이었던 나카이 지쿠잔(中井竹山)이라는 학자는 ‘초모위언(草茅危言)’이라는 책에서, 조선은 원래 진구코고 이래 일본의 속국이었지만 현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덕분에 대등한 우호국이 되었다고 논하고, 아무리 이제는 형세가 바뀌었다고는 해도 원래 속국이었던 나라의 사신을 후대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며 막부를 비판한다. 통신사가 주자학을 일본에 전해주었다는 사실에 집착하는 조선시대와 현대 한국의 사람들에게는 당혹스럽게 느껴질 이러한 주장을 근세 일본의 학자들이 펼친 배경에는, 특히 근세 일본에서 나가사키를 통해 청나라 상인들이 대량의 중국 서적을 가져오고 있었고, 동시에 중국 이외의 지식도 나가사키를 통해 알려졌다는 근세 일본의 지적 상황이 있다. 주자의 학설을 요령 있게 정리한 퇴계 이황은 존중하지만, 주자학은 조선 고유의 것이 아니며 조선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주자라는 프리즘을 거치지 않고 직접 고대 중국어를 공부해서 사서오경을 연구하고자 하는 고학(古學)이라는 학문적 움직임이 18세기에 왕성해지면서, 주자학에 집착하는 조선의 풍토가 이들에게는 고루하게 느껴졌다. 비슷한 시기의 조선에서는 외국 문물에 관심을 갖는 지식인 집단이 등장하면서 청나라와 일본에서 배울 것이 있다는 발상이 생겨난다. 특히 1764년의 제11회 통신사 파견 때에는 일본의 주자학자 이외에 고학을 공부하는 승려, 기무라 겐카도라는 상인 출신 학자 그룹과도 접촉을 하면서, 소수의 지배계급 이외에도 다양한 계급 출신이 서로 어울려 세계의 정보를 공유하는 일본 사회의 모습에 충격을 받게 된다.(네이버캐스트 2012년 11월 15일 ‘조선을 조선답게 그리려고 한 한 화가의 열망-옛 일본 소설 속의 조선 풍속화’ 참조) 이 시기의 문화적 교류가 200여년간의 통신사 파견 가운데 가장 눈부셔서, 어떤 학자들은 이 시기에 유라시아 동부에 중세 유럽과 같은 일종의 학술적 연합체가 성립되었다고 판단하기도 한다. 정민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 공화국’, 후마 스스무 ‘연행사와 통신사’ 등) 다만 이 시기가 되면 이미 일본에서는 주자학자와 고학자가 서로 교류도 하지 않을 정도로 대립하고 있었고 조선에 대한 우월감을 지닌 일부 인사가 통신사와의 교류를 피하는 일도 있었다. 이처럼 200년 동안 조선과 일본은 통신사라는 제도를 통해 정치적으로 안정을 취하고 군사적으로 서로를 정탐했으며 학술적으로 점차 접근했다.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화한 역사를 극복하고자 17~19세기의 통신사를 ‘선린우호’의 상징으로 이상화하는 경향이 20세기 후반부터 양국에서 현저해졌다. 그러나 필자는 개인적으로, 조선과 일본 양측을 정말로 심층까지 이해하고 자국의 이익을 관철하려 하면서도 상대국의 입장을 파악하여 배려하고자 하는 진정한 선린우호를 실천한 사람은 17~18세기의 전환기에 쓰시마의 외교관으로 활동한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부산 왜관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나가사키에서 청나라 상인들에게 중국어를 배운 호슈는 통신사들이 “그대는 여러 나라의 말을 다 잘하는데 그중 특히 일본어를 잘한다”(‘先哲叢談’)고 농담했다고 할 정도로 외국어에 능통했다. 이러한 외국어 재능을 통해 그는 조선·청·일본 각각의 입장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으며, 우호적 자세로 협상에 임하여 일본과 쓰시마의 이익을 무리 없이 추구했다. 그 결과 그는 조선과 일본의 매파로부터 모두 비난받고 역사에서 묻혔다. 필자는 일전에 ‘한 경계인의 고독과 중얼거림’이라는 호슈의 수필을 번역하면서, 만약 호슈 정도의 사람이 주장하는 것까지도 납득하지 못한다면 한국은 일본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바 있다. 호슈에 비견할 만한 조선의 인물은 아마도 ‘해동제국기’라는 위대한 외교문헌을 편찬한 조선시대 전기의 신숙주 정도일 것이다. 이 두 사람 모두 양국인의 기억에서 묻혔다. 그만큼 한국과 일본 사이의 간극은 넓고 깊다. 참고서적 ‘조선시대 한국인의 일본 인식’ ‘18세기 일본 지식인 조선을 엿보다’(다시로 가즈이·왜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