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백만명이 굶어죽은, 17세기 조선을 강타한 경신대기근 1편

백삼/이한백 2014. 8. 18.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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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에 사는 노비 순례가 다섯살된 딸과 세살된 아들의 인육을 먹었는데, 사실여부를 물었더니 큰 병을 앓고 굶주리던 차에

아들과 딸이 병들어 죽어 삶아 먹었으나 죽여서 먹은 것은 아니다 하였습니다. 순례는 보기에 흉측하고 참혹해 얼굴이나 살

갗,머리털이 조금도 사람모양이 없고 마치 귀신의 형상같았으니 반드시 실성한 사람일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성하였다하더라도 이는 실로 예전에 없던 일이고 범한 것이 매우 흉악하므로 가두어 두었습니다. 해당부서를 시

켜 처리하게 하소서.(1671년 충청감사 이홍연)

 

서울내외에 굶어죽은 시체가 길가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혹은 부모 처자가 서로 베고 깔고 함께 죽은 경우도 있고, 혹은 어미가

이미 죽고, 아이가 그 곁에 엎드려 젖을 만지며 빨다가 곧이어 따라 죽기도 합니다. 울고불고 신음하는 소리에 지나가는 자도

흐느낍니다. 더우기 전염병은 날로 치솟아 열풍이 불꽃을 일으키는 듯한 기세입니다.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드문데, 걸렸다

하면 곧 죽습니다...사방에서 죽어가는 참상은 전쟁에 비길바가 아닙니다. 더구나 보리와 밀을 이미 그르쳤고,수수와 좁쌀도 모

두 벌레가 파 먹었으니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은 생기가 사라져버렸습니다.(1671년 대사헌 장선징)

 

17세기는 유난히 추웠다. 전지구적으로 평균기온이 1-2도 내려가고 서늘한 여름과 추운 겨울이 잦은 이상저온이 장기

간 지속됐다. 이는 자연재해로 연결됐고, 기근과 전염병,불황 그리고 내란과 전쟁을 불러 일으켰다.

17세기는 위기의 시대였다. 이시기는 15세기부터 시작된 소빙기가 절정에 이른 시대였다.  내란과 전쟁의 와중에서 많

은 나라들이 망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다. 거대한 제국이었던 명나라도 끝내 쓰러지고 말았다.

 

17세기 동아시아에서는 명.청교체,왜란,호란등 침략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 직격탄을 맞은 나라가 조선이었다.

임진왜란이후 인구가 감소하고 농토가 황폐화된 와중에서도 자연재해는 끊임없이 밀어닥쳤다. <실록>에 수록된 천변

재이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기근과 전염병이 가장 심한 시기가 1651년부터 1700년이었다. 이 기간은 생존환경면에

서  조선조 역사상 최악의 시기라고 한다. 그 가운데 대기근도 여러 차례 발생했다.

 

재해가 끊이지 않자, 조선도 대응책을 갖추었다. 진휼을 전담하던 임시기구였던 진휼청을 상설기관으로 만들고 독자적

재원을 갖추게 하였다. 또 당시 백성들의 큰 부담이었던 공물납을, 대동법을 시행하여 그 수취액을 1/5-1/6까지 줄여

주었다.

 

1670년(현종 11)은 새해벽두부터 불길한 징조가 나타났다. 서울하늘에서 붉고 푸른 햇무리가 관측된 것이다. 사람들은

위망과 쇠란의 징조라고 숙떡거렸다. 다른 날에는 유성들이 떨어졌다.

1670년 2-5월, 극심한 가뭄과 냉해가 전국을 휩쓸었다.

4월은 밀과 보리를 수확하고 조,콩,벼의 씨를 뿌리는 시기로 1년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달이다.이달에 재해가 들면 1년 

농사는 끝장이다. 가뭄으로 5월 모내기마저 물건너 갔다.

1670년 5-6월, 우박,서리가 전국을 강타했다.

특히 평안도가 피해가 심했는데 전체 42개 고을중 3분의 2가량이 냉해피해를 입었다. 이때 수해와 풍해가 겹쳤다.

1670년 6월, 태풍과 폭우가 한반도 전역에 쏟아졌다. 충해가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병충을 당시 사람들은 황충이라고 불렀는데, 황이란 메뚜기로 풀,나무,소나무,잣나무의 잎을 갉아 먹는 피해를 내고 충

이란 벌레로 알곡을 갉아 먹는 피해를 낸다. 특히 함경도의 피해가 심했다.

1670년 7월, 우박과 함께 서리와 눈이 전국에 내렸다.

서리가 일찍 내려 추수를 눈앞에 둔 작물이 모두 말라 죽었는데 특히 함경도의 피해가 심각했다.

1670년 7월, 제주도에 초대형 태풍이 몰아쳤다.

해일이 밀고들어와 온갖 초목들이 짠 바닷물에 절어 죽어갔다. 전체인구 4만 2700여명이 굶주렸고 도민의 20-30%가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1670년 8월, 냉우(冷雨)가 내렸다. 전라도가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1670년 8월, 삼남지방에 진도가 높은 지진이 발생했다.

1670년 겨울, 혹심한 추위가 닥쳤다.

경상도에서 추위때문에 밀과 보리가 말라죽었다.

제주도에서는 쌓인 눈이 3m나 되었는데, 산에 먹을 것을 구하러 올라갔다가 얼어 죽은자가 91명이나 되었다.

 

1671년 3월, 찬바람과 된서리,찬비,눈이 잇따라 내리는 추위가 작년부터 계속 이어졌다.

전국 일원에 10m이상의 폭설이 연거푸 내렸다. 이 추위로 수확철에 접어든 밀,보리와 성장중인 가장과 조가 상하고

모내기용 볏모가 말라죽었다.

 

1670-71년 재해는 냉해,가뭄,수해,풍해,충해등 5대재해가 겹친 유래없는 대재해였다. 이어 전염병과 가축병이 겹치면

서 대재앙이 되었다. 1670년, 전국 360개 고을 모두 자연재해로 농사를 망쳤다. 이중 심한곳이 103개, 그 다음이 156개

였고, 나머지 100개 고을조차도 평년의 대흉작 수준이었다. 예전같으면 성한 곳이 더러 있었는데 그해는 한 곳도 없었

다하니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이 기근은 1671년까지 이어졌다. 이 두해의 대기근을 경신대기근이라 한다. 경신대기근

은 조선 역사상 최악의 대기근으로 최대규모의 식량고갈상태를 가져왔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1670년 1월 충청도에서 장계가 올라왔다. 전염병이 도내에 돌고 있어 감염자가 513명이고 사망자가 30명에 이르렀다

는 내용이다. 2월에 접어들자 전염병은 전국으로 확산되어갔다.

병에 걸리면,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고 온몸이 뒤틀리며 구토와 설사가 멈추지 않다가 맥없이 쓰러져 죽어 갔다. 빠른

전염률, 높은 사망율,심한 통증이 특징이었다. 역병은 다음해 봄철이 되어도 수그러 들줄을 몰랐다 마침내 그해 가을

사상 최대의 사망자를 내며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대기근으로 영양실조에 걸린 기아자들이 면역력을 잃고 쉽게 감염됐고,  그들이 먹을 것을 찾아 떠도는 바람에 확산된

것이다. 그리하여 서울, 지방, 빈부귀천이나 남녀노소 가릴것 없이 광범위하게 감염되고 죽어갔다.

그러자 병을 피해 떠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많은 관리들이 감염되어 죽었고, 멀쩡한 신하들도 감염을 피하기 위해

줄줄이 사직서를 냈다. 임금은 입궐을 독려하고 사직서를 물리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때문에 행정공백이 커졌고, 교

통, 통신망이 마비되기도 했다.

 

전염병이 한창일 때 우역이라는 가축병이 발생했다. 우역은 1670년  7월 처음 발병하여 이내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

했다. 이 해 황해도에서 소 2만2165마리가 죽었다. 경신대기근때 우역으로 죽은 소는 4만여두에 이른다. 전체 농가의

4%이상이 소를 잃은 셈이다.  소의 대량폐사는 엄청난 재산손실이다. 이는 조선의 1년 벼농사와 맞먹고 호조의 2년 수

입과 비슷하다. 또한 농사와 운송에도 치명타였다.

 

경신대기근은 기근,전염병,가축병,혹한이 삼중 사중으로 겹친 대재앙이었다. 대재앙의 종착지는 굶주림과 병으로 인

한 수많은 죽음들이었다.

시장에는 곡물이 나오지 않았고, 나온 곡물은 가격이 천청부지로 올라있었다. 상인들은 사재기에 열을 올렸다.

식량이 바닥나자, 사람들은 먹을수만 있다면 풀뿌리든 나뭇잎이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먹었다. 그중 으뜸은 솔잎

과 도토리였다. 하지만 도토리도 재해로 인해 성한 것이 없었다. 바짝 마르고 누렇게 부황 든 사람들은 옥수숫대를 가루

로 만들어 풀과 섞어 먹었는데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떠도는 유랑민과 거지들이 길에 가득찼다. 먹을 것을 찾아 고향을 떠난 무리들이었다. 운봉에서는 전

체 가호의 20%인 300여호가 집을 비웠다. 이들은 굶주린 배를 채우려  먹을것이 있으면 까마귀떼처럼 달려들어 주어

었다. 머지않아 노약자는 죽고 건장한 자는 도적이 되었다.

1671년, 전년 가을에 수확한 곡식이 떨어지는 새봄이 오자, 기아자가 대량으로 발생하기 시작했다.

1671년 5월 경상도에서 굶주림에 허덕인 자는 24만명으로 전체도민의 25%에 달했다. 아사자에 대한 보고는 1670년 7월

부터 보인다. 8월로 접어들며 본격적으로 아사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1671년 아사자로 보고된 수는 십여만 이지만, 빙

산의 일각일뿐이다. 문책을 두려워한 지방관들이 사실을 축소,왜곡해서 보고했고, 촌락이나 도로에서 굶어 죽은 자들은

부분 누락시켰기 때문이다.

경신대기근 시기 역병에 감염된 자는 5만2천명, 사망한자는 2만 3천명으로 보고 되었다. 이 역시 극히 일부분일뿐이다.

 

병든 사람은 병으로 죽고, 병없는 사람은 굶어서 죽었다. 시체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사람들이 전염될 것을 우려하여

꺼리고, 기운 있는 자들이 드무니 길가에 방치된 시신은 끝없이 이어졌다.

도데체 이 2년간 기근과 염병으로 얼마나 죽었을까?

1671년 12월 사간원 헌납 윤경교는 상소에서 기근과 여역으로 떠돌다 죽은자들과 고향에서 죽은 사람들을 합하면 그 수

가 일백만에 이른다고 하였다.  그 여섯달전 대사헌 장선징도 일백만을 언급하였다. 이는 1669년 호적상 인구가 516만이

기에 전 인구의 25%에 이른다. 하지만 1672년 호적을 보면 473만으로 43만명이 줄어있다. 또 호적에 등록되지 않은 외거

비등을 감안하면 당시 조선의 인구는 천만명을 넘기때문에,일반적으로 100만명설은 크게 과장되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먹을것이 부족해지자. 사람들은 자녀들을 팔거나 죽이고 거리에 내버리곤 했다. 버려진 아이들이 거리에 득실거렸다.

어떤 자들은 무리를 모아 도적질을 했다. 금산에서는 향청좌수 이광성이 무리 수백을 모아 군량미를 탈취하려고 했다.

서울에서는 굶주린 병졸들이 도적질을 하다 체포되어 처형되기도 했다.

또 유언비어가 수시로 나돌아 조정의 골치거리가 되기도 했다.

 

참고)

1.대기근/ 김덕진 지음/ 푸른역사

2. 대동법 / 이정철 지음/ 역사비평사

3 레알 뻘짓 블로그(http://blog.naver.com/alsn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