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임진왜란과 기근

백삼/이한백 2014. 6. 19. 10:34

1593년 10월, 임진왜란이 나자 도망치다시피 의주로 몽진했던 선조가 서울로 되돌아왔다. 거의 1년 반 만의 환도였지만 왜군에 대한 방어보다 시급한 문제가 있었다. 기근이었다. 왜란이 발생한 다음해와 그 다음해인 1593~1594년, 두 해에 걸쳐 극심한 기근이 있었다. 왜군의 약탈과 살육으로 농민들이 도망하여 경작을 포기한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지만, 당시 기후조건도 한 몫을 했다. 왜란이 있었던 1590년대는 세계적으로 한랭했던 시기였다. 프랑스의 포도 수확은 늦어졌으며, 영국의 밀 생산도 좋지 않았다. 중국은 1593년 한여름에 추위로 동사하는 사람이 발생하고, 1595년에는 절강성에 두 달 동안 폭설이 내려 많은 사람이 얼어 죽었다. 조선도 10년 중 한여름에 눈과 서리가 내리는 이상저온 현상이 5년이나 있었다.

선조는 서울에 돌아오면서 도성 안팎의 굶어죽은 시체를 매장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렇지만 겨울 한파가 닥치자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망자는 더 늘어났다. 시냇가나 공터에 시신들이 쌓여 곳곳에서 언덕을 이루었다. 시신을 내어놓으면 굶주린 사람들이 그 살점을 베어내어 백골만 남았다.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특히 심했는데 비변사는 구제할 방법이 없다고 실토하면서, 백성이 다 사라지면 무엇으로 나라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반문했다. 

1594년 3월 사헌부의 보고는 보다 선명하다. "기근이 극에 달하여 심지어 사람의 고기를 먹기에 이르렀지만 전혀 괴이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길가의 굶어죽은 시신을 잘라내어 온전히 붙어 있는 살점이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이는 살아있는 사람을 도살하여 내장과 골수까지 먹고 있습니다." 사헌부는 인육을 먹는 일이 만연하자 이를 엄금할 것을 청했다. 식인행위를 금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충격적이다.

조정에서는 절대적인 양식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명나라에 손을 벌렸다. 명나라도 자국의 기근과 변란으로 원조가 원활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어 절멸된 상태"에 이른 조선에 식량을 원조했다. 압록강 하구에 국제무역시장인 중강개시가 처음으로 열린 것이 이때였다.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은 생존을 위해 도적이 되기도 하고 반란을 꾀하기도 했다. 당시의 기근은 국가의 존폐를 결정할 정도의 중대한 문제였다

1593~1594년의 기근은 왜군에도 직접적인 타격을 주었다. 제해권을 상실한 상태에서 군량의 운송은 한계가 있었다. 극심한 기근 상황에서 왜군의 식량사정은 조·명연합군보다 좋을 수 없었다. 투항왜적 곧 항왜(降倭)가 대량으로 넘어오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또 하나 왜군을 괴롭힌 것이 있었다. 추위였다. 왜군은 대부분 일본 남부지역 출신으로 한반도처럼 혹독한 겨울 날씨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한겨울에 치러진 평양성 전투는 그들에게 큰 교훈을 주었다. 추위에 익숙하지 못한 그들은 결국 남쪽으로 패퇴하여 남해안지역에 성채를 쌓아 월동을 대비했다. 당시 일본에 머물던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조선으로 건너온 15만 명 중에 삼분의 일인 5만 명이 사망했는데, 그들 대부분을 죽음으로 이끈 것은 전쟁이 아니라 굶주림과 추위, 질병이었다고 했다.

임진왜란은 이른바 '17세기 소빙기'가 시작되던 시점에 발생했다. 비변사는 1593~1594년 사이에 인육을 먹고 죽은 백성이 절반이라고 했다. 사관은 조정의 무기력한 대응에 대해 "주상의 애달파하는 하교가 참으로 굶어죽은 백골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고 비판했다. 그도 분노한 것이다. 슬프게도 다음 세기에는 더욱 많이 보게 될 장면들이다. 

부경대 인문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