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근세 이성계와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역사가 현대사에 주는 함의

백삼/이한백 2014. 5. 23. 18:01

근세 이성계와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역사가 현대사에 주는 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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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supportEmptyParas]-->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가문과 이씨조선의 이성계 가문 속에서 마키아벨리와 정도전에 의해서 형성된 군주론의 참된 의미는 사회공동체를 형성하는 민중이 곧, 군주론의 주체임을 바로 깨달아, 이를 반드시 현대사의 민주주의의 꽃으로 승화시켜야 할 것 <!--[end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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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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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따라 무난히도 아침햇살이 따사롭다. 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에서 아침을 맞는다. 정말로 호텔 객실로 비쳐드는 아름다운 아침햇살에 의해 상쾌한 기분마저 든다. 나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이 햇빛 속에 나의 몸을 그대로 내밀어본다. 그리고 밖을 내려다본다. 호텔 건너편으로 보이는 피렌체의 아름다운 언덕과 나무와 대리석교회들, 또 저만치 앞 쪽에서 아르노강의 강물이 강독에 부딪치며 조용히 흘러가는 모습이 그저 아름답게만 보인다. 피렌체! 꽃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담긴 도시!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주도 피렌체는 사계절의 모습이 이처럼 늘 화사하다. 뿐만 아니라 이 이탈리아 예술의 수도 피렌체는 르네상스문화부흥운동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르네상스 문화부흥운동을 주도한 것은 바로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Medici family)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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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메디치 가문은 14~16세기 피렌체공화국에서 가장 유력하고 영향력이 높았던 시민가문으로 피렌체공화국의 실제적인 통치가문이었다. 그리고 이 메디치 가문은 당시에 학문과 예술을 후원하여 르네상스시대가 피렌체에서 열리는데 가장 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가문이다. 그리스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신()이 아닌 인간(人間)’ 중심의 문화를 부르짖은 르네상스의 불길은, 이처럼 피렌체의 메디치(Medici family)가문에 의해서 유럽사회에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의해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한 후 도래된 중세암흑시대에 있어서 유럽사회의 신본주의 문명을 인간중심의 인문주의문명으로 바꾼 피렌체의 메디치(Medici family)가문을 생각하며, 또 다시 우리의 한 많은 한민족사를 사려깊이 생각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Medici family)가문과 서로 비교하여 이씨조선을 탄생시킨 이성계의 가문을 마음속으로 그려본다. 과연 피렌체의 메디치가문과 이성계의 가문은 역사적으로 어떤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일까? 우리들은 이 두 가문을 동서양의 문명사를 이해하는 관점에서 반드시 서로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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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가문은 14~16세기 걸쳐 350년 동안 서구 유럽사회의 르네상스시대를 연 가문이며, 이성계가문은 14~20세기 초반까지 519년 동안 총 27대의 왕들을 배출하며 조선의 한반도를 지배한 가문이다. 그리고 이 두 가문에는 니콜로 마키아벨리(Machiavelli, Niccolo, 1469 ~ 1527)와 삼봉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라는 걸출한 역사적인 인물이 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메디치(Medici family)가문에 대한 군주론(君主論)을 주창했으며, 삼봉 정도전은 이성계 가문에 대한 주군론(主君論)을 서약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가 메디치(Medici family)가문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그의 인생을 마무리한 것처럼, 삼봉 정도전 역시 그 자신이 그토록 꿈꾸어왔던 성리학적 이상세계의 실현을 끝내는 보지 못하고, 바로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의 칼에 의해서 단죄되고 마는 극단적인 삶을 살고 만다. 과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君主論)과 삼봉 정도전의 주군론(主君論)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메디치가문과 마키아벨리의 관계와 이성계 가문과 삼봉 정도전과의 관계는 서로 어떻게 역사적으로 규명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들은 이제 이들이 살다간 그 과거의 시대상에 맞추어, 우리시대의 새로운 국가관과 사회관을 다시 재정립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럼 먼저 이성계가문의 전체적인 성격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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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문의 역사적인 등장배경과 그리고 이성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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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유럽사회에서 르네상스시대가 일어나고 한반도의 조선에서 이씨조선이 일어나기 전, 13세기 전후는 그야말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본주의의 암흑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서구 유럽사회에서는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전후 8회에 걸쳐 감행한 십자군(crusades, 十字軍, 1096~1272) 대원정의 전쟁말기에 처해져 있었으며, 조선의 한반도에서는 몽골 제국의 제1대 왕 칭기즈칸(Chinggis Khan,1155 추정~1227)테무친에 의해서 세워진 원나라의 쇠망기에 맞추어, 역시 중국의 명나라가 새롭게 등장하는 매우 혼돈스러운 세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조선 반도 역시, 고려 말에 새로운 이씨조선이 잉태하는 혼란스러운 시대가 만들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혼란스러운 시대에서는 인간의 나약한 마음을 파고드는 극단적인 신본주의가 극성을 부리기 마련이다.

 

십자군(crusades, 十字軍, 1096~1272)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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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키스칸과 몽골제국의 영토

 

 

서구 유럽사회에서는 로마 황제와 교황의 정치적인 권력욕으로 인하여 전 유럽사회가 신본주의의 부패사회로 치닫고 있었으며, 같은 시기 한반도의 고려역시 불교의 신본주의를 추구하고자 하는 정치세력들이 고려사회 전체를 부패사회로 전락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러한 신본주의를 타파하고, 진정한 인간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난다. 바로 서구 유럽사회의 르네상스부흥운동은 메디치(Medici family)가문에 의해서, 그리고 한반도의 인본주의 부흥 운동은 이성계가문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다. 이제 우리들은 이러한 세계사의 흐름에 견주어 이성계가문의 등장과 관련한 역사적인 전 배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이성계 가문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던 시기 고려 말의 정국은 그야말로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국면을 벗어나고, 새로운 변화를 간절히 갈망하던 그런 시대였다. 이제 이성계 가문의 역사적인 등장배경을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여 선대가문으로부터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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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 이성계 당시의 한반도

 

 

이성계(李成桂)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이다. 이성계의 가문은 고려 공민왕 시기부터 급부상한 신흥 무장 세력이었다. 하지만 이성계의 가문은 고려의 중앙 귀족가문출신이 아니라,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쌍성총관부지역에서 힘을 키워가던 변방세력에 불과했다. 이 쌍성총관부는 원나라가 1258(고려 고종 45) 고려에 침입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한 후 설치한 조선의 강제적인 통치 기구이다. 이 철령 이북의 땅은 공민왕이 이 지역을 수복하기 전까지 근 100여 년간을 원나라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이었다.

 

▲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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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는 원래 전주지역의 향리였는데, 가솔들을 이끌고 바로 이곳 철령 이죽의 쌍성총관부 지역으로 이주한다. 그리고 그 이후 이성계의 가문은 고조부 이안사로부터 아버지 이자춘 때에 이르기까지 원나라에서 천호(千戶)라는 지방관의 자리를 얻어, 대대로 이 지역에서 고려인과 여진족들 위에 군림하는 변방세력가로 성장하게 된다. 이렇듯 고려의 중앙과는 거리가 먼 변경지역의 세력, 심지어 고려의 관리도 아니었던 이성계가문의 이성계가 고려의 중앙 조정에 데뷔하게 된 것은, 바로 공민왕의 반원 정책 덕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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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은 중국의 원·명 교체기의 혼란한 국제정세를 틈타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고자 1356년 원의 간섭기에 잃어버렸던 땅, 바로 그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려 한다. 이때 공민왕이 보낸 동북면병마사 유인우에게 협력하여 쌍성총관부 지역을 고려가 탈환할 수 있도록 도운 사람이, 바로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었다. 그때 당시 20대였던 이성계도 아버지와 함께 원나라의 세력을 몰아내는데 일조한다. 공민왕은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이 지역에 화주목을 설치한 후 이자춘의 공을 높이 사 그에게 고려의 벼슬을 내린다. 그리고 1361년 이자춘은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로 임명되어 동북면지방의 실력자로 급부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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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침에 시달리고 내적으로는 권문세족의 득세로 왕권이 약화되어 군사조직은 붕괴하고 국가 재정은 말이 아니었던 고려 말, 비록 변방의 세력이지만 착실히 군사력을 키운 이성계 가문의 힘은 만만히 평가될 것은 아니었다. 이성계는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는 탄탄한 사병조직을 가지고 있었고, 지역에 뿌리박고 살면서 키운 인맥과 경제력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이성계는 급부상한 집안의 배경과 함께 뛰어난 무예를 겸비하고 있었다. 그는 활을 매우 잘 쏘았으며 동북면의 여진족과 고려인들을 수하로 부리면서 장수로서의 자질을 키워나갔다. 아버지 이자춘의 노력으로 고려의 중앙 무대에 명함을 내민 이성계는 자신의 능력에 힘입어 곧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게다가 당시 잇따른 외적의 침입은 약화된 고려 조정으로서는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었지만, 청년 이성계에게는 무장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하늘이 준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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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외적을 물리치며 큰 공을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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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정에 내알 한 뒤, 이성계의 본격적인 활동은 1361년 독로강(현재 강계지역) 만호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면서부터 시작되어, 승승장구를 계속하였다. 같은 해 겨울, 압록강이 얼어붙자 중국에서부터 쏟아지듯 침입해온 10만 명의 홍건적들이 수도 개경을 함락시킨다. 이때 이성계는 고려인과 여진족 2,000명으로 구성된 자신의 사병조직을 이끌고 수도 탈환에 참가한다. 그리고 그는 홍건적의 두목을 모두 활로 쏘아 죽이고 수도 개경에 맨 처음 입성하는 큰 공을 세운다. 이듬해에는 원나라 장수 나하추의 침입을 물리쳤으며, 1364년에는 공민왕을 폐하려는 원나라 황제의 명령으로 침입한 덕흥군과 최유의 1만 명 군대를 최영과 함께 무찔러 고려왕실의 안정을 도모한다. 또한 자신의 이종 사촌이 되는 여진족 삼선·삼개의 난을 평정하여 동북면의 안정도 되찾는다. 이로써 이성계는 고려 중앙 조정에서 탄탄한 입지를 확보하고 중요 벼슬을 얻게 된다.

 

▲ 이성계의 여진족 토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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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이성계의 활동은 동북쪽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극심해진 삼남 지역의 일본왜구의 침입을 막아낸다. 특히나 해안뿐만 아니라 내륙에까지 깊이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던 극악한 왜구들을 황산에서 모두 섬멸함으로써 그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게 된다. 우리는 이 전투를 황산 대첩이라고 한다. 이후 이성계는 북쪽과 남쪽을 오르내리며 근 20여 년간을 고려 조정을 위해 일한다. 그리고 그가 치르는 전투는 모두 승리하였으므로 그는 바로 불패의 사나이, 난세를 구원할 영웅으로 명성을 쌓아간다. 그의 거듭되는 승전은 그를 고려조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로 만들었고 벼슬길은 승승장구한다. 또한 그의 인기와 명성을 좇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들게 된다. 그 속에는 이미 그 운이 다한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생각을 품은 신진사대부들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 위화도 회군 개경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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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 회군, 쿠데타 드디어 권력의 정점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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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신의 능력으로 승승장구하며, 아무리 그 입지를 확고히 한다 하여도 이성계에게는 변방지역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항상 붙어 있었기에, 누대에 걸쳐 뿌리내린 막강한 권문세족들이 버티는 고려 중앙 정치무대에서 그의 성장은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특히 같은 시기 이성계와 함께 외적을 퇴치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권문세족 출신의 최영장군에게는 이성계로서는 넘어서기 어려운 것이었다. 공민왕 사후 한때 중앙 정계를 주름잡던 이인임 세력을 최영과 함께 물리친 이성계는 수문하시중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언제나 최영의 그 다음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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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장군의 영전

 

이즈음 동북아 국제정세는 원나라가 북쪽 몽골 지역으로 쫓겨 나가고 명나라가 중국의 본토를 차지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이때 중국 본토를 차지한 후, 명나라는 원·명 교체기의 혼란한 상황 동안 돌아보지 못한 이웃 나라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려 한다. 그리고 고려와의 관계에 있어서 명나라는 공민왕이 회복한 철령 이북의 땅을 다시 반납하라는 억지를 부리고 나선다. 명나라는 철령 이북의 땅은 원나라가 고려의 땅을 강제 점거하였던 쌍성총관부 지역으로서, 명나라는 이곳에 철령위를 세우면서 이전에 원나라의 땅이었던 지역은 모두 명나라의 소유라고 주장하는 정치적인 괘변을 들어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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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최영과 그가 보호하고 있던 고려의 우왕은 명나라의 이러한 요구에 반발한다. 그리고 오히려 명나라 국초의 불안한 정국을 틈타 요동까지 정벌하자고 나선다. 그러나 이성계는 최영의 의견에 반대하고 나선다. 이성계는 최영이 울분에 차 전투의 시기와 국제 정세를 잘못 읽고 있다고 판단하고, 명나라 요동정벌이 불가한 4가지 이유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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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바로 여름철 농번기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부적당한 점,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쓰기 힘들다는 점, 요동을 공격하는 사이에 남쪽의 왜구가 침입할 우려가 있다는 점, 그리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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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의견은 군사에 정통한 장수로서 일견 타당한 부분도 있었으나, 그러나 완강한 최영과 우왕에 힘에 의해 무시되고 만다. 결국 이성계는 우왕과 최영의 명을 받아 우군도통사가 되어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요동정벌 길에 오른다. 그러나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가기 전 위화도에 주둔한 이성계는 큰 비를 만나고 더는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이대로 물에 빠져 죽을 것인가, 아니면 군대를 돌릴 것인가의 기로에서 이성계는 조민수를 설득해 회군을 선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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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위화도에서 회군하면서 이성계는 이미 왕명을 거역한 반역자의 신세가 되고 만다. 이로 인해 이러나저러나 운명의 기로에 서 있었던, 그는 요동정벌을 위해 얻은 대군을 개경으로 끌고 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요동 정벌대에 군사 대부분을 내주었던 최영은 적은 숫자로 이성계에게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바로 이성계는 쿠데타에 성공했고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태산과 같은 존재, 최영을 제거한 것이다. 이성계는 우왕을 왕위에서 내쫓고 고려 중앙 정계의 일인자가 된다. 이때 그의 쿠데타에 힘을 실어준 것은 공민왕 시기 중앙 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한 성리학을 신봉하는 신진사대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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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진 사대부는 고려 말의 사회적 모순을 고려왕조를 그대로 유지한 채 그 안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던 온건파와 그리고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급진파로 나뉘어 있었다. 이때 온건파로는 정몽주·이색 등이 있었고, 급진파로는 삼봉 정도전이 대표적이었다. 처음에는 신진 사대부 전체가 이성계와 협력하여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왕위에 앉히는 등 뜻을 같이하였지만, 새로운 왕조를 향한 급진파의 급격한 추진력은 결국 두 세력을 반목하게 하고 만다. 결국 이성계는 급진파의 삼봉 정도전과 결탁하여 역성혁명을 반대하고 고려에 대한 충성을 주장하던 정몽주를 마지막으로 제거함으로써 역성혁명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 이성계는 조준의 건의에 따라 전제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구세력의 경제력을 박탈하고, 신진 사대부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새로운 나라를 향한 지배계층의 입지를 확고히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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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진사대부의 뿌리가 된 유교 성리학의 학당

 

 

신진 사대부의 세력기반으로 새로운 이씨왕조를 연 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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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를 제거한 후 4개월 뒤, 이성계는 삼봉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1392년 마침내 왕위에 오른다. 그는 개경에서 공양왕에게 선위를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라 개국하였고, 이듬해 나라의 이름을 드디어 고려에서조선으로 바꾼다. 이때 이성계가 설립한 조선은 3대 기본 국가정책으로 숭유억불·농본주의·사대주의를 선택하게 된다. 이것은 이성계가 조선을 세울 때 이념적 바탕을 제공한 신진 사대부들의 정체성을 바로 드러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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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을 신봉하고 고려시대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였던 신진 사대부들의 경험론이 반영된 숭유억불(유학을 높이고 불교를 누른다.), 중국 송나라에서부터 시작된 성리학 사상의 주요한 경제적 바탕이 된 농업을 국가의 중심 산업으로 하는 농본주의, 그리고 분수를 알아 큰 나라를 모시고 주변과 교린하는 성리학적 사대주의가 조선을 이루는 중심 사상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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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주의는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 하편에 기록되어있는 '오직 어진 자가 큰 나라로 작은 나라를 섬기고, 오직 지혜로운 자가 능히 작은 나라로 큰 나라 섬긴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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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이치를 즐기는 자요,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이치를 두려워하는 자이니 하늘의 도리를 즐기는 자는 천하를 편안하게 하고 하늘의 도리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릴 것이다.' 라는 글 중 이소사대(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섬긴다 以小事大)’에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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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바로 조선이 유학에서 최고로 치는 어진 자보다는 지혜로운 자라는 두 번째 자리를 택함으로써 중국에 비해 작은 나라인 조선의 안정과 당시 국제 정세 속에서 실리를 추구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이성계가 세운 이 세 가지 건국이념은 이후 조선 500년의 정체성을 이루는 근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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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나라를 세운 뒤 이성계는 1394년 무학도사의 도움을 받아 한양에 도읍을 정하여 궁궐을 짓고 수도를 이전하게 된다. 이것은 고려의 본거지인 개경을 벗어남으로써 고려의 기득권층을 배제하고 새로운 지배계층을 형성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성계는 관제를 개편하여 유학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관제를 마련하고 너무 힘이 드세진 개국공신을 견제하면서 각지의 인재들을 아울러 왕권을 튼튼히 하였다. 또한 이성계는 [경제육전]을 편집하게 하여 법치주의에 입각한 국가체제의 정비를 추구하게 한다. [경제육전]은 성종대 [경국대전]의 완성 이전까지 조선 초기 법전의 초석이 되었으며, 조선 500년간 기본 법전이 된 [경국대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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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란에 휩싸인 태조 이성계의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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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체성의 나라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재위 기간은 1392년부터 1398년까지 불과 6년밖에 되지 않는다. 하늘 아래 가장 높은 자리인 왕위에 스스로 오르는 영웅다운 삶을 살아낸 그였지만, 말년에 자식들이 벌이는 골육상잔의 권력 다툼 앞에서, 그는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고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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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극적인 삶의 시작은 바로 세자 책봉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는 데는 정도전을 대표로 하는 급진적 신진 사대부의 힘도 컸지만, 안으로는 이성계의 집안에서도 새 나라를 개창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두 사람 있었다. 바로 그것은 이성계의 첫 부인 한씨의 소생인 다섯째 아들 이방원(태종)과 그의 두 번째 부인 강씨(신덕왕후)였다. 개국공신에게 논공행상이 있듯이 집안의 큰 조력자들에게도 논공행상이 있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다음 왕위를 예약하는 세자의 자리였다. 당시 아버지를 도와 나라를 세우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방원은 그 세자 자리가 당연히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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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단양 도담삼봉유원지에 2010년 월 세워진 정도전 동상     

 

그러나 이성계의 참모 역할을 했던 정도전과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도록 불철주야 내조한 강씨의 생각은 달랐다. 왕권과 신권의 조화로운 정치를 추구하는 성리학의 골수 깊은 신봉자인 정도전에게 있어서도 너무 강한 성격의 이방원이 다음 왕위를 잇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강씨는 내조의 공을 전실 자식인 이방원이 가져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성계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둔 강씨는 자신의 아들 중 하나가 다음 왕이 되기를 강력히 희망한다. 이미 첫 부인 한씨가 사망한 뒤라 이성계의 곁에서 이방원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그 아무도 없었다. 이방원으로써는 너무나 억울하게 죽 쒀서 개 준 격으로 강씨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이 세자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를 지켜보는 이방원은 나라도 무너뜨린 기세였다. 눈앞에서 왕위가 사라지는 것을 가만 지켜볼 인물이 아니었던 이방원은, 즉시 정도전과 맞서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그리고 자신의 사병을 일으켜 정도전을 급습해 죽이고, 이복동생인 방석과 방번을 모두 살해해 버린다. 이는 아버지 이성계가 번연히 살아 있는 와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성계는 이 변란에서 두 아들과 사위까지 잃었고 권력 앞에 인면수심으로 행동하는 자식들의 다툼에 인생무상을 느끼고 하야를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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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초 왕자의 난으로 이어지는 주역 이방원

 

이성계는 마침내 13989월에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정종의 즉위는 난을 일으킨 후 바로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아버지를 협박해 왕위를 찬탈한 것처럼 보일까 염려한 이방원이 마련한, 왕으로 가기 전 일종의 유예기간인 셈이었다. 이후 2년 뒤 이방원은 2차 왕자의 난을 다시 일으킨 넷째 형 방간마저 물리치고,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아 조선의 3번째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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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를 둘러싼 자식들의 목숨을 건 권력 다툼에 회의를 느낀 이성계는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고향인 함경도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다섯째 아들 이방원을 몹시도 증오하였지만, 이미 이방원에게로 기운 대세는 다시 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이때 이방원은 이성계를 모셔오기 위해 매번 차사를 보냈지만, 이성계는 아들이 보낸 차사마저 모조리 죽여서 돌려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나온 말이 바로 심부름을 간 사람이 소식이 아주 없거나 또는 회답이 좀처럼 오지 않을 때 쓰는 함흥차사란 말이다. 이후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간곡한 설득으로 겨우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 태상왕의 자리에 있게 된다. 이때 한성으로 돌아온 태조는 만년에 불교에 깊이 심취하였는데, 양주 회암사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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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불교에 심취한 것은 왕자의 난 이후 은퇴할 때부터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1398(태조 7) 태조는 도봉산에 있던 옥천암을 지나다가, 이전에 이곳에서 백일기도했던 것을 상기하고는 천축사(天竺寺)라 사액하였다고 한다. 옥천암은 673(문무왕 13) 의상 대사가 의상대에서 수도를 할 때, 제자를 시켜 옥천암을 짓게 한 것으로부터 출발하였으며, 고려 시대에는 부근의 거찰 영국사의 부속 암자였다. 천축사가 본격적으로 중흥하기 시작한 것은 태조의 사액 이후이다. 이성계는 이렇게 말년을 보내다가 1408524일 창덕궁 별전(別殿)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그의 시호는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며, 묘호는 태조이다. 그리고 그의 건원릉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동 동구릉(東九陵)내에 있으며, 태조 이성계의 신위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셔 놓은 종묘에 봉안되어 있다. 종묘에서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 르네상스 문화의 산실 메디치가문의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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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르네상스 문화의 산실 메디치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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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상업도시 피렌체! 인구 30여만 명에 불과한 이 도시만큼 세계적인 예술의 집합소이자 우아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곳도 드물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가 형성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바로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이 메디치(Medici family)가문 때문일 것이다. 출신도 보잘것없는 한 가문이 이탈리아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으로, 더 나아가 세계적인 가문으로 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그 영향력이 상업과 정치라는 현세적인 분야뿐 아니라 종교적인 분야,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안목을 바탕으로 한, 예술가들에 대한 후원을 통해 급기야는 르네상스시대에까지 강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메디치 가문의 존재로 인해 피렌체 또한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었고, 또한 그로 인해 수백 년 후의 오늘날에 살아가는 시민들에게까지 조상들의 후광에 힘입어 세계적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여 경제적인 보상을 얻어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과거의 피렌체, 현재의 피렌체, 특별한 변화가 없는 한 미래의 피렌체에도 예술적 부유함을 안겨 줄 이 가문은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명성을 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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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디치 가문의 주요 인물

 

 

메디치 가문(이탈리아어:Medici)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가문이었다. 메디치 가문은 썩 훌륭한 집안 출신은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그들의 족보에 따르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페르세우스가 조상이라고 하는데, 이를 믿는 사람들은 그들 가문 출신 외에 없다. 토스카나 지방에서 농사를 짓던 선조 몇몇이 아무래도 성공하기 위해서는 농사보다는 그 시대에 막 발전하기 시작한 상업에 종사하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 하에 가까운 상업도시 피렌체로 향한 것이, 이 가문의 성공신화의 출발점이 된다. 이 메디치 가문은 세 명의 교황(레오 10, 클레멘스 7, 레오 11)과 르네상스예술의 후원자로 잘 알려진 피렌체의 통치자 로렌초와 같은 유명한 인물을 배출하였으며, 그리고 나중에는 혼인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왕실의 일원으로까지 이르게 된다. 메디치 가문은 다른 귀족 가문들처럼 그들도 자기네 도시 정부를 피렌체에 건설하여 지배하였으며, 또한 피렌체를 예술과 인문주의가 융성한 환경의 도시로 만들어 나갔다. 그들은 밀라노의 비스콘티와 스포르차, 페라라의 에스테, 만토바의 곤차가 등 다른 위대한 귀족 가문들과 더불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어내는 큰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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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Medici family)가문의 유래와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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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 북쪽의 농업 지방인 무겔로에 왔다고 하며, 처음으로 역사에 기록된 것은 1230년대 문헌에서였다. 비록 메디치(Medici)가 이탈리아어로 의사를 뜻하는 말이지만, 메디치의 정확한 명칭의 유래는 알려지지 않았다. 14세기 초, 메디치가의 일족들은 특히 프랑스와 스페인과 더불어 모직물 교역의 걸출한 집단으로 자라난다. 이탈리아 도시정부 시설에서 일부 메디치 사람들이 참석했음에도, 아직 알비치나 스트로치와 같은 저명한 가문들보다 중요성이 떨어졌다. 살베스트로 데 메디치라는 사람은 치옴피의 난 동안 모직물 제작자 조합의 의장직을 맡았으며, 1396년 안토니오라는 사람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1400년에 메디치 일가는 또 다른 음모와 연루되어 두 명만 제외하고 20년 동안 피렌체의 정치에서 추방되었다. 이 둘 중의 한 사람인 아베라르도(비치) 데 메디치는 나중에 메디치 왕조 시대를 연 장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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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라르도의 아들 조반니 디 비치는 메디치 은행을 설립하여 가문의 재산을 늘렸으며,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비록 얼마간의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었지만, 그는 가문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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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디 비치 이후 메디치가의 계통은 둘로 나뉜다. 조반니 디 비치의 장자 국부 코시모(Cosimo de' Medici 'Pater Patriae') 계통과 조반니 디 비치의 차남인 대 로렌초(Lorenzo di Cosimo de'Medici)의 계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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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4년 조반니 디 비치의 장남인 코시모 데 메디치가 그란 마에스트로의 자리를 인계받았으며, 피렌체 공화국의 비공식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가문의 장자 계통 -(국부 코시모의 계통)- 1537년 피렌체의 초대 공작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의 암살 때까지 군림하였다. 수 세기 동안의 긴 통치는 겨우 민란으로 국외추방을 당한 두 번(1494-1512년 사이, 1527-1530)만 중단되었다. 권력은 차남 계통-(대 로렌초의 계통)- 에게 넘어갔는데, 그의 증손자이며 초대 토스카나 대공인 코시모 1세와 함께 시작되었다. 메디치 가문의 권력 상승은 연대기 베네데토 데이(Benedetto Dei)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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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시모와 그의 아버지는 은행업과 제조업에 기반을 둔 가문의 재산으로 예술과 문화, 교회를 후원하기 시작하면서 세대에 걸친 출세 기반을 확실하게 잡았다. 아무튼, 피렌체 시민들의 절반은 메디치 가문의 경영 지점에 고용되어 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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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의 위대한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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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은행은 유럽을 통틀어서 가장 부유하고 훌륭한 은행이었다. 그 덕분에 한동안 메디치 가문은 유럽에서 가장 유복한 가문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이를 토대로 메디치가는 피렌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하였으며, 나중에는 이탈리아전역과 유럽에까지 확대되었다. 회계전문직에서의 그들은 신용과 차변을 추적하기 위한 복식부기체제의 개선이라는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이 체제는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을 위해 일하는 회계사들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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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치 가문은 르네상스 전성기의 피렌체를 이끈 로렌초 데 메디치를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에게는 도시를 이끌고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죽은 후에 일 마그니피코(위대한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그는 시를 쓰기도 하면서 메디치 가문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가 남긴 시 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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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ever wants to be happy, let him be so:
about tomorrow there’s no knowing.
행복해지고자 하는 자들이여, 행복을 즐겨라
내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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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는 자기 아이들에게 엄청난 사랑과 관심을 쏟아 부었다. 로렌초는 자신의 성공적인 도시경영을 계속 이어가게 하고자 아이들의 능력을 파악하고 그들의 미래와 직업을 설계하였다. 1478년 로렌초의 동생 줄리아노는 부활절에 교회에서 암살당했다. 로렌초는 나중에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되는 줄리아노의 사생아 줄리오 데 메디치(1478-1535)를 자신의 아들로 입적하였다. 로렌초가 죽자 능력 없는 그의 아들 피에로 2세가 피렌체의 통치권을 물려받았는데, 피에로는 1494년에서 1512년동안 메디치가 피렌체에서 추방당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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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에서의 활동과 동방박사의 경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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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은 가톨릭 교회에서도 영향력을 끼쳐 16세기 유명한 두 명의 교황들(레오 10, 클레멘스 7)을 배출하였다. 메디치 가문의 교회에서의 영향력은 로마와 피렌체 두 곳을 손에 넣어 이탈리아의 지배자로 살아남게 하였다. 그들 모두 예술을 후원하였지만, 신학분야에서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사상이 퍼지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또 다른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으로는 알레산드로 오타비아노 데 메디치(레오 11)가 있다. 메디치 가문은 성경에 나오는 동방박사의 경배(Adoration of the Magi)를 그린 그림에서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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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박사의 경배는 동방의 박사들이 아기 예수에게 경배를 들이는 모습 즉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시느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니(마태복음 2:2)’라는 마태복음서의 기록에 등장한다. 이 마태 복음서에 따르면 동방의 점성술사(동방 박사)들이 메시아의 도래를 알리는 별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찾아와 그리스도에게 경배하며 황금, 유황, 몰약을 바쳤다고 합니다. 그럼 화가들이 그린 <동방 박사의 경배 Adoration of the Magi >에는 동방 박사들이 등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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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Adoration of the Magi. 1481-82 )의 동방박사의 경배

 

수 백 년 동안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중요한 축일은 그리스도가 동방 박사들의 경배를 받은 공헌축일(16)이었다. 3세기경까지 동방 박사들은 동방의 왕이었으며, 세 명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9세기 무렵 이들은 아시아인 발타샤르, 유럽인 가스파르, 아프리카인 멜키오르라는 구체적인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각각 다른 인종으로 등장한다. 조토의 작품에서도 동방 박사들은 왕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마침내 이들을 통해 그리스도는 왕 중의 왕이라는 위치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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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토의 동방박사의 경배(GIOTTO di Bondone. No. 18 Scenes from the Life of Christ: 2. Adoration of the Magi. 1304-06)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가 그린 '동방박사의 경배'는 동방의 왕이자 박사였던 세 사람이 별의 인도를 받아 베들레헴으로 찾아가, 새로 나신 아기예수에게 경배를 드리는 모습을 그린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이전의 동방박사의 경배를 그린 다른 그림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그림 속에 그려진 세 명의 동방박사의 얼굴은 실제로는 메디치 가문사람들의 초상화를 나타내고 있다. 아기 예수에게 경배를 드리는 백발의 동방박사는 메디치 가문의 원로인 코시모, 붉은 망토를 걸친 동방박사는 코시모의 첫째 아들인 피에로, 그 옆의 하얀 옷을 입고 있는 동방박사는 코지모의 둘째 아들인 조반니를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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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 BOTTICELLI, Sandro. Adoration of the Magi
c. 1475. Tempera on panel, 111 x 134 cm.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의 동방박사의 경배

 

이외에도 메디치 가문의 주요 인물들의 초상을 찾아볼 수 있는데, 조반니 옆의 검정 옷을 입고 서있는 남자는 조반니의 아들인 줄리아노, 허물어진 담 뒤에 있는 바위를 옥좌 삼아 앉은 성모는 보티첼리의 스승 프라 필리포 리피(Fra Filippo Lippi)의 성모들과 많이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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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들이 모두 15세기 이탈리아인들의 복장을 하고 있어 세속적 분위기가 더 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그림이 특히 유명한 것은 맨 왼쪽에 있는 보티첼리 자신의 초상 때문이다. 델 라마보다도 한결 강렬한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는 이 젊은 화가의 초상은 명성을 얻기 시작한 자신감에 가득 차 있는 듯이 보인다.

 

 

▲ 삼봉 정도전과 마키아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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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 정도전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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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의 14세기를 전후로 한 세계는 그야말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처럼 혼돈의 시대였다. 서구 유럽사회는 로마제국의 약화로 이어지는 신본주의의 십자군전쟁이 전 유럽사회를 부패한 사회로 몰아가고 있었으며, 동양은 칭기즈칸(Chinggis Khan,1155 추정~1227)의 세계화 군사전략으로 역시 혼돈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혼돈의 시기를 더욱더 부채질하는 것은 종교였다. 종교의 근본적인 목적은 사회정화를 통해 밝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서양의 모든 종교는 정치권력과 야합하는 향락에 빠져 온 세상을 더럽히는 그 선봉에 서 있었다. 서구 유럽사회에서는 로마황제와 교황의 신본주의가 순수한 인간의 가치를 무너뜨리고 있었으며, 동양사회와 한반도 역시 불교의 신본주의를 추구하는 정치세력들이 인간의 가치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시기 서구유럽사회와 한반도에 두 가문이 등장한다. 바로 서구 유럽사회에 있어서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가문과 한반도의 이성계 가문의 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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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가문은 14~16세기 걸쳐 350년 동안 서구 유럽사회의 르네상스시대를 연 가문이며, 이성계가문은 14~20세기 초반까지 519년 동안 총 27대의 왕들을 배출하며 조선의 한반도를 지배한 가문이다. 그리고 이 두 가문에는 니콜로 마키아벨리(Machiavelli, Niccolo, 1469 ~ 1527)와 삼봉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라는 걸출한 역사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니콜로 마키아벨리와 삼봉 정도전은 과연 누구인가? 삼봉 정도전은 중국에 있어서 원이 무너지고 새로운 명나라가 세워지는 혼란스러운 국제질서 속에서, 신본주의적인 부패로 찌든 그의 조국 고려를 무너뜨리고, 그리고 여기에 새로운 인본주의적인 신권(臣權)재상 중심정치의 조선을 세우고자 한 원대한 꿈을 가진 정치개혁가였다. 삼봉 정도전의 주요 정치사상은 신본주의로 찌든 불교사상을 타파하고 새로운 인본주의의 유교성리학으로 작금의 병든 고려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그리고 이에 필요한 토지 전제개혁을 통해 농민의 삶을 향상시키는 복지정책이었다. 또한 이에 따르는 동아시아 국제외교관계를 현실적인 사대주의로 추구하자는 것이었다. 즉 숭유억불·사대교린·농민개혁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삼봉 정도전과 너무나도 닮은 정치개혁가가 르네상스시기 메디치가의 피렌체에서 나타난다. 바로 니콜로 마키아벨리(Machiavelli, Niccolo)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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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 정도전과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삶은 너무나도 닮아 있다. 삼봉 정도전이 그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이성계를 주군으로 선택한 것처럼,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신본주의적 부패국가로 전락해가는 이탈리아를 인본주의적인 정치사상으로 통일시키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요구하며, 메디치(Medici family)가문을 주군의 가문으로 선택하려 한다. 그리고 메디치 가문에 그의 저서<군주론>을 받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현실적인 냉엄함을 기술한 책자이다. 그런데 이러한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은 삼봉 정도전의 사상과 그대로 일치한다. 삼봉 정도전 역시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모든 현실적인 냉엄함을 정치이념으로 들어낸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와 삼봉 정도전의 정치적인 목적은 바로 인본주의적인 국민의 삶이었다. 하지만 후세의 학자들은 이를 잘못 이해하여,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한이라는 이미지를 붙여 마키아벨리스트라고 부른다. 이러한 혹평은 살인적인 마키아벨리’(셰익스피어), ‘악의 교사’(리오 스트라우스)라는 저주에서 비롯하여,‘공화주의의 대변자’(스피노자·루소)라는 찬양에 이르기까지, 극단적인 양극단의 평가를 오늘날까지 그대로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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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저술된 주요 개념인 비르투(주체적 의지·)와 포르투나(운명의 힘), 네체시타(불가피성), 그리고 프루덴차(실천적 이성)에 대한 설명이 그렇다. 그리고 이들 개념이 원문에서 출현할 때마다 각각의 개념이 사용된 마키아벨리의 문장들을 여럿 보여주며 개념의 속뜻을 거의 완벽히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 또한 마지막 개념인 프루덴차(실천적 이성)가 등장하는 대목에서 이렇게 정리한다. “제대로 된 신생 군주란, 국가를 장악하고 개혁하며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불가피성(네체시타)이 요구하는 과업을 실천적 이성(프루덴차)을 통해 이해하고, 운명의 힘(포르투나)에 수동적으로 굴복하는 대신 비르투(주체적 의지·)를 가지고 그 과업을 완수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라고 정의한다. 이처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그대로 삼봉 정도전 주군론으로 이어진다. 즉 삼봉 정도전에게 있어서 신생 군주인 이성계는 국권으로 국가를 강력히 장악하고 개혁하며 안전하게 지켜내기 위해, 반드시 실질적인 실천적인 이성을 통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어쩔 수 없는 운명의 힘에 수동적으로 굴복하는 대신, 자신의 주체적인 강한 힘으로 모든 과업을 완수하는 사람이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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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키아벨리의 스트라파도 고문(두팔을 뒤로 묵어 아래로 떨어뜨려 두 팔을 모두 부러뜨리는 고문)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처럼 제후국이 난립하고 제자백가들이 백가쟁명하던 시기였다. 특히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가문을 몰아내고 세운 피렌체 공화국의 고위공직자였다가 메디치 가문의 복귀 뒤 반메디치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스트라파도라는 모진 고문을 받고 나서 농장에 은둔하며 장작을 만들고 새를 잡아 파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군주론을 집필한, 가혹한 운명의 주인공이였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삼봉 정도전이 살았던 고려말엽 역시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전한 백가쟁명의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삼봉 정도전도 이의민에게 쫓기어 유배지에서 그의 사상을 완결한다. 그리고 유배지에서 조선의 정치체제 구상을 밝힌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경제문감(經濟文鑑)' 같은 저술의 정신적인 기초를 닦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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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이제 한국정치를 제대로 정리하여야만 한다. 한국정치는 지금 왜 이처럼 진흙탕과도 같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한국 정치는 부재는 그대로 한국국민들의 정치의식 수준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한국정치를 살펴보면 정치에 대한 한국인들의 이상주의·도덕주의적 접근이 현실을 매우 도외시하는, 정서적인 급진주의와 교조주의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교묘히 이용하는 것이 한국정치세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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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는 인간들 사이의 갈등을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 갈등을 조절하는 현실적인 수단으로 바로 정치를 바라보았다. 이에 반해 이상주의·도덕주의에 침윤된 작금의 한국정치는 모든 존재하는 갈등들을 부인하고, 그리고 존재하지도 않는 사회통합을 강조하면서 결과적으로 갈등 조절에 실패하고, 국민들을 냉소주의나 급진주의로 빠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상주의·도덕주의의 역설인 셈이다. 마키아벨리는 정치가 있어야 할 것의 당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바로 이런 현실주의적 접근이야말로 정서적인 급진주의와 교조주의에 빠진 한국의 민주주의를 바로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키아벨리의 생각은 그대로 삼봉 정도전의 생각과 일치한다. 삼봉 정도전은 유배지 생활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고려 백성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한 것이다. 현실을 외면한 허황된 종교적인 철학으로는 무너져가는 고려를 절대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없다면 그것은 완전히 판을 그대로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완전히 판을 바꾸기 위해서는 정치에 대한 정의를 다시 새롭게 정립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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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통해 정치를 권력 게임이나 자기 이익의 추구로 본 것이 아니라, 시민적 덕을 중심 가치로 삼아 정치공동체를 건설하려 하는 민주주의의 원리로서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마키아벨리는 귀족보다 민중을 매우 중시한 민주주의자였다. 이처럼 삼봉 정도전도 정치의 주체를 귀족보다는 민중을 중심에 놓고 귀족사회의 부패를 바로 척결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 나름대로의 대포를 만들어내어 귀족사회의 걸림돌을 제거해야만 했다. 바로 대포는 낡은 사상과 관습을 부숴버리는 것이다. 과연 그 대포란 무엇인가? 그리고 대포의 힘은 어디에서 나와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들은 이제 이 정의를 내려야만 한다. 마키아벨리와 삼봉 정도전이 주장하는 썩은 정치부패사회를 척결하는 대포는 바로 대자연의 원칙과 신뢰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대자연은 바로 사회공동체이다. 대자연의 사회공동체란 천지인의 서로 힘을 합쳐 움직이는 것처럼, 어떤 특정한 권력층이나 귀족층들이 자신들만의 권력유지를 위해 사용하는 원칙과 신뢰가 아니라, 바로 모든 사회공동체의 원칙과 신뢰를 확립하는 법질서로 세상을 만들어가라는 것이다. 아마도 14세기 자신의 원대한 꿈을 보지 못하고 죽어간 마키아벨리와 삼봉 정도전은 오늘날 이것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 단태와 베아트리체의 사랑이 서린  베키오다리(Ponte Vecch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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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와 메디치(Medici)가문이 주는 우리시대의 개혁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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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꽃의 도시 피렌체,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 나는 호텔 창가에 않아 다시 피렌체의 전경을 내려다본다. 저 멀리 유유히 흐르는 아르노강의 강물위로 베키오다리(Ponte Vecchio)가 보인다. 베키오 다리는 1345년에 건설한 로마시대의 마지막 다리로서,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눈 장소로 알려져 있다. 요즘 우리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물쇠 서약의 효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곳에서, 연인들은 사랑을 맹세하고 자물쇠를 채운 뒤 그 사랑의 열쇠를 강물에 던져 버린다. 또한 아르노강 넘어로 두오모(Duomo) 성당이 보인다. 1292년에 착공하여 1436년 준공되어 140년에 걸쳐 완성했다는 이 성당은 붉은 돔인 쿠폴라464개 계단을 따라 성당 꼭대기로 오르면 피렌체의 모든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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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l Fiore)

 

 

이 두오모 성당의 두오모는 돔형(dome)을 뜻하는 말로, 라틴어 도무스(Domus)에서 유래된 말로 바로 을 뜻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사실 지붕을 가진 대성당이라는 말이다. 이 두오모 성당의 원래 명칭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l Fiore)으로, 꽃의 성모 교회라는 뜻을 나타낸다. 이름처럼 정말 아름답게 나의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두오모 성당 앞에 있는 산 조반니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의 팔각지붕이 어렴풋이 나의 눈에 들어온다. 피렌체의 수호성인들에게 바쳐진 이 건물은 기베르티의 필생의 작품으로, 바로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으로 지칭한 청동문이 만들어져 있다. 나는 물끄러미 아름다운 꽃의 도시 피렌체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아름답고 멎진 도시를 만든 피렌체의 메디치(Medici family) 가문을 생각한다. 하지만 메디치가문은 이처럼 예술의 도시도 만들었지만, 무엇보다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한 인문주의의 르네상스시대를 여렸다는 것이다.

 

산 조반니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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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서구 유럽에서 메디치(Medici family)가문에 의해서 인문주의의 르네상스 시대가 부활한 당시, 한반도에서는 이성계 가문에 의해서 인문주의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 정치·사회적인 분야에서의 인문주의 회복운동은 바로 마키아벨리와 삼봉 정도전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들고 메디치(Medici family)가문을 찾아간 것처럼, 삼봉 정도전은 이성계를 주군으로 섬기기 위해 철령 이북의 동북면으로 이성계를 찾아간다. 그리고 이들은 그들을 시험한다. 14~15세기 전 후로 살다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과 이성계의 가문은 동서양문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endif]--> 산 조반니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의 황금문

 

 

피렌체의 메디치(Medici family)가문에 의해서 형성된 인문주의의 르네상스 운동은 전 세계의 민주주의의 부활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성계 가문의 삼봉 정도전에 의해서 형성된 성리학의 인문주의의 회복운동은 조선의 역사를 개방의 역사로 탈바꿈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 바로 조선조 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이어지는 개방화의 밑바탕에는 삼봉 정도전의 정신이 숨어있다. 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 전쟁이었다. 현 시대의 변화는 바로 메디치가문의 르네상스부흥운동과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강력한 국가권력을 원하는 나폴레옹, 히틀러, 무솔리니 등에 의해 애용되었으며, 삼봉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은 현대 한국사회의 법질서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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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키아벨리가 메디치(Medici family)가문에 인정을 받지 못하고 물러 난 것처럼, 삼봉 정도전 역시 이성계 가문의 태종 이방원에 의해서 사살되고 만다. 그리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18세기 이후에야 진정한 평가를 받는 것처럼, 삼봉 정도전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흥선 대원군에 의해서 그 정치적인 인정을 받는다. 왜 이들은 당대의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일까? 그것은 이들의 정치사상이 너무나 이상적이고 현실적인 냉엄함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와 삼봉 정도전의 이루려는 사회 개혁방안은 주어진 부패라는 현실 앞에서, 이와 처절히 싸워야만 하는 사회개혁방안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과연 인류는 정말 부패라는 탐욕의 권력을 바른 이성으로 단절할 수 없는 것일까? 이는 메디치가문과 이성계 가문 그리고 마키아벨리와 삼봉 정도전이 살다간, 그 시대와 지금의 현 시대가 전혀 다르지 않다는 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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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들은 이들의 역사를 통해 우리시대를 개혁해나가야만 한다. 그 개혁의 첫 걸음은 바로 인문주의의 새로운 부활이며, 그리고 그 부활은 현실에 벗어난 너무 이상적인 냉엄함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 누구도 대자연의 섭리로부터 벗어나 살아갈 수가 없다. 바로 인류가 살아나갈 수 있는 삶의 모든 원칙은 대자연으로부터 얻어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 누구도 가정·사회·국가·지구를 떠나 절대로 살아갈 수가 없는 존재이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아갈 수 없듯이, 인간은 사회공동체를 떠나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정신문화는 바로 대자연의 사회공동체에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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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와 삼봉 정도전은 이 사회공동체라는 인식의 부족으로 군주론과 주군론을 펴며, 한 시대의 사회변화를 개혁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주군인 메디치가문과 삼봉 정도전의 주군인 이성계 가문은 사회공동체라는 인식의 결여 속에, 결국 자신들만의 왕조를 만들어내고 부패함으로서, 그리고 또한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그 부패한 업보를 지고 역사 속에서 쓸쓸히 살아지고 만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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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은 항상 우리들에게 독단을 버리고 다 함께 살아나가는 어울림의 문화를 형성하라고 우리들에게 주문하고 있다. 하늘은 땅을 사랑하고, 땅은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은 하늘을 사랑하듯이, 인류는 모두가 다 서로 사랑하는 사회공동체를 형성하지 않으면 절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바로 우리사회의 모든 개혁의 정신은 탐욕이 아닌, 이 사랑의 정신이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메디치 가문과 이성계 가문을 향한 마키아벨리와 삼봉 정도전의 군주론은 과연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또한 메디치 가문과 이성계 가문은 또한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인가! 군주론의 진정한 군주는 특정 권력자가 아닌 바로 국민과 민중이며, 그리고 모든 인류인 것이다. 우리들은 이제야말로 진정한 사회공동체의 사랑의 정신이 과연 무엇인지를 바로 깨닫고, 그 깨달음을 사회개혁운동으로 전환해야만 할 것이다. 아마도 메디치가문과 이성계 가문, 마키아벨리와 삼봉 정도전은 이것을 현 시대의 우리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주는 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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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supportEmptyParas]-->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가문과 이씨조선의 이성계 가문 속에서 마키아벨리와 정도전에 의해서 형성된 군주론의 참된 의미는 사회공동체를 형성하는 민중이 곧, 군주론의 주체임을 바로 깨달아, 이를 반드시 현대사의 민주주의의 꽃으로 승화시켜야 할 것 <!--[end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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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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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따라 무난히도 아침햇살이 따사롭다. 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에서 아침을 맞는다. 정말로 호텔 객실로 비쳐드는 아름다운 아침햇살에 의해 상쾌한 기분마저 든다. 나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이 햇빛 속에 나의 몸을 그대로 내밀어본다. 그리고 밖을 내려다본다. 호텔 건너편으로 보이는 피렌체의 아름다운 언덕과 나무와 대리석교회들, 또 저만치 앞 쪽에서 아르노강의 강물이 강독에 부딪치며 조용히 흘러가는 모습이 그저 아름답게만 보인다. 피렌체! 꽃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담긴 도시!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주도 피렌체는 사계절의 모습이 이처럼 늘 화사하다. 뿐만 아니라 이 이탈리아 예술의 수도 피렌체는 르네상스문화부흥운동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르네상스 문화부흥운동을 주도한 것은 바로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Medici family)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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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메디치 가문은 14~16세기 피렌체공화국에서 가장 유력하고 영향력이 높았던 시민가문으로 피렌체공화국의 실제적인 통치가문이었다. 그리고 이 메디치 가문은 당시에 학문과 예술을 후원하여 르네상스시대가 피렌체에서 열리는데 가장 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가문이다. 그리스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신()이 아닌 인간(人間)’ 중심의 문화를 부르짖은 르네상스의 불길은, 이처럼 피렌체의 메디치(Medici family)가문에 의해서 유럽사회에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의해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한 후 도래된 중세암흑시대에 있어서 유럽사회의 신본주의 문명을 인간중심의 인문주의문명으로 바꾼 피렌체의 메디치(Medici family)가문을 생각하며, 또 다시 우리의 한 많은 한민족사를 사려깊이 생각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Medici family)가문과 서로 비교하여 이씨조선을 탄생시킨 이성계의 가문을 마음속으로 그려본다. 과연 피렌체의 메디치가문과 이성계의 가문은 역사적으로 어떤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일까? 우리들은 이 두 가문을 동서양의 문명사를 이해하는 관점에서 반드시 서로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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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가문은 14~16세기 걸쳐 350년 동안 서구 유럽사회의 르네상스시대를 연 가문이며, 이성계가문은 14~20세기 초반까지 519년 동안 총 27대의 왕들을 배출하며 조선의 한반도를 지배한 가문이다. 그리고 이 두 가문에는 니콜로 마키아벨리(Machiavelli, Niccolo, 1469 ~ 1527)와 삼봉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라는 걸출한 역사적인 인물이 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메디치(Medici family)가문에 대한 군주론(君主論)을 주창했으며, 삼봉 정도전은 이성계 가문에 대한 주군론(主君論)을 서약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가 메디치(Medici family)가문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그의 인생을 마무리한 것처럼, 삼봉 정도전 역시 그 자신이 그토록 꿈꾸어왔던 성리학적 이상세계의 실현을 끝내는 보지 못하고, 바로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의 칼에 의해서 단죄되고 마는 극단적인 삶을 살고 만다. 과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君主論)과 삼봉 정도전의 주군론(主君論)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메디치가문과 마키아벨리의 관계와 이성계 가문과 삼봉 정도전과의 관계는 서로 어떻게 역사적으로 규명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들은 이제 이들이 살다간 그 과거의 시대상에 맞추어, 우리시대의 새로운 국가관과 사회관을 다시 재정립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럼 먼저 이성계가문의 전체적인 성격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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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문의 역사적인 등장배경과 그리고 이성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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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유럽사회에서 르네상스시대가 일어나고 한반도의 조선에서 이씨조선이 일어나기 전, 13세기 전후는 그야말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본주의의 암흑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서구 유럽사회에서는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전후 8회에 걸쳐 감행한 십자군(crusades, 十字軍, 1096~1272) 대원정의 전쟁말기에 처해져 있었으며, 조선의 한반도에서는 몽골 제국의 제1대 왕 칭기즈칸(Chinggis Khan,1155 추정~1227)테무친에 의해서 세워진 원나라의 쇠망기에 맞추어, 역시 중국의 명나라가 새롭게 등장하는 매우 혼돈스러운 세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조선 반도 역시, 고려 말에 새로운 이씨조선이 잉태하는 혼란스러운 시대가 만들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혼란스러운 시대에서는 인간의 나약한 마음을 파고드는 극단적인 신본주의가 극성을 부리기 마련이다.

 

십자군(crusades, 十字軍, 1096~1272)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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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키스칸과 몽골제국의 영토

 

 

서구 유럽사회에서는 로마 황제와 교황의 정치적인 권력욕으로 인하여 전 유럽사회가 신본주의의 부패사회로 치닫고 있었으며, 같은 시기 한반도의 고려역시 불교의 신본주의를 추구하고자 하는 정치세력들이 고려사회 전체를 부패사회로 전락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러한 신본주의를 타파하고, 진정한 인간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난다. 바로 서구 유럽사회의 르네상스부흥운동은 메디치(Medici family)가문에 의해서, 그리고 한반도의 인본주의 부흥 운동은 이성계가문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다. 이제 우리들은 이러한 세계사의 흐름에 견주어 이성계가문의 등장과 관련한 역사적인 전 배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이성계 가문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던 시기 고려 말의 정국은 그야말로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국면을 벗어나고, 새로운 변화를 간절히 갈망하던 그런 시대였다. 이제 이성계 가문의 역사적인 등장배경을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여 선대가문으로부터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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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 이성계 당시의 한반도

 

 

이성계(李成桂)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이다. 이성계의 가문은 고려 공민왕 시기부터 급부상한 신흥 무장 세력이었다. 하지만 이성계의 가문은 고려의 중앙 귀족가문출신이 아니라,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쌍성총관부지역에서 힘을 키워가던 변방세력에 불과했다. 이 쌍성총관부는 원나라가 1258(고려 고종 45) 고려에 침입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한 후 설치한 조선의 강제적인 통치 기구이다. 이 철령 이북의 땅은 공민왕이 이 지역을 수복하기 전까지 근 100여 년간을 원나라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이었다.

 

▲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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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는 원래 전주지역의 향리였는데, 가솔들을 이끌고 바로 이곳 철령 이죽의 쌍성총관부 지역으로 이주한다. 그리고 그 이후 이성계의 가문은 고조부 이안사로부터 아버지 이자춘 때에 이르기까지 원나라에서 천호(千戶)라는 지방관의 자리를 얻어, 대대로 이 지역에서 고려인과 여진족들 위에 군림하는 변방세력가로 성장하게 된다. 이렇듯 고려의 중앙과는 거리가 먼 변경지역의 세력, 심지어 고려의 관리도 아니었던 이성계가문의 이성계가 고려의 중앙 조정에 데뷔하게 된 것은, 바로 공민왕의 반원 정책 덕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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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은 중국의 원·명 교체기의 혼란한 국제정세를 틈타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고자 1356년 원의 간섭기에 잃어버렸던 땅, 바로 그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려 한다. 이때 공민왕이 보낸 동북면병마사 유인우에게 협력하여 쌍성총관부 지역을 고려가 탈환할 수 있도록 도운 사람이, 바로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었다. 그때 당시 20대였던 이성계도 아버지와 함께 원나라의 세력을 몰아내는데 일조한다. 공민왕은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이 지역에 화주목을 설치한 후 이자춘의 공을 높이 사 그에게 고려의 벼슬을 내린다. 그리고 1361년 이자춘은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로 임명되어 동북면지방의 실력자로 급부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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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침에 시달리고 내적으로는 권문세족의 득세로 왕권이 약화되어 군사조직은 붕괴하고 국가 재정은 말이 아니었던 고려 말, 비록 변방의 세력이지만 착실히 군사력을 키운 이성계 가문의 힘은 만만히 평가될 것은 아니었다. 이성계는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는 탄탄한 사병조직을 가지고 있었고, 지역에 뿌리박고 살면서 키운 인맥과 경제력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이성계는 급부상한 집안의 배경과 함께 뛰어난 무예를 겸비하고 있었다. 그는 활을 매우 잘 쏘았으며 동북면의 여진족과 고려인들을 수하로 부리면서 장수로서의 자질을 키워나갔다. 아버지 이자춘의 노력으로 고려의 중앙 무대에 명함을 내민 이성계는 자신의 능력에 힘입어 곧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게다가 당시 잇따른 외적의 침입은 약화된 고려 조정으로서는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었지만, 청년 이성계에게는 무장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하늘이 준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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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외적을 물리치며 큰 공을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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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정에 내알 한 뒤, 이성계의 본격적인 활동은 1361년 독로강(현재 강계지역) 만호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면서부터 시작되어, 승승장구를 계속하였다. 같은 해 겨울, 압록강이 얼어붙자 중국에서부터 쏟아지듯 침입해온 10만 명의 홍건적들이 수도 개경을 함락시킨다. 이때 이성계는 고려인과 여진족 2,000명으로 구성된 자신의 사병조직을 이끌고 수도 탈환에 참가한다. 그리고 그는 홍건적의 두목을 모두 활로 쏘아 죽이고 수도 개경에 맨 처음 입성하는 큰 공을 세운다. 이듬해에는 원나라 장수 나하추의 침입을 물리쳤으며, 1364년에는 공민왕을 폐하려는 원나라 황제의 명령으로 침입한 덕흥군과 최유의 1만 명 군대를 최영과 함께 무찔러 고려왕실의 안정을 도모한다. 또한 자신의 이종 사촌이 되는 여진족 삼선·삼개의 난을 평정하여 동북면의 안정도 되찾는다. 이로써 이성계는 고려 중앙 조정에서 탄탄한 입지를 확보하고 중요 벼슬을 얻게 된다.

 

▲ 이성계의 여진족 토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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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이성계의 활동은 동북쪽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극심해진 삼남 지역의 일본왜구의 침입을 막아낸다. 특히나 해안뿐만 아니라 내륙에까지 깊이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던 극악한 왜구들을 황산에서 모두 섬멸함으로써 그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게 된다. 우리는 이 전투를 황산 대첩이라고 한다. 이후 이성계는 북쪽과 남쪽을 오르내리며 근 20여 년간을 고려 조정을 위해 일한다. 그리고 그가 치르는 전투는 모두 승리하였으므로 그는 바로 불패의 사나이, 난세를 구원할 영웅으로 명성을 쌓아간다. 그의 거듭되는 승전은 그를 고려조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로 만들었고 벼슬길은 승승장구한다. 또한 그의 인기와 명성을 좇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들게 된다. 그 속에는 이미 그 운이 다한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생각을 품은 신진사대부들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 위화도 회군 개경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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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 회군, 쿠데타 드디어 권력의 정점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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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신의 능력으로 승승장구하며, 아무리 그 입지를 확고히 한다 하여도 이성계에게는 변방지역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항상 붙어 있었기에, 누대에 걸쳐 뿌리내린 막강한 권문세족들이 버티는 고려 중앙 정치무대에서 그의 성장은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특히 같은 시기 이성계와 함께 외적을 퇴치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권문세족 출신의 최영장군에게는 이성계로서는 넘어서기 어려운 것이었다. 공민왕 사후 한때 중앙 정계를 주름잡던 이인임 세력을 최영과 함께 물리친 이성계는 수문하시중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언제나 최영의 그 다음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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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장군의 영전

 

이즈음 동북아 국제정세는 원나라가 북쪽 몽골 지역으로 쫓겨 나가고 명나라가 중국의 본토를 차지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이때 중국 본토를 차지한 후, 명나라는 원·명 교체기의 혼란한 상황 동안 돌아보지 못한 이웃 나라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려 한다. 그리고 고려와의 관계에 있어서 명나라는 공민왕이 회복한 철령 이북의 땅을 다시 반납하라는 억지를 부리고 나선다. 명나라는 철령 이북의 땅은 원나라가 고려의 땅을 강제 점거하였던 쌍성총관부 지역으로서, 명나라는 이곳에 철령위를 세우면서 이전에 원나라의 땅이었던 지역은 모두 명나라의 소유라고 주장하는 정치적인 괘변을 들어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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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최영과 그가 보호하고 있던 고려의 우왕은 명나라의 이러한 요구에 반발한다. 그리고 오히려 명나라 국초의 불안한 정국을 틈타 요동까지 정벌하자고 나선다. 그러나 이성계는 최영의 의견에 반대하고 나선다. 이성계는 최영이 울분에 차 전투의 시기와 국제 정세를 잘못 읽고 있다고 판단하고, 명나라 요동정벌이 불가한 4가지 이유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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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바로 여름철 농번기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부적당한 점,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쓰기 힘들다는 점, 요동을 공격하는 사이에 남쪽의 왜구가 침입할 우려가 있다는 점, 그리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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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의견은 군사에 정통한 장수로서 일견 타당한 부분도 있었으나, 그러나 완강한 최영과 우왕에 힘에 의해 무시되고 만다. 결국 이성계는 우왕과 최영의 명을 받아 우군도통사가 되어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요동정벌 길에 오른다. 그러나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가기 전 위화도에 주둔한 이성계는 큰 비를 만나고 더는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이대로 물에 빠져 죽을 것인가, 아니면 군대를 돌릴 것인가의 기로에서 이성계는 조민수를 설득해 회군을 선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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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위화도에서 회군하면서 이성계는 이미 왕명을 거역한 반역자의 신세가 되고 만다. 이로 인해 이러나저러나 운명의 기로에 서 있었던, 그는 요동정벌을 위해 얻은 대군을 개경으로 끌고 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요동 정벌대에 군사 대부분을 내주었던 최영은 적은 숫자로 이성계에게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바로 이성계는 쿠데타에 성공했고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태산과 같은 존재, 최영을 제거한 것이다. 이성계는 우왕을 왕위에서 내쫓고 고려 중앙 정계의 일인자가 된다. 이때 그의 쿠데타에 힘을 실어준 것은 공민왕 시기 중앙 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한 성리학을 신봉하는 신진사대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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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진 사대부는 고려 말의 사회적 모순을 고려왕조를 그대로 유지한 채 그 안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던 온건파와 그리고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급진파로 나뉘어 있었다. 이때 온건파로는 정몽주·이색 등이 있었고, 급진파로는 삼봉 정도전이 대표적이었다. 처음에는 신진 사대부 전체가 이성계와 협력하여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왕위에 앉히는 등 뜻을 같이하였지만, 새로운 왕조를 향한 급진파의 급격한 추진력은 결국 두 세력을 반목하게 하고 만다. 결국 이성계는 급진파의 삼봉 정도전과 결탁하여 역성혁명을 반대하고 고려에 대한 충성을 주장하던 정몽주를 마지막으로 제거함으로써 역성혁명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 이성계는 조준의 건의에 따라 전제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구세력의 경제력을 박탈하고, 신진 사대부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새로운 나라를 향한 지배계층의 입지를 확고히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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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진사대부의 뿌리가 된 유교 성리학의 학당

 

 

신진 사대부의 세력기반으로 새로운 이씨왕조를 연 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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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를 제거한 후 4개월 뒤, 이성계는 삼봉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1392년 마침내 왕위에 오른다. 그는 개경에서 공양왕에게 선위를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라 개국하였고, 이듬해 나라의 이름을 드디어 고려에서조선으로 바꾼다. 이때 이성계가 설립한 조선은 3대 기본 국가정책으로 숭유억불·농본주의·사대주의를 선택하게 된다. 이것은 이성계가 조선을 세울 때 이념적 바탕을 제공한 신진 사대부들의 정체성을 바로 드러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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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을 신봉하고 고려시대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였던 신진 사대부들의 경험론이 반영된 숭유억불(유학을 높이고 불교를 누른다.), 중국 송나라에서부터 시작된 성리학 사상의 주요한 경제적 바탕이 된 농업을 국가의 중심 산업으로 하는 농본주의, 그리고 분수를 알아 큰 나라를 모시고 주변과 교린하는 성리학적 사대주의가 조선을 이루는 중심 사상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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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주의는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 하편에 기록되어있는 '오직 어진 자가 큰 나라로 작은 나라를 섬기고, 오직 지혜로운 자가 능히 작은 나라로 큰 나라 섬긴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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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이치를 즐기는 자요,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이치를 두려워하는 자이니 하늘의 도리를 즐기는 자는 천하를 편안하게 하고 하늘의 도리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릴 것이다.' 라는 글 중 이소사대(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섬긴다 以小事大)’에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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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바로 조선이 유학에서 최고로 치는 어진 자보다는 지혜로운 자라는 두 번째 자리를 택함으로써 중국에 비해 작은 나라인 조선의 안정과 당시 국제 정세 속에서 실리를 추구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이성계가 세운 이 세 가지 건국이념은 이후 조선 500년의 정체성을 이루는 근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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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나라를 세운 뒤 이성계는 1394년 무학도사의 도움을 받아 한양에 도읍을 정하여 궁궐을 짓고 수도를 이전하게 된다. 이것은 고려의 본거지인 개경을 벗어남으로써 고려의 기득권층을 배제하고 새로운 지배계층을 형성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성계는 관제를 개편하여 유학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관제를 마련하고 너무 힘이 드세진 개국공신을 견제하면서 각지의 인재들을 아울러 왕권을 튼튼히 하였다. 또한 이성계는 [경제육전]을 편집하게 하여 법치주의에 입각한 국가체제의 정비를 추구하게 한다. [경제육전]은 성종대 [경국대전]의 완성 이전까지 조선 초기 법전의 초석이 되었으며, 조선 500년간 기본 법전이 된 [경국대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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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란에 휩싸인 태조 이성계의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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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체성의 나라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재위 기간은 1392년부터 1398년까지 불과 6년밖에 되지 않는다. 하늘 아래 가장 높은 자리인 왕위에 스스로 오르는 영웅다운 삶을 살아낸 그였지만, 말년에 자식들이 벌이는 골육상잔의 권력 다툼 앞에서, 그는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고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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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극적인 삶의 시작은 바로 세자 책봉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는 데는 정도전을 대표로 하는 급진적 신진 사대부의 힘도 컸지만, 안으로는 이성계의 집안에서도 새 나라를 개창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두 사람 있었다. 바로 그것은 이성계의 첫 부인 한씨의 소생인 다섯째 아들 이방원(태종)과 그의 두 번째 부인 강씨(신덕왕후)였다. 개국공신에게 논공행상이 있듯이 집안의 큰 조력자들에게도 논공행상이 있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다음 왕위를 예약하는 세자의 자리였다. 당시 아버지를 도와 나라를 세우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방원은 그 세자 자리가 당연히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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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단양 도담삼봉유원지에 2010년 월 세워진 정도전 동상     

 

그러나 이성계의 참모 역할을 했던 정도전과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도록 불철주야 내조한 강씨의 생각은 달랐다. 왕권과 신권의 조화로운 정치를 추구하는 성리학의 골수 깊은 신봉자인 정도전에게 있어서도 너무 강한 성격의 이방원이 다음 왕위를 잇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강씨는 내조의 공을 전실 자식인 이방원이 가져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성계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둔 강씨는 자신의 아들 중 하나가 다음 왕이 되기를 강력히 희망한다. 이미 첫 부인 한씨가 사망한 뒤라 이성계의 곁에서 이방원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그 아무도 없었다. 이방원으로써는 너무나 억울하게 죽 쒀서 개 준 격으로 강씨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이 세자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를 지켜보는 이방원은 나라도 무너뜨린 기세였다. 눈앞에서 왕위가 사라지는 것을 가만 지켜볼 인물이 아니었던 이방원은, 즉시 정도전과 맞서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그리고 자신의 사병을 일으켜 정도전을 급습해 죽이고, 이복동생인 방석과 방번을 모두 살해해 버린다. 이는 아버지 이성계가 번연히 살아 있는 와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성계는 이 변란에서 두 아들과 사위까지 잃었고 권력 앞에 인면수심으로 행동하는 자식들의 다툼에 인생무상을 느끼고 하야를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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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초 왕자의 난으로 이어지는 주역 이방원

 

이성계는 마침내 13989월에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정종의 즉위는 난을 일으킨 후 바로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아버지를 협박해 왕위를 찬탈한 것처럼 보일까 염려한 이방원이 마련한, 왕으로 가기 전 일종의 유예기간인 셈이었다. 이후 2년 뒤 이방원은 2차 왕자의 난을 다시 일으킨 넷째 형 방간마저 물리치고,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아 조선의 3번째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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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를 둘러싼 자식들의 목숨을 건 권력 다툼에 회의를 느낀 이성계는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고향인 함경도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다섯째 아들 이방원을 몹시도 증오하였지만, 이미 이방원에게로 기운 대세는 다시 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이때 이방원은 이성계를 모셔오기 위해 매번 차사를 보냈지만, 이성계는 아들이 보낸 차사마저 모조리 죽여서 돌려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나온 말이 바로 심부름을 간 사람이 소식이 아주 없거나 또는 회답이 좀처럼 오지 않을 때 쓰는 함흥차사란 말이다. 이후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간곡한 설득으로 겨우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 태상왕의 자리에 있게 된다. 이때 한성으로 돌아온 태조는 만년에 불교에 깊이 심취하였는데, 양주 회암사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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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불교에 심취한 것은 왕자의 난 이후 은퇴할 때부터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1398(태조 7) 태조는 도봉산에 있던 옥천암을 지나다가, 이전에 이곳에서 백일기도했던 것을 상기하고는 천축사(天竺寺)라 사액하였다고 한다. 옥천암은 673(문무왕 13) 의상 대사가 의상대에서 수도를 할 때, 제자를 시켜 옥천암을 짓게 한 것으로부터 출발하였으며, 고려 시대에는 부근의 거찰 영국사의 부속 암자였다. 천축사가 본격적으로 중흥하기 시작한 것은 태조의 사액 이후이다. 이성계는 이렇게 말년을 보내다가 1408524일 창덕궁 별전(別殿)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그의 시호는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며, 묘호는 태조이다. 그리고 그의 건원릉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동 동구릉(東九陵)내에 있으며, 태조 이성계의 신위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셔 놓은 종묘에 봉안되어 있다. 종묘에서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 르네상스 문화의 산실 메디치가문의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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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르네상스 문화의 산실 메디치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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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상업도시 피렌체! 인구 30여만 명에 불과한 이 도시만큼 세계적인 예술의 집합소이자 우아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곳도 드물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가 형성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바로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이 메디치(Medici family)가문 때문일 것이다. 출신도 보잘것없는 한 가문이 이탈리아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으로, 더 나아가 세계적인 가문으로 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그 영향력이 상업과 정치라는 현세적인 분야뿐 아니라 종교적인 분야,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안목을 바탕으로 한, 예술가들에 대한 후원을 통해 급기야는 르네상스시대에까지 강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메디치 가문의 존재로 인해 피렌체 또한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었고, 또한 그로 인해 수백 년 후의 오늘날에 살아가는 시민들에게까지 조상들의 후광에 힘입어 세계적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여 경제적인 보상을 얻어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과거의 피렌체, 현재의 피렌체, 특별한 변화가 없는 한 미래의 피렌체에도 예술적 부유함을 안겨 줄 이 가문은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명성을 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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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디치 가문의 주요 인물

 

 

메디치 가문(이탈리아어:Medici)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가문이었다. 메디치 가문은 썩 훌륭한 집안 출신은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그들의 족보에 따르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페르세우스가 조상이라고 하는데, 이를 믿는 사람들은 그들 가문 출신 외에 없다. 토스카나 지방에서 농사를 짓던 선조 몇몇이 아무래도 성공하기 위해서는 농사보다는 그 시대에 막 발전하기 시작한 상업에 종사하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 하에 가까운 상업도시 피렌체로 향한 것이, 이 가문의 성공신화의 출발점이 된다. 이 메디치 가문은 세 명의 교황(레오 10, 클레멘스 7, 레오 11)과 르네상스예술의 후원자로 잘 알려진 피렌체의 통치자 로렌초와 같은 유명한 인물을 배출하였으며, 그리고 나중에는 혼인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왕실의 일원으로까지 이르게 된다. 메디치 가문은 다른 귀족 가문들처럼 그들도 자기네 도시 정부를 피렌체에 건설하여 지배하였으며, 또한 피렌체를 예술과 인문주의가 융성한 환경의 도시로 만들어 나갔다. 그들은 밀라노의 비스콘티와 스포르차, 페라라의 에스테, 만토바의 곤차가 등 다른 위대한 귀족 가문들과 더불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어내는 큰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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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Medici family)가문의 유래와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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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 북쪽의 농업 지방인 무겔로에 왔다고 하며, 처음으로 역사에 기록된 것은 1230년대 문헌에서였다. 비록 메디치(Medici)가 이탈리아어로 의사를 뜻하는 말이지만, 메디치의 정확한 명칭의 유래는 알려지지 않았다. 14세기 초, 메디치가의 일족들은 특히 프랑스와 스페인과 더불어 모직물 교역의 걸출한 집단으로 자라난다. 이탈리아 도시정부 시설에서 일부 메디치 사람들이 참석했음에도, 아직 알비치나 스트로치와 같은 저명한 가문들보다 중요성이 떨어졌다. 살베스트로 데 메디치라는 사람은 치옴피의 난 동안 모직물 제작자 조합의 의장직을 맡았으며, 1396년 안토니오라는 사람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1400년에 메디치 일가는 또 다른 음모와 연루되어 두 명만 제외하고 20년 동안 피렌체의 정치에서 추방되었다. 이 둘 중의 한 사람인 아베라르도(비치) 데 메디치는 나중에 메디치 왕조 시대를 연 장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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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라르도의 아들 조반니 디 비치는 메디치 은행을 설립하여 가문의 재산을 늘렸으며,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비록 얼마간의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었지만, 그는 가문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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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디 비치 이후 메디치가의 계통은 둘로 나뉜다. 조반니 디 비치의 장자 국부 코시모(Cosimo de' Medici 'Pater Patriae') 계통과 조반니 디 비치의 차남인 대 로렌초(Lorenzo di Cosimo de'Medici)의 계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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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4년 조반니 디 비치의 장남인 코시모 데 메디치가 그란 마에스트로의 자리를 인계받았으며, 피렌체 공화국의 비공식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가문의 장자 계통 -(국부 코시모의 계통)- 1537년 피렌체의 초대 공작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의 암살 때까지 군림하였다. 수 세기 동안의 긴 통치는 겨우 민란으로 국외추방을 당한 두 번(1494-1512년 사이, 1527-1530)만 중단되었다. 권력은 차남 계통-(대 로렌초의 계통)- 에게 넘어갔는데, 그의 증손자이며 초대 토스카나 대공인 코시모 1세와 함께 시작되었다. 메디치 가문의 권력 상승은 연대기 베네데토 데이(Benedetto Dei)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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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시모와 그의 아버지는 은행업과 제조업에 기반을 둔 가문의 재산으로 예술과 문화, 교회를 후원하기 시작하면서 세대에 걸친 출세 기반을 확실하게 잡았다. 아무튼, 피렌체 시민들의 절반은 메디치 가문의 경영 지점에 고용되어 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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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의 위대한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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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은행은 유럽을 통틀어서 가장 부유하고 훌륭한 은행이었다. 그 덕분에 한동안 메디치 가문은 유럽에서 가장 유복한 가문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이를 토대로 메디치가는 피렌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하였으며, 나중에는 이탈리아전역과 유럽에까지 확대되었다. 회계전문직에서의 그들은 신용과 차변을 추적하기 위한 복식부기체제의 개선이라는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이 체제는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을 위해 일하는 회계사들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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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치 가문은 르네상스 전성기의 피렌체를 이끈 로렌초 데 메디치를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에게는 도시를 이끌고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죽은 후에 일 마그니피코(위대한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그는 시를 쓰기도 하면서 메디치 가문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가 남긴 시 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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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ever wants to be happy, let him be so:
about tomorrow there’s no knowing.
행복해지고자 하는 자들이여, 행복을 즐겨라
내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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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는 자기 아이들에게 엄청난 사랑과 관심을 쏟아 부었다. 로렌초는 자신의 성공적인 도시경영을 계속 이어가게 하고자 아이들의 능력을 파악하고 그들의 미래와 직업을 설계하였다. 1478년 로렌초의 동생 줄리아노는 부활절에 교회에서 암살당했다. 로렌초는 나중에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되는 줄리아노의 사생아 줄리오 데 메디치(1478-1535)를 자신의 아들로 입적하였다. 로렌초가 죽자 능력 없는 그의 아들 피에로 2세가 피렌체의 통치권을 물려받았는데, 피에로는 1494년에서 1512년동안 메디치가 피렌체에서 추방당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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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에서의 활동과 동방박사의 경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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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은 가톨릭 교회에서도 영향력을 끼쳐 16세기 유명한 두 명의 교황들(레오 10, 클레멘스 7)을 배출하였다. 메디치 가문의 교회에서의 영향력은 로마와 피렌체 두 곳을 손에 넣어 이탈리아의 지배자로 살아남게 하였다. 그들 모두 예술을 후원하였지만, 신학분야에서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사상이 퍼지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또 다른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으로는 알레산드로 오타비아노 데 메디치(레오 11)가 있다. 메디치 가문은 성경에 나오는 동방박사의 경배(Adoration of the Magi)를 그린 그림에서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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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박사의 경배는 동방의 박사들이 아기 예수에게 경배를 들이는 모습 즉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시느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니(마태복음 2:2)’라는 마태복음서의 기록에 등장한다. 이 마태 복음서에 따르면 동방의 점성술사(동방 박사)들이 메시아의 도래를 알리는 별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찾아와 그리스도에게 경배하며 황금, 유황, 몰약을 바쳤다고 합니다. 그럼 화가들이 그린 <동방 박사의 경배 Adoration of the Magi >에는 동방 박사들이 등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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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Adoration of the Magi. 1481-82 )의 동방박사의 경배

 

수 백 년 동안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중요한 축일은 그리스도가 동방 박사들의 경배를 받은 공헌축일(16)이었다. 3세기경까지 동방 박사들은 동방의 왕이었으며, 세 명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9세기 무렵 이들은 아시아인 발타샤르, 유럽인 가스파르, 아프리카인 멜키오르라는 구체적인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각각 다른 인종으로 등장한다. 조토의 작품에서도 동방 박사들은 왕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마침내 이들을 통해 그리스도는 왕 중의 왕이라는 위치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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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토의 동방박사의 경배(GIOTTO di Bondone. No. 18 Scenes from the Life of Christ: 2. Adoration of the Magi. 1304-06)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가 그린 '동방박사의 경배'는 동방의 왕이자 박사였던 세 사람이 별의 인도를 받아 베들레헴으로 찾아가, 새로 나신 아기예수에게 경배를 드리는 모습을 그린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이전의 동방박사의 경배를 그린 다른 그림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그림 속에 그려진 세 명의 동방박사의 얼굴은 실제로는 메디치 가문사람들의 초상화를 나타내고 있다. 아기 예수에게 경배를 드리는 백발의 동방박사는 메디치 가문의 원로인 코시모, 붉은 망토를 걸친 동방박사는 코시모의 첫째 아들인 피에로, 그 옆의 하얀 옷을 입고 있는 동방박사는 코지모의 둘째 아들인 조반니를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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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 BOTTICELLI, Sandro. Adoration of the Magi
c. 1475. Tempera on panel, 111 x 134 cm.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의 동방박사의 경배

 

이외에도 메디치 가문의 주요 인물들의 초상을 찾아볼 수 있는데, 조반니 옆의 검정 옷을 입고 서있는 남자는 조반니의 아들인 줄리아노, 허물어진 담 뒤에 있는 바위를 옥좌 삼아 앉은 성모는 보티첼리의 스승 프라 필리포 리피(Fra Filippo Lippi)의 성모들과 많이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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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들이 모두 15세기 이탈리아인들의 복장을 하고 있어 세속적 분위기가 더 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그림이 특히 유명한 것은 맨 왼쪽에 있는 보티첼리 자신의 초상 때문이다. 델 라마보다도 한결 강렬한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는 이 젊은 화가의 초상은 명성을 얻기 시작한 자신감에 가득 차 있는 듯이 보인다.

 

 

▲ 삼봉 정도전과 마키아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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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 정도전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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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의 14세기를 전후로 한 세계는 그야말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처럼 혼돈의 시대였다. 서구 유럽사회는 로마제국의 약화로 이어지는 신본주의의 십자군전쟁이 전 유럽사회를 부패한 사회로 몰아가고 있었으며, 동양은 칭기즈칸(Chinggis Khan,1155 추정~1227)의 세계화 군사전략으로 역시 혼돈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혼돈의 시기를 더욱더 부채질하는 것은 종교였다. 종교의 근본적인 목적은 사회정화를 통해 밝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서양의 모든 종교는 정치권력과 야합하는 향락에 빠져 온 세상을 더럽히는 그 선봉에 서 있었다. 서구 유럽사회에서는 로마황제와 교황의 신본주의가 순수한 인간의 가치를 무너뜨리고 있었으며, 동양사회와 한반도 역시 불교의 신본주의를 추구하는 정치세력들이 인간의 가치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시기 서구유럽사회와 한반도에 두 가문이 등장한다. 바로 서구 유럽사회에 있어서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가문과 한반도의 이성계 가문의 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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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가문은 14~16세기 걸쳐 350년 동안 서구 유럽사회의 르네상스시대를 연 가문이며, 이성계가문은 14~20세기 초반까지 519년 동안 총 27대의 왕들을 배출하며 조선의 한반도를 지배한 가문이다. 그리고 이 두 가문에는 니콜로 마키아벨리(Machiavelli, Niccolo, 1469 ~ 1527)와 삼봉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라는 걸출한 역사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니콜로 마키아벨리와 삼봉 정도전은 과연 누구인가? 삼봉 정도전은 중국에 있어서 원이 무너지고 새로운 명나라가 세워지는 혼란스러운 국제질서 속에서, 신본주의적인 부패로 찌든 그의 조국 고려를 무너뜨리고, 그리고 여기에 새로운 인본주의적인 신권(臣權)재상 중심정치의 조선을 세우고자 한 원대한 꿈을 가진 정치개혁가였다. 삼봉 정도전의 주요 정치사상은 신본주의로 찌든 불교사상을 타파하고 새로운 인본주의의 유교성리학으로 작금의 병든 고려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그리고 이에 필요한 토지 전제개혁을 통해 농민의 삶을 향상시키는 복지정책이었다. 또한 이에 따르는 동아시아 국제외교관계를 현실적인 사대주의로 추구하자는 것이었다. 즉 숭유억불·사대교린·농민개혁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삼봉 정도전과 너무나도 닮은 정치개혁가가 르네상스시기 메디치가의 피렌체에서 나타난다. 바로 니콜로 마키아벨리(Machiavelli, Niccolo)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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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 정도전과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삶은 너무나도 닮아 있다. 삼봉 정도전이 그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이성계를 주군으로 선택한 것처럼,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신본주의적 부패국가로 전락해가는 이탈리아를 인본주의적인 정치사상으로 통일시키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요구하며, 메디치(Medici family)가문을 주군의 가문으로 선택하려 한다. 그리고 메디치 가문에 그의 저서<군주론>을 받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현실적인 냉엄함을 기술한 책자이다. 그런데 이러한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은 삼봉 정도전의 사상과 그대로 일치한다. 삼봉 정도전 역시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모든 현실적인 냉엄함을 정치이념으로 들어낸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와 삼봉 정도전의 정치적인 목적은 바로 인본주의적인 국민의 삶이었다. 하지만 후세의 학자들은 이를 잘못 이해하여,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한이라는 이미지를 붙여 마키아벨리스트라고 부른다. 이러한 혹평은 살인적인 마키아벨리’(셰익스피어), ‘악의 교사’(리오 스트라우스)라는 저주에서 비롯하여,‘공화주의의 대변자’(스피노자·루소)라는 찬양에 이르기까지, 극단적인 양극단의 평가를 오늘날까지 그대로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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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저술된 주요 개념인 비르투(주체적 의지·)와 포르투나(운명의 힘), 네체시타(불가피성), 그리고 프루덴차(실천적 이성)에 대한 설명이 그렇다. 그리고 이들 개념이 원문에서 출현할 때마다 각각의 개념이 사용된 마키아벨리의 문장들을 여럿 보여주며 개념의 속뜻을 거의 완벽히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 또한 마지막 개념인 프루덴차(실천적 이성)가 등장하는 대목에서 이렇게 정리한다. “제대로 된 신생 군주란, 국가를 장악하고 개혁하며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불가피성(네체시타)이 요구하는 과업을 실천적 이성(프루덴차)을 통해 이해하고, 운명의 힘(포르투나)에 수동적으로 굴복하는 대신 비르투(주체적 의지·)를 가지고 그 과업을 완수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라고 정의한다. 이처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그대로 삼봉 정도전 주군론으로 이어진다. 즉 삼봉 정도전에게 있어서 신생 군주인 이성계는 국권으로 국가를 강력히 장악하고 개혁하며 안전하게 지켜내기 위해, 반드시 실질적인 실천적인 이성을 통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어쩔 수 없는 운명의 힘에 수동적으로 굴복하는 대신, 자신의 주체적인 강한 힘으로 모든 과업을 완수하는 사람이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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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키아벨리의 스트라파도 고문(두팔을 뒤로 묵어 아래로 떨어뜨려 두 팔을 모두 부러뜨리는 고문)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처럼 제후국이 난립하고 제자백가들이 백가쟁명하던 시기였다. 특히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가문을 몰아내고 세운 피렌체 공화국의 고위공직자였다가 메디치 가문의 복귀 뒤 반메디치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스트라파도라는 모진 고문을 받고 나서 농장에 은둔하며 장작을 만들고 새를 잡아 파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군주론을 집필한, 가혹한 운명의 주인공이였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삼봉 정도전이 살았던 고려말엽 역시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전한 백가쟁명의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삼봉 정도전도 이의민에게 쫓기어 유배지에서 그의 사상을 완결한다. 그리고 유배지에서 조선의 정치체제 구상을 밝힌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경제문감(經濟文鑑)' 같은 저술의 정신적인 기초를 닦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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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이제 한국정치를 제대로 정리하여야만 한다. 한국정치는 지금 왜 이처럼 진흙탕과도 같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한국 정치는 부재는 그대로 한국국민들의 정치의식 수준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한국정치를 살펴보면 정치에 대한 한국인들의 이상주의·도덕주의적 접근이 현실을 매우 도외시하는, 정서적인 급진주의와 교조주의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교묘히 이용하는 것이 한국정치세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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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는 인간들 사이의 갈등을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 갈등을 조절하는 현실적인 수단으로 바로 정치를 바라보았다. 이에 반해 이상주의·도덕주의에 침윤된 작금의 한국정치는 모든 존재하는 갈등들을 부인하고, 그리고 존재하지도 않는 사회통합을 강조하면서 결과적으로 갈등 조절에 실패하고, 국민들을 냉소주의나 급진주의로 빠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상주의·도덕주의의 역설인 셈이다. 마키아벨리는 정치가 있어야 할 것의 당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바로 이런 현실주의적 접근이야말로 정서적인 급진주의와 교조주의에 빠진 한국의 민주주의를 바로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키아벨리의 생각은 그대로 삼봉 정도전의 생각과 일치한다. 삼봉 정도전은 유배지 생활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고려 백성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한 것이다. 현실을 외면한 허황된 종교적인 철학으로는 무너져가는 고려를 절대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없다면 그것은 완전히 판을 그대로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완전히 판을 바꾸기 위해서는 정치에 대한 정의를 다시 새롭게 정립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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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통해 정치를 권력 게임이나 자기 이익의 추구로 본 것이 아니라, 시민적 덕을 중심 가치로 삼아 정치공동체를 건설하려 하는 민주주의의 원리로서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마키아벨리는 귀족보다 민중을 매우 중시한 민주주의자였다. 이처럼 삼봉 정도전도 정치의 주체를 귀족보다는 민중을 중심에 놓고 귀족사회의 부패를 바로 척결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 나름대로의 대포를 만들어내어 귀족사회의 걸림돌을 제거해야만 했다. 바로 대포는 낡은 사상과 관습을 부숴버리는 것이다. 과연 그 대포란 무엇인가? 그리고 대포의 힘은 어디에서 나와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들은 이제 이 정의를 내려야만 한다. 마키아벨리와 삼봉 정도전이 주장하는 썩은 정치부패사회를 척결하는 대포는 바로 대자연의 원칙과 신뢰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대자연은 바로 사회공동체이다. 대자연의 사회공동체란 천지인의 서로 힘을 합쳐 움직이는 것처럼, 어떤 특정한 권력층이나 귀족층들이 자신들만의 권력유지를 위해 사용하는 원칙과 신뢰가 아니라, 바로 모든 사회공동체의 원칙과 신뢰를 확립하는 법질서로 세상을 만들어가라는 것이다. 아마도 14세기 자신의 원대한 꿈을 보지 못하고 죽어간 마키아벨리와 삼봉 정도전은 오늘날 이것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 단태와 베아트리체의 사랑이 서린  베키오다리(Ponte Vecch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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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와 메디치(Medici)가문이 주는 우리시대의 개혁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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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꽃의 도시 피렌체,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 나는 호텔 창가에 않아 다시 피렌체의 전경을 내려다본다. 저 멀리 유유히 흐르는 아르노강의 강물위로 베키오다리(Ponte Vecchio)가 보인다. 베키오 다리는 1345년에 건설한 로마시대의 마지막 다리로서,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눈 장소로 알려져 있다. 요즘 우리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물쇠 서약의 효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곳에서, 연인들은 사랑을 맹세하고 자물쇠를 채운 뒤 그 사랑의 열쇠를 강물에 던져 버린다. 또한 아르노강 넘어로 두오모(Duomo) 성당이 보인다. 1292년에 착공하여 1436년 준공되어 140년에 걸쳐 완성했다는 이 성당은 붉은 돔인 쿠폴라464개 계단을 따라 성당 꼭대기로 오르면 피렌체의 모든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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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l Fiore)

 

 

이 두오모 성당의 두오모는 돔형(dome)을 뜻하는 말로, 라틴어 도무스(Domus)에서 유래된 말로 바로 을 뜻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사실 지붕을 가진 대성당이라는 말이다. 이 두오모 성당의 원래 명칭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l Fiore)으로, 꽃의 성모 교회라는 뜻을 나타낸다. 이름처럼 정말 아름답게 나의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두오모 성당 앞에 있는 산 조반니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의 팔각지붕이 어렴풋이 나의 눈에 들어온다. 피렌체의 수호성인들에게 바쳐진 이 건물은 기베르티의 필생의 작품으로, 바로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으로 지칭한 청동문이 만들어져 있다. 나는 물끄러미 아름다운 꽃의 도시 피렌체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아름답고 멎진 도시를 만든 피렌체의 메디치(Medici family) 가문을 생각한다. 하지만 메디치가문은 이처럼 예술의 도시도 만들었지만, 무엇보다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한 인문주의의 르네상스시대를 여렸다는 것이다.

 

산 조반니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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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서구 유럽에서 메디치(Medici family)가문에 의해서 인문주의의 르네상스 시대가 부활한 당시, 한반도에서는 이성계 가문에 의해서 인문주의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 정치·사회적인 분야에서의 인문주의 회복운동은 바로 마키아벨리와 삼봉 정도전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들고 메디치(Medici family)가문을 찾아간 것처럼, 삼봉 정도전은 이성계를 주군으로 섬기기 위해 철령 이북의 동북면으로 이성계를 찾아간다. 그리고 이들은 그들을 시험한다. 14~15세기 전 후로 살다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과 이성계의 가문은 동서양문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endif]--> 산 조반니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의 황금문

 

 

피렌체의 메디치(Medici family)가문에 의해서 형성된 인문주의의 르네상스 운동은 전 세계의 민주주의의 부활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성계 가문의 삼봉 정도전에 의해서 형성된 성리학의 인문주의의 회복운동은 조선의 역사를 개방의 역사로 탈바꿈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 바로 조선조 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이어지는 개방화의 밑바탕에는 삼봉 정도전의 정신이 숨어있다. 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 전쟁이었다. 현 시대의 변화는 바로 메디치가문의 르네상스부흥운동과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강력한 국가권력을 원하는 나폴레옹, 히틀러, 무솔리니 등에 의해 애용되었으며, 삼봉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은 현대 한국사회의 법질서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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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키아벨리가 메디치(Medici family)가문에 인정을 받지 못하고 물러 난 것처럼, 삼봉 정도전 역시 이성계 가문의 태종 이방원에 의해서 사살되고 만다. 그리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18세기 이후에야 진정한 평가를 받는 것처럼, 삼봉 정도전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흥선 대원군에 의해서 그 정치적인 인정을 받는다. 왜 이들은 당대의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일까? 그것은 이들의 정치사상이 너무나 이상적이고 현실적인 냉엄함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와 삼봉 정도전의 이루려는 사회 개혁방안은 주어진 부패라는 현실 앞에서, 이와 처절히 싸워야만 하는 사회개혁방안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과연 인류는 정말 부패라는 탐욕의 권력을 바른 이성으로 단절할 수 없는 것일까? 이는 메디치가문과 이성계 가문 그리고 마키아벨리와 삼봉 정도전이 살다간, 그 시대와 지금의 현 시대가 전혀 다르지 않다는 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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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들은 이들의 역사를 통해 우리시대를 개혁해나가야만 한다. 그 개혁의 첫 걸음은 바로 인문주의의 새로운 부활이며, 그리고 그 부활은 현실에 벗어난 너무 이상적인 냉엄함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 누구도 대자연의 섭리로부터 벗어나 살아갈 수가 없다. 바로 인류가 살아나갈 수 있는 삶의 모든 원칙은 대자연으로부터 얻어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 누구도 가정·사회·국가·지구를 떠나 절대로 살아갈 수가 없는 존재이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아갈 수 없듯이, 인간은 사회공동체를 떠나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정신문화는 바로 대자연의 사회공동체에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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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와 삼봉 정도전은 이 사회공동체라는 인식의 부족으로 군주론과 주군론을 펴며, 한 시대의 사회변화를 개혁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주군인 메디치가문과 삼봉 정도전의 주군인 이성계 가문은 사회공동체라는 인식의 결여 속에, 결국 자신들만의 왕조를 만들어내고 부패함으로서, 그리고 또한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그 부패한 업보를 지고 역사 속에서 쓸쓸히 살아지고 만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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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은 항상 우리들에게 독단을 버리고 다 함께 살아나가는 어울림의 문화를 형성하라고 우리들에게 주문하고 있다. 하늘은 땅을 사랑하고, 땅은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은 하늘을 사랑하듯이, 인류는 모두가 다 서로 사랑하는 사회공동체를 형성하지 않으면 절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바로 우리사회의 모든 개혁의 정신은 탐욕이 아닌, 이 사랑의 정신이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메디치 가문과 이성계 가문을 향한 마키아벨리와 삼봉 정도전의 군주론은 과연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또한 메디치 가문과 이성계 가문은 또한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인가! 군주론의 진정한 군주는 특정 권력자가 아닌 바로 국민과 민중이며, 그리고 모든 인류인 것이다. 우리들은 이제야말로 진정한 사회공동체의 사랑의 정신이 과연 무엇인지를 바로 깨닫고, 그 깨달음을 사회개혁운동으로 전환해야만 할 것이다. 아마도 메디치가문과 이성계 가문, 마키아벨리와 삼봉 정도전은 이것을 현 시대의 우리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