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대 일본에서 간행된 초등 교육용 ‘대일본 판지도(大日本板地圖)’. 판에서 떼어 내서 퍼즐처럼 맞추며 지리를 익히는 구조이다. 뒷면에는 각 지역의 설명이 적혀 있다. 당시 일본의 영토였던 사할린 남부, 홋카이도, 쿠릴열도가 보인다. 김시덕 |
임진왜란을 겪은 류성룡 역시 ‘징비록’에서 1593년 1월에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평양성을 함락시킨 이래로 일본군은 기세가 꺾였으므로 이때 공세를 취해야 했다고 한탄한다. “진실로 우리나라에 한 명의 장군이 있어서 수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때를 보아 앞뒤로 길게 늘어져 있던 적군의 가운데를 공격하여 끊는 기이한 계책을, 평양성전투에서 적군이 패하였을 때 실행에 옮겼으면 적의 대군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을 터이고 한양 이남(以南)에서 썼더라면 적의 수레를 한 대도 돌려보내지 않을 수 있었을 터이다. 이렇게 할 수 있었다면, 적은 놀라고 겁먹어 수십 수백 년 동안 감히 우리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을 것이니 훗날의 걱정거리가 없어졌을 터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매우 쇠약해져 있어서 힘으로 이 전략을 실행하지 못하였고, 명나라 장수들도 이 전략을 모르고 적들로 하여금 조용히 오고가게 하였고, 적들을 징계하여 두려움을 품게 하지 못하였기에 그들은 온갖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교감 해설 징비록’ 595~596쪽) 이처럼 조선 측에서는 일본에 대해 선제공격을 가해 복수를 치러야만 일본이 다시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공유되고 있었다. 그러나 황폐해진 조선의 상황에서는 임진왜란 중에 빠른 속도로 실력을 기르고 있던 누르하치의 여진 세력에 대응하기도 벅찼다.
한편 일본 측에서도 1592년의 임진왜란과 1597년의 정유재란에 이어 제3차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후에 조선과 도쿠가와 일본 측의 국교 정상화를 중개하던 쓰시마는, 만약 국교가 맺어지지 않으면 일본이 조선을 다시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고 협박하였다. 이것이 단순히 협박이 아니었음은,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와 더불어 함경도를 침략한 바 있는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의 아들 가쓰시게(勝茂)가 또다시 있을지도 모르는 조선 침략을 위한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일화에서도 추측할 수 있다. 이 일화는 가쓰시게가 창건한 규슈 사가번(佐賀藩)에서 널리 읽힌 ‘하가쿠레(葉隱)’라는 문헌에 보이는데(권4의 61), 이를 통해 1598년 이후에도 조선에 대한 재침략이 일본 각지에서 이야기되고 있었음이 짐작된다. 이러한 상황이 뜻하는 바는, 임진왜란이 1598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급작스럽게 끝나다 보니 이 전쟁의 마무리가 지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에서는 복수전이, 일본에서는 확실한 승리를 위한 3차전이 이야기된 것이다.
복수에 대한 조선 측의 열망이 반영된 것이 ‘임진록’이라는 군담소설이다. 수많은 이본(異本)이 있는 ‘임진록’ 가운데 상당수는 1619년에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누르하치의 후금군과 싸운 사르후전투에서 처형당한 김응서와, 투항한 강홍립(姜弘立)을 양대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이 두 사람은 임진왜란을 복수하기 위해 일본을 공격하여 거의 정복했지만, 강홍립이 배신하는 바람에 김응서는 자결한다. 그 뒤에 잘 알려진 사명대사의 전설이 소개되며 일본이 조선에 항복했다는 결말이 지어진다. 한편 조선의 ‘임진록’에 대응하는 것이 1804년에 일본에서 상연된 연극 ‘덴지쿠 도쿠베 한국 이야기’이다. 이 연재의 제9회 동남아시아 편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이 연극은, 일본과 동남아시아를 오고가며 무역하던 덴지쿠 도쿠베라는 선원이 진주목사 김시민의 아들이라는 설정으로 당시 일본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역사적으로는 1592년 11월의 제1차 진주성전투에서 전사한 김시민이, 이 연극에서는 일본에 대한 조선의 원한을 갚기 위해 일본에 잠입했다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처형당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처형장에서 덴지쿠 도쿠베를 만난 김시민은 덴지쿠 도쿠베가 자신의 아들임을 밝힌다. 자신의 숙명을 깨달은 덴지쿠 도쿠베는 모국 조선을 위해 일본을 멸망시키고자 인도(당시에는 동남아시아를 인도로 믿었음)에서 배워 온 기독교 마법을 부리며 두꺼비를 타고 전쟁을 벌이게 된다.
요컨대 조선도 일본도 임진왜란에 대한 조선 측의 보복 전쟁이 당연히 일어났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 측의 사정으로 인해 복수전이 일어나지 않았고 이에 양국에서는 상상 속의 임진왜란 제3차전이 벌어진 것이다.
캄차카반도에 유배되어 있던 동유럽 출신의 모리스 베뇨프스키(Moric Benyovszky)라는 사람이 1771년에 유배지를 탈출해 귀국하던 중 일본에 들른 일이 있었다. 탈출하면서 들른 곳마다 거짓말을 하고 마다가스카르에서 독립국을 만들려다 살해된 그는, 일본에서도 거짓말을 했다. 러시아가 일본을 점령하려고 쿠릴열도에 요새를 만들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 주장이 일본 국내에 퍼지면서, 과연 러시아에 일본 침략 의도가 있는지를 둘러싸고 혼란이 일어났다. 18세기 후기에 일본에서 왕성하게 집필된 대(對)러시아 전략서의 선구를 이루는 ‘아카에조 풍설고(赤蝦夷風說考)’의 저자 구도 헤이스케(工藤平助)는, 러시아가 원하는 것은 오직 일본과의 교역일 뿐 침략 의도는 없다며 베뇨프스키의 주장을 비판했다. 반면 하야시 시헤이(林子平)라는 사람은 러시아가 일본을 공격할 것이 명백하다고 주장하며,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한 전략서인 ‘해국병담(海國兵談)’을 집필했다.
이처럼 일본에 접근하는 러시아의 의도가 파악되지 않던 중에, 1792년 아담 키릴로비치 락스만이 표류민 다이코쿠야 고다유(大黑屋光太夫) 등을 데리고 홋카이도에 왔다. 이때 러시아 측은 어디까지나 표류민을 송환시킨다는 인도적 목적을 내세웠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이들을 우호적으로 접대했다. 그리고 일본은 러시아와 교역을 할 의사가 없으며 앞으로 표류민 송환 등은 일본의 대외 교섭 창구인 규슈의 나가사키로 올 것을 요구했다. 이는 사실상 일본이 러시아 측의 교역 요구를 거절한 것이었으나, 러시아 측은 나가사키에서 교역하는 것을 일본 측이 허가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일본과의 정식 교역을 꿈꾸며 1804년에 일본에 온 것이 러시아의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레자노프였다. 고다유가 귀국한 이듬해인 1793년에 또다시 일본인 쓰다유(津太夫) 일행이 알류샨열도에 표착했는데, 레자노프는 이들의 송환을 명분으로 일본에 온 것이었다. 이때 그는 러시아어·일본어·만주어로 작성된 러시아의 국서를 가져왔다. 러시아어·만주어·라틴어로 네르친스크 조약문을 작성한 경험이 있는 러시아는, 유라시아 동부 지역에서 중국어가 아닌 만주어가 실질적 지배 언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이때 일본에는 만주어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막부를 대표하는 천재였던 다카하시 가게야스(高橋景保)가 청나라에서 건너온 ‘어제 증정 청문감(御製訂淸文鑑)’이라는 사전을 독학하여 2년 만에 만주어 국서를 해독해 낸다. 오늘날까지 세계의 만주학 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일본의 만주 연구는 이때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앞서 언급한 조선의 일본 공격을 소재로 한 연극 ‘덴지쿠 도쿠베 한국 이야기’가 1804년에 상연된 것은 이해에 레자노프가 일본을 방문한 데에서 자극받은 것 같다. 이 연극을 보았을 중간계급뿐 아니라 도쿠가와 막부도 이즈음 북방 정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막부는 락스만의 방일 이후 홋카이도 이북 지역에 대한 직할 통치를 시작하고, 곤도 주조(近藤重) 등에게 쿠릴열도 탐사를 명한 바 있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북아메리카의 모피 무역을 독점하는 러시아-미국 회사가 1799년에 설립되었는데 그 설립을 주도한 사람이 레자노프였다. 레자노프는 1804년 9월에 나가사키에 갔다가 일본으로부터 통상을 거절당한 뒤 러시아령 알래스카에 안정적으로 식량을 제공할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캘리포니아의 에스파니아 총독에게 접근했다. 이때 그는 에스파니아 총독의 딸인 마리아 콘셉시온 아르구엘로(Maria Concepcion Arguello)와 약혼함으로써 성공적으로 교섭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후 일단 귀국했던 레자노프는 시베리아의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급작스럽게 죽었고, 마리아는 레자노프의 죽음을 전해들은 뒤로도 독신으로 살다 1857년에 죽었다.(‘시베리아 정복사’ 347~358쪽) 태평양을 사이에 둔 장대한 스케일의 로맨스였다.
이처럼 레자노프는 지구의 북반부 전체를 지배할 기세였던 러시아제국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 유럽·아시아·아메리카의 세 대륙을 분주히 다녔으나, 그의 일생에서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일본의 개국(開國)이었다. 이에 원한을 품은 레자노프는 부하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크보스토프에게 사할린 및 쿠릴열도의 이투르프(捉)섬에 자리한 일본의 군사 거점을 공격하도록 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약탈해간 대포도 이 무렵 러시아군에 약탈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박물관에 현존한다고 한다.(아사히신문 2010년 9월 6일자 ‘ロシアに眠る幕府の大砲江戶後期の紛略奪品∇大調査’) 이처럼 당시 양국 간의 충돌은 실제로는 러시아 측의 일방적 승리로 끝난 소규모 접전에 불과했으나 13세기의 고려·몽골 침략 이후 500여년 만에 외국 군대의 침략을 경험한 일본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러시아가 자국과 일본 사이의 완충지대인 아이누인의 땅을 병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본 본토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일본인 사이에 퍼졌는데, 그러한 소문 가운데에는 조선이 임진왜란의 복수를 위해 러시아와 손잡고 일본을 서쪽과 동쪽에서 협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이 있었다.
그러한 소문을 전면적으로 창작 소재로 삼아 1806~1807년에 오호츠크해에서 러시아 해군과 일본 해군이 전면전을 벌였다는 설정하에 하야시 시헤이가 ‘해국병담’에서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제시한 각종 전략을 가상으로 적용해 본 것이 군담소설 ‘북해이담’이다. 형식으로는 소설이지만 내실은 러시아의 남침과 조선의 복수전을 대비한 시뮬레이션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하겠다. 필자는 이전에 이 문헌에 대해 상세히 논한 바 있으므로 관심 있으신 독자분들께서는 그 글을 참고하시기 바란다.(‘전근대 일본의 대(對)러시아 전략과 임진왜란’ ‘조선 기록문화의 역사와 구조 2; 기록에서 사회로’)
‘북해이담’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일본에 보내는 조공사가 통신사인데, 러시아인이 이 통신사 일행에 섞여 일본에 잠입하여 일본의 정세를 살피려 한다는 비밀 정보를 나가사키의 네덜란드인이 알려주었다. 그 때문에 막부가 조선에 통신사 파견을 연기시켰다고 주장한다. 1764년에 제11회 통신사가 파견된 뒤 1811년의 마지막 통신사까지 거의 50년의 공백이 있었는데, 이를 소설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북해이담’은 네덜란드 측이 다음과 같이 막부에 보고했다고 주장한다. “근년에 러시아인의 세력이 왕성해져서 유럽 각국을 모두 정복하였는데, 러시아는 일본에 곡식이 풍부하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부러워했습니다. 러시아가 일본과 통신·교역하려는 뜻은 곧 일본을 넘보는 데 있습니다. 조선이 관리를 일본에 보내려는 것은, 사절단 속에 러시아인이 섞여 내조하여 에도까지의 경로 및 요새, 사람들의 성향을 살피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됩니다. 우리들은 예로부터 일본의 은혜를 입은 바가 큽니다. 은혜를 입은 나라에 대하여 신의를 잃는 것을 두려워하여 러시아를 꺼리지 않고 아뢰는 바입니다.”(권6) 이 보고를 받은 막부는, 러시아가 일본과 교역을 개시하면 일본과 유럽 간의 무역을 독점하는 네덜란드가 손해를 입을 것이기 때문에 이처럼 러시아와 일본 사이를 이간질한 것이라 추측한다. 동시에 조선의 의도를 미심쩍어 하며 통신사 일행이 쓰시마까지만 오도록 조선 측에 요청한다.
한편 네덜란드 측의 첩고가 도착할 무렵 조선에서도 다음과 같은 연락이 막부에 도달한다. “러시아가 꼬드긴 일이 있었지만 그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비밀리에 대청(大淸)에 보고한 바 ‘일본과의 신의를 깨면 안 된다. 러시아와 원수지게 되면 대청이 후방에서 지원해주겠다’라는 명령이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조선은 통신사를 반드시 막부가 있는 에도까지 보내겠다며 강경한 자세를 취한다. 이에 대해 ‘북해이담’의 저자는 조선이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현재는 무예를 연마하고 있어서 더이상 일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경계감을 표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러시아와 조선이 일본을 협공할 경우를 상정하여 일본 측의 대응을 모색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공이 그 나라를 쳤을 때 그 나라의 지리와 인구도 모두 파악하였다. 조선의 병사는 30만을 넘지 않을 것이다. 그 가운데 자국을 지킬 부대로 적어도 절반은 남길 것이니, 일본을 공격할 부대는 15만을 넘지 않을 것이다.… 규슈에 17만~18만명의 병사가 있으니 이로써 조선군 20만명에 맞서면 무엇이 두렵겠는가. 장군의 현명함과 어리석음, 병사들의 용감함과 두려워함이 있을 뿐이다. 또한 일찍이 유약한 조선국이었으니 최근에 무예를 닦았다고 해도 그 수준은 뻔하다.”(권10)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조선이 가동할 수 있는 병력 수는 15만 정도이며, 또 조선은 원래 무력에 약한 나라이기 때문에 일본이 문제없이 막을 수 있으리라고 예측하는 것이다. 조선에 대한 우월감에 가득찬 발언이지만, 조선이 언제든지 일본을 침공할 수 있다는 임진왜란 이후의 공포가 이런 식으로 발현된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북해이담’에서는 조선과 러시아의 협공을 예상한 전략이 세워진 뒤, 러시아 해군과 일본 북부 여러 번(藩)의 연합 해군이 오호츠크해에서 전면전을 펼쳤다고 서술한다. 100년 뒤의 러일전쟁을 예비하는 듯한 이 가상 해전에서 일본이 승리한 뒤, 저자는 만약 러시아가 일본 본토를 공격하면 일단 해안에서 퇴각하여 러시아군을 내륙으로 끌어들여 격멸하자고 주장한다.(권20)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이 보여준 전략을 떠오르게 하는 이러한 주장은, 어쩌면 바다 건너 오는 외부 세력에 대한 전근대 유라시아 동부 지역 국가들의 공통적인 공포에서 기인하는지도 모르겠다. 러시아·영국·프랑스·미국 등 서구 세력의 접근은 이러한 공포가 현실화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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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문학전집 4 임진록’
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조선 기록문화의 역사와 구조 2 기록에서 사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