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프로야구 난투사](40)한국야구 '난투극 원조'는 1910년대, 패싸움, 자해, 심판구타..장난 아니었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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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프로야구 난투사](40)한국야구 '난투극 원조'는 1910년대, 패싸움, 자해, 심판구타..장난 아니었네
출처 OSEN 입력 2014.01.28 09:23 수정 2014.01.28 11:52기사 내용
'오성구락부는 1914년 11월 10일 한반도 내 최강팀으로 군림하던 용산철도국(일본인 팀)에 도전, 훈련원에서 치열한 난타전 끝에 14-13으로 1점 차 승리를 낚았다. 이 경기를 지켜보던 일본인 관중들은 뜻밖의 패배에 화가 난 나머지 몽둥이를 휘두르며 오성구락부 선수들에게 덤벼들었고 한국인 관중들은 이에 맞서 서로 치고 받아 경찰이 동원되고 나서야 간신히 사태를 수습하는 집단 난투극을 벌였다. 이런 관중들의 집단 난투극은 굵직한 한 일전이 벌어질 때마다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사건으로 한민족의 울분을 토해내는 배설구 역할을 했다. (중략) 이런 상황에서(용구 부족 등 어려운 여건을 지칭함) 오성학교 선배들이 스탠드에 몰려와 응원을 펼치면 선수들은 죽을 각오로 뛰어야 했다. 왜냐하면 선수들이 지는 날에는 선배들이 낙담한 나머지 돌 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이마에서 피를 흘리는 자해행위를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끔찍한 광경을 보지 않으려면 한층 더 다부지게 분발할 수밖에 없었다.' (1999년 대한야구협회, 한국야구위원회 공동 발행 < 한국야구사 > 제2절 '1910년대 오성의 전성시대와 지방야구발전' 가운데 발췌 인용)
한국야구 초창기에 이런 풍경은 그리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다. 황성기독청년회(YMCA)와 더불어 당시 쌍벽을 이루었던 오성학교에서 야구선수를 했던 이원용(생몰연대 미상)의 증언도 그 같은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한국야구사의 기록은 해방 이후 대한야구협회 이사장을 지냈던 이원용의 증언과도 궤를 같이한다.
1950년대 대표적인 종합잡지인 < 신태양 > 1956년 6월 특집호(제 5권 6호, 통권 46호)에는 초창기 한국야구의 실정을 잘 알 수 있는 귀중한 증언이 실려 있다. 1919년 조선체육회 발기인의 일인이었던 이원용이 자신의 선수 경험담 등을 담은 회고록 '野球半世紀(야구반세기)의 野話(야화):짚신 신고 맨손으로 하던 야구 이야기'를 8쪽에 걸쳐 술회해 놓은 것이다.
이원용의 회고록인 '야구반세기의 야화'는 '스포-쓰 奇譚(기담)'이라는 부제를 달고 '스파이크 代身(대신) 짚신', '가슴으로 뽈 막아낸 뽈', '亂鬪劇(난투극)도 한몫', '必死的(필사적)인 껨', '三十五年前(35년전)의 美國職業軍(미국직업군)', '解放後(해방후)의 野球(야구)' 등 소제목으로 단락을 나누어 당시 선수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경기의 뒷얘기를 흥미롭게 풀어놓았다.
그의 증언에는 한국야구사의 이정표가 될 만한 중요한 역사적인 사실들도 들어 있다. 주로 필자의 기억에 의존한 회고여서 일부는 정확한 날짜가 밝혀지지 않은 아쉬움이 있지만 여태껏 야구사에 실려 있지 않은 사건과 일화를 확인할 수 있다.
그의 회고록에는 그야말로 '짚신 신고 맨몸으로 야구를 하던',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같은 웃지 못 할, 가슴 아린 추억담이 듬뿍 실려 있다. 일제 치하에서 야구마저도 그네들의 억지와 탄압에 짓눌려 숱한 고통을 겪은 일도 털어놓았다.
이원용은 자신이 다녔던 오성중학 야구부의 실정을 예로 들어 '야구공은 일본 미만진(美滿津)제 공을 몇 개 사가지고 쓰다가 이것이 터지면 제 손으로 꿰매어 쓰고, 목면으로 만든 유니폼에 부치는 마크도 제 손으로 그려 넣었다'고 했다. 물론 글러브도 모자라 선수들이 돌려가며 썼다.
이원용은 "오성중학은 이같이 사재를 써가며 열심히 한 결과 일본인 야구단의 강적 철도, 왜성, 체신 등 팀들과 매년 수차례의 대항전을 가졌는데 체신과 왜성은 오성의 실력이 앞서 거의 승리를 거두었으나 체신과는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오성이 승리하는 날에는 철도 응원단이 습격해 난투가 벌어져 경기장은 수라장이 되기 일쑤였다. 오성 선수들이나 응원단은 경기가 끝나자마자 배트를 들고 그에 맞서기도 했다."고 응원단 난투 광경을 전했다.
이원용은 또 "조선체육회 창립 기념으로 1920년(그는 1919년으로 기술했으나 이는 착오로 실제는 1920년이 맞다) 11월에 배재학교운동장에서 제1회 전조선 야구대회를 열어 오늘의 기반을 쌓기 시작했다. 야구열이 점차 고조되기 시작해 이듬해(1921년) 2회 대회는 용산철도국운동장에서 개최, 결승전에서 경신과 배재가 맞붙었는데 주심을 맡았던 내가 경신 투수 이종호군의 투구에 볼을 선고했더니 경신 주장 박천호 군이 이에 불복, 항의함으로써 나는 결연히 몰수게임을 판결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몰수게임이다."고 술회했다. 경신응원단은 몰수게임 판정에 대해 이원용을 둘러싸고 위협하며 구타까지 했으나 그는 그에 개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 후 더 큰 난투극 사건이 일어났다. "1921년 5월에 < 새동무 > 라는 잡지사가 전국소년야구대회를 배재학당운동장에서 열었는데 결승전에서 배재와 성서주일(城西主日)학교 사이에 패권을 다투게 됐다. 그런데 성서주일학교 투수가 규칙에 위배된다고 배재측에서 항의했지만 주최측이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분개한 배재 응원단 700여명이 돌격나팔을 불면서 본부석을 습격한 불상사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 전신) 이사회는 '앞으로 5년간 배재학교는 야구는 물론 다른 경기 전반에 걸쳐 출장금지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원용은 일제의 탄압 사례도 몇 가지 기술해 놓았다.
"매년 가을에 철도국 주최로 열리는 야구대회에 오성중학이 진용을 강화하기 위해 평양으로부터 이용석(2루수), 이학근(유격수) 두 선수를 불러서 연습을 했는데 일본 경찰 고등계가 둘을 구속, 경기 당일에도 풀어주지 않았고, 오성이 그대로 출전해 5-3으로 이기자 철도국원들이 우승기를 가지고 달아난" 사실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원용은 특히 개인의 노력으로 1921년 가을에 미국직업야구단(메이저리그) 선발팀을 초청한 일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이원용이 조선체육회장 고원훈의 승낙을 얻어 여비로 200원을 받고 동일은행에서 500원을 빌려 일본 고베로 가서 미국선발팀의 허버트 H 헌터 감독을 찾아가 방문경기를 성사시킨 비화를 털어놓았다.
이원용은 헌터 감독이 처음에는 '코리아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세계 일주여행의 일정을 변경할 도리가 없다며 거절을 했으나 같은 호텔에 투숙하고 야구장을 쫓아다니며 우리나라의 기후, 풍토를 자랑했더니 단원들이 회의한 다음 겨우 한 게임을 서울에서 거행하자는 승낙을 받았다'고 그 경과를 설명했다. 메이저리그 선발팀의 방한 허락을 받고 귀국한 이원용은 그러나 조선체육회 이사회가 대회 지원을 거부하는 바람에 결국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사비를 들여 대회를 치렀다.
메이저리그 선발팀은 모두 26명의 선수단으로 구성, 메이저리그 심판인 모리아리티가 주심, 이원용이 부심을 맡아 한국 선발팀과 경기를 했는데 경기 전 헌터 감독이 이원용에게 29-1로 이기겠다고 예언했다. 결과는 29-2였으므로 한 점 차이가 났는데, 이는 메이저리그 3루수의 수비 실수로 한국이 한 점을 더 얻어낸 때문이었다.
헌터 감독은 경기 후 그날 밤 명월관에서 열렸던 환영회 석상에서 "경기 전에 이원용 씨에게 말한 바와 같이 29-1로 이기겠다고 했으나 3루수 스티븐슨의 실수로 한 점을 더 허락한 것은 미국 팀이 진 것과 같다"는 말로 내빈 일동을 폭소시켰다. 이원용은 '미국 선수들의 기술은 예상 이상으로 신통해서 일본에서도 상대방에게 그 점수를 예언할 수 있게끔 자유자재로 대전했다'고 기술해 놓았다.
이원용의 회고를 통해 우리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난투극의 원조라고 불러도 좋을 그라운드 패싸움이 1910~1920년대에 빈번히 일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마구잡이 싸움박질 수준이었지만 1904년에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한국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야구를 가르친 이래 단 기간 안에 그만큼 야구가 일상 속에 자리를 잡았음을 알게 해주는 일화들이다.
☞ < 신태양 > 은 1949년 1월호(1948년 12월 16일 발행)로 창간된 1950년대 월간 종합잡지로 발행인 겸 편집인은 황준성(黃俊性), 발행소는 서울 중구 태평로2가 신태양사였다. 판형은 A5판, 면수는 350쪽 내외였다. 1959년 6월 1일 통권 제80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이 잡지는 시, 소설, 수필 등 문학작품과 시사정보, 사회, 경제 등에 관련된 논문을 수록함으로써 종합잡지의 구색을 갖추었다. 6·25 동족상잔 전쟁을 겪으며 어려운 가운데서도 종합잡지의 면모를 갖추고 내용도 충실했던 당대의 대표적인 월간지의 하나였다.
1950년대 대표적인 종합잡지인 < 신태양 > 1956년 6월 특집호(제 5권 6호, 통권 46호)에는 초창기 한국야구의 실정을 잘 알 수 있는 귀중한 증언이 실려 있다. 1919년 조선체육회 발기인의 일인이었던 이원용이 자신의 선수 경험담 등을 담은 회고록 '野球半世紀(야구반세기)의 野話(야화):짚신 신고 맨손으로 하던 야구 이야기'를 8쪽에 걸쳐 술회해 놓은 것이다.
이원용의 회고록인 '야구반세기의 야화'는 '스포-쓰 奇譚(기담)'이라는 부제를 달고 '스파이크 代身(대신) 짚신', '가슴으로 뽈 막아낸 뽈', '亂鬪劇(난투극)도 한몫', '必死的(필사적)인 껨', '三十五年前(35년전)의 美國職業軍(미국직업군)', '解放後(해방후)의 野球(야구)' 등 소제목으로 단락을 나누어 당시 선수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경기의 뒷얘기를 흥미롭게 풀어놓았다.
그의 증언에는 한국야구사의 이정표가 될 만한 중요한 역사적인 사실들도 들어 있다. 주로 필자의 기억에 의존한 회고여서 일부는 정확한 날짜가 밝혀지지 않은 아쉬움이 있지만 여태껏 야구사에 실려 있지 않은 사건과 일화를 확인할 수 있다.
그의 회고록에는 그야말로 '짚신 신고 맨몸으로 야구를 하던',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같은 웃지 못 할, 가슴 아린 추억담이 듬뿍 실려 있다. 일제 치하에서 야구마저도 그네들의 억지와 탄압에 짓눌려 숱한 고통을 겪은 일도 털어놓았다.
이원용은 "오성중학은 이같이 사재를 써가며 열심히 한 결과 일본인 야구단의 강적 철도, 왜성, 체신 등 팀들과 매년 수차례의 대항전을 가졌는데 체신과 왜성은 오성의 실력이 앞서 거의 승리를 거두었으나 체신과는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오성이 승리하는 날에는 철도 응원단이 습격해 난투가 벌어져 경기장은 수라장이 되기 일쑤였다. 오성 선수들이나 응원단은 경기가 끝나자마자 배트를 들고 그에 맞서기도 했다."고 응원단 난투 광경을 전했다.
이원용은 또 "조선체육회 창립 기념으로 1920년(그는 1919년으로 기술했으나 이는 착오로 실제는 1920년이 맞다) 11월에 배재학교운동장에서 제1회 전조선 야구대회를 열어 오늘의 기반을 쌓기 시작했다. 야구열이 점차 고조되기 시작해 이듬해(1921년) 2회 대회는 용산철도국운동장에서 개최, 결승전에서 경신과 배재가 맞붙었는데 주심을 맡았던 내가 경신 투수 이종호군의 투구에 볼을 선고했더니 경신 주장 박천호 군이 이에 불복, 항의함으로써 나는 결연히 몰수게임을 판결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몰수게임이다."고 술회했다. 경신응원단은 몰수게임 판정에 대해 이원용을 둘러싸고 위협하며 구타까지 했으나 그는 그에 개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 후 더 큰 난투극 사건이 일어났다. "1921년 5월에 < 새동무 > 라는 잡지사가 전국소년야구대회를 배재학당운동장에서 열었는데 결승전에서 배재와 성서주일(城西主日)학교 사이에 패권을 다투게 됐다. 그런데 성서주일학교 투수가 규칙에 위배된다고 배재측에서 항의했지만 주최측이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분개한 배재 응원단 700여명이 돌격나팔을 불면서 본부석을 습격한 불상사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 전신) 이사회는 '앞으로 5년간 배재학교는 야구는 물론 다른 경기 전반에 걸쳐 출장금지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원용은 일제의 탄압 사례도 몇 가지 기술해 놓았다.
"매년 가을에 철도국 주최로 열리는 야구대회에 오성중학이 진용을 강화하기 위해 평양으로부터 이용석(2루수), 이학근(유격수) 두 선수를 불러서 연습을 했는데 일본 경찰 고등계가 둘을 구속, 경기 당일에도 풀어주지 않았고, 오성이 그대로 출전해 5-3으로 이기자 철도국원들이 우승기를 가지고 달아난" 사실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원용은 특히 개인의 노력으로 1921년 가을에 미국직업야구단(메이저리그) 선발팀을 초청한 일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이원용이 조선체육회장 고원훈의 승낙을 얻어 여비로 200원을 받고 동일은행에서 500원을 빌려 일본 고베로 가서 미국선발팀의 허버트 H 헌터 감독을 찾아가 방문경기를 성사시킨 비화를 털어놓았다.
이원용은 헌터 감독이 처음에는 '코리아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세계 일주여행의 일정을 변경할 도리가 없다며 거절을 했으나 같은 호텔에 투숙하고 야구장을 쫓아다니며 우리나라의 기후, 풍토를 자랑했더니 단원들이 회의한 다음 겨우 한 게임을 서울에서 거행하자는 승낙을 받았다'고 그 경과를 설명했다. 메이저리그 선발팀의 방한 허락을 받고 귀국한 이원용은 그러나 조선체육회 이사회가 대회 지원을 거부하는 바람에 결국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사비를 들여 대회를 치렀다.
메이저리그 선발팀은 모두 26명의 선수단으로 구성, 메이저리그 심판인 모리아리티가 주심, 이원용이 부심을 맡아 한국 선발팀과 경기를 했는데 경기 전 헌터 감독이 이원용에게 29-1로 이기겠다고 예언했다. 결과는 29-2였으므로 한 점 차이가 났는데, 이는 메이저리그 3루수의 수비 실수로 한국이 한 점을 더 얻어낸 때문이었다.
헌터 감독은 경기 후 그날 밤 명월관에서 열렸던 환영회 석상에서 "경기 전에 이원용 씨에게 말한 바와 같이 29-1로 이기겠다고 했으나 3루수 스티븐슨의 실수로 한 점을 더 허락한 것은 미국 팀이 진 것과 같다"는 말로 내빈 일동을 폭소시켰다. 이원용은 '미국 선수들의 기술은 예상 이상으로 신통해서 일본에서도 상대방에게 그 점수를 예언할 수 있게끔 자유자재로 대전했다'고 기술해 놓았다.
이원용의 회고를 통해 우리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난투극의 원조라고 불러도 좋을 그라운드 패싸움이 1910~1920년대에 빈번히 일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마구잡이 싸움박질 수준이었지만 1904년에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한국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야구를 가르친 이래 단 기간 안에 그만큼 야구가 일상 속에 자리를 잡았음을 알게 해주는 일화들이다.
이 잡지는 시, 소설, 수필 등 문학작품과 시사정보, 사회, 경제 등에 관련된 논문을 수록함으로써 종합잡지의 구색을 갖추었다. 6·25 동족상잔 전쟁을 겪으며 어려운 가운데서도 종합잡지의 면모를 갖추고 내용도 충실했던 당대의 대표적인 월간지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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