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광해군은 마땅히 폐위되어야 할 자였다 1편. / 광해군 치세 15년간 무슨 일이 이었는가?

백삼/이한백 2014. 8. 24. 09:03

1623년(광해군 15) 3월 14일, 주저앉은 광해군앞에서 그의 죄상을 널리 밝히는 인목대비의 교서가 읽혀지고 있었다.

교서에서 밝히는 광해군의 죄목은 다음과 같다.

 

1. 형을 해치고 아우를 죽였으며, 여러 조카를 도륙하고 서모를 처 죽이고, 여러 차례 큰 옥사를 일으켜서 무고한 사람들

    을 해쳤다.

2. 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고, 두채의 궁궐을 건축하는 등 토목공사를 10년동안 그치지 않았다.

3. 선왕조의 옛 신하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내쫓고, 오직 악행을 조작하여 아첨하는 척신과 후궁,환관만을 높이고 신

    임했다.

4. 돈을 실어나르며 벼슬을 사고 파는 것이 마치 장사꾼같았다. 부역이 번다하고 가렴주구는 끝이 없어 백성들은 그

   학정을 견디지 못했다.

5. 광해군 11년, 오랑캐를 징벌할 때는 은밀히 장수에게 동태를 보아 행동하라고 지시했고, 끝내 모든 군사가 오랑캐에

    게 투항함으로써 추한 소문이 온 세상에 퍼지게 했다.

 

이 교서를 보면, 지금까지 들어왔던 반정명분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수 있다. 폐모살제란 말도 1항과 비교하면 지나치게

단순화 한 것이며, 2,3,4항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항이다. 궁궐 공사가 차지하는 재정적 부담, 외척과 내시,내명부는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한 원칙의 손상, 세금과 부역의 과중으로 인한 백성들의 피폐함등은 결코 가벼운 이유가 아닌

데도 말이다.

물론 이 교서는 반정주체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반정 명분은 누구나 공감할수 있는 내용이어야 했다. 자신들의 행위를 정

당화 하기 위해 내용을 조작하고 과장했다면, 누가 수긍하겠는가? 오히려 반발만 살 뿐이다.

당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긍할수 있는 내용...과연 광해군 재위 15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광해군시대의 시대적 과제는 임진왜란 이후의 피폐된 민생을 회복하고, 태동하는 북방의 위협에 효율적으로 대처하는 것

이었다. 안타깝게도 광해군은 이런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지 못한채 15년을 허비함으로서 역사에 오점을 남겼다.

 

광해군 일기를 보면, 옥사가 끊이지 않는다.

즉위하자 마자, 형인 임해군의 역모사건을 처리 한다. 이 과정에서 임해군의 비복 100여명이 국문을 받다 사망한다.

지나치다. 사건의 면면을 보면 이정도로 확대 할 사안이 아닌데, 광해군은 친국을 주도하며 사건을 크게 만들었다.

한편으로는 형제이기 때문에 용서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작은 의혹이라도 있는 자라면  용서하지 않았다. 아마 명이

임해군의 존재를 이유로 들어,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감의 표출이리라.

임해군은 다음 해, 유배지에서 사망한다.

 

광해군은 즉위하자, 이원익과 이항복을 정승으로 삼아, 당파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광해군 4년, 김직재의 옥사를 확대하여 소북파를 비롯한 1백여명을 숙청하더니, 광해군 5년 칠서의 옥사(계축옥사)

를 일으켰다. 이 옥사로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사사되고, 친동생인 영창대군이 강화도로 귀양갔다가 살해당했다.

광해군 옹립에 큰 공을 세웠던 대북파는 공안정국을 주도하며, 서인,남인,소북파들을 계속 조정에서 몰아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조정은 대북파로 채워지면서 대북의 전횡이 시작된다.

광해군은 유별나게 친국을 좋아했다. 왕의 기본 덕목인 경연은 아프다, 춥다, 덥다는 이유로 열지 않는 와중에도, 살이 타고

뼈가 무러지고 비명소리가 난무하는 친국은 빠짐없이 챙겼다. 가히 친국매니아라 할만하다. 실록을 찾아 보면 친국을 가장

많이 한 자는 영조로 401건이며 그다음이 광해군으로 344건이다. 하지만 영조는 재위기간이 무려 52년인데 광해는 15년이

다. 광해의 비틀어진 내면을 들여다 볼수 있다.

경연은 단순히 경서를 강독하는 자리가 아니다. 경연장에서는 신하와 임금이 모여앉아 각종 현안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는다

. 임금과 신하가 정책대안을 놓고 논쟁하고 토론하는 자리인 것이다. 경연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소통이 되지 않는

다는 의미다. <광해군일기>는 그의 재위 16년간 경연을 연것이 10일에 불과하다고 적어놓았다. 광해는 경연을 싫어했다. 그

는 주로 내시와 후궁,궁녀들과 어울렸다. 그들은 왕의총애를 기회삼아  청탁을 처리해 주고 많은 뇌물을 받았다.

광해는 자신의 권력을 빼앗으려는 사건에는 민감했지만, 나머지 사안들에 대해서는 무심했다. 아니 의욕이 없었다.

그가 즐겨쓰는 말은 천천히 결정하겠다 라는 말이다. 처음에는 우유부단한데서 나왔으나 마침내는 간언을 거절하고 뇌물을

밝히는 수단이 되었다. 이말이 세간에 유행하며 백성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왕이 의욕이 없자. 조정도 긴 침묵이 드리워졌다. 권력은 어느덧 대북파,그중에서도 왕과 인척관계인 이이첨,박승종,유희분

에게 모아졌다. 광해군시대의 말년은 이들 척신들이 조정을 주도했다.

광해군 9년 그들은 폐모론을 본격적으로 제기했다. 먼저 신료들에 대한 여론조사를 통해 반대파를 추려, 숙청에 나섰다.

사람들은 대세를 따랐고, 인목대비는 후궁으로 강등되어 덕수궁에 유폐됐다.

광해군 10년, 폐모론으로 조정을 대북일당체제로 만든 대북파내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폐모론을 주도했던 허균이 역모죄

로 처형 된 것이다. 허균은 <홍길동전>의 저자로 우리에게 개혁적 인물로 알려졌지만, 그의 행적을 보면 계축옥사이후 권

신 이이첨의 혀가 되어 전횡을 일삼았던 인물이다. 결국 이이첨과 권력투쟁과정에서 죽음을 당했다.

이 모든 옥사에는 배후가 있었다. 광해였다. 이이첨마저도 유림의 분위기가 좋지 않자, 점점 몸을 사렸지만, 광해는 허균

앞세워 끝내 폐모를 관철시켰다. 정사에 대한 의욕은 없었지만, 권력에 대한 집착과 미워하는 자에 대한 증오는 광기를

띠었다. 하지만 이는 광해의 큰 실수였다.

유가는 엄밀히 말하면 덕치가 아니라 예치를 주장하는 파이다. 예는 효제에서 시작한다. 광해는 예의 근본을 부정한 셈이

다, 더구나 논리적으로도 인목대비를 후궁으로 내칠수 있는 것은 죽은 선조만 할수 있었다. 아들이 아비의 부인을 첩으로

내칠수는 없는 것이다. 폐모를 계기로 유림은 광해군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조정에 쓸만한 사람이 없자, 광해는 계속 사

람을 불렀다. 하지만 응하는 자들이 거의 없었다. 광해는 화가 치밀어 조사를 명한다.

 

지금 임금이 곤욕을 치르고 있는 시국에 신하로서 신명을 바치는 의리를 생각하지 않고 교외에서 빈둥거리면서 지내고 국가를 위해

서 힘쓰지 않으니 신하의 도리로써 어찌 이럴수 있는가. 또 대신과 대간이 이에 대해서 한마디 언급이 없으니 극히 놀랍다.그들을

무겁게 추고하라

 

심지어 이이첨의 측근들 조차 떠나기 시작했다. 광해군 13년, 그도 이이첨의 대북 전횡에 넌더리를 내지만 아무런 적극적

조치를 취하지 않는 우유부단함을 다시 보여준다.

이렇듯 내정이 어수선 할때,북방의 정세가 요동을 쳤고, 명에서 파병을 요청해 왔다. 광해는 강홍립에서 일만 군사를 딸려

보내면서 " 명군 지휘부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오직 패하지 않는 전투가 되도록 노력하라"고 명했다. 강홍립은 후금

에 투항한 후 조선의 입장에 대한 양해를 구했다. 누루하치는 조선의 입장을 이해했지만, 그 뒤 명과 후금 중 누구를 선택

할 지를 결정하라고 압박했다.

광해군 13년 그는 "이 적(후금)들은 왜적과 같지 않다. 어찌 반드시 한 성을 함락시킨 뒤에야 밀려 오겠는가, 만약 수비를

하고 있는 의주등의 성을 비껴두고 곧바로 서울로 올라온다면, 어느 사람과 어느 병사로 막아낼수 있겠는가. 중도에서 적을

막을 계책을 급히 마련하라" 며 그의 영민함을 보여준다. 나중에 청은 이런 전략을 앞세워 조선을 침공했다.

 

그의 정세판단은 옳았지만, 자신은 후금과 화친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신하들 앞에서 극구 부인했다. 당시 조선의 조야는 집

대북파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후금과의 화친을 반대하고 있었다. 광해는 이들을 설득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런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비록 이번에는 술수를 써서 무난히 넘어갔지만 언제까지 이런 국면이 유지 될수는없었다.

1636년(이 때는 광해는 실각하고 인조가 재위에 있을 때이다)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황제를 칭했다. 칭제건원의 의

미가 무엇인가? 동아시아 세계관은 한명의 천자와 다수의 제후로 구성된다. 황제는 천자다. 한 하늘에 두명의 천자가 있을

수 없다. 조선은 명과 청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 이때 설령 광해가 왕위에 있었다 하더라도 전쟁을 피할수 있었을까?

없었다, 조선의 조야는 신하가 되라는 청의 요구를 당연히 거부했을 것이다. 광해가 그들을 설득할 수 있었을까?  폭정으로

일관하던 그는 설득할수 있는 능력도 없었고, 그런 의욕조차도 없었다. 대북파조차도 반대했을 테니까..결국 광해는 왕위에

서 쫓겨 나던가 전쟁을 하던가 양자택일을 할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차피 조야를 굴복시키려면 전쟁에서의 패배와 청에

의한 강경파들의 숙청이 필요하니 말이다.

조선이 이런 길을 피하고자 한다면 명과 손을 잡고, 군비를 증강해서 청이 한쪽을 치면 다른 한쪽이 청을 공격하는 전략을

수행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삼국분립의 정세가 형성되었겠지만, 당시 명과 조선 그 누구도 청에 대해 공세를 취하지 못

할 정도로 허약했다. 이미 야전에서는 청군은 무적이었다. 병자호란때 조선은 남한산성에 농성하며 명의 구원을 기다렸지

만 명은 만리장성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자신의 힘도 없이 국면을 유지한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다.

 

광해군 15년(1623년) 3월 인조반정이 터졌다. 광해는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로 귀양갔다. 거기서 20년 가까이 있

다가 1641년 7월 죽는데, 그의 나이 67세였다. 부고를 듣고 조정은 3일간 업무를 보지않고 그를 애도했다.

 

1편 정치편 완 다음은 2편 민생편 및 종합입니다.

 

참고)

1. 광해군 일기

2. 광해군/ 오항녕 지음/  너머북스

3. 대동법/ 이정철 지음/  역사비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