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편에 이어 허구연이 야구판으로 돌아온 뒤 가장 먼저 한 것은 일본식 용어를 바로잡는 것이었다. 당시 야구계에는 포볼(볼넷), 데드볼(몸에 맞는 공), 언더베이스(태그업), 사이드스루(사이드 암), 라이너(라인드라이브) 등 엉터리 용어가 만연해 있었다. 야구의 본고장이 미국임을 감안한 허구연은 왜색 용어만큼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순화 운동에 돌입했다.
1982년 MBC PD 아나운서 해설가들을 모아놓고 정식 용어를 설명하고 있는 허구연. 당시 언론에서 무리한 시도라며 4차례나 사설을 통한 비판을 받았지만 결국 허구연은 야구 용어들을 교화해 나갔다.
이후 허구연은 또 한번의 변화기를 겪는다. 1986년 청보 핀토스 감독으로 취임 한 것. 불과 35세의 일로, 최연소 감독이었다. 개막전부터 내리 7연패를 당하는 등 8승 23패란 처참한 성적을 거둔 뒤 전기리그 도중 일본으로 단기 연수길에 오른다. 허구연은 당시를 회상하며 "선수 생활동안 2군 생활을 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독이 됐다. 후보 선수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성적 부진의 원인이었다"고 말했다. 1986년 청보 핀토스 제주도 캠프 당시의 허구연. 왼쪽부터 강태정 전 감독, 모리모토 인스트럭터, 허구연. 유남호.
결국 허구연은 한 시즌도 마치지 못한 채 감독생활을 마감했고 이후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가 롯데 코치부터 다시 시작한다. 괌으로의 해외 연수를 추진하는 등 여전히 의욕적인 자세를 잃지 않았지만 1989년 롯데가 최하위를 기록하는 등 코치로서의 결과 역시 그리 좋지 않았다. 1986년 롯데 괌 전지훈련 당시의 허구연 코치(오른쪽 세 번째) 맨 왼쪽은 어우홍 감독, 가운데 반바지 입은 이는 박종환 단장이다.
1990년 미국으로 지도자 연수를 떠난 허구연은 토론토 블루제이스 산하 마이너리그에서 2년간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했다. 이 때부터 허구연은 본격적인 선진 야구를 경험하게 된다. 선발 투수의 강판이후 아이싱하는 모습이나 프로구단 야구장의 인프라 구축 등 당시 국내에서 볼 수 없었던 모습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1990년 시토 개스톤 블루제이스 감독과 찍은 기념사진. 시토 개스톤 감독은 캐나다 연고 팀의 1992년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일궈낸 인물이며 흑인 감독으로서는 현재까지도 유일하게 월드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감독이다.
허구연이 미국 제자라고 가장 먼저 언급하는 선수는 지난 2009년 은퇴한 제프 켄트다. 켄트는 1989년 20라운드 523순위로 프로에 입단했으나 지명 순위가 말해주 듯 허구연이 코치연수 중이던 1990년에는 큰 기대를 받지 못했다. 타율역시 2할초반대에 머물렀다. 그러나 허구연에게는 타격 시 팔이 들리는 약점이 보였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더운 날씨에도 100여개 이상의 공을 던져주는 관심을 보였다. 이후 타율은 2할7푼대까지 올라갔고 1992년 메이저리그에 입성하더니 2000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시절에는 내셔널리그 MVP에 선정됐다.
이후 켄트는 허구연에게 금테가 둘러진 메이저리그 초청장을 보냈고 2001년 허구연이 샌프란시스코 취재를 위해 방문했을 때는 만사를 제치고 적극적으로 인터뷰에 응하기도 했다.
허구연의 관심은 로베르토 알로마에게도 이어졌다. 1990년 트레이드로 블루제이스 유니폼을 입은 알로마는 당시 허구연이 2군 선수들에게 마사지를 해 주던 것을 보고 부러워했다. 이후 1993년 취재 차원에서 스카이돔(현 로저스센터)을 찾은 허구연에게 알로마는 "오늘 안타를 3개 칠테니 마사지를 해달라"고 요구했다. 사진은 허구연이 로베르토 알로마에게 마사지를 해주고 있는 모습. 하지만 이날 알로마의 안타는 2개 였다.
1991년 말 해설위원으로 복귀한 허구연은 선수, 감독, 해설, 미국코치 등의 경험을 바탕으로 야구 해설가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국내 야구 및 미국 메이저리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물론 영어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1994년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입성하게 되면서 그 역시 국민 해설가 반열에 오르게 된다. 1994년 한국인 최초로 당시 LA다저스 토미 라소다 감독을 인터뷰하는 허구연(위). 미국 무대를 밟은 박찬호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는 허구연(아래)
박찬호에 이어 1999년 김병현이 메이저리그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 입단하자 허구연의 해설가로서의 능력은 더욱 발휘 된다. 사진은 2002년 당시 김병현과 촬영한 것으로 김병현은 전년도인 2001년 아시아인 최초로 월드시리즈에 출장하는 기록을 세웠다. 허구연은 "당시 김병현이 마무리를 계속 했다면 세미 소사가 나와도 3구3진으로 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선수였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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