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도산 안창호 독립운동 [독립운동과 제1차 도미, 제2차 도미]|

백삼/이한백 2014. 2. 10. 10:04


독립운동

[편집]독립운동과 제1차 도미

1902년 안창호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면서 하우스 보이로 취직해 2~3년 동안 일하였다. 이후 리버사이드로 이사하여 오렌지 따는 일을 하였다. 유학생 신분이던 1905년 장남이 필립이 태어났고, 그는 한인친목회를 발족시켜 한인공립협회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피선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17일 대한제국의 박제순과 일본 정부의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 제국이 빼앗자, 1907년 안창호는 귀국하여 대한 사람[4]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하는 애국 계몽 운동 외에도 1904년 의친왕정재관(鄭在寬) 등과의 공립협회(共立協會) 창립, 1909년 김좌진·이갑(李甲) 등과의 서북학회 창립을 하였고 또한1907년 미국에서 귀국한 이후 신민회대한협회 대성학교 설립 등을 위해 서울과 평양 등에서 여러 차례 연설을 했다. 도산은 탁월한 웅변력으로 수천 인파의 마음을 사로잡곤 하였다.[5] 1907년 대한협회에서 주최한 강연에 참여해 연설을 하였는데, 그의 연설을 듣고 감동받은 여운형·여운홍 형제와 조만식은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기로 한다.[5] 그의 강연에 감화받은 조만식은 '장차 민족을 위해서 봉사하려면 실력을 키워야 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5] 1907년 2월에는 대한유학생회(大韓留學生會)의 초청연사로 초빙되어 강연하였다. 1908년 안창호는 대성학교를 평양에 설립하였는데, 당시 대성학교의 교육방침은 정직하게 살자는 것이었다. 1909년 청년학우회의 창설에 가담하였으나, 같은해 10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경성부 용산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수감당하였다. 

[편집]제2차 도미

1911년 안창호는 다시 한국을 떠나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와서 1919년까지 미국에서 가족과 함께 지냈다. 191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대한민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의 중앙 총회 조직에 참석하고 국민회 초대 총회장에 선임되었다. 이어 신한민보 발간.

한일 합병 이후인 1913년 흥사단을 창립하였으며, 이후 박용만정순만, 이승만과 함께 미국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하기도 했다.1918년말, 1919년 4월에 열리는 파리강화회의의 대표자로 이승만을 파견하였으나 미국 국무성에서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아 실패하였다.


자료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C%95%88%EC%B0%BD%ED%98%B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