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윤계선의 달천 몽유록 (2)

백삼/이한백 2014. 7. 8. 09:57

고 임피(고종후 高從厚)가 또한 나아가 말하기를, “군영의 고아로서 세상에 다시 없는 지극한 슬픔을 안고, 호부(虎父)에 견자(犬子)가 될까 두려워, 새매의 날개에 종달새가 찢길 것도 잊어버리고, 피눈물 흘리며 창을 베개 하고, 뼈에 사무친 원한을 갚기 어려워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한 무리가 싸락눈처럼 모여들어 관흥(關興)[주14]․장포(張苞)[주15]의 승전을 날짜를 정해 놓고 기다릴 만하였는데, 결국 고기를 굶주린 범의 아가리에 던져준 결과가 되었으니, 죽어서도 소원을 풀지 못하게 되었소.” 하고, 이에 읊기를,
비바람 해마다 지나가니 / 風雨年年過
모래밭에 묻힌 뼈에도 이끼가 끼었네 / 沙場骨亦苔
평생에 원수를 갚으려던 뜻은 / 平生報仇志
조금도 삭아지지 않았노라 / 一寸未成灰

하였다.
[주14]관흥(關興) : 관우(關羽)의 아들로 제갈량에게 중용된 장수.
[주15]장포(張苞) : 장비(張飛)의 아들.

고종후 [高從厚, 1554~1593] 
본관 장흥(長興). 자 도충(道冲). 호 준봉(準峰). 시호 효열(孝烈). 1570년(선조 3) 진사가 되고, 1577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현령(縣令)에 이르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아버지 경명(敬命)을 따라 의병을 일으키고, 금산(錦山)싸움에서 아버지와 동생 인후(因厚)를 잃었다. 이듬해 다시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 복수의병장(復讐義兵將)이라 칭하고 여러 곳에서 싸웠고, 위급해진 진주성(晉州城)에 들어가 성을 지켰으며 성이 왜병에게 함락될 때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세상에서는 그의 3부자(三父子)를 3장사(三壯士)라 불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광주(光州)의 포충사(褒忠祠)와 진주(晉州)의 충민사(忠愍祠)에 배향되었다. 


이 좌랑(李佐郞)(이경류李慶流)이 또한 나아가, “부형(父兄)의 하던 일을 이어받아 입으로 성현의 남기신 글을 외웠지마는 경륜의 재주가 부족하여 조정에서 일하기 어려웠으며, 전쟁하는 용기 또한 용렬해서 왜적의 포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한 장의 편지를 아내에게 부쳤으니 장부로서 가소로운 일이며, 두 개의 귤을 형에게 던졌으니 원귀(寃鬼)가 가련하다. 비참한 정상이 어찌 이다지도 극도에 달했는고.” 하고, 이에 읊기를,
몸은 청유막을 돕는데 / 身佐靑油幕
왜놈이 세류영[주16]을 엿보았네 / 胡窺細柳營
구름을 탄 용이 홀연히 거꾸러지니 / 雲龍忽顚倒
왜적이 벌써 날뛰는구나 / 豺虎已縱橫
칼은 장홍[주17]의 피가 새파랗고 / 劍碧萇弘血
꽃은 두견새 울음소리에 붉도다 / 花紅杜宇聲
백골을 거두어줄 사람 없는데 / 無人收白骨
방초는 온 들에 푸르도다 / 芳草遍郊生

하였다. 
[주16]세류영(細柳營) : 한(漢) 나라 주아부(周亞夫)가 장군이 되어 세류(細柳)에 진을 쳤을 때 그 규율이 다른 어느 장군의 진보다 엄정하였다. 문제(文帝)가 순시하고 크게 감동하여 마침내 세류영의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주17]장홍(萇弘) : 《장자》외물편에, “장홍이 촉에서 원통히 죽어서 피를 저장해 두었는데 3년이 지나자 그 피가 새파랗게 되었다.” 하였음. 장홍은 본래 주(周) 나라 대부였음.

이경류 [1564-1592]
1591년(선조24) 28세로 문과에 급제. 전적을 거쳐 이듬해인 1592년(선조25) 29세때 예조좌랑에 재직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공은 병조좌랑으로 출전하여 상주전투에서 순절. 순변사 이일이 왜적과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하였으나, 윤섬, 박지, 이경류 등은 군사를 규합하여 싸워서 공을 세우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 자세한 내용과 전설이 있음.

박 교리(박지 朴篪)가 또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나이 겨우 열 여덟에 이름이 전국에 으뜸가고, 금마옥당(金馬玉堂)[주18]을 단번에 뛰어올랐으며, 어로(御爐)의 푸른 연기 속에 하루에 임금을 세 번 알현했으니, 은총이 이미 넘쳐 재앙이 또 닥쳐왔네. 뉘 알리오. 대궐의 뜰에서 하직을 올리자마자 문득 왜적의 소굴에서 참몰당할 줄을. 말을 달리는 재주는 썩은 선비에게 본래 해당되지 않지만 사람의 목숨을 하늘에 어찌 의지하랴. 고향은 아득하고 나의 몰골은 처량하기만 하구나.” 하면서 읊기를,
희고 고운 얼굴은 사람들 가운데 적은데 / 白面人中少
붉은 연꽃은 막사 안에 피었구나 / 紅蓮幕裏開
명성이 비록 자자하였으나 / 聲華雖籍甚
천명은 이미 쇠하였도다 / 天命已衰哉
갈길이 머니 이 넋을 어디에 의탁하리오 / 路遠魂何托
세월이 오래 되니 뼈도 또한 부서지누나 / 年深骨亦摧
달은 대궐문에 밝으니 / 月明靑鎖闥
밤마다 내 넋은 홀로 돌아가노라 / 夜夜獨歸來

하였다.
[주18]금마옥당(金馬玉堂) : 금마문(金馬門)과 옥당서(玉堂署)로 한(漢) 나라 때에 학사들을 초대하였던 곳이었는데, 뒤에는 인하여 한림원이나 한림학사를 지칭하는 데 쓰인다.

윤섬과 박지는 모두 임진왜란 초기에 상주 전투에서 순국한 분들임. NAVER 백과 사전에 따로 나온 것이 없어서 나중에 조사해야 함.

윤 판사(윤섬 尹暹)가 또 나아가서, “양반집 자손이요 대부의 신하로서 때가 맞지 않아 운명이 다하고 하늘이 순탄하지 않아 일이 잘못되니, 많은 선비 중에서 혼자 뽑힌 몸이 마침내 난리통에 쓰러졌소. 집에 계신 부모님은 늙고 쇠한데 소식이 끊겼으며, 호교(湖橋)에 산은 높고 물은 아득하여 길조차 먼데, 밝은 달을 따라 집에 돌아가고, 슬픈 바람에 부쳐 나무에 외치노라.” 하면서 읊기를,
젊은 시절 활쏘기는 익히지 않았으니 / 桑弧少不習
늘그막에 말도 타기 어렵도다 / 陣馬老難騎
남은 운명 어찌하여 이다지도 기구한가 / 殘命何多舛
뜬 이름은 일찍부터 속임을 입었다오 / 浮名早被欺
구름을 바라보는 그쪽에는 하늘이 아득하고 / 天昏望雲處
해가 저무니 부모가 문을 기대고 자식 기다릴 때로세 / 日暮倚閭時
쓸쓸하다 외로운 넋이 남아 있으니 / 寂寞孤魂在
빈 산에는 소쩍새가 슬피 우네 / 空山哭子規

하였다.

신 병사(신할 申硈)가 또한 나아가 말하기를, “일찍 무과에 급제하여 병서를 대략 익힌 탓으로 벼슬을 건너뛰어 병조에 적을 두고 북문을 맡았더니, 시운이 막히어 임금의 파천을 슬퍼하게 되었소. 군사를 거느리고 저 철령(鐵嶺)을 넘어 원수(元帥)를 만나 임진(臨津)에 진을 쳤소. 나라의 치욕을 씻고, 아울러 형의 원수를 갚고자 군사를 재촉하여 물을 건넜으나,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고 맨몸으로 강을 건너려는 격이라. 군사와 말이 모두 희생되었으니 비록 후회한들 이제 무엇하리오.” 하고, 이에 노래하기를, “강물은 유유히 흐르는데, 넋은 한번 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네. 바람은 소소히 언덕에 불고, 음산한 구름은 하늘을 덮어 날은 차갑네. 누군들 형제가 없으리오마는 어찌 우리 집안에만 이다지도 가혹한고. 물고기 배에 나의 뼈를 묻게 되었으니 해가 갈수록 잊혀지지 않네.” 하였다. 정 동지가 또 나아가서, “일찍 시서(詩書)를 익히고 병법은 배우지 못하였네. 다행히 과거에 급제하여 오래 벼슬에 매여 있다가 전쟁에서 손님접대하는 구실을 맡았고 높은 벼슬에 올랐소. 복이 과하면 재앙이 생기니, 은혜는 깊고 죽음은 가벼워라. 넋은 전장터에 떨어지고, 뼈는 모래밭에서 썩으니, 언제나 슬픔을 품고 있는데 세월은 덧없이 빠르기만 하오.” 하고는 읊기를,
사나운 왜적과 부딪쳐 성호를 박차니 / 驕鋒一犯蹴城濠
오작교 언저리에 살기가 드높다 / 鳥鵲橋邊殺氣高
서생이 싸움에 나갈 것을 진작 알았더라면 / 早識書生事征戌
말을 달리고 활과 칼을 익혀볼 것을 / 且將馳馬慣弓刀

하였다. 
신할은 임진년에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가토 기요마사의 5만 왜군과 대치함. 자세한 것은 추후에 정리하겠음. 백과 사전에 나오지 않음. 한국의 인문학 수준을 알겠음.
심 감사(심대 沈垈)가 또 나아가, “적의 포위 속에서 어명을 받고, 나라가 절단난 나머지에 임소로 오니, 종묘사직은 폐허가 되어 서울을 바라보며 속을 썩히고, 병력은 모자라 기내에서 군사를 모아들이니, 옷의 띠를 풀 겨를도 없이 오직 나라에 은혜를 갚는데 에만 충실하였소. 삭녕(朔寧)에서 군사를 잃은 것은 그 실패의 원인이 비록 지략이 없는 탓이었다고 하지만 종로 네거리에서의 효수는 다행히 가져갈 아들이 있었으니, 팔자대로 죽었는데 내가 다시 무슨 말을 더하리오.” 하며, 읊기를,
푸른 산 깊은 곳에 관청문은 닫혔는데 / 碧山深處掩官扉
척후마는 밤중에 나가 돌아오지 않네 / 候馬中宵去不歸
넋은 창칼에 흩어지니 아관 진형도 다 흩어지고 / 魂散劍鋒鵝鸛盡
적막한 새벽 하늘에 지는 달빛만 비치도다 / 曉天寥落月斜輝

하였다.
심대 [沈岱, 1546~1592]
본관 청송(靑松). 자 공망(公望). 호 서돈(琁). 시호 충장(忠壯). 1572년(선조 5)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부승지(副承旨)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왕을 호종하였다. 서울 탈환 작전을 계획 ·추진하려다 삭령(朔寧)에서 왜군의 기습으로 전사,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청원군(靑原君)에 봉하여졌으며,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