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도산 안창호 생애 초기 [출생과 가계, 교육 계몽 운동]|

백삼/이한백 2014. 2. 10. 10:03


출생과 가계

도산 안창호는 평안남도 강서(江西) 초리면 7리 봉상도(도롱섬)에서 1878년 11월 9일 농부인 [2] 순흥 안씨 안흥국(安興國)과 황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대는 문성공 안향(安珦)의 후손으로, 대대로 평양 동촌(東村)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때에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으로 옮겨왔다. 아호인 도산(島山)은 도롱섬에서 따서 지은 것이었다.

그러나 12세 때 아버지 안흥국을 일찍 여의고 할아버지의 손에 자랐다. 9세부터 서당에 다니기 시작하였다.[3] 조숙했던 그는 서당에 함께 다니며 공부하던 몇년 연상의 필대은(畢大殷) 등과 함께 국내·외[3]의 이런 저런 문제에 대해서 많은 토론을 하기도 했다.[3]

[편집]교육 계몽 운동

1894년 16세때 안창호는 평양이 청일전쟁으로 파괴당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어 평양을 벗어나 그 해 서울로 상경, 선교사 언더우드가 운영하는 구세학당 보통부에 입학하였다. 구세학당 재학 중 장로교에 입교하였다. 1897년 서재필·이승만·윤치호 등이 주관한독립협회에 가입하였으며, 이승만, 양기탁윤치호이상재이동녕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였다. 안창호는 곧 만민공동회 관서지방 발기회에도 참여하였다.

안창호는 평양부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강연에 연사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였는데, 이 때 웅변가로 명성이 알려졌다. 이후 안창호는 곳곳에 순회강연을 다니기도 했고, 연사로 초빙되기도 했다. 1898년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안창호는 고향으로 돌아가 교육과 기독교 전도운동에 뛰어들었다. 1899년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와 탄포리교회를 설립하였고, 인근 황무지를 농지로 개간하는 간척사업을 추진하였다. 1902년 이혜련과 결혼하였고 그 해 11월 4일 아내와 함께 출국, 미국으로 건너간다.


자료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C%95%88%EC%B0%BD%ED%98%B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