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광해군은 마땅히 폐위되어야 할 자였다 2편/광해군 15년간 무슨일이 있었나?

백삼/이한백 2014. 8. 25. 09:38

광해군때의 시대적 과제는 임진왜란이후 피폐된 민생을 회복시키고 북방의 위협에 효율적으로 대응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폐된 국가운영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한 제도적 재정비와 절약,효율적 재정지출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불필요한 대규모 재정수요를 유발시켰다. 5,6개에 이르는 궁궐공사가 그 예이다.선조40년(1607)에 시

해 광해군대에 완성된 창덕궁을 비롯, 창경궁,경덕궁(경희궁),경운궁(덕수궁),인경궁,자수궁의 공사가 진행되었다. 조

선조 전체를 살펴보아도 이렇듯 짧은 기간에 궁궐공사가 동시다발적으로 집중된 경우는 없었다. 공사비 대부분은 백성

들에게 부가 되었고 파행적인 납속책도 확대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한 그날, 인조는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던 조도사(세금 징수관) 6명과 제주목사를 처형했다.

어 궁궐공사를 중지시키고 궁궐을 짓기위해 설치했던 영건,나례도감등 12개 도감을 폐지했다. 이는 백성의 고통에 대한

세력의 응답이었다. 극심한 흉작으로 재정난이 예측되는 시점임에도, 백성의 고혈을 짜던 조도성책(특별 세금 징수

대장)을 소각하고, 백성들에게 부과했던 쌀과 포를 삭감해 주었다.

인조는 즉위 6개월만에 다시 백성들에게 거둘 예정이었던 원곡 11만석을 삭감했다. 이원곡은 광해군 13년이전의 미납공

물들이었다. 당시 호조에서 거두던 1년 세금에 해당되는 양이었다. 광해군 14년부터 극심한 가뭄이 들어 삭감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조는 급한대로 이런 조치를 통해 광해군대의 이탈을 되돌려야 했다.

인조12년 왜란중에 전비로 부과된 부가세중 5결포,별수미,조예가미를 폐지했다. 호조의 1년수입이 9만석인데 이셋의 합

4만6900석이었다. 이렇듯 왜란중 시작되어 30년이상 유지되던 여러 부가세를 폐지하며 정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1608년 광해가 임금이 되었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 컸다. 왜란 당시 분조를 이끌며 보인 능력때문이다.

왕위에 오른 광해군앞에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회복하야 하는 시급한 과제가 놓여 있었다. 그 과제의 핵심은 전비마

련을 위해 전쟁중 부가된 부가세의 폐지, 공정하게 세금을 걷기위해 필요한 양안(토지 소유자 조사)실시, 백성들의 고혈을

짜던 공물납 문제의 해결등이었다.

 

광해군 즉위년 5월 이원익은 공물납의 폐단을 지적하며 쌀로 거두어 방납을 없앨 선혜법(대동법)을 시행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공물납은 국가재정의 3/4을 차지할 정도로 비대해져 있었다. 이는 백성들에게는 세부담의 3/4이란 소리며, 전세(田稅)

10배이상의 부담이어서 원성이 자자했다.

이원익은 공물대신 토지 한결당 16두씩 거두어, 그 중 2두는 지방관아에 주고, 나머지로 관청에서 방납인에게 물건을 사서

쓰되, 일단 폐단이 심한 경기도부터 시작하자는 것이다.

 

조선의 세금에는 논밭에서 걷는 세금인 전세(田稅)와 개인(성인남성)에게 물리는 군역(군포),호에 물리는 공물납이 있다.

건국초기, 조선은 수입의 대부분을 전세로 거두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전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줄고 공물이 차지하

는 비중이 늘어났다. 이는 지주들의 저항때문이었다.

공물납은 지역의 특산물을 바치는 세금이다. 연산군때 마구 부과한 공물이 그대로 굳어지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해당 지역

에서 생산되지 않는 공물(불산공물)의 수취가 많아지면서 백성들의 부담이  가중됐다. 그 결과 일정 댓가를 받고 불산공물

을 대주는 중간상인층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공물을 부과한 관청과 짜고 공물가의 몇십배를 백성들에게 착취하였다. 이것

이 방납의 폐단이었다.

 

공물납의 또다른 문제는 그 수취가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공물은 최종적 부과단위가 고을이고, 그 고을내에서 공물을 어

게 마련할 것인가는 수령에게 맡겨져 있었다. 일반적으로 토지결수에 따라 부담을 나누었지만, 힘있는 자들은 그 부담

을 힘없는 자들에게 떠 넘기는 경우도 많았다. 즉 역의 불균등도 공물납의 큰 문제중 하나였다.

 

선조대가 되면 이미 공물을 현물로 납부하는 방식은 찾기 어려워졌고 미포(쌀과 무명)로 내는 관행이 굳어졌다. 대동법은

관행을 제도화(양성화)한 것이다. 선조대 각 고을에서는 이미 공물납을 쌀로 걷고 있었다. 각 고을은 그 쌀로 공물을

사서 당 관청에 바쳤다.그런데 점퇴(퇴짜)를 맞은 것이다. 이는 그 공물을 방납상인에게 사서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각 고을이 질적당한 공물을 마련하는 최종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점퇴와 그에 따른 높은 공물가를 감당

할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공물 대신 쌀로 걷는 것(작미,수미)이 제도화된다면, 각 고을은 조정에 정해진 쌀만 내면 되는 것

이고, 공물은 조정이 알아서 마련하니 점퇴와 방납의 관행은 사라지게 될것이다.

 

작미의 또다른 의미는  공납을 고을 단위로 부과하는 데서 토지소유자에게 부과하는 전세로 바꿀수 있는 길이 열린것이다.

전세화가 실현되면 당시 부의 근원이었던 토지가 실질적인 과세대상이 되고 , 상대적으로 토지가 적은 자영농이나 소농은

세금부담이 줄어들게 된다. 즉 세금부담의 불균등이 사라지는 것이다. 토지수익에 대한 균등과세야 말로 대동법이 노리는

진정한 목표였다.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를 보면, 나중에 대동법의 주요한 뼈대가 되는 내용들이 이미 관찰되고 있다. 사대동(고을이 1년

에 부담하는 공물가 총액을 고을의 모든 호가 신분에 관계없이, 고르게 분담하는 고을 내부의관행), 공물의 작미작포(현물

로 내야 할 공물을 쌀이나 무명으로 내는것)등이다. 대동법은 이미 확산되고 있던 공물과 관련된 몇가지 사회적 관행을 법

적 강제성을 부여해 법제도로 규정한 것이다.

 

경기선혜법은 후일 성립된 대동법에 간접적으로 기여 했으나, 이를 대동법의 원형으로 보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그 내용이 현종때 충청도와 전라도의 대동법 운영규정에 따라 전면 수정된 것이다. 그만큼

선혜법은 문제가 많았다. 원래 공물납에는 지방 관아의 운영비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선혜법은 운영비를 너무 작게

지급했다. 따라서 지방관아는 부족한 만큼. 백성들에게 더 추징을 했다. 그럼에도 경기도 백성들은 이전보다 낫다며 법

의 유지를 요구했다.

 

광해군2년, 곽재우는 대동법의 확대실시를 요구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신료들도거듭 요청했다. 그러나 그때 마다  광

해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광해군은 임토작공(특산물이 나는 곳에 공물을 나누어 배정함)의 관례에 기초한 현물납을

포기하지 않았다. 더구나 기자헌,유공량 같은 대북파도 반대에 동조했다.

광해군에게, 공물납의 폐단은 당연한 관례였고, 그 속에는 다 나라를 다스리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는 방납의 폐

단을 언급했지만, 작미도 공안(공물의 품목과 수량을 기록한 장부)개정도 고려하지 않았다. 정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든

, 의지가 없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광해는 경기 선혜법이 자신의 견해와 다르다고 선언했다.

광해군이 대동법에 부정적인 이유는 궁궐공사등에 필요한 막대한 자재와  금액을 조달하는데 이 법이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공물납을 금지한다면 자재들을 징발 하기도 힘들고, 수시로 세금을 부과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시행된지 반년도 안됐는데, 선혜법은 흔들리고 있었다. 광해군과 대북파,방납배등은 이 법을 폐지하려고 했지만, 경기도

민들의 요구와 호조판서 황신같은 실무관료들의 반대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광해군 5년 계축옥사가 터지면서,

황신은 여기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다. 선혜법을 지지했던 서인,남인계 신료들도 조정에서 축출됐다. 이후 선혜법은 흐지

부지된다.

 

광해군 3년 호조판서 황신은 국가세입은 전쟁전에 비해 10분의 2,3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지출은 어느덧 전쟁전의 규모

를 회복하고 있다고 한탄했다. 한해 받아들이는 공물로는 당년의 용도를 지탱하기가 크게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만큼 광해의 궁궐공사가 국가재정을 파탄상태로 몰고 있었다.

왜란이전 전결수(실제 농사짓는 땅)는 113만결이었다. 선조 36년(1634) 계묘양전에서는 29만결로 줄었다. 광해군 폐위후

인조12년(1634) 갑술양전에서는 89만 5천결이었다. 광해군대 전결규모는 전쟁전의 26%, 인조대의 32% 수준이었다.

어런 상황이라면 누가 즉위했던지 간에 재정의 정상화를 최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토지결수를 파악하고 공정과세를

위한 양전을 하고, 그 재정규모에 기초하여 정책 우선순위를 결정해야 했다. 즉 대동법을 통한 민생안정을 추구해야 했으

나 그는 농업사회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과소비인 토목을 선택했다. 그 결과 재정은 거덜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7년 전쟁이 끝났다. 피폐해진 백성들을 쉬게 해주어야 하는 시기다. 하지만 광해는 무려 6개의 궁궐을 지어대고 있었다.

선조40년부터 짓기 시작한 창덕궁은 광해군 원년에는 중건이 마무리됐다. 그러자 그는 곧바로 창경궁 수리에 들어갔다.

신하들의 반대가 빗발치자, 그는 창덕궁은 중랑과 복각이 답답하고 음침해 한곳도 환하게 트인 곳이 없고 ,침전은 궁인

들이 드나드는 곳과 멀지 않아 잡다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자신이 심병이 있어 사람이 떠드는 소리를 싫어

하므로 거처는 반드시 소통되고 확 트인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병을 요양하기 위해 산책방을 그 옛터에 따라 짓게 하

고 그 규모를 조금 더 넓힌 것은 병을 조섭하는 별당으로 삼고자 하기위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하지만 궁전의 기교와 호

화스러움은 예전에 없던 것이라고 사관은 적었다.

 

광해군 7년 경운궁을 수리하고 인경궁과 경덕궁을 짓기 시작했다.

광해는 풍수와 미신을 신봉했다. 이 때문에 궁궐의 설계가 수시로 바뀌었고, 심지어 파주 교하로 천도까지 하려고 하였다.

거기다 기둥을 무슨 모양으로 할지, 돌을 어디서 운반할지, 기술자들을 빨리 불러오는 문제까지 꼼꼼하고 세심한  관심을

보였다.하지만 문제는 재정이었다. 건축비용을 어디서 충당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광해군은 전세를 100% 인상했다. 왜란이후 작성된 양안은 급한대로 시기결(현재 농사짓는 땅)만 파악했기 때문에 누결

(누락된 땅),은결(숨긴 땅)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인상된 전세는 힘없는 백성들에게 더 큰 부담이 됐다.

 

공사는 점점 커졌다. 인경궁을 지었는데 들보와 기둥은 작으나 칸수는 법궁의 10배가 넘고 별전도 열채가 넘었으니 인왕

산을 휘감은 건물의 장엄함과 장식의 사치스러움이 예전에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 돈이 더 필요할수 밖에 없다.

각지에 세금징수관들을 파견하여 닥달을 했다.백성들에게 포목을 100배의 가격으로 강매하기도 했다. 이들은 대부분 시

의 노비들 이었는데, 거둬들인 재물의 태반을 자신이 차지해 몇달 사이에 큰 부자가 된 자도 있었다. 심지어 사족의 부

녀자를 강간하는등 횡포를 부려도 벌을 받지 않았다.

 

납속책도 시행되었다. 공명첩과 면향첩(반역등으로 강등된 고을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문서), 면역첩(군역등을 면제

시켜 주는 문서), 허통첩(서얼에게 과거응시자격을 주는 문서)등을 팔았을 뿐 아니라 죄를 면제해주거나 무과의 부정시

험을 눈감아 주는 댓가로도 돈을 받았다. 더구나 실제 관직까지 팔아 치웠다. 공공연히 매관매직을 일삼은 것이다.

 

이것으로도 부족하자 군량미까지 동원하기 시작했다. 둔전에서 나온 곡식은 물론, 강화도에 비축해둔 군량미 9천석까지

사용했다.

 

궁궐공사에 얼마의 비용이 들어갔을까?

광해군 9년, 궁궐공사 3개월동안 사용한 정철이 10만근인데, 무기를 제조하는 군기시가 1년동안 쓰는 양이 1만근이었다.

광해군9년과 11년 기록을 보면, 궁궐공사에서 쓰는 쌀 사용량이 1년에 4만석에서 9만여석이었다. 인조대 호조에서 거두

던 전세가 연간 8-9만석이니 국가예산의 50%에서 100%를 전용하는 셈이다.

무기를 제조하는 철이나 국가예산 대부분을 소모적인 궁궐공사에 투입하고 있으니 재정이 남아날리가 없다. 당연히 북방

의 위협에 대비할, 국방비에 배정할 예산도 거의 없었고, 신료들의 봉록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다.

조선과 명의 군대가 후금에 패한 뒤인 광해군 11년, 명은 전몰장병에 대한 위로금으로 은 1만냥을 보내왔다. 그러나 그 은

은 궁으로 들어가고 전사자가족이나 부상자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참고)

1. 광해군 일기

2. 광해군/ 오항녕 지음/  너머북스

3. 대동법/ 이정철 지음/  역사비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