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오토 딕스

백삼/이한백 2014. 8. 21. 10:57

@

오토 딕스

[ OTTO DIX ]

 

1차, 2차 세계 (50세의 나이에 참전) 대전에 참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음. 2차 대전때는 강제 징집당했다고 함.ㅠㅠ 

출생-사망 1891년 12월 2일 ~ 1969년 7월 25일
출생지-사망지 독일 게라 - 독일 징겐
예술양식 독일 표현주의 화가, 가차 없이 사실주의적으로 표현된 전쟁의 모습,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비평,
초상화, 폭력적이고 성적이며 상스러운 이미지

오토 딕스는 20세기 전반기의 혼란스러웠던 독일에서 살았으며, 그는 이러한 격변의 시대를 잘 반영한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들을 제작했다. 1910년에 딕스는 드레스덴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초상화가로서 자신의 초기 인상주의 스타일을 연마했다. 딕스의 삶과 작품양식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자원입대해 군복무를 함으로써 철십자 훈장을 수상했다.

딕스가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받았던 상처는 그의 미술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표현주의적인 양식으로, 사회를 그처럼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몰고 간 비참한 현실을 그려냈다. 친구이자 동료 화가였던 게오르게 그로스와 함께 딕스는 신즉물주의(Neue Sachlichkeit) 운동의 주창자가 되었다. 이 운동은 1920년대 독일에서 일어난 미술운동으로 사실주의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에 만연해 있던 체념과 냉소를 반영하고 있다.

딕스는 장애를 입은 참전용사들에 대한 열악한 처우에 대해서 격분했다. 이는 다리가 잘려나간 병사들이 퇴폐적인 베를린 시민들에게 무시당하는 장면들을 묘사한 <성냥팔이>(1920), <프라하 거리>(1920), 그리고 <메트로폴리스>(1928) 등의 작품에 반영되어 있다. 딕스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독일의 모습이라고 보았던 쾌락추구의 장면과 폭력과 죽음, 매춘의 이미지들을 대비되게 배치함으로써 삶의 어두운 부분을 집요하게 추구했다. 1927년, 딕스는 드레스덴 아카데미의 교수로 임용되었고 1931년에는 프러시아 예술원의 교수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나치의 등장으로 그는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그의 작품들은 전시가 금지되었다. 1937년 나치가 열었던 '퇴폐미술전'에서 딕스의 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었다. 히틀러의 암살 계획에 가담한 죄로 유죄를 선고받았던 딕스는 프랑스군에 의해 풀려났다. 딕스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작품 활동을 재개했다. 그의 작품들은 베를린 시절에 비해 다소 차분해진 양식으로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미술가들은 진실을 수정하거나 개선하려고 하면 안 된다. 그저 실체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  유화 ‘저널리스트 실비아 폰 하르덴의 초상’*1926년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Otto Dix는 초상화를 그릴 때,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초상화를 그릴 때, 그 모델과 많은 대화를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 모델의 얼굴생김새와 그 모델의 손이 지금까지 그 모델이 살아온 인생여로를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뭐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Otto Dix의 초상화는 손이 과장되게 그려져 있다. 또한 얼굴만 봐도 이 사람은 어떻게 살아왔구나 하는 게 느껴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고...
위 그림믄 아주그냥 저 여자가 Journalist 구나! 라는 생각이 팍팍 든다.

나 신경예민해요! 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 입술모양 하며..."  

 

 

 

 

 

 

 

 

성냥팔이

 

손발이 잘린 퇴역군인은 가련한 인물이다.

전쟁은 그의 손발과 눈을 앗아갔다. 그의 불구는 잘린 발목을 향해 오줌을 누는

닥스훈트 강아지를 통해 겨우 주의를 끌 뿐이어서  더욱 극명하게 비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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