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이순신과 측실에게서 난 아들들

백삼/이한백 2014. 7. 8. 09:54

이순신과 측실에게서 난 아들들

측실에게서 난 아들 둘, 이훈(李薰)과 이신(李藎)이 더 있음.
장남 이회는 나중에 현감을 지냈고, 둘째 이열은 찰방을 지냈으며, 셋째 이면은 정유재란때 전사했고, 
이훈은 무과급제자로 정묘호란 때 전사했으며, 이신 역시 무과급제자로 이괄의 난때 전사합니다.

##### 조선왕조실록 
정조16년 9월 5일

이에 앞서 각신(閣臣) 서유방(徐有防)이 아뢰기를,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아들 이면(李葂)은 왜적에게 죽었고, 서자(庶子) 이훈(李薰)과 이신(李藎)은 오랑캐에게 죽기도 하고 이괄(李适)의 난리에 죽기도 하였으니, 아울러 증직(贈職)하거나 정려(旌閭)할 것을 대신(大臣)에게 물으소서.”

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복주(覆奏)하기를,

“충무공이 통영(統營)에 있을 당시 아들 이면은 고향집에 있다가 왜적을 만나서 여기저기서 싸워 왜적 3명을 죽이고 그도 왜적의 칼날에 죽었습니다. 죽을 당시 총각이었는데 참으로 충무공의 아들로서 부끄러움이 없다 하겠습니다. 다만 충무공이 순국(殉國)하기 전의 일이어서 효자로 정려할 수도 없고 또 충신으로 정려할 수도 없습니다. 이훈은 정묘년 호란(胡亂)에 죽었고 이신은 안현(鞍峴)에서 죽었으니 그 충절(忠節)이 우뚝하다고 일컬을 수 있으나, 다만 이 두 사람도 후손이 없고 또 사판(祠版)도 없으며 전쟁터에서 죽었기 때문에 무덤도 만들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비록 증직의 교지가 있다 한들 누구에게 전할 것이며 어디에 고하겠습니까. 매우 난처한 일입니다.”

하니, 그대로 두라고 명하였다. 
(주) 이괄의 난 : 이괄은 그의 부하 이수백(李守白)·기익헌(奇益獻), 구성부사(龜城府使)인 한명련(韓明璉)과 함께 가까운 병영(兵營)의 군사 1만여 명과 항왜병(降倭兵) 100여 명으로 먼저 개천(价川)을 점령하고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는 한편, 반란군과 내응할 것을 염려하여 전 영의정 기자헌(奇自獻) 등 35명을 처형하였다.

반란군은 평안도의 순천(順川)·자산(慈山)·중화(中和), 황해도의 수안(遂安)·황주(黃州)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평산(平山)으로 진격하였다. 중앙에서 파견한 토벌군과 장만이 이끄는 추격군은 합세하여 저탄(猪灘)에서 반란군과 싸웠으나, 도리어 반란군에게 패하였고 반란군은 승승장구하여 경기도의 개성·벽제에 이르렀다. 이에 인조는 공주로 피란을 갔고 한성은 반란군에게 점령되었다. 이괄은 1624년 2월 11일 선조(宣祖)의 열번째 아들 흥안군(興安君) 제(瑅)를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바로 그날 밤장만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반란군을 한성 근교의 안령(鞍嶺)에서 대파(大破)하였다.

이괄은 패잔병을 이끌고 광희문을 빠져나와 경기도 이천(利川)으로 달아났으나, 전부대장(前部大將) 정충신(鄭忠信)의 추격을 받았다. 이에 이괄의 부하 기익헌·이수백 등은 자기들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이괄·한명련 등 9명의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하여 반란은 평정되었다.

##### 조선왕조실록
정조 20년 8월 9일
충무공의 아들 이면(李葂)이 정유년에 순국하고 이훈(李薰)이 갑자년에 순국하였으며 이신(李藎)이 정묘년에 순국하였는데 정증하는 전례가 아직까지 시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 조선왕조실록
정조20년 8월 21일
학생 이면(李葂)에게 이조 참의를 증직하고, 급제 이훈(李薰)·이신(李藎)에게 병조 참의를 증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