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백만명이 굶어죽은, 조선을 강타한 경신대기근 2편/ 조선은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나?

백삼/이한백 2014. 8. 20.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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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전지구적으로 발생된,평균기온이 1-2도씩 내려가는 이상저온현상은 자연재해와 기근, 전염병을 연이어 몰고왔

다. 그 영향으로 동아시아에서는 명.청 교체,왜란,호란등 침략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 중심부에 조선이 있었다.

임진왜란이후 농토가 황폐화되고 백성들의 삶이 곤궁에서 헤매이는 와중에서도 자연재해는 끊임없이 찾아왔다.

특히 1651년부터 1700년 사이는 조선에서 기근과 전염병이 가장 심했던 시기로, 생존환경면에서 최악의 시기였다.

그 기간중에 백만명이상이 굶어 죽은 경신대기근(1670-71년)과 을병대기근(1695-96년)이 있었다.

 

재해가 끊이지 않자, 조선도 대응책을 갖추었다. 진휼을 전담하던 임시기구였던 진휼청을 상설기관으로 만들고 독자적

재원을 갖추게 하였다. 또 당시 백성들의 큰 부담이었던 공물납을, 대동법을 시행하여 그 수취액을 1/5-1/6까지 줄여

주었다.

 

1670-71년 재해는 냉해,가뭄,수해,풍해,충해등 5대재해가 겹친 유래없는 대재해였다. 이어 전염병과 가축병이 겹치면

서 대재앙이 되었다. 역사는 이시기를 경신대기근이라 부른다.

 

초기에는 기우제와 여제, 대사면령등 소극적으로 대응하던 조정은 재해가 연이어 닥치고, 전염병이 돌자 본격적인

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조정은 도성과 지방에 의관과 의녀, 의서와 약재를 보내 병자 치료를 독려했다. 서울에서는 활인서가 환자치료를 도맡

다. 공조,진휼청,의국이 환자를 수용할 천막과 자리, 급식용식량,간장,소금, 치료용 의사,약재를 지원했다.

1670년 여름이 시작되자, 전국에서 먹을것을 찾아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1671년 1월 도성내외에 진휼소

개설하여 무료급식을 시행하자, 기아자들이 도처에서 구름처럼 몰려왔다. 이때문에 서울에 전염병이 들불처럼 번져

병자가 수천에 이르렀다. 활인서의 막사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 사이 전염병은 궁궐안으로까지 번져 숙경공주가 죽고 왕은 황급히 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도성의 사대부와 관리들

중에서도 감염자가 급증했으며 죽는자도 많았다. 1671년 6월 활인서에 수용된 환자 수는 2만여명에 이르렀다. 이는 서울

인구10%가 넘는 숫자였다. 활인서에서 수많은 병자들이 치료받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죽고 감염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높고 골이 깊다. 즉 일백리안에 비오고 볕나는 곳이 다르고, 한고을 안에 마르고 습한 곳이 같지 않아 한 지

안에서도 재해를 경미하게 입은 곳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근이 닥치면, 이쪽에서 저족으로 옮기거나 위를 털어

래를 보충하는 방식으로 극복했다. 그런데 경신대기근은 어느 고을도 피해가지 못했다. 곡식을 융통할 곳이 없었다.

 

민간에서 보유한 곡식이 바닥나자 사람들은 관아에서 환곡을 대출해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관아도 이미 크고 작은 기근으

로 빌려주기만 해서 창고가 텅 비어있었다. 전처럼 이웃 고을에서 구입 할수도 없었다. 그 곳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지주나 부농에게 손을 내밀어 보지만, 그들 역시 자기 소유의 노비들조차 굶기고 쫓아내는 형편이었다. 대기근이 언제까지

갈 것인지 예측을 못하기에 한 톨의 쌀이라도 비축하려는 것이었다. 또 조선은 국가재정이 어려울 때마다 재력가들에게 강

탈에 가까운 방법으로 많은 기부를 받았기에 그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시장에서는 사재기가 성행하고 곡물가는 천정부지로 솟아 있었다. 그나마 보이지도 않았다. 조정은 쌀을 시중가보다 낮게

시장에 방출하고, 백성들에게 빌려주고, 상인들에게도 방매했다. 여기에는 훈련도감, 어영청, 수어청등이 보유한 비상식량

이 동원되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한편 구황서인 <구황촬요>를 전국에 배포하고, 송금령을 해제해 백성들이 산에서 솔잎을 채취하도록 허용했다.

 

유망하는 백성들이 늘어나고 굶어 죽는 자들이 나오자, 조정은 감독관을 파견하여 지방관들이 적극적으로 진휼에 나서도

록 독려했다. 1670년 가을에 접어들자 각 고을의 비축곡이 바닥 났다. 이제 조정의 비축곡을 풀 차례였다.

먼저 한성부에서 도성민들에게 비축곡을 방출했다. 강화도에 비축한 목면을 가져와 추위에 떠는 사람들에게 옷감으로 사

용하도록 했다. 내수사도 무명 스무동과 삼베 열동을 보탰다.  경기도에는 강화도에 비축한 벼 7600석과 쌀 1만 4천석, 남

한산성의 쌀 1만 4천석을 지원했다. 전라도와 경상도는 도내에 비축한 군량미를 사용하도록 했다.

조선은 호란이후 강화도와 남한산성에 방대한 비축곡을 저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국방요지인 평안도에도 막대한 곡물을

비축하고 있었다. 지금 이 세곳의 비축 물자를 조운선으로 실어와 진휼에 투입하고 있는 것이다.

1670년 한해 조정이 진휼에 사용한 재물은 쌀 4만2천석, 콩 6570석, 좁쌀 1만 1200석,보리 9800석,밀 900석,은 6만 6800

냥, 무명 45동,포 200동, 소금 500석이었다. 여기에 지방에서 사용한 수량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엄청난 국가재원이 기근

구제에 투입됐다. 그러나  대기근의 절정은 아직 오지 않았다.

 

식량결핍으로 목숨이 위태롭고 종자가 고갈되어 농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곡물방출은 효과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

한정 비축곡을 방출 할수만은 없었다. 적은 곡물로 큰 효과를 낼수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진휼소의 설치였다.

진휼소에서 굶주린 자들에게 제공하는 설죽은 적은 재료로 많은 사람들을 먹일수 있어서 오래전부터 실시해온 기민책이

었다.  1671년 1월 서울과 지방 모두에 진휼소를 설치했다. 진휼소는 기아자들에게 죽을 먹여 최소한의 영양가를 공급해

사경을 헤매지 않게 하고, 임시 잠자리를 제공하며, 현지 농민에게 식량과 종자의 공급 및 전염병의 확산을 막는 방역

치를 취하는 것이 주 임무다.

진휼소가 문을 열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전국에서 굶주린자들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2월달에는 하루에 2만여명이 몰려

었는데, 이들을 위해 하루 서른 혹은 마흔 가마의 죽을 쑤었다. 닭이 울때 시작해 한낮에 이르러 끝나고 한낮부터 시작해

밤이 깊어서야 파였다고 하니, 온종일 쉼없이 죽을 쑨 것이다.

서울의 다섯 진휼소에 서울 인구의 30-40%되는 3-4만명이 몰려들었고, 5월 철수할 시점에, 수용되어 있던 기아자수는

3만 2040명이었다.

기아자들은 날마다 찾아왔다. 사족 부녀자들도 맨발에 얼굴을 가리고 죽을 달라고 애걸했다. 어떤 여인은 옆에서 남편이

갑자기 죽어도, 먹던 죽을 다 먹고 나서야 곡을 했다.

 

보고된 숫자를 보면 진휼소에서 죽을 먹은 사람들의 월평균은 전체 조선인구의 20-30%인 100-150만명은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4개월동안 500만명이상인 셈이니 평균적으로 조선인 전체가 죽을 얻어먹은 꼴이 된다.

진휼소의 곡물 사정은 긴박했다. 곡물이 떨어지면 소금,간장만 주고, 이도 떨어지면 미역등 해초류만 주었다.그래서 서로

먼저 죽을 타려고 밀고 당겼고, 서울에서는 한 노파가 넘어져 밟혀 죽는 사고까지 터졌다.

 

그해 여름 조정에서는 진휼소 개폐논쟁이 한창이었다.  진휼소를 열었는데도 1671년 봄과 여름사이에 사망자가 눈덩이처

럼 불어났기 때문이다. 이는 기민들이 모여들면서 전염병이 퍼졌기 때문이다.

양식이 떨어지고, 전염병의 매개처역활을 한다는 의견에 밀려 조정은 5월15일 전국의 진휼소를 철수시켰다.

철수후 굶어죽는자가 속출했다. 봄보리 농사마저 흉작이어서 죽는자들이 더했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현종 즉위후 크고 작은 재난으로 세금체납과 진휼비 지출이 급증해 국가재정은 적자를 면치못했다. 하지만 굶주린 백성들

에게 세금을 부과 할수는 없었다. 결국 재해정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군포를 감면해주고, 각종 세금을 줄여 주었다.

하지만 마냥 줄여줄수는 없었다. 올해의 상납은 평년의 1/10에 불과한데 이마저도 줄인다면 나라의 비용은 어디에서 구

느냐는 신료들의 걱정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신대기근 2년간 수만석을 진휼에 쏟아부은데 반해 세금은 쥐꼬리만하게 들어왔다. 국고가 바닥났다. 주요 관청의 재고

량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백관의 봉록도 군병들의 급료도 지급하기 힘들었다. 국가를 유지하려면 3년분은 비축해

야 하는데 한달분도 없는 형편이었다. 지출을 최대한 줄이고 가용재원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국가예산을 가장 많이 잡아먹는 군사비와 왕실비용이 삭감됐다. 조선은 위기시마다 납속을 이용해서 재원을 마련했다.

이번에도 공명첩을 600장이나 발행했다. 불티나게 팔릴 것같던 공명첩이 팔리지 않았다. 단가를 낮추어도 찾는 이가 별로

없었다. 모두가 어려운 시기였다. 결국 국내에서 곡물을 조달하는 일은 한계에 다다르고 말았다.

이때 조정에서는 청에서 곡물을 수입하자는 의견이 일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료들은 운송의 번거로움과 혹시 청에게

약점을 잡힐지 모른다는 우려로 반대해 무산되고 말았다.

1697년 또다시 백만명의 아사자를 낸 을병대기근때, 조선은 청나라에 양곡지원을 요청했다. 청은 다음해 압록강변에 쌀

3만석을 실어와 1만석은 무상으로, 2만석은 유상으로 판매했다.

 

도적들이 들끓자, 순찰을 강화하고 5가작통법과 호패법강화등을 통해 유민통제를 적극적으로 실시했다. 하지만 이시기

현세구제의 비기,도참,미륵신앙이 백성들 사이에서 확산되어 갔다.

유망과 비기의 영향으로 백성들의 집단이주가 빈번해 졌는데, 특히 평안도주민들의 남쪽 이주가 두드러졌다.

아마 한반도의 한냉화에 따른 북쪽지방의 혹한과 전염병 때문으로 보인다. 인구수가 15세기에 경상도,평안도,충청도,전

라도순이던것이 17세기를 거치면서 경상도,전라도,충청도,평안도 순서로 바뀌었다. 대기근시대의 한 단면이다.

 

참고)

1.대기근/ 김덕진 지음/ 푸른역사

2. 대동법 / 이정철 지음/ 역사비평사

3 레알 뻘짓 블로그(http://blog.naver.com/alsn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