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명량해전 일본 수군 보고서

백삼/이한백 2014. 8. 26. 09:07

명량해전을 일본수군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요?

모리고동문서(毛利高棟文書)에 명랑해전 이틀후에 보고한 보고서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모리고동은 정유재란때 감군으로 남원성 함락을 지휘한 다이묘 毛利高政(모우리 다카마사)의 후손의 이름입니다.

이 명량해전 보고서는 비록 자신들의 입장에서 조선수군을 물리쳤다는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절대 알 수 없었던 자세한 전투 사항들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당일 전투는 새벽6시부터 시작되었군요. 끝난 시각은 오후 4시경입니다. ​이순신이 피난선을 뒤에 배치했는데 이를 전선으로 보고 있군요. 조선의 전함은 14척이라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안위와 싸운 두 배가 어느 가문의 배인지 장수 이름이 나옵니다.  어느 장수가 바다에 빠졌는지 알수 있습니다. 안위배에 올라탔다가 부상을 입고 물에 빠진 장수가 생각보다 거물입니다. 그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아 남원성 전투를 지휘했던 감군으로 명량해전에서도 감군으로 전투를 감시하는 다이묘(大名) 毛利高政이었습니다. 죽은 안골포적장 마다시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이 전투에서 전사한 장수 来島通総(구루시마 미치후사 朝鮮水軍板屋船の攻撃を受けて戦死した。享年37)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来島通総은 임진왜란에서 전사한 유일한 다이묘(大名) 이며 일본 전체 수군 다섯 장수 중의 한사람입니다. 강항록이나 난중잡록에는 이순신이 來島守의 목을 베어 돛대에 달았다고 하고 있기 때문에 마다시가 바로  来島通総을 말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다시로 보이는 또 다른 사람이 있는데 일본 수군 다섯 장수중의 한사람인  菅達長(칸 미치나가)의 아들 菅又四郞(菅正陰 칸 마치카게)의 又四가 마타시로 발음되고 그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그를 지칭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   <1593년 부산포 앞바다 일본 수군도>

      九月十八日付船手衆注進状 (毛利高棟文書 中)

​      9월18일 수군 주진장

             謹而奉致言上候先書如申上候於全州各致相談候全羅之川口江罷出候事

​             삼가 받들어 말씀 위로 올립니다. 앞의 서신에서 올린 바와 같이 전주에서 각 상의 말씀 있어서 전라도의 해협에서

                적을 내쫓은 일

 風自分御座候付而此度者大船共彼川口小関舟斗にて去十日打立赤国浦過半発向仕候事

 하나  바람이 제멋대로 있어서 이 대선들은 모두 저 강구에 남겨두고 작은 관선들로 10일에 출격을 떠나 전라도 포구와 포구

        섬과 섬을 지나고 임무를 향해 출발했음. 

 たいたんむろのむかひ水営申城瀬戸口番舟大船拾四艘其外小舟数百艘かゝり居申候条即十六日押懸申候而卯刻より申刻迄相戦申候事

​ 하나 타이탄무로의 건너편 수영과 신성의 해협의 입구에 조선수군 대선14척 그외 작은배 수백척이 정박해 있어 즉시 16일

        눌러  쳐들어가 새벽6시부터 오후4시까지 싸움을 했음

 毛利民部太輔のり舟壱艘幷藤堂佐渡守家中舟壱艘番舟大船相付申候然処民部太輔則切乗やゝ久相戦申自身貳所手負其上海上被打落候右之仕合誠無比類手からにて御座候則民部太輔事者藤堂佐渡右之付申候舟乗移異儀無御座候幷民部太輔のり無異儀引取申候事

 ​하나 모리고정(毛利高政)의 배 한척과 등당좌도수가문의 배 한척이 함께 조선수군의 큰배에 서로 붙었고 그래서 그곳에서

       민부대보(毛利高政)은 올라 타 넘어 서로 전투하다 자신은 두곳에 부상을 입고 그 바다에 떨어졌습니다. 그것은 비교할 수

       없을 위대한 일이었습니다. 즉시 모리고정의 몸은 등당좌도의 배로 옮겨 타 무사했습니다. 모리고정의 배도 무사했음.

 申刻迄相戦則見合以悉可討果与存候刻大風吹出番船依為案内者遠嶋帆任逃退申候則六七里斗追懸雖申候其上嶋無案内付而番舟小舟共数艘やきわり申候事

 하나 오후 4기까지의 싸웠고 드디어 적을 실로 토벌하려는 순간 큰 바람이 불고 조선배가 지형을 잘 아는 것에  의지해

        먼섬으로 돛을 올리고 도망가 즉시 6,7리를 추격했는데 날이 저물고 그 섬과 섬을 잘 몰라서 조선수군의 작은배 수척을

        부수고 들어온 일

 右戦候翌日彼番舟有所早舟以方雖相尋申候近辺相見不申候尚従是先手羅州川口へおし近郡発向仕可致言上候此等之趣宜預御披露候謹言

​ 하나 이 전투의 다음날 저 조선배의 소재를 빠른 배로 곳곳과 포구포구마다 찾았으나 근처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우선

        나주의 강구에 배를 돌려 가까운 군을 향했습니다. 에에 대해 추후에 보고 하겠습니다. 이런 사항을 알려주실 일을 삼가

        말씀드립니다. 

                                                                    九月一八日

                                                                                             ​ 藤堂佐渡守

                              脇坂中務少輔

                              菅平右衛門

                              藤堂宮内少輔

                              菅三郎兵衛

                              菅右衛門八

                              加藤左馬助

  増田右衛門尉殿

  石田治部少輔殿

  長束太蔵太輔殿

  徳善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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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참전 일본수군​

船手衆(수군)                     計7200人 
藤堂高虎(토도 다카토라)         2800人    
加藤嘉明(카토 요시아키)         2400人 
脇坂安治(와키자카 야수하루)  1200人 
来島通総(구루시마 미치후사)    600人 
菅達長(칸 미치나가)                 200人 
黒田如水(쿠루다 쇼수이)及諸家の水軍若干之に属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