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윤계선의 달천 몽유록 (3)

백삼/이한백 2014. 7. 8. 09:58

정 만호(정운 鄭運)가 이에 큰 칼을 들고 일어나서 춤을 추며 〈돛을 내리는 노래〉를 부르며 말하기를, 
나라의 위급함을 염려하며, 고을에 사내다운 사내 없음을 나무랐네. 
살아서는 장군과 함께 일을 같이하고, 죽어서는 장군과 처소를 같이하니, 
하늘을 우러러 무엇이 부끄러우며, 땅을 굽어 무안할 것이 무엇이랴
.” 
하였다. 그 지기(志氣)가 활달하고 격조가 비장한데 그 노래에 이르기를,
돛대는 높아 백 자나 되고, 큰 돛은 구름같구나 / 檣高百尺兮大帆如雲
푸른 바다 넓고 넓은데 물결은 잔잔하기도 하다 / 碧海茫茫兮波不生紋
왼쪽은 부산이요, 오른쪽은 대마도라 / 左釜山兮右馬島
취한 눈을 부릅뜨니 기운이 훈훈하네 / 瞋醉眼兮微醺醺
몸이 먼저 죽어 뜻을 이루지 못하니 / 身先死兮志未遂
장한 기운 내뿜어 구름 끝을 범하네 / 噓壯氣兮干雲端
대장부가 구질구질해서 되겠는가 / 大丈夫不可瑣瑣兮
한 알의 탄알을 슬퍼해서 무엇하리 / 何用悲乎一彈丸兮

하였다.
정운 [鄭運, 1543~1592]
본관 하동(河東). 자 창진(昌辰). 시호 충장(忠壯). 영암(靈巖) 출생. 무과에 급제하여 거산도찰방(居山道察訪)·웅천현감(熊川縣監)을 지냈다. 제주판관(濟州判官) 때 목사(牧使)와의 불화로 파직되었다가 1591년(선조 24) 녹도(鹿島)만호가 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의 선봉장이 되어 옥포해전·당포해전·한산도대첩 등의 여러 해전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부산포해전에서 추격 도중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으며,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영암의 충절사(忠節祠), 흥양(興陽)의 쌍충사(雙忠祠)에 제향되었다.
 


이 첨사(이영남 李英男)가 또한 나아가서, 
비록 백 사람의 으뜸은 못 되지마는 한낱 외로운 충성을 자처하오. 
소륵(疏勒)에서 성를 지킬 적에 경공(耿恭)을 도위(都尉)로써[주19],
적벽(赤壁)에서 배를 불사를 적에 정보(程普)를 우독(右督)으로써 면려하였는데[주20],
창같은 자줏빛 수염이 오래 강 모퉁이에 머물러 있고, 
수풀같이 늘어선 배들이 모두 손 아래 달려있었소.
대마도를 깎아서 바다를 메워버리렸더니, 
어찌 붕새의 날개가 꺾일 것을 생각하였으리오. 
넋은 날아가고, 용기는 다하니 원한이 푸른 바다에 막혔도다
.” 
하고, 이에 읊기를,
큰 바다는 저렇게 깊은데 / 大海深如許
외로운 몸은 원한이 가득하도다 / 孤身怨有餘
장한 뜻은 아직 펴지도 못하였는데 / 壯心售未了
거센 물결은 허공에 부딪쳐 푸르도다 / 鯨浪碧磨虛

하였다.
[주19]소륵(疏勒)에서 …… 도위(都尉)로써 : 소륵은 신강성(新疆省)에 있는 한(漢) 나라 때 36국(國)의 하나요, 경공은 후한(後漢) 때 장수로 흉노(匈奴)를 공격하고 돌아와 기도위(騎都尉)가 되었다.
[주20]적벽(赤壁)에서 …… 면려하였는데 : 적벽대전 때에 오(吳) 나라 장수 정보가 유비의 군사와 합세하여 조조의 병선을 불로 공격하여 대파하였다.

 


이영남 李英男
*호남동순록湖南同殉錄
이영남(1571~1597) 자는 자호. 판부사 이익추의 손자. 전의 사람인데 전주에서 살았다. 1588에 무과에 합격하였다.
1590(20살)에 율포만호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 원균이 도망하려는 것을 보고 옥포만호 이운룡이 꾸짖어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하게 되자, 그 교섭의 책임을 이영남이 졌다. 이순신이 처음에 구원해 주는 것을 거절하자 그는 전라좌수영 문 밖에서 3일 동안 통곡하면서 오가기를 대여섯 차례였다. 그 뒤로 모든 장수들이 합력하여 적을 무찌르는 속에 그는 항상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다. 뒤에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
*백과사전
조선 중기 무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옥포만호(玉浦萬戶)로서 원균(元均)을 도와 적과 싸웠고, 정유재란 때,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진도해전에 참전, 공을 세웠다. 이어 노량해전에서 패주하는 적을 추격, 섬멸하다가 전사했다. 1621년(광해군 13)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이 수사(이억기 李億祺)가 이에 일어나 청하기를,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하다가 죽었으면 그만이지 
이미 지나간 일을 이제 와서 말해 무엇하리오. 
청컨대, 여러 대인을 위하여 농이나 하나 하겠소.

하며, 긴 허리를 굽히고 늙은 주먹에 침을 뱉아 노를 저으며 즐기는 시늉을 하고, 
취하여 노래 부르기를,
두병(斗柄 북두칠성의 국자 자루에 해당하는 세 별)은 길게 기울고, 밀물은 오르려 하고. 
뱃사공들아! 배를 띄워 가잤구나. 
왕사(王事)를 튼튼히 하라는 장군의 명령이 지엄하니, 부상(扶桑)이 지척이라 또 긴 돛이 걸렸구나
 .” 
하였다.
이억기 [李億祺, 1561~1597]
본관 전주(全州). 자 경수(景受). 시호 의민(毅愍). 17세에 사복시내승(司僕寺內乘)이 되고 그후 무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경흥(慶興)·온성부사(穩城府使)를 역임하면서 북방의 경비에 만전을 기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는 전라우도 수사(水使)가 되어 이순신(李舜臣)을 도와 당항포·옥포 등지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이순신이 원균(元均)의 참소로 하옥(下獄)되자 이항복(李恒福)·김명원(金明元) 등과 함께 무죄를 변론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원균 휘하의 좌익군(左翼軍)을 지휘, 용전하다가 칠천량(漆川梁) 싸움에서 원균과 함께 전사하였다.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완흥군(完興君)으로 추봉되고 병조판서에 추증, 여수 충민사(忠愍祠)에 이순신과 함께 배향되었다. 


신 판윤(신립 申砬)이 또 나아가서, “미천한 나의 회포는 이미 대강 말하였소.” 하고, 읊기를,
국내에서 명성도 일찍 났는데 / 國中名譽早
죽은 뒤에는 시비도 많도다 / 身後是非多
한 번 패하고 본진으로 돌아와서 / 一敗還關後
처량하게 큰 칼 어루만지며 노래부르네 / 悽然撫劍歌

하였다. 
신립 [申砬, 1546~1592]
본관 평산(平山). 자 입지(立之). 시호 충장(忠壯). 1567년(선조 즉위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도총부도사(都摠莩事) ·경력(經歷)을 지내고 진주판관(晉州判官)이 되었다. 1583년 온성부사(穩城府使)가 되어 북변에 침입해온 이탕개(尼湯介)를 격퇴하고 두만강을 건너가 야인(野人)의 소굴을 소탕하고 개선, 함경북도병마절도사에 올랐다. 1587년 흥양(興陽)에 왜구가 침입하자 우방어사(右防禦使)가 되어 군사를 인솔, 토벌에 나섰다가 이미 왜구가 철수했으므로 돌아오던 중 양가의 처녀를 첩으로 삼았다는 삼사(三司)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곧 함경남도병마절도사에 다시 등용되었으나, 졸병을 참살한 죄로 중추부동지사(中樞芬知事)의 한직으로 전임되었다. 
1590년 평안도병마절도사에 보직되고 이듬해 한성부 판윤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로 임명되어 충주(忠州)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북상해오는 적군과 대결했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여 패배, 부하 장수인 김여물(金汝岉)과 함께 강물에 투신 자결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유 수사(유극량 柳克良)가 또한 나아가서, 
영웅은 죽음을 아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헛된 죽음을 아까워 하는 것이오. 
좋은 장수는 빠른 것을 귀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신령스러운 것을 귀히 여기는 것이오. 
생각건대, 그날 어떤 사람이 늙은 나더러 겁이 많다고 꾸짖고 양처럼 구박하며, 
이제 윗도리를 벗고 범을 잡으라 하니,
나라의 은혜를 받은 것이 두세 번이라 죽어 마땅하지만, 
싸우다가 죽은 자가 천백을 헤아리니 그 참혹함을 어찌 차마 말하리오. 
활이 꺾이자 주먹을 휘두르고, 
칼에 맞아 머리가 깨어져 해골은 황량한 들판에 드러나고 
슬픔을 큰 강물에 쏟는구려
.”
하고 읊기를,
배수에 꽉 찬 군사 늙은 이리를 치는데 / 背水嬴兵搏老狼
한 사람 방책 없어 만 사람이 죽었네 / 一人無策萬人亡
산하의 잔풀이 해마다 푸르르니 / 山河細草年年緣
지나는 길손이 싸움터를 가리키네 / 惟有行人指戰場

하였다.
유극량 [劉克良, ?~1592]
연안유씨(延安劉氏)의 시조. 자 중무(仲武). 시호 무의(武毅). 선조 초에 무과에 급제, 위장(衛將)이 되었다. 1591년(선조 24) 전라도수군절도사가 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방장(助防將)으로 죽령(竹嶺)을 수비했으나 패배했다. 이어 임진강(臨津江)의 적을 방어하다가 전사했다. 병조참판에 추증, 개성 숭절사(崇節祠)에 배향되었다.


김 진주(김시민 金時敏)가 또한 나아가서, 
다행히 하늘에 빛나는 신령의 도움으로 성을 보전한 공적이 조금 있었던 바 
포상의 영광이 분에 넘쳐 감격하여 몸을 바쳤소. 
강성한 오랑캐 군사가 잠깐 우이(盱眙)[주21]에서 꺾이더니, 
자기(子琦)의 군세(軍勢)가 수양(睢陽)에 다시 모이자[주22], 
그물로 참새를 잡아먹고 땅을 파서 쥐를 잡아먹다가 
계책이 다하여 말을 잡아먹고 뼈를 깎아 불을 때고, 
아들을 바꾸어 먹으면서도 양을 끌고 항복할 생각은 없었소. 
뜻을 더욱 삼판(三版 세 길 되는 성)에만 쏠렸으나, 몸이 돌연히 한 알의 탄알에 쓰러졌소. 
임금의 특별한 은총에 보답하지 못하니, 장한 회포 풀기 어렵구려
.”
하며, 노래하기를, 
누각 밑 바위는 깎아지른 듯한데, 그 밑에 긴 강 있어 푸른 물결 쓸쓸하도다. 
장사가 오래 포위되어 변방의 티끌이 까맣고, 총소리 하늘을 흔들어 대 쪼개는 소리같구나. 
은혜는 태산같고 몸은 홍모(鴻毛)같으니, 피는 흘러 갑옷을 물들인다. 
땅은 넓고 하늘은 높은데, 미친 바람이때로 일어 노기를 떨치누나
.”
하였다.
[주21]우이(盱眙) : 안휘성(安徽省)에 있는 초(楚) 나라 의제(義帝)가 도읍했던 곳.
[주22]자기(子琦)의 …… 모이자 : 안녹산(安祿山)의 난리 때 장순(張巡)이 수양 태수(睢陽太守) 허원(許遠)과 함께 성을 지켜 적장 윤자기(尹子琦)와 싸웠으나 결국 성은 함락되어 모두 피살되었다.
김시민 [金時敏, 1554~1592]
본관 안동. 자 면오(勉吾). 시호 충무(忠武). 목천(木川) 출생.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 훈련원판관이었을 때 군사에 관한 일을 병조판서에 건의한 것이 채택되지 않아 관직을 버렸다. 1591년(선조 24)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었는데,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죽은 목사(牧使)를 대신하여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무기를 갖춘 공로로 목사가 되었다.
사천(泗川) ·고성(固城) ·진해(鎭海) 등지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올라 금산(金山)에서 다시 적을 격파하였다. 그해 10월 적의 대군이 진주성(晋州城)을 포위하자 불과 3800명의 병력으로 7일 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적을 격퇴했으나, 그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되었으며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고, 뒤에 영의정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증(追贈)되었다. 진주(晋州)의 충민사(忠愍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이 병사(이복남 李福南)가 또한 나아가서, 
적군이 운봉(雲峯)을 넘어오니 저 명나라 장수가 혼자서 대방(帶方 남원)을 지키면서 
남원을 함락한 왜적이 구례(求禮)로부터 온 것을 운봉에서 왔다고 한 것은 잘못 전해들은 것이다
우리 나라 군사를 지휘하니, 여러 군진에서는 그것을 앉아서 보고만 있었소. 
나는 나라의 수치라고 민망히 여겨 한 기마로 달려갔으나 관하에는 겨우 30여 명이 있을 뿐이었는데
성 밖 적군의 그 수효가 백만이었소. 
아홉 번 공격하여도 떨어뜨리기 힘든 성이 단번에 무너졌으니 어찌 참혹한 일이 아니겠소. 
의로운 충성을 한번 펴보지도 못하고 쌓인 시체들과 함께 썩었소
.”
하고, 읊기를,
교룡성(남원산성) 낡았는데 남은 구름 사라지고 / 蛟龍城古殘雲斷
오작교 쓸쓸한 데 지는 해만 차갑구나 / 鳥鵲橋荒落照寒
백골의 떨기 속에 많은 세월 흘렀으니 / 白骨叢中多歲月
장부의 백발이 꿈속에 솟아 관을 찌르네 / 壯夫華髮夢衝冠

하였다.
이복남(李福男) 
1555(명종 10)~1597(선조 30)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우계(羽溪). 자 수보(綏甫). 시호 충장(忠壯). 
선조때 무과에 급제, 1592년(선조 25) 나주판관이 되었다. 이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전주까지 올라오자, 그해 7월 김제군수 정담(鄭湛) 등과 함께 웅치에서 왜적과 맞서싸웠다. 이듬해 전라방어사(全羅防禦使), 충청조방장(忠淸助防將), 1594년 남원부사, 전라도병마절도사, 이듬해 나주목사(羅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다시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 남원성이 왜적에 의해 함락되자, 조방장(助防將) 김경로(金敬老), 산성별장(山城別將) 신호(申浩) 등과 함께 순국을 맹세하고 성남문으로 잠입하여 왜적과 맞서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성은 함락되고 전군과 함께 전사하였다.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가, 후에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 兼 判義禁府事 五衛都摠莩摠管)으로 추증되었다. 1612년(광해군 4) 남원 충렬사(忠烈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이때 그의 아들 경보(慶寶)는 7세의 어린 나이에 일본군의 포로로 끌려가 그곳에 정착하였는데, 그의 후손 이가정문(李家正文) 박사가 천신만고 끝에 뿌리를 찾아 1982년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가 화제가 된 일도 있었다.


황 병사(황진 黃進)가 또한 나아가서, 
하찮은 몸이 쓸 데는 없으나 외로운 성을 의지하여 총지휘자가 되었소. 
바람은 일만 깃발에 위엄을 날리고, 비는 한쪽 모퉁이에서 화를 빚어, 
탄알이 어느새 이마에 맞자 적들은 다투어 성에 기어올랐소.
이는 하늘이 망하게 한 것이지 잘못 싸운 죄가 아니니, 이 일을 난들 어찌하리오. 
새끼줄이 끊어지면 자국이 있는 법이니, 누가 나를 허물하겠소. 
성을 오르면서 흘린 피를 마시며 싸운 상처를 싸매었소
.” 
하고, 〈성을 쌓는 노래[築城之歌]〉를 지어 이르기를,
궂은 비 열흘이나 잇달아 내리니 벼이삭에 귀가 돋히고 / 遙雨連旬兮禾頭生耳
우뚝한 옛성은 사뭇 높아 무너졌네 / 古城崔嵬兮崇極而圮
달구질 소리, 에헤야! 성쌓기에 힘쓰자 장사들이여 / 萬杵馮馮兮勖哉與士
적이 올라오면 우리들이 다 죽는다 / 賊若攀登兮吾屬且死

하였다.
황진 [黃進, 1550~1593] 
본관 장수(長水). 자 명보(明甫). 호 아술당(蛾述堂). 시호 무민(武愍). 1576년(선조 9)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1591년 조선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에 다녀와 미구에 일본이 내침(來侵)할 것을 예언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복(同福)현감으로 근왕병(勤王兵)을 이끌고 북상하여 용인(龍仁)에서 패전하고 이어 진안(鎭安)에서 왜적의 선봉장을 사살한 뒤 적군을 안덕원(安德院)에서 격퇴하고, 훈련원 판관(判官)이 되어 이치(梨峙)전투에서 적을 무찔렀다. 그 공으로 익산(益山)군수 겸 충청도 조방장(助防將)에 오르고, 절도사 선거이(宣居怡)를 따라 수원(水原)에서 싸웠다. 
이듬해 충청도 병마절도사에 승진하여 패퇴하는 적을 추격, 상주(尙州)에 이르는 동안 연승(連勝)을 거두고, 적의 대군이 진주성(晉州城)을 공략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절도사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성중에 들어가 9일 동안 혈전 끝에 전사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진주 창렬사(彰烈祠), 남원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