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3~1792년과 1802~1805년에 각각 유라시아 동해안의 북쪽과 남쪽을 탐험한 다이코쿠야 고다유와 문순득. 유라시아 동해안의 북쪽과 남쪽을 누빈 이들의 행적을 http://mapssite.blogspot.com에서 제공하는 백지도에 표시하였다.(빨간색이 고다유, 파란색이 문순득 경로) |
지난 회에 살펴본 바와 같이 네덜란드 연합동인도회사(VOC)는 동남아시아에서 무력을 행사하여 현지민을 억압했지만, 동중국해를 둘러싼 지역에는 명·청, 조선, 일본과 같이 강력한 군사력과 정치력을 보유한 국가가 존재했기 때문에 동남아시아에서와 달리 현지 권력에 비굴할 정도로 영합하며 철저하게 실리를 추구하는 행태를 보였다. VOC가 동중국해 연안에서 얻고자 한 것은 중국의 비단·도자기·생사(生絲)와 일본의 은(銀)이었으며, 이들은 중국과 일본 간을 오고가는 중개무역에서 막대한 이익을 거두었다. 이에 비해 VOC는 조선왕조가 지배하던 한반도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물산이나 우호적인 정권을 발견하지 못하였기에, 중국과 일본의 근세 역사와 비교하면 한국의 동시기 역사에서는 이들의 흔적이 상대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그 드문 사례가 1627년의 우베르케르크(Ouwerkerck)호, 1653년의 스페르베르(Sperwer)호 표착 사건이다. 1627년의 표착 사건에서는 얀 얀스 벨테브레(Jan janse Weltervree), 즉 박연(朴燕, 朴淵 등)이 조선에 정착하여 군사기술 혁신에 공헌한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1653년에 표착하여 1666년에 일본으로 탈출한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은 한반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담은 ‘하멜보고서’ 또는 ‘하멜표류기’로 저명하다. 조선시대 후기 윤행임(尹行恁)의 문집 ‘석재고(碩齋稿)’ 권9 ‘해동외사(海東外史)’에는 지구 반대편에서 우연히 만난 박연과 하멜이 눈물을 흘리며 모국어로 대화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박연은 아란타(阿蘭陀·네덜란드)인이다. 1628년에 호남에 표류했다. 조정에서는 그를 훈련도감에 예속시키고 항왜(降倭·투항한 일본인) 및 표류 중국인들을 지휘하게 하였다. 박연의 원래 이름은 호탄만(hopman·지도자, 우두머리라는 뜻)인데, 병서에 능통하고 대포를 매우 정교하게 만들었다. 1653년 진도군에 난파한 선박이 한 척 있었는데, 배 안의 36인은 옷과 모자가 괴이하고, 코는 높으며 눈은 깊었다. 언어와 문자가 통하지 않았다. 혹은 그들을 서양인이라고 했고 혹은 남만인이라고 했다. 조정에서는 박연에게 명하여 그들을 심문하도록 했다. 박연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눈물을 흘려 옷깃이 다 젖도록 울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모두 성력(星曆)에 능통하였고 조총과 대포를 잘 만들었다. 그 사람들을 서울 바깥의 영(營)에 나누어 예속시켰다. 그 후 1667년, 호남 좌도 수군절도영에 예속된 8명이 몰래 고깃배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도망쳤다. 왜의 추장은 조정에 편지를 보내 “네덜란드는 일본의 속군(屬郡)입니다. 귀국에 체류하던 8인이 도망쳐 지금 네덜란드에 이르렀습니다”라고 전했다. 이에 조정은 박연 또한 네덜란드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박연과 하멜 두 사람이 눈물로 해후한 지 150여년 뒤인 1809년경, 제주도에서는 또 한 차례 눈물의 해후가 있었다. 필리핀 루손에서 표류한 사람들이 말이 통하지 않아서 귀국하지 못하다가, 루손의 언어를 말할 줄 아는 조선 사람을 만나 비로소 귀국할 길이 열린 것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필리핀에 끌려간 사람들을 제외하면,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필리핀 지역의 언어를 익힌 사람일 터인 그의 이름은 문순득이었다. 1801년에 제주에 표착한 이들은 조선 사람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막가외(莫可外), 막가외”라고만 외쳤다. 그리고 9년 만에 자신들과 말이 통하는 문순득을 만났으니, “미친 듯이 바보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서 울기도 하고 외치기도 하여 그 모습이 매우 딱하고 측은하였다”고 ‘순조실록’ 1809년 6월 26일자 기사는 전한다. 이들이 말하던 ‘막가외’는 유라시아 동해안 굴지의 국제 무역항 ‘마카오’였다. 조선 조정은 주변 여러 나라와 교섭하여 이들 루손 사람을 귀국시키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던 터였다. 그러던 차에 우이도 출신 홍어장수 문순득이라는 사람이 류큐·루손·마카오를 거쳐 귀국한 것이다. 문순득의 표류를 전하는 가장 유명한 기록은, 가톨릭 교도였던 정약전(丁若銓)이 박해를 받아 우이도에 유배되어 있던 시기에 집필한 ‘표해시말(漂海始末)’이다. 이 기록은 정약전의 동생으로 강진에 유배되었던 정약용(丁若鏞)의 제자 이강회(李綱會)가 남긴 ‘유암총서(柳菴叢書)’에 포함되어 전한다. 그런 의미에서 ‘표해시말’은 문순득·정약전·이강회의 공동 작업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때는 이 ‘표해시말’이 문순득의 표류 사실을 전하는 유일한 문헌으로 생각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조선에서는 물론 그가 표류했던 류큐, 마카오, 청나라 등에서도 문순득에 관한 기록이 확인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목포대학교 최성환 교수의 ‘문순득 표류 연구-조선 후기 문순득의 표류와 세계 인식’(민속원, 2012)이라는 상세한 연구서가 있어서 크게 참고가 된다. 오늘날 신안군에 속한 우이도에 살던 문순득은 전라도 특산인 홍어를 거래하기 위해 태사도에 들러 일을 마치고 귀향하던 1802년 1월 18일에 표류, 1월 29일에 류큐에 표착하였다. 중세 이래 중개무역으로 번성한 류큐(琉球) 왕국은,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사천 등지에서 활동한 일본 사쓰마번(薩摩藩)의 시마즈(島津) 가문에 의해 1609년에 정복된 상태였다. 그러나 류큐 왕국이 중국 명·청조와의 조공무역을 통해 얻는 이익이 않았기 때문에, 사쓰마번 측에서는 형식적으로나마 류큐의 독립을 유지시키고 있었다. 류큐 측에서는 문순득 일행을 잘 대우하다가 청나라 일행에 이들을 따라 보내 조선으로 귀국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1802년 10월에 류큐를 떠났으나 또다시 표류하여 이번에는 오늘날의 필리핀 루손에 표착하였다. 1802년 11월부터 1803년 8월까지 루손에 머물던 문순득 일행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이 지역의 전통적이고 유럽적인 문물을 섬세히 관찰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포로들 가운데 일부가 가톨릭 교도 추방령으로 루손에 온 적은 있으나, 당연히도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에 반해 문순득은 무사히 조선으로 귀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을 조선의 민관(民官)에 전할 수 있었다. 따라서 문순득의 루손 표착은 사실상 한반도 주민의 첫 필리핀 방문으로서 중대한 의의를 지닌다.
▲ ‘표해시말’ 앞표지 photo 국립해양문화연구소
그는 루손에서 중국인 가톨릭교도의 도움을 받아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한편으로, 담뱃값과 술값을 벌기 위해 끈을 꼬아 팔았다. 여러 나라 사람이 섞여 살면서 외국인들도 자유롭게 상거래를 할 수 있는 루손의 경제적 풍토는, 상업이 천시받고 외국인과의 교류가 거의 없던 조선에서 온 문순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훗날 베이징에서 문순득 일행을 데리고 귀국한 사람이 지은 ‘표류주자가(漂流舟子歌)’라는 한시에 보이는 “흑산도 민속은 매우 어리석어 바다에서 이익을 좇느라니 대부분 곤궁하구려 (중략) 원하노니 네 고향엘 가거들랑 농사에 안식해서 농사나 힘쓰게나”(최성환 226쪽)라는 구절은, 바다를 통해 여러 나라가 함께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19세기 초기 유라시아 동해안의 상황과는 정반대되는 조선 지배계급의 세계인식을 보여준다. 문순득은 ‘표해시말’에서 “다른 나라는 우리나라와 달라 중국·안남(베트남)·여송(루손)의 사람들이 서로 같이 살며, 짝을 지어 장사를 하는 것이 한 나라(同國)나 다름이 없다. 하물며 안남과 오문(마카오)은 서로 그리 멀지 않고, 함께 배를 타고 함께 장사를 하니 이상한 일이 아니다”(최성환 292쪽)라며 조선의 현실을 한탄한다. 1803년 8월에 배를 타고 9월에 광둥 마카오에 도착한 문순득은 당시의 국제적인 표류민 귀환 시스템에 따라 12월에 마카오를 떠나 1804년 5월에 베이징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9월에 연행사로 온 조선 관리들을 따라 11월에 베이징을 떠나 1805년 1월에 우이도에 귀향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도 제주에 표류한 루손 사람들이 여전히 귀국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문순득은 “내가 나그네로 떠돌기 삼년, 여러 나라의 은혜를 입어 고국으로 살아 돌아왔는데 이 사람은 아직도 제주에 있으니 안남(베트남)·여송(루손)인이 우리나라를 어떻게 말하겠는가. 정말 부끄러워서 땀이 솟는다”(최성환 292쪽)라며 당혹스러워한다. 문순득은 ‘표해시말’에 기록된 내용보다 훨씬 더 견문한 것이 많고, 남기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던 것 같다고 최성환 교수는 추측한다. 정약용이나 그의 제자 이강회의 글에서는 ‘표해시말’에 담겨 있지 않은 문순득의 경험담에 기반한 주장이 전개되고 있다. 특히 이강회는 유라시아 동해안을 누비는 대형 선박들에 대한 문순득의 체험을 듣기 위해 우이도에 들어와 그의 집에 머물렀다고 한다.(최성환 255쪽) 당시의 일반적인 조선 사람들에게는 땅끝의 유배지로 느껴졌을 터인 우이도가, 정약용으로 대표되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창문으로 기능한 것이다. 한편 문순득의 표류를 전하는 가장 유명한 문헌이라 할 수 있는 ‘표해시말’에는 조선어-류큐어-루손어를 대조한 표가 붙어 있다. 일본을 중심으로 하여 유라시아 동해안 각지의 현황을 상세히 정리한 신숙주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 이래, 조선에서는 외국에 대한 책을 지을 때 조선어와 해당 지역 언어를 대조한 표를 작성해왔다. 물론 이러한 관례는 중국과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루어졌다. 일본의 경우, 1644년에 만주에 표착하여 조선을 거쳐 일본으로 귀국한 사람들의 경험을 정리한 ‘조선 이야기(朝鮮物語)’ ‘달단 표류기(韃靼漂流記)’ 등의 문헌군에는 일본어와 조선어, 또는 만주어, 중국어 등을 대응시킨 표가 보인다. 표류기는 단순히 모험의 기록일 뿐 아니라, 흔히 가볼 수 없는 바깥세상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소스북(sourcebook)으로서 기능했다. 문순득이 표류하던 18~19세기의 전환기에는 특히 러시아령 시베리아로 표류한 일본인들이 많았는데, 러시아 측은 이들 표류민의 송환을 일본과의 통상무역을 시작하는 계기로 삼고자 하였다. 다이코쿠야 고다유(大黑屋光太夫)라는 선장이 이끄는 배가 서기 1783년에 중부 일본의 이세(伊勢) 지역에서 출항하였다가 알래스카의 알류샨열도(Aleutian Islands)에 표착, 당시 북아메리카에서 상업 활동을 펼치고 있던 러시아인들에게 구조되어 캄차카반도, 바이칼호 부근의 이르쿠츠크,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거쳐 1792년에 귀국한 사건은, 특히 러시아와 일본이 이들 표류민의 송환을 둘러싸고 우호적으로 협조한 사례로서 유명하다. 이들의 귀국에는 시베리아에서 활동하던 박물학자 키릴 구스타보비치 락스만의 능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들의 귀국으로부터 20여년 뒤에는 독일의 박물학자 필립 프란츠 폰 시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가 네덜란드 연합동인도회사(VOC)의 일원으로 일본 나가사키에서 활동했으니, 일본열도가 북쪽과 남쪽에서 유럽의 탐구대상이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키릴 락스만의 일족인 아담 키릴로비치 락스만이 다이코쿠야 고다유를 평화적으로 귀국시킨 몇 년 뒤인 1806~1807년에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레자노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이 사할린·쿠릴열도에 주둔하던 일본 병사들을 습격하는 사건이 있었다. 사실 락스만과 레자노프는 러시아와 일본의 무역 개시라는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움직였으나, 전자는 평화적으로 후자는 군사적으로 일본에 접근했다는 차이가 있어서 일본인들은 이 두 사람에 대해 상반되는 감정을 가져왔다.
17세기 말부터 시베리아에 표착한 일본의 표류민들은 적지 않았으나, 러시아에 정착하지 않고 일본으로 귀국한 것은 고다유 일행이 처음이었다.(기사키 료헤이 ‘고다유와 락스만’ 刀水書房, 27~30쪽) 고다유 일행이 귀국한 뒤에 네덜란드학(난학) 연구자 가쓰라가와 호슈(桂川甫周)가 편찬한 ‘북사문략(北槎聞略)’ 말미에는 일본어와 러시아어의 대조표가 실려 있다. 한반도~류큐~필리핀~마카오~청으로 이어지는 유라시아 동해안의 남쪽 지역을 표류한 문순득과, 알래스카~캄차카~시베리아~이르쿠츠크~오호츠크로 이어지는 유라시아 동해안의 북쪽 지역을 표류한 고다유. 문순득의 모험을 기록하고 후세에 전한 것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 정약전과, 그의 동생 정약용의 제자 이강회였다. 고다유의 모험을 기록한 것은 일본 열도의 근대를 예비한 네덜란드학 연구자 가쓰라가와 호슈였다. 문순득의 경험은 몇 년째 조선에 머물던 루손 사람을 귀향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고다유의 경험은 도쿠가와 막부가 러시아의 위협에 대비하는 정책을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문순득과 다이코쿠야 고다유라는 표류민은 그들이 살던 당대에 바깥 세계의 정보를 제공해주는 정보원으로서 중대한 의미를 지녔다. 동시에 이들은 일본 열도와 한반도가 바깥 세계에 대해 문호를 연 근대와 현대에도 일종의 롤모델로서 기능하였고 또 기능하고 있다. 1868년에 메이지유신을 일으키면서 근대 국가로의 전환을 이룬 일본은 전근대 일본의 쇄국성을 비판하기 위해 다이코쿠야 고다유와 같은 표류민을 이용하였다. 즉 “락스만이 온 것은 미국의 페리 제독이 개국을 요구하기 이전 도쿠가와 막부의 ‘완고한 쇄국체제’에 대한 외국의 첫 도전이었으며, 막부는 이들을 반년 이상이나 네무로 지역에 머물게 하고는 임시방편의 외교 전략을 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다유와 같은 “표류민도 오랜 고생 끝에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이 획득한 귀중한 해외지식은 활용되지 않았으며, 그들은 일반 사회에서 격리되어” “비정하고 냉혹한 막부의 쇄국정책”에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1945년의 패전으로 인해 근대 일본이 걸어온 길을 반성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공존하는 길을 찾고 있는 현대 일본에서는 이들 표류민에 대한 근대 일본의 인식을 재검토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역사관을 열어가”(기사키 료헤이 서문)려는 움직임이 확인된다. 근대 일본의 재야 문화사가(文化史家)인 이시이 겐도(石井硏堂)는 전근대 일본의 표류기를 수집하여 ‘표류기담전집(漂流奇談全集·1908), ‘이국표류기담집(異國漂流奇譚集·1927)’ 등을 출판하였다. 소년을 위한 모험담 집필을 특기로 하였던 이시이 겐도는, 다이코쿠야 고다유 등의 표류민이 후발 제국주의 국가 일본을 이끌어야 할 ‘사명’을 띤 소년들의 롤모델이라고 생각했을 터이다. 표류민들을 통해 전근대를 비판하고 이들 표류민을 근대 국민의 롤모델로 기능케 하려 한 근대 일본 일각의 움직임과 상통하는 움직임이, 문순득의 표류를 둘러싸고 현대 한국에서도 확인된다. 1979년에 문순득의 후손인 문채옥씨가 소장한 이강회의 문집 ‘유암총서’에 문순득의 표류 내용을 정약전이 정리한 ‘표해시말’이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후, ‘표해시말’은 문순득의 표류를 전하는 유일한 문헌이자 한국 문화에서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약한 ‘해양문학’의 귀중한 사례라는 정도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다가 21세기 들어 문순득의 모험이 공중파의 다큐멘터리에서 다루어지고,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서적도 출판되었으며, 2012년에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홍어장수 문순득 아시아를 눈에 담다’라는 대규모 전시를 개최했다. 문순득은 전근대 한반도의 쇄국 체제를 빠져나가 세계를 보고 온 사람으로 일약 주목받게 된 것이다. 바야흐로 현대 한국은 문순득을 발견하고 있는 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세기 현대 한국의 역사 교육은 ‘찬란한 역사’를 이념으로 내걸면서도, 외국으로부터 침략받은 고난과 그에 대한 극복의 사실을 가르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 한반도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의 이민이 해외로 나가는 한편으로 한국에 매력을 느끼는 외국인이 세계 각지에서 이민 오는 21세기의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생각의 틀을 현대 한국 사회는 아직 갖고 있지 못하다. 한반도 역사상 유례없는 정치·경제·군사적 성장을 이룬 한국의 시민들은 자신 한 사람 한 사람이 한반도 역사의 선구자라는 사실을 기뻐하면서도, 한반도의 역사상 누군가가 오늘날 자신이 걸었던 길을 앞서 걸은 바 있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고독감을 덜고 싶어한다. 메이지유신 이후의 근대 일본이 그러했듯이, 현대 한국 역시 롤모델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적절한 롤모델이 제시되지 못한 결과 ‘위대한 한국사’를 주장하는 허구적 민족주의가 시장에서 힘을 얻기도 하지만, 많은 시민은 문순득과 같은 역사상의 실존 인물을 호출해내고 있다. 그리고 2014년 현재, 문순득에 대한 현대 한국의 이야기는 단순한 영웅담으로부터 또 한 차례의 변화를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표해시말’이 문순득의 표류 사실을 전하는 유일한 기록이 아니라 문순득 일행이 방문한 류큐·마카오 등지에서도 관련 기록이 발견되고 있으며, 조선을 포함한 유라시아 동해안 전체가 상호 호의에 입각한 표류민 송환 체제를 국제적으로 유지했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 연재의 첫머리에서 주장했듯이 한반도는 역사상 언제나 지정학적 요충지로서 기능한 것이 아니다. 하멜이나 1801년의 필리핀 표류민은, 한반도가 유라시아 동해안의 국제적 네트워크에서 외곽에 위치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러나 전근대 일본과 마찬가지로 조선 역시 결코 완고하게 쇄국체제를 유지한 것이 아니며, 지정학적으로 변두리에 위치했기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속도와 효율성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한반도 역시 국제 체제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문순득을 둘러싼 최근 한국 사회의 동향은, 21세기 지구에서 자신의 덩치에 맞는 역할을 수행할 것을 요구받는 현대 한국의 시민들이 한반도와 유라시아 동해안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틀을 요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이번 글을 쓰기 위한 자료를 제공해주신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이철한 선생님, 신안군청 문화관광과 이재근 선생님, 문화재청의 임경희 선생님, Russia포커스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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