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허구연

백삼/이한백 2014. 3. 4. 09:43

[매경닷컴 MK스포츠 임성윤 기자] 허구연(63) 한국야구위원회 야구발전위원장이자 MBC 야구 해설위원, 야구가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로 자리매김 하면서 스타급 선수들만큼이나 대중들에게 친숙해진 인물이다.

30년이 넘는 해설 경력 때문일까? 그의 해설에는 막힘이나 주저함이 없으며 단시간에도 어려운 상황들을 쉽게 풀어주는 친절함이 배어 있다. 거침없는 해설에는 완고하리만치 끊임없이 수반되는 노력들이 숨어 있다.

30여년은 선수로, 30여년은 해설로 살아온 야구인 허구연의 인생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기에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이 야구관련 지식들이 솟아 나오는 것일까? 그가 소중히 간직해 온 사진들을 통해 야구인 허구연의 단편들을 짚어보도록 하자.

1980년대 초 광주구장에서 야구 중계를 하고 있는 허구연. 직접 마이크를 들고 관중들 사이에서 이어폰을 낀 채 해설을 하고 있는 모습이 색다르다. 사진 왼쪽 캐스터는 MBC 고창근 아나운서.

허구연은 경상남도 진주에서 1951년 태어나 부산에서 자랐다. 그는 부친을 닮아서인지 어려서부터 덩치가 컸다. 1955년 경 아버지와 나들이를 나갔을 때의 허구연. 허구연은 5남매중 4째 아들로 태어났고 3명의 형들은 모두 서울 소재 명문대에 진학한 엘리트로 성장했다.

허구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명문이었던 부산중학교에서 야구특기자로 입학제의가 왔지만 허구연은 라이벌 명문이었던 경남중학교에 시험을 쳐서 합격했다. 3명의 형들이 상대 공대로 진학했기에 허구연은 은연중에 법대에 가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모친 역시 경기고-서울법대로 이어지는 KS 마크를 바라기도 했다.

그럼에도 학교에서는 허구연에게 야구를 지속 할 것을 권유했다. 당시 사회분위기는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큰 덩치와 강력한 스윙을 앞세운 강타자에 투수능력까지 갖춘 허구연을 그냥 놔 둘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허구연에게 서울 법대를 기대하던 집안에서는 야구를 크게 반대했으나 야구에 뜻을 둔 허구연은 경남고등학교 시절까지 주전을 놓치지 않았다.

경남중학교 3학년 때의 허구연, 허구연은 경남중학교 시절 타자로서의 능력(위)과 투수로서의 능력(아래)을 모두 뽐냈다.

경남고등학교로 진학한 뒤에도 허구연은 1학년 때부터 주전을 놓치지 않았다. 경남고등학교는 허구연이 1학년이던 1967년 제 21회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동대문운동장에서 우승을 자축하고 있는 경남고 야구부, 오른쪽 4번째 등번호 3번이 허구연이다.

경남고 3년 내내 중심타자로 활약한 허구연. 1960년대 당시 목조건물이던 경남고의 모습이 이채롭다.

허구연은 1971년 고려대학교에 체육교육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다시 대입 시험을 치러 공부로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72학번으로 재입학하는 엄친아의 면모를 드러냈다.

고려대학교 야구부 주장 시절 허구연. 사진은 1974년 고연전 당시의 야구 축구 농구 아이스파키 럭비 부 주장들의 기념 촬영이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허구연. 왼쪽 첫 번째는 연세대 야구부 주장이었던 신중국 전 공군야구단 감독이다.

프로야구가 존재하지 않던 70년대 중반, 야구선수들의 목표는 국가대표였다. 허구연도 마찬가지였으며, 고교대표팀을 거쳐 국가대표가 됐다. 1974년 국가대표 시절의 허구연(왼쪽). 당시 국가대표 야구팀의 유니폼은 벨트가 없는 새로운 형식의 디자인을 선보였다.

1978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석사학위를 받을 때의 허구연(왼쪽). 1975년 대학을 졸업한 허구연은 한일은행으로 들어가 실업야구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1976년 대전에서 있었던 한일 실업야구 올스타전에서 정강이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다. 4번의 수술이 받아야 했던 큰 부상. 그러나 허구연은 병상에서 하루 10시간 이상의 공부를 통해 고려대학교 법대 대학원에 합격했다. 가운데 인물은 지도교수였던 심재우 교수.

교수가 되리라 마음먹고 경기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던 허구연은 1982년 MBC로부터 프로야구 해설을 해달라는 제의를 받는다. 틈틈이 라디오 방송에서 해설을 한 영향이었다. 교수냐 해설이냐의 기로에 섰던 허구연은 국내 최초의 연봉제 해설가로 데뷔하게 된다. 허구연은 출연료 형식으로 지급되던 당시 관례를 깨고 연봉 1400만원에 프로 해설가가 됐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잠실야구장에서 해설을 하고 있는 허구연. 당시 중계는 중계박스가 아닌 테이블 석에서 직접 마이크를 잡은 채 진행 됐다. 왼쪽은 국내 야구 전문 캐스터 1호인 김용 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