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일본대지진과 정유재란

백삼/이한백 2014. 6. 19. 10:44

1596년 8월 31일 그는 후시미성에 있었다. 자정이 돼 땅이 흔들리고 그가 머물던 천수각이 무너졌다. 500여 명의 시녀가 깔려 죽었다. 그러나 5층에 있던 그는 극적으로 탈출했다. 교토를 덮친 대지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살아남았고, 역사의 비극은 다시 시작됐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것이다.

임진왜란 직후 히데요시의 은거를 위해 세우기 시작한 후시미성은 1596년에 완성됐다. 이것은 단순한 성이 아니었다. 3차례에 걸친 축성과정에서 히데요시가 '천하인'으로서 자신의 권위를 확고하게 하고, 어린 아들 히데요리에게 정권을 물려주기 위한 정치적 책략 중심에 이 성이 있었다. 그런 성이 완성과 더불어 무너져버린 것이다. 아들을 위해 후계자였던 조카 히데츠구를 할복하게 했던 그에겐 치명적 사건이었다.

당시 지진은 규모 진도(M.) 7의 대지진이었다. 정치 중심지였던 쿄토, 오사카, 이즈미 등 광범위한 지역이 파괴됐다. 산이 내려앉고 집들이 매몰됐으며 해안가에는 쓰나미가 덮쳐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직격탄을 맞은 후시미의 치안은 불안했다. 혼란을 틈타 모반이 일어날 것이라는 풍문이 넘쳐났다. 1년 전 히데츠구 사건과 연관해 이런 소문은 더욱 커져갔다. 알몸으로 뛰쳐나와 목숨을 건졌던 히데요시도 여장을 하고 시녀들 사이에 섞여있어야 했을 만큼 정치적 상황은 위급했다.

당시 후시미성은 더 큰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히데요시는 장엄한 자신의 성에 명나라와 조선의 사신을 맞아들여 강화교섭을 유리하게 이끌고자 했다. 후시미성은 조선침략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받기 위해 그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던 화려한 무대장치였다. 이미 한 달 반여 전에 심유경을 후시미성에 초빙해 자신의 위세를 드러내며 강화교섭을 타결하려 했다. 자신을 일왕으로 책봉하려는 명의 사절을 맞이하기 위해 무사행렬이라는 정치이벤트도 준비했다. 대지진은 이 모든 것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일본의 지진 소식은 조선에도 전해졌고, 관료와 백성들은 이를 천벌이라 여겼다. 진양의 유생 정경운은 히데요시가 천벌에서 살아남은 것을 안타까이 여기며 그의 뼈를 부셔 악인을 징벌하여 다스리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했다. 이런 저주는 조선인뿐만 아니라 학정에 시달리던 왜인들 입에서도 흘러나왔다. 

대지진으로 국내정세는 불안해지고, 성공을 목전에 두었던 강화교섭마저도 끝내 파탄에 이르자 히데요시는 새 희생양을 찾았다. 조선이었다. 그는 강화교섭이 성사될 수 있었는데 조선사신이 늦은 바람에 후시미성이 붕괴하고 자신의 권위는 떨어졌다고 분노했다. 그 결과는 이듬해 정유년의 대대적인 2차 침공이었다.

정유재란은 임진년의 그것과는 성격이 전혀 달랐다. 오로지 살육, 살육을 위한 전쟁이었다. 의병장을 지낸 조경남은 히데요시의 다음 말을 빌려 당시의 참상을 전했다. "해마다 군사를 일으켜 조선인을 모조리 죽여 그 나라를 텅텅 비게 만든 이후에 서쪽지방 사람들을 이주시켜라. 10년을 이렇게 하면 업적은 이루어질 것이다. 다만 사람에게 귀는 두 개이고 코는 하나이니 코를 베어 수급을 대신하라." 한 인간의 광기어린 꿈이자 집착이었다.

만약 그때 후시미성에서 히데요시가 죽었다면 전쟁은 좀 더 일찍 끝났을까? 그는 조선인 대량학살을 지시하고 그 증거물을 요구했다. 소금에 절여 바다를 건너간 조선인의 목과 코는 전리품으로 자신의 무덤 앞을 장식하게 했다. 비뚤어진 그의 욕망은 일본 역사 속에서 면면이 이어졌다. 1910년 한국을 강제적으로 병탄했을 때 일본인들은 히데요시의 꿈을 마침내 이뤘다고 했다. 지난 3월 일본에 대지진이 있었다. 그렇지만 415년 전의 일본대지진으로 정유재란이 초래됐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경대 인문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