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백삼/이한백 2014. 2. 3. 18:23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2) -- 거시적 재평가 --

유영익 / 연세대 국제대학원 석좌교수

 

 

Ⅲ. 이대통령의 업적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7월부터 1960년 4월까지 12년간 대한민국을 통치하였다. 이 기간에 그는 625전쟁(1950~1953)과 같은 미증유의 국난을 극복하면서 자기가 오랫동안 준비했던 건국구상에 따라 국가건설 작업을 진행시켰다. 아래에서 이대통령이 ‘건국’대통령으로서 개인적 노력을 통해서나 휘하의 정부기관을 통솔하면서 어떠한 업적을 달성하였는지를 정치, 외교, 군사, 경제, 교육, 사회, 문화 종교 등 일곱 분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1) 정치분야의 업적


이승만은 청년시절 독립협회의 청년층 지도자로서 대한제국의 정체개혁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둠으로써 장래에 정치가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과시한 바 있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개혁운동이 1899년에 실패하여 한성감옥에 투옥되자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그 때부터 기독교 전도와 신학문의 연마에 주력하였다.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1910년 정치학 박사학위 취득>

 

그 결과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근대 국가 건설에 필요한 학문 즉, 정치학 국제법 서양사 철학사 등을 공부하여 1910년에 정치학 분야의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이어서 서울과 호놀룰루에서 기독교 교육에 종사하였다. 이승만이 정치가로서 역사의 무대에 부상하는 것은 31운동을 계기로 여러 곳에 수립된 임시정부, 그 중에서도 특히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최고 지도자로 추대 되면서 부터이다.


그는 1919년부터 1925년까지 약 6년간 상해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직을 유지하면서 정치지도자로서의 경륜을 쌓았지만 불행히도 1925년 3월 사회주의 계열 및 興士團(흥사단) 계열의 인사들이 우세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으로부터 대통령직을 탄핵 면직 당했다.


그 후 그는 1940년까지 하와이에 본부를 둔 同志會(동지회)의 총재로서 상해-중경의 임시정부를 측면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1941년에 그는 동지회를 포함한 美洲(미주)내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이 참여한 在美韓族聯合委員會(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가담하여 그 단체의 주미외교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위원회의 지도부 인사들과 불화를 빚은 끝에 1943년 12월에 위원회를 탈퇴, 미주 내 독립운동에서 독자노선을 걸었다. 해방 전에 이승만은 이와 같이 해외 한인사회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획득하지 못하고 또 미 국무부로부터 고집이 센 ‘귀찮은 존재’로 따돌림을 받는 신세에 놓여있었다. 따라서 1945년 70세의 이승만은 그의 비판자들의 눈에 정치적 생명이 다 끝난 ‘외톨이’ 망명객처럼 비쳤다.

 

<우익세력 규합 反託운동 주도 미 소주도 신탁통치 좌절시켜>

 

해방 후 1945년 10월에 귀국한 이승만은 비판자들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귀국 후 3년 만에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이어서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2년 간 남한을 통치하였다.


노령의 이승만이 이와 같은 정치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오랜 기간에 걸쳐 축적된 그의 탁월한 정치 외교적 실력과 세계적 명성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해방정국에서 자웅을 결하게 된 여러 한국인 정치가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흐름을 정확하고 신속하게 판단하는 형안을 갖추었고 또 남한을 통치하던 미군정과 그 배후의 미국 정부를 상대로 협상을 벌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미국 내에서 자기의 외교활동을 적극 밀어주는 튼튼한 인맥이 있었다. 다른 한편 그는 해방 후 미증유의 혼란 상태에서 메시아의 출현을 갈망하는 대다수 남한 국민들에게 비젼을 제시하고 그들을 포섭할 수 있는 리더싶과 아울러 전국적인 조직과 넉넉한 정치자금이 있었다. 한마디로, 이승만은 해방 후 다른 정치인 내지 독립운동가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비상한 권능과 매력을 갖춘 카리스마적 지도자로서 해방정국에 소신대로 새 나라를 건국하고 통치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 고국을 떠난 지 33년만에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미소 양국이 일방적으로 결의한, 4대 강국에 의한 5년간의 신탁통치 계획을 무산시키고 1948년 8월 대한민국을 ‘자율적으로’ 건국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후 그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신생 공화국의 國基(국기)를 다지면서 이 땅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리는데 진력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 그의 추종자인 許政(허정)이 시인했듯이 ─ “오랜 미국생활에서 민주주의를 체득했으면서도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는데 실패하였다. 필자는 이대통령의 정치적 업적을 논함에 있어 대한민국의 건국에 끼친 이승만의 공헌을 중점적으로 살펴본 다음 대통령으로서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끼친 그의 초보적 공헌에 대해 논급하고자 한다.

 

가. 대한민국 건국에의 공헌


대한민국의 건국은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된 일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건국 과정에서 이승만의 역할은 단연 돋보였다. 그의 공헌은 쩖 반탁운동 주도, 쩗 남한 과도정부 수립안 제창, 쩘 남한 과도정부 수립을 위한 대미 외교, 쩙 유엔(UN) 감시하의 총선거 실시 지원, 쩚 대한민국 헌법제정 총괄, 쩛 신정부 조직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 등으로 나뉜다.

 

(1) 반탁운동 주도


이승만은 해방공간에서 金九(김구)가 영솔하는 임시정부, 宋鎭禹(송진우)金性洙(김성수)의 한국 민주당, 李允榮(이윤영)을 위시한 월남민들의 조선민주당, 任永信(임영신)이 조직한 여자국민당 등 여러 우익세력을 규합하여 반탁운동을 주도함으로써 미소 양국이 기도한 다자간 신탁통치계획을 좌절시켰다.

 

<“우리는 이 신탁통치를  `절대 반대하는 바이요”>

 

1945년 10월 20일 미 국무성 극동국장 빈센트(John Carter Vincent)가 장차 한반도에 신탁통치를 실시할 계획이 있다고 발표하자 이승만은 10월 29일 “우리는 이 신탁통치를 절대 반대하는 바이요,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도 이 제도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反託(반탁)의사를 밝혔다.


12월 28일에 ‘모스크바 협정’이 공표되고 1946년 3월에 서울에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로 약칭)가 열리게 되자 그는 자신이 조직한 大韓獨立促成國民會(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김구가 결성한 非常國民會議(비상국민회의)를 발족시키고 이 기구를 동원하여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승만은 1946년 4월 17일부터 6월 9일까지 南鮮巡行(남선순행)을 하면서 천안, 대전, 옥천, 옥구, 김천, 대구, 영천, 경주, 울산, 부산, 동래, 마산, 진해, 함안, 진주, 하동, 순천, 보성, 장흥, 목포, 광주, 정읍, 전주, 이리, 군산, 장호원 등지에 들려 반탁강연을 하였다.


그후 1947년 5월에 제2차 미소공위가 열리자 그는 또 다시 김구가 이끄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와 제휴하여 國民議會(국민의회)를 조직하고 全國學生總聯盟(전국학생총연맹, 위원장 李哲承(이철승))을 앞세워 대규모의 반탁 시위를 벌이는 등 격렬한 반탁 미소공위 거부운동을 전개했다.

 

<좌익우세 남한, 과도정부 수립 제창, 우익우세로 전환>

 

이러한 끈질긴 반탁운동은 대내적으로 찬탁을 지지한 南勞黨(남로당) 이외의 非(비)좌익계 국민들을 단결시킴으로써 해방 후 좌익 우세였던 정치 풍토를 우익 우세로 역전시키는데 기여하였고, 대외적으로 한반도문제에 관심이 있는 강대국들에게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널리 알림으로써 1947년 9월에 미국이 모스크바 협정을 파기하고 유엔을 통한 한국문제 해결을 모색하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요컨대, 이승만이 전개한 반탁운동 덕택으로 한민족은 일종의 보호국 정치라고 볼 수 있는 열강에 의한 5년간의 신탁통치를 면하고 3년 만에 자율적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할 수 있었다.

 

(2) 남한 과도정부 수립 안 제창


이승만은 제1차 미소 공위가 1946년 5월에 결렬되어 무기한 휴회하자 남한 과도정부 수립 안을 제창함으로써 향후 남한 정국에서 국민들이 지향할 좌표를 제시하고 이로써 국론을 통일하는데 기여하였다.
특유의 국제 감각과 정보력으로 국내외 정세를 예리하게 관망하던 이승만은 서울에서 개최된 미소공위가 아무런 성과 없이 무기 휴회 되자 미소협상에 의한 통일정부의 수립 가능성이 사라졌다고 판단하고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이제 우리는 무기화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치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라는 내용의 남한 과도정부 수립 론을 제창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미소공위가 실패한 이상 우리 민족은 미소간의 흥정에 더 이상 기대를 걸지 말고 우선 남한에서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고 그 기구를 이용하여 북한의 소련군을 철퇴시키는 공작을 펴서 통일정부를 수립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한반도 전체공산화 예방위해 불가피한 次善의 선택 單政>

 

이어서 그는 6월 29일 김구와 더불어 남한 과도정부 수립 추진기구로서 민족통일총본부를 결성하고 정부 수립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이승만과 김구 간의 협조관계는 1948년 초 김구가 남한 만의 총선거 실시에 반대하여 이승만과 결별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노력은 국내 비 좌익 세력들의 정견을 통일함으로써 사상적으로 좌익세력의 ‘신탁통치 후 건국 론’을 극복하고 나아가 남한 국민들로 하여금 나중에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된 총선거에 적극 참여하게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일부 현대사 연구자들은 이승만이 ‘單政(단정)노선’을 선창했기 때문에 그에게 남북분단 고착화의 책임이 있다고 지탄한다.


그러나 해방 후 북한을 점령한 소련의 스탈린(Joseph Stalin)이 1945년 9월 20일부터 이미 38선 이북 지역에 친소 정권을 세우기로 마음먹고 1946년 2월 북한에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위원장 김일성)라는 사실상의(de facto) 단독정권을 수립하여 ‘민주기지’ 건설이라는 미명아래 공산화 작업을 착착 진행시켰던 사실에 비춰볼 때 이승만은 단정의 선창자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가 택한 노선은 한민족이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예방하고 ‘자율적으로’ 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했던 차선의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3) 남한 정부수립을 위한


(3) 대미 외교


이승만은 1946년 12월에 미국을 방문하여 약 4개월간 워싱턴 D.C.에 머물면서 미국 조야를 상대로 남한 과도정부 수립 안을 홍보함으로써 1947년 7월 하순에 미국정부가 신탁통치 계획을 백지화하고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하여 남한에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변경하는데 기여하였다.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던가,  `소련과 함께 물러가라” 압력>

 

이승만은 제1차 미소공위가 무위로 끝난 다음 미군정의 지원 하에 추진된 金奎植(김규식)呂運亨(여운형) 중심의 좌우합작운동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1946년 12월 남조선대한민국대표민주의원 의장의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1947년 4월까지 워싱턴에 머물면서 미국 정부 지도자들과 언론을 상대로 유엔을 통해 남한에 과도정부를 수립할 것을 촉구하였다.


방미 기간 중 그는 트루먼(Harry S. Truman)대통령, 마샬(George C. Marshall) 국무장관, 그리고 리(Trigve Lie) 유엔 사무총장 등 한국문제 해결에 관건을 쥔 정치 지도자들과 면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그는 미국무성 점령지역 담당 차관보 힐드링(John R. Hilldring)을 면담하는데 성공하여 그로부터 자신의 남한 과도정부 수립 안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이 밖에도 그는 『뉴욕 타임즈』등 주요 언론매체를 통해 “한국은 내란의 위기 직전에 있다”, “북괴군 50만이 남침을 준비 중이다”, “하지(John R. Hodge)는 한국을 소련에 팔아넘기려고 한다”,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던가, 소련과 함께 물러가라”, “30일 내지 60일 이내에 남한에 군정을 인계할 과도 독립정부가 수립”될 것이라는 등의 기사를 흘림으로써 워싱턴 정가에 ‘코리아 돌풍’을 일으켜 ‘잊혀 진 나라’ 한국에 대한 미국 조야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하였다.


이승만의 귀국에 앞서 미국정부는 3월 12일 ‘트루먼 독트린(The Truman Doctrine)’을 발표하여 그 때까지 유화협력으로 일관했던 미국의 對蘇(대소)정책을 강경봉쇄로 전환하였다. 트루먼 독트린은 비록 이승만의 반공반소 사상에 직접 영향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를 계기로 미국은 모스크바 협정에 입각한 한반도 신탁 통치안을 포기하고 그 대신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통해 한반도에 통일된 독립정부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게 되었다. 미국의 이러한 정책 변경은 미국이 이승만의 남한 과도정부 수립안을 사후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의미했다.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510선거 실시 적극지원>

 

(4) 유엔한국임시위원단
    감시하의 총선거 실시 지원


미국은 1947년 5월에 서울에서 재개된 제2차 미소공위에서 기대했던 성과가 나타나지 않자 모스크바협정을 폐기하고 그 대신 유엔을 통한 한국문제 해결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1948년 5월 10일에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 ‘유엔위원단’으로 약칭) 감시하의 총선거가 남한에서 실시되었다. 이승만은 이 무렵 국내에서 끈질기게 총선거 조기 실시를 주장하고 또 총선 실시에 대비한 구체적 조치를 강구함으로써 유엔위원단이 510선거를 차질 없이 치를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였다.


1947년 9월 17일 미국의 마샬(George Marshall) 국무장관은 유엔총회에서 한국문제를 의제로 다룰 것을 정식으로 제안했다. 유엔총회는 소련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9월 23일 한국문제를 의제로 채택하였다. 10월 17일에 미국의 유엔대표부는 유엔 총회 정치 안보위원회에 ①1948년 3월 31일 이전에 남북한에서 인구비례에 따른 총선거 실시, ② 선거감시를 위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 파견, ③ 총선거 당선자들이 의회를 구성하여 통일 한국정부 수립, ④ 한국의 통일정부가 독자적인 군대를 조직하는 즉시 미소 양군 철수 등을 골자로 하는 한국문제관련 결의서 초안을 제출했다.


유엔총회는 11월 14일 정치위원회가 상정한 결의안을 수정 없이 찬성 43표, 반대 0표, 기권 6표로 채택하였다. 이렇게 하여 한반도 문제는 모스크바 협정과 미소 공동위원회라는 기존의 해결구도를 벗어나 유엔으로 그 무대를 옮기게 되었던 것이다.


유엔위원단은 1948년 1월 8일에 입국했다. 그 다음날 金日成(김일성)은 이 위원회의 입북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고, 소련은 1월 22일 유엔 소련대표 그로미코(Andrei Gromyko)를 통해 협조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이렇게 북한에서의 총선거 실시가 불가능해지자 유엔 위원단은 이 문제를 유엔 소총회(Little Assembly : UN Interim Committee of the General Assembly)에 회부했다.

 

<유엔 위원단 메논단장  이승만 지도력 극구칭찬  보고서 제출>

 

유엔 소총회는 2월 26일 미국의 입장대로 유엔위원단으로 하여금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한다는 결의안을 찬성 31표, 반대 2표, 기권 11표로 통과시켰다. 이는 남북한에서의 총선을 통한 단독정부 수립 안으로 변경시킨, 결정적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2월 28일 서울에서 열린 유엔위원단의 비공식 회의에서 위원단은 한국 내 접근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참관하기로 결정하였다. 유엔위원단이 이렇게 남한 총선 안을 수용하자 3월 1일 주한미군사령관 하지는 5월 9일(나중에 5월 10일로 변경)을 선거일로 발표하였다.


한국문제가 유엔에 회부되고 이어서 유엔위원단이 입국하게 되었을 때 이승만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는 미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 1947년 4월 28일에 열린 귀국 환영대회에서 ‘남조선과도정권’을 먼저 수립하고 그 다음에 이를 유엔에 가입시키자고 주장하였다. 1947년 여름, 미국이 제2차 미소공위 개최를 준비하자 그는 격렬한 반탁운동을 추진하는 한편 ‘자율적 계획’에 의한 남한 내 단독선거를 준비했다.


5월 21일부터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열리자 그는 미국이 소련과 함께 한국에서 ‘잡채정부(chop suey government)’ 설립을 시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6월 하순에 이르러 제2차 미소공위가 제1차 미소공위의 전철을 되풀이 하자 그는 하지의 해임을 요구하기도 했다. 7월 초에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되자 그는 “내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라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1947년 6월 27일에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보통선거법을 통과시킨데 이어 7월에 제2차 미소공위가 사실상 결렬되자, 이승만은 7월 10일 한국 민족대표자회의를 결성하고 미군정을 상대로 과도입법의원이 만든 보통선거법으로 조속히 선거를 실시할 것을 요구하였다. 1947년 9월, 한국문제가 유엔총회에 회부되었을 때 이승만은 한민당과 더불어 이를 환영하였다.


유엔위원단의 입국을 며칠 앞둔 1948년 정초에 그는 “다시 없이 좋은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우리의 이념인 민족자결주의를 선양, 국권수립에 매진하자”라는 신년사를 발표하였다. 1월 8일에 유엔위원단이 입국하자 그는 위원단에게 조속한 선거 실시와 정부수립을 역설하였다.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에서 남한단선을 결정하자 그는 이 결정을 적극 지지하였다.

 

<조병옥, 장택상 휘하경찰력 동원 총선 실시에 만전>

 

이승만은 유엔위원단의 단장인 인도 대표 메논(K. P. S. Menon)을 여류시인 毛允淑(모윤숙)의 미인계로 포섭함으로써 2월 26일 유엔 소총회가 한국문제에 대해 결의할 때와 2월 28일 유엔위원단 임시회의에서 표결을 할 때 자기의 입장에 유리한 결과가 나오도록 유도하는데 성공하였다.


모윤숙의 권유에 따라 梨花莊(이화장)에서 이승만을 면담한 메논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 안에 대해 중립적이었던 원래의 입장 ─ 즉, 인도정부의 입장 ─ 을 바꾸어 유엔 소총회에 이승만의 지도력을 극구 칭찬하는 보고서를 제출했고 또 유엔위원단 회의에서 소총회의 결의를 지지하는 찬성표를 던졌다.


이승만은 1947년 7월 10일 우익단체에서 선출한 ‘민족대표’들로써 민족대표자회의를 구성하고 남한 과도정부 수립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민족대표자대회는 김구가 이끄는 국민의회와 통합을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자 8월 26일 독자적으로 총선대책위원회(위원장 신익희)를 구성하였다. 총선대책위원회는 1947년 말까지 하급조직을 남한 각지의 시 군 구에 이르기까지 완료하였다.

 

<“자유의사를 합법적으로 표현” 510선거 공정성 합법성 인정>

 

또한 1948년 2월에는 선거운동의 전위대로 4개 우익청년단체를 통합한 구국청년총연맹을 결성하는 등 선거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이승만과 동조한 한민당 역시 1947년 11월 선거대책대강을 작성하고 막대한 자금을 조달하며 『동아일보』를 이용한 선전을 통해 총선거 실시의 만전을 기하였다. 특히 한민당원인 趙炳玉(조병옥) 경무부장과 張澤相(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은 휘하의 경찰력을 동원하여 총선거를 무난히 치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한국 역사상 초유의 총선거인 510총선거는 이승만을 받드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으로 약칭), 한민당, 조선민주당, 여자국민당, 그리고 독촉의 산하단체인 청년조선총동맹(회장 유진산), 서북청년회(위원장 문봉재), 민족통일총본부, 대동 청년단(단장 지청천), 대한독립노동총연맹(의장 전진한), 조선민족청년단(단장 이범석)등이 주동이 되어 실시되었다.


이들 외에 무소속이 대거 참여했다. 좌익과 중간파의 대부분, 그리고 우파중의 임시정부계 인사들은 총선거를 보이콧했다. 좌파의 남조선 單選單政(단선단정)반대투쟁위원회는 510총선을 앞두고 총선을 파탄시키기 위한 무장폭동을 선동하면서 모든 좌익단체에 총선파탄 투쟁을 위한 총동원령을 내렸고, 단선단정반대투쟁 총파업위원회는 총파업을 선언했다.


그러나 5월 10일의 투표는 미군정이나 유엔위원단이 우려했던 것보다는 평온하게 실시되었다. 전국 각 지역의 투표소에는 경찰관과 鄕保團(향보단) 단원이 배치되어 경비를 하고, 유엔위원단과 수많은 외국기자들이 투표 진행 상황을 지켜보는 가운데 투표가 실시되었다. 각지에서 투표소 피습사건, 경찰관 우일인사 피살사건, 통신 교통시설 파괴, 노동자 파업, 학생 맹휴 등이 산발적으로 발생했다. 그 결과 5월 7일부터 10일까지 사상자수는 ─ 유엔위원단의 보고에 따르면 ─ 사망 128명, 부상 137명에 달했다.


그러나 투표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전반적으로 큰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최종 집계에 따르면, 전국의 투표율은 등록자 대비 95.2%, 총유권자 대비 71.6%에 달했다. 유엔위원단은 5월 13일 공보를 통해 “선거를 전체적으로 보아 매우 원활히 그리고 조직과 효율성의 면에서는 상당히 좋은 수준으로 진행되었다”라고 선거 감시 결과를 발표했다.


이어서 6월 25일에 “1948년 5월 10일의 선거 결과는 위원단의 접근이 가능하고 전 한국 민의 3분의 2를 점하는 지역의 선거 민들이 그들의 자유의사를 합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라는 결의안을 채택함으로써 유엔위원단은 선거의 공정성과 합법성을 인정하였다.

 

(5) 대한민국 헌법 제정 총괄


이승만은 1948년 5월 31일에 소집된 制憲國會(제헌국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어 대한민국 헌법과 정부조직법의 제정 작업을 총 지휘하는 책임을 맡아 그 임무를 완수하였다. 헌법의 起草(기초)는 당시 ‘서울 장안에서 거의 유일한 헌법학자’로 알려진 兪鎭午(유진오)를 비롯한 헌법 기초 전문위원들과 국회 헌법기초위원회(위원장 徐相日(서상일)) 소속 위원들이 담당하였다. 이 때 이승만은 의장으로서 헌법 제정에 남다르게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평소 新大韓의 政體는 대통령제여야 된다는 소신>

 

즉, 그는 헌법기초위원 30명과 헌법기초 전문위원 10명을 선임하고 전문위원들이 마련한 헌법 초안을 헌법기초위원회와 국회 본회의에서 심의 통과 시킨 다음 공포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그는 헌법기초위원회에서 마련한 헌법초안의 권력구조 관련규정을 자기의 뜻에 맞게 수정하도록 설득함으로써 신생 대한민국의 정부형태를 대통령중심제로 확정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평소에 新(신)대한의 정체는 미국식 대통령제여야 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던 이승만은 6월 7일 기자회견을 통해 “대통령을 군주같이 앉혀 놓고 수상이 모든 일에 책임을 진다는 것은 비 민주제도일 것이다.


민중이 대통령을 선출한 이상 모든 일을 잘 하던지 못하던지 대통령이 책임을 져야할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라는 내각책임제를 반대하면서 ‘대통령책임제’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 후 헌법기초위원회에서 마련한 초안이 내각책임제라는 소식을 듣자 그는 두 번이나(6월 15일, 6월 21일) 기초위원회 회의에 출석하여 내각책임제 초안을 대통령중심제 안으로 바꾸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순전히 한국인의 의지와 능력만으로 헌법 제정에 성공>

 

6월 21일에 그는 기초위원회에서 “만일 내각책임제를 채택하면 [자기는] 그러한 헌법 하에서는 어떠한 직책에도 취임하지 않고 민간에 남아 국민운동이나 하겠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러한 그의 압력이 주효하여 헌법 기초위원회는 6월 23일 ‘내각책임제 요소가 약간 가미된 대통령중심제’ 혹은 ‘미국의 대통령제와 영국의 의회제를 혼합한 대통령중심제안’을 본회의에 상정했다.


6월 23일부터 시작된 국회 본회의에서의 헌법초안 심의에서는 내각중심제와 대통령제, 양원제와 단원제 등 권력구조를 둘러싼 문제가 쟁점으로 부각했다. 그밖에 국가통제를 규정한 경제조항, 근로자의 권익보호 조항, 대통령의 긴급명령권, 반민족행위자 처벌 특별법 제정 문제 등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대체로 무소속을 중심으로 한 소장파 의원들은 이승만의 뜻에 맞춘 권력구조 조항을 비판한 반면, 이승만을 받드는 독촉과 한민당 소속의원들은 되도록 빨리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상정된 헌법안을 조속히 통과시킬 것을 역설했다.


결국 이승만이 주장한 대통령중심제가 채택되었고 대통령 선출방법으로는 국회에서 선거하는 間選制(간선제)가 채택되었다. 헌법안은 본회의에서 13차의 회의를 거쳐 ─ 국회에서 헌법에 대한 토론이 시작된 지 34일만인 ─ 7월 12일에 통과되었다. 이승만 의장은 국회에서 통과된 헌법을 ─ 7월 16일에 통과된 정부조직법과 함께 ─ 7월 19일 헌법공포식을 통해 공포했다.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당선 서울 중앙청 광장서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

 

이승만은 외국의 압력이나 도움을 받지 않고 순전히 한국인의 의지와 능력만으로써 헌법을 제정하고 또 자기의 소신대로 대한민국의 권력구조를 대통령중심제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이 밖에도 그는 헌법 초안 심의 과정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의 채택, 兩院制(양원제) 대신 單院制(단원제) 국회 구성안 채택, 국무위원 임명에 대한 국무총리의 提薦權(제천권) 부결 등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대한민국 헌법은 1941년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공포한 大韓民國建國綱領(대한민국건국강령), 1947년에 입법의원이 통과시킨 朝鮮臨時約憲(조선임시약헌) 그리고 1948년 초에 북한에서 작성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등 우리의 헌법안은 물론 미국 헌법, 독일의 바이마르 헌법, 일본의 메이지 헌법(明治憲法) 등 선진 외국의 헌법들을 두루 참고하여 만든 이상적인 헌법이었다.


헌법 前文(전문)에서 “대한민국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 독립국가를 계승하여”라고 천명함으로써 대한민국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정신(민족주의 이념)을 계승했음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함으로써 새로 건국된 국가가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적 및 이념적 법통을 이어받은 국가임을 확인하였다.


이 헌법은 평등권, 자유권, 재산권, 교육권 등 기본권의 보장, 3권 분립을 통한 권력간 견제와 균형, 사법권의 독립, 지방자치 등 근대 자유민주주의 헌법이 갖추어야 할 사항을 모두 내포하였다.


정치면에서 내각책임제 요소가 가미된 대통령중심제 정부형태와 단원제 국회제도를 채택했다. 경제면에 있어서 자유경제체제를 원칙으로 하되 ‘사회 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경제의 발전’이라는 한계 내에서 경제적 자유를 인정하며 주요 자원이나 산업에 대해서는 국유 내지 국공영의 원칙을 따를 것을 천명했다.


이 점에서 헌법의 경제조항들은 국가 사회주의적 경향을 띠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농지개혁, 노동3권, 노동자의 기업이익 분배 균점 권, 반민족행위자 처벌 근거조항 등 건국과정에서 제기된 일반 국민들의 여망을 광범하게 수용하였다. 이 헌법이 제정 공포 됨으로써 대한민국은 민족주의, 자유민주주의 및 사회정의에 바탕 한 민주공화국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6) 신정부의 조직과


(4) 대한민국 수립 선포


헌법이 공포된 다음 이승만은 7월 20일에 실시된 국회에서의 대통령선거에서 재석의원 186명 가운데 180명이라는 압도적인 지지표를 얻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7월 24일 대통령직에 취임한 그는 8월초에 李範奭(이범석)을 수반으로 한 초대 내각의 인선을 마치고 이어서 대법원장에 金炳魯(김병로)를 임명했다. 국회도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 후 공석으로 남았던 국회의장에 신익희를 선출했다. 이로써 대한민국 정부는 3부의 수장을 모두 갖춘 정부로서 출범했다.


이대통령은 1948년 8월 15일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극동연합군총사령관 맥아더,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의장 루나(Luna)등을 배석시킨 가운데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을 거행하였다. 이 자리에서 하지는 15일 밤 자정을 기해 미군정이 종식됨을 공표하였다.

 

<“우리는 하루빨리 한데 뭉치어  우리 땅 우리국가를 찾아놓고...>

 

새 정부가 수립된 다음 한미 정부 간에 정권 이양 협상이 시작되어 8월 24일에는 대한민국 정부에 경찰, 통위부, 해안경비대 등의 통솔권 내지 통수권의 점진적 이양을 규정한 ‘한미 군사협정’이 조인되었으며, 9월 11일에는 양 정부간에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정권 이양 절차가 마무리되었다. 12월 12일에 유엔총회는 대한민국을 공식적으로 승인하고, 이에 정통성과 국제적 지지를 부여하는 미국의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 결의안은 그 후 대한민국이 전 한반도에 걸쳐 통치권을 갖는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었다.


해방 직후(1945.10.17) 이승만은 서울에서 가진 첫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하루 빨리 뭉치고 대동단결하여 우리의 자주독립을 얻어야 한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 중 가장 긴급한 문제는 완전 독립이 아닌가. 그러자면 하루 빨리 뭉쳐야 할 줄 안다. 한데 뭉치어 우리 땅을, 우리 국가를 찾아놓고 전 인민의 총선거를 단행하여 새 국가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될줄 안다”라고 말하였다.


1945년 11월 4일에 그는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대표 자격으로 미 영 중 소 연합국 수뇌들에게 서한을 발송하여 “우리[한국민]는 지금 당장 독립을 원하며 ... 1년 내에 우리 집을 지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해방 후 이승만은 이데올로기의 좌우를 초월하여 온 국민을 단결시켜 1년 이내에 남북을 아우르는 독립 국가를 건국하려고 했다.

 

<이승만의 공적은 李成桂  李芳遠의 업적에 비길만>

 

그러나 그는 이미 세계적 냉전체제에 휘말린 남한 정국에서 좌우를 망라한 전 국민의 통합에 실패했고 또 남북을 합친 독립국가를 1년 이내에 건국하는데 실패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난마와 같이 흐트러진 남한정국에서 한편으로는 좌익과 일부 중간파 세력 및 임시정부지지 세력을 제외한 대다수 국민을 단합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으로 하여금 신탁통치 계획을 포기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를 통해 비록 남한에서 만이라도 해방 후 3년만에 대한민국을 탄생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해방 후 한국이 처했던 국내외의 여건이 한민족의 이상과 의지만으로는 통일국가를 건설하기가 극히 어려운 상황이었음을 고려할 때 이승만이 주도한 대한민국 건국은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면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이승만의 공적은 조선왕조를 창건한 太祖(태조) 李成桂(이성계)와 왕조 초창기에 치밀하게 국가의 기반을 다져놓은 현실주의 정치가 太宗(태종) 李芳遠(이방원)의 업적에 비길 만하다.

 

나. 초대 대통령으로서 한국


나. 민주주의 ‘발전’에 끼친 공헌


1948년 8월 15일에 거행된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에서 이대통령은 새로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가 실천할 다섯 가지의 시정방침을 제시하는 가운데 그 제1항으로서 다음을 천명했다.

 

<“의로운 것이 종말에는  惡악을 이기는 이치를  우리는 믿어야”>

 

민주주의를 전적으로 믿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 국민 중에 혹은 獨裁制度(독재제도)가 아니면 어려운 시기에 나갈 길이 없는 줄로 생각하며 또 혹은 共産分子(공산분자)의 파괴적 행동에 중대한 문제를 해결할 만한 지혜와 능력이 없다는 관찰로 독재권이 아니면 방식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으나 이런 것은 우리가 다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目下(목하)의 사소한 장애로 인하여 영구한 복리를 줄 민주주의 방침을 무효하게 만드는 것을 우리가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독재가 자유와 진흥을 가져오지 못하는 것은 역사에 증명된 것입니다. 민주제도가 어렵기도 하고 또한 더디기도 한 것이지만 의로운 것이 종말에는 악을 이기는 이치를 우리는 믿어야 할 것입니다. 민주제도가 세계 우방들이 다 믿는 바요 우리 우방들이 專制政治(전제정치)와 싸웠고 또 싸우는 중입니다. 세계의 이목이 우리를 들여다보며 역사의 거울이 우리에게 비추어 보이는 이때에 우리가 민주주의를 채용하기로 30년 전부터 결정하고 실행하여 온 것을 또 간단없이 실천해야 될 것입니다. 이 제도로 성립된 政府(정부)만이 인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부입니다.

 

요컨대 그는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독재정치를 단호히 배격하고 민주주의 정치를 기어이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웅변조로 다짐하였다.


그러나 그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봄 다가오는 국회에서의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예상한 나머지 악명 높은 ‘부산 정치파동’을 일으켜 정 부통령의 直選制(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이른바 ‘발췌 개헌안’을 국회에 상정하여 이를 7월 4일 공포분위기의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그렇게 개정된 헌법에 따라 그는 8월 5일에 치러진 직선제 정부통령 선거에서 제2대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 이와 같이 그는 민주주의 절차를 유린하고 일종의 ‘무혈 혁명’을 통해 재집권함으로써 국내외 언론에서 ‘독재자’로 낙인이 찍혔다. 그렇다면 왜 그는 이러한 치명적 불명예를 무릅쓰고 스스로의 약속을 위반하면서 무리하게 개헌을 감행했던가? 이에 대한 답은 구구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당시 이승만의 입장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던 한 정치가, 즉 부산 정치파동 초기에 국무총리 署理(서리)였던 허정의 견해를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겠다. 허정은 이대통령이 개헌을 무리하게 단행한 배경과 동기를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신생공화국 정치구조에 대한  판단과 결단 옳았음을 방증>

 

당시 국회 다수파였던 民主國民黨(민주국민당)...은 이대통령의 독선을 규탄하며 張勉(장면)박사를 2대 대통령으로 선출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사실상 국회와 이대통령 사이에는 적지 않은 마찰이 있어서 이대통령은 국회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고, 국회는 이대통령에게 반대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립과 반목이 초대 대통령 임기 종료를 앞두고 이대통령을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움직임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간선제를 그대로 두고는 이대통령의 재선은 상당히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나 이대통령은 국민이 자신의 재선을 바라고 있으며 자신의 집권은 일종의 당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이대통령이 재선을 바란 것은 개인적인 집권욕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통일을 이룩하려면 자신의 계속적인 영도가 꼭 필요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여 남북 분단이 고정된데 대해 대단한 책임감을 느끼고 통일에 대해 비장한 의무감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의 힘으로 반드시 통일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집념 때문에 대통령 재선을 일종의 사명으로 여기고 있었다.

 

배경과 동기는 여하튼 이대통령은 1952년 7월의 제1차 개헌을 통해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어 놓았다. 그 후 그는 1954년의 제2차 개헌(이른바 ‘4사5입’개헌)을 통해 국회의 동의를 거쳐 임명하게 되어있던 국무총리의 자리를 아예 폐지하였다.

 

<이승만의 독재는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독재보다 훨씬 더 ‘민주적’>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국회로부터 견제를 받지 않고 국민이 직선하는 대통령이 되었다. 이는 대한민국이 동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미국식 대통령중심제를 모방한 나라가 된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정착된 직선 대통령중심제는 1960년에 그가 하야한 다음 8개월의 단명으로 끝난 張勉(장면)총리의 제2공화국과 박정희 대통령의 維新(유신)기간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남한정치의 기본 구조로 기능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1961년 이후 대한민국의 대다수 정치인은 대통령중심제를 선호해왔다.


이 사실은 1948년 헌법 제정 당시는 물론 1952년과 1954년의 개헌 당시 신생 공화국의 정치구조에 관한 이대통령의 판단과 결단이 그르지 않았음을 방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하튼 이대통령은 1952년 제1차 개헌부터 1960년 419까지 ‘가부장적 권위주의자’로서 ‘1인독재’를 통해 대한민국을 통치했다. 그렇다면 이 기간에 그는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조금도 기여한 바가 없었는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는 약 8년간 권위주의적 통치를 행하면서 아래와 같이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는 업적을 남겼다.


(1) 이대통령은 집권기간에 국민이 선거를 통해 정부통령과 국회의원, 그리고 지방의회 의원들을 뽑는 관행을 확립함으로써 한국 국민의 민주주의 정치 경험 축적에 기여하였다. 이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은 선거가 반드시 자파에 유리하지 않을 때에도 ─ 부정선거를 감행하면서 까지 ─ 선거를 정규적으로 실시함으로써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했다. 이 점에 있어 이대통령의 ‘독재’는 朴正熙(박정희) 및 全斗煥(전두환) 대통령 등의 ‘군사독재’에 비해 훨씬 더 ‘민주적’이었다.


(2) 이대통령은 그의 집권 기간에 국회를 한반도 해산하지 않고 유지함으로써 이 땅에 대의민주주의가 뿌리 내리는 데 기여하였다. 이대통령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 국회를 해산할 것을 여러 번 고려하였고 실제로 지방의원들과 ‘민중 자결단’등을 사주하여 국회 해산 요구 시위를 하도록 선동하였지만 “초대 대통령인 나로서는 국회를 해산시켰다는 전례를 만드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끝내 국회를 해산하지 않았다. 그 후에 그는 국회에 직접 간접으로 탄압을 가하였지만 국회라는 제도를 계속 유지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의 외피를 벗어던지지 않았다. 이 점 역시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독재와 구별되는 업적으로 간주될 수 있다.

 

<兩黨制度 허용 지방자치제 도입으로 민주주의 기초 다져>

 

(3) 이대통령은 집권 말기에 自由黨(자유당)과 民主黨(민주당)의 대결구도로써 상징되는 보수 兩黨制度(양당제도)의 출현을 용인함으로써 근대적 정당제도의 발달에 기여하였다. 주지된 바와 같이, 이대통령은 1951년에 직선제 개헌 추진을 염두에 두고 그 때까지의 초당적 입장을 버리고 자유당이라는 관제여당을 발족시켰다.


그런데 1954년 제2차 개헌을 계기로 護憲同志會(호헌동지회)가 결성되고 이를 모체로 거대 야당인 민주당이 탄생함으로써 남한에는 자유당과 민주당으로써 대표되는 양당제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 두 보수정당은 1958년 5월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무소속(27석)과 통일당(1석)을 제치고 자유당 126석, 민주당 79석이라는 압도적 다수를 확보하였다. 이것은 그동안 선거 때마다 적어도 1/3이상의 의석을 차지했던 무소속과 진보 정당을 포함한 군소 정당들의 몰락을 의미했고 나아가 한국 민주주의 역사상 최초로 양당제가 실현된 것을 의미했다.


(4) 이대통령은 지방자치제를 도입함으로써 풀뿌리 민주주의의 성장에 기여하였다. 이대통령은 1952년 2월, 즉 제1차 개헌을 앞둔 시점에서 자기의 심복인 전 차인국장 張錫潤(장석윤)을 내무부장관에 기용하여 그로 하여금 1949년 7월에 제정 공포된 지방자치법에 따라 ─ 원래 1950년 12월에 실시될 계획이었으나 625전쟁으로 말미암아 연기된 ─ 지방의회 선거를 실시토록 하였다.


그 결과 1952년 4월 25일에 시 읍 면 의원선거가 실시되고, 5월 10일에는 도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시 읍 면 선거에서는 정원 387명 가운데 자유당은 118명(31%)을 당선시킴으로써 무소속 의원 148명(40%)과 함께 야당에 대해 압승을 거두었다. 도의원 선거에서도 자유당은 정원 306명 가운데 147명(48%)의 당선자를 냄으로써 무소속과 4석을 건진 야당(민국당)을 제치고 압승을 거두었다. 여하튼 이러한 지방선거를 거쳐 5월 20일에 한국 역사상 최초로 지방의회인 각도의회가 開院(개원)하였던 것이다. 지방자치제는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필수요건으로서 1919년에 이승만이 소집한 필라델피아 회의에 참가했던 독립운동가들이 소망했던 사항의 하나였다.

 

<비판적인 전기 작가 알렌도 李대통령의 언론의 자유 폭넓게 허용사실 인정>

 

(5) 이대통령은 집권기간에 언론의 자유를 비교적 폭넓게 허용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 신장에 기여하였다. 이대통령 집권기에 한국에는 신문과 잡지 등 많은 정기간행물이 발간되었다. 그 가운데 지식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매체는 『동아일보』, 『경향신문』, 『사상계』등이었다. 주지된 대로, 이 세 가지 매체들은 김성수가 창당한 한민당, 장면을 지지하는 가톨릭 교회, 그리고 김구가 이끌었던 한독당의 입장을 각각 대변하는 야당계 정기간행물이었다.


그런데 이대통령은 적어도 1957년 11월에 국회에서 ‘언론규제조항’을 통과시킬 때까지 이들 야당계 출판물에 대한 통제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리고 국회에서 통과시킨 언론규제 조항도 이승만과 자유당이 의도했던 대로 언론의 비판적 논조를 꺾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비판적 논조를 강화시키는 역효과를 초래하였다.


달리 말하자면, 이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은 1959년 4월에 『경향신문』에 대해 폐간조치를 취하기까지 ─ 즉, 419의거가 일어나기 1년 전까지 ─ 언론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을 가하지 않았다. 이승만에 대해 비판적인 전기를 쓴 알렌조차 이대통령이 언론의 자유를 폭넓게 허용한 사실을 인정했다.


요컨대, 이대통령은 1952년 이후 권력 확장에의 끊임없는 집착에도 불구하고 언론의 자유를 폭넓게 허용하였고, 선거와 의회 제도를 존속시켰으며 지방자치제를 도입하는 등 민주주의 창달에 도움이 되는 조치를 취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제1공화국 시기의 정치를 ‘사이비 민주주의’정치 혹은 ‘외양적 민주주의(facade democracy)’정치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제1공화국기의 권위주의적 지배는 박정희 전두환 등으로 대표되는 군부의 독재에 비해 비교적 溫和(온화)화였다고 말할 수 있다.

<완전 민주주의 준비단계로 교도민주주의 정치 실행>

 

이상을 통해 우리는 이승만대통령이 1952년 이후 ‘거의 전제적인’ 1인 독재로 남한을 통치하되 상당히 폭넓게 언론자유를 허용하고, 선거제도, 의회제도, 지방자치제도 등을 ‘발달’시키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10여년에 걸친 권위주의적 통치기간에 민주주의 기본이 되는 주요제도들을 온존 내지 발달시킴으로써 남한 국민들로 하여금 민주주의를 실천하는데 필요한 경험을 축적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것은 1919년에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대한인 총 대표회 참가자들이 채택한 「한국민의 목표와 열망」(‘나’안)과 1920년 서재필이 이승만에게 건의한 「(임시)정부의 정책 및 조직 대강」(‘라’안)에 나타난 敎導民主主義(교도민주주의)적 구상과 일맥상통한다. 즉, 이대통령은 한국 국민이 ‘완전한’ 민주주의 정치를 실천 향유하기 전에 거쳐야 하는 준비 단계로서 일종의 교도민주주의 정치를 실행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기본입장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이대통령의 정치적 업적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다를 수 있다.


이승만은 일찍이 1904년에 한성감옥에서 탈고한 『독립정신』에서 “외교를 친밀히 하는 것이 지금 세상에 나라를 부지하는 법으로 알아야 할지니 만일 외교가 아니면 형세가 외로워서 남의 침탈을 면할 수 없다”라고 갈파한 바 있다.


그 후 그는 대한제국의 밀사로 미국에 건너가 러일전쟁의 중재역을 맡은 미국대통령 T. 루즈벨트를 면담(1905.8.4)하고 러일전쟁 종결 후 대한제국의 독립보존을 위해 미국대통령이 거중조정을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처녀 외교를 시발점으로 그는 31운동 이후 미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주로 미국을 상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획득을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는 1921~22년간 워싱턴에서 개최된 워싱턴 군비축소회의(The Washington Disarmament Conference)와 1933년에 제네바에서 개최된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회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전권대사로 활약했고, 1941년 이후 해방까지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자격으로 미국 대통령들(F. 루즈벨트와 트루먼)과 국무성을 상대로 외교교섭을 끈질기게 벌였다.

<“外交의 神’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돋보이는 외교적 업적>

 

이러한 그의 외교활동은 모두 기대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통해 한국인 지도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국제외교의 경험을 쌓았다. 그 결과 그는 1948년에 대통령이 된 다음 외교계 일각에서 ‘외교의 神(신)’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돋보이는 외교 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그는 1948년 12월 유엔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선거가 가능했던 지역에서 수립된 한반도 내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받았고 이어서 1949년 말까지 미국을 위시한 약 30개 국가들로부터 승인을 획득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 미군의 즉각적인 개입을 실현시킨 것도 그의 빛나는 외교업적이었다. 1952년 1월 일방적으로 ‘인접해양에 관한 주권에 대한 대통령발언(일명 ‘평화선’, ‘이승만 라인’)을 선포하고 해양경비대를 창설하여(1953.12) 1965년 6월 韓日漁業協定(한일어업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獨島(독도)를 포함한 인접 해상에서 한국의 주권을 행사하고 어족자원을 보호한 것은 대일 외교사상 보기 드문 쾌거였다.


이대통령 집권기에 대한민국 외무부는 미국, 자유중국, 영국, 프랑스, 필리핀, 독일, 베트남, 터키 등 8개 국가에 대사관을, 유엔과 일본에 대표부를, 이태리에 공사관을, 8개 도시에 총영사관을 설치하는 등 도합 17개의 재외공관을 설치함으로써 그 때까지의 한국 역사상 최 대 폭의 외교 망을 구축하였다. 이대통령의 지도하에 한국 외교관들은 1954년 개최된 제네바 정치회담에 미국 등 열강의 대표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참석하여 본격적인 외교활동을 벌였다.

 

<외교업적의 白眉는 53년 10월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

 

그는 중화민국, 필리핀, 베트남의 국가 원수들과 긴밀히 협의하면서 太平洋同盟(태평양동맹)을 통한 아시아 집단안보체제의 결성을 모색하고, 1954년에는 아시아민족반공연맹을 결성하는 등 이 지역의 반공 반일 전선 구축에 앞장섰다.


이대통령은 1954년 7월에 국빈자격으로 워싱턴을 방문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정상회담(7.27~29)을 하고 미국 상하 양원 합동의회에서 연설(7.28)했는데 이 역시 한국 외교사상 이정표적인 행적이었다.


이대통령이 이룩한 여러 가지 외교적 업적 가운데 백미는 역시 1953년 10월에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이대통령은 미국이 대한민국을 승인한 직후부터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시도했다.


즉, 그는 1949년 3월에 장면 초대 주미대사와 조병옥 대통령 특사 겸 유엔대표단 단장으로 하여금 미국정부를 상대로 약20만으로 추산되는 북한의 군사력을 능가하는 국군을 육성하는데 필요한 군사원조를 요청하면서 상호방위조약(a mutual security pact)의 체결 가능성을 타진케 했다.

 

<이승만의 한미상호방위조약  요구에 아이젠하워 등 美 지도자들 거부반응>

 

그러나 미국 측은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대통령시대이래 어느 나라와도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일이 없다”라는 이유를 내세워 이 제의를 묵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대통령은 트루먼 행정부가 1949년 여름 주한미군의 철수계획을 통보하자 5월 17일 미군 철수를 인정하는 대신 미국이 한국과 상호방위협정을 체결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이대통령은 625전쟁 발발 후 1950년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의 양상이 극적으로 달라진 다음 트루먼 대통령이 1951년 4월 11일에 맥아더를 해임하고 5월 13일에 국가안보회의의 결정을 거쳐 ‘정치적 타결’을 통해 38선 부근에서 휴전을 모색하기로 방침을 정하자 휴전은 한국인에게 ‘사형집행 영장’이나 다름없다고 규탄하면서 휴전에 완강히 반대하였다.


1952년 3월 초에 트루먼 미대통령에게 보낸 공한에서 그는 한미 양국 간에 상호방위조약(a mutual security treaty)을 체결하는 것만이 한국민 들에게 휴전을 납득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만약 미국이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한국군은 단독으로 북진통일을 하겠다고 위협했다. 트루먼은 이대통령의 단독북진을 ‘공상(fantasy)’이라고 일축하고 그의 조약체결제의를 묵살하였다.


이대통령은 1952년 말 미국대통령 선거에서 전쟁의 명예로운 조기 종결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된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가 1953년 2월 대통령직에 취임하자 그를 상대로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시도하였다. 그는 4월 14일 아이젠하워에게 “만일 미국 정부가 한국에 방위조약을 제공한다면 그것은 한국 민이 전쟁을 계속 수행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라고 하면서 조약 체결을 제의했다. 그 후 그는 4월 30일과 5월 12일에 각각 서한과 면담을 통해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Mark W. Clark)대장에게도 같은 취지의 의사를 전달했다.


이 같은 이대통령의 거듭된 조약 체결 요구에 대해 아이젠하워 대통령, 덜레스(John F. Dulles)국무장관 및 콜린스(J. Lawton Collins) 육군참모총장 등 미국 지도자들은 거부반응을 나타내었다. 그들은 휴전 후 한국에 있는 미군의 대부분을 오끼나와로 철수시키되 한국의 안보를 위해서는 16개 유엔 참전국들이 공동으로 한국의 안보를 보장하며 적이 재침할 경우에는 전쟁을 한반도에 국한시키지 않겠다는 내용의 ‘大制裁宣言(대제재선언:the Greater Sanctions Declaration)’을 공포하고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시켜주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이러한 미국의 입장을 5월 25일 주한 미국대사 브리그스(Ellis O. Briggs)와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를 통해 이승만에게 전달하였다.

 

<유엔군 사령관 동의 없이 반공포로 2만7천여 명 석방>

 

미국의 이 같은 방침에 실망한 이대통령은 유엔참전국의 대 제재선언 따위는 ‘전혀 무의미한 것’이라고 평하고 “당신들은 유엔군을 모두 철수시켜도 좋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것입니다. 누구한테도 우리를 위해서 싸워달라고 요청하지 않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민주국가들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한 것이 우리의 잘못이었습니다. 미안합니다만 현재의 상황에서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협조를 약속해 줄 수 없습니다.”고 언명하였다.


클라크 사령관은 이대통령이 앞으로 미국의 휴전 노력을 방해하기 위해 극단적 행동을 취할 우려가 있다고 미 합참본부에 보고하였다.


이 보고에 접한 워싱턴의 미 합참본부 요원들과 국무부 정책입안자들은 1953년 5월 29일과 30일에 긴급회의를 열고 이대통령을 무마할 방책을 모색한 결과 미국이 기왕에 필리핀 내지 태평양 국가들과 맺은 방위조약에 준하는 조약을 한국과 체결하자는데 합의하였다.

 

<“어차피 적들에게 팔릴바엔 통일될 때까지 전쟁 하겠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이 정책건의를 받아드려 6월 6일 이승만에게 휴전 후 한국과 미 필리핀 조약 내지 ANZUS(Australia, New Zealand and the United States)조약에 준하는 방위조약을 체결할 용의가 있다고 통보하였다. 이는 미국이 종전의 입장에서 후퇴한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대통령은 아이젠하워의 제안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이 휴전 성립 ‘이전에’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되 미 필리핀 조약이나 ANZUS에 준하는 조약이 아니라 미군의 일본영토 내 시설과 구역 사용권을 허여한 美日安保條約(미일 안보조약)에 준하는 조약을 체결할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미국으로부터 최대한의 양보를 이끌어내기 위해 미리 계획한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즉, 그는 6월 16일 반공포로 27,000여명을 유엔군 사령관의 동의 없이 독단으로 석방한 것이다. 이로써 그는 미국이 한국의 요구를 외면하고 일방적으로 휴전을 성사시키려고 할 경우 한국은 미국이 추구하는 휴전을 얼마든지 방해할 수 있다는 점을 미국 측에 주지시켰다.


이승만의 일방적인 포로 석방조치에 당황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8군 사령관 테일러(Maxwell D. Taylor)가 5월 4일에 미리 준비해놓은 ‘비상상비 계획(Plan Everready)’에 따라 이승만을 권좌에서 몰아내고 군정을 실시할 수도 있었지만 이 방안을 선택하지 않고 이승만과 타협하기로 결정하였다.


아이젠하워는 국무성의 극동문제 담당 차관보 로버트슨(Walter S. Robertson)을 대통령 특사로 서울에 급파하여 그로 하여금 한국과 상호방위조약 체결 협상을 벌이도록 조처하였다.


이대통령과 로버트슨은 6월 26일부터 7월 10일까지 2주간 서울에서 ‘축소판 휴전회담(mini truce talk)’을 벌였다. 회담 도중에 이승만은 로버트슨에게 다음과 같이 미국의 양심을 건드리는 발언을 했다.

우리는 [1882년에 朝美(조미)조약을 체결한 이후] 미국을 확고히 신뢰했지만 과거에 미국에게 두 번씩이나 배반을 당했습니다. 즉, 1910년에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했을 때와 1945년에 한국이 분단되었을 때입니다. 현재의 상황은 또 하나의 배반 같은 것을 시사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제부터 우리 친구[미국인]들에게 지금까지 품고 있던 무조건적인 신뢰를 의심하기 시작한다면 당신[들]은 우리를 탓하겠습니까?

 

그는 또 “우리가 미국과의 협력을 [무조건] 지속하다간 우리는 ‘또 하나의 [자유]중국’이 되어버리던가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40년 전 한국의 모습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차피 적들에게 팔려질 바에는 차리리 한국이 통일될 때까지 우리는 전쟁을 계속 하겠습니다”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이대통령과 로버트슨은 7월 9일 다음과 같은 합의에 도달했다. 즉, 이승만은 “휴전에 서명하지는 않겠지만 그것을 방해하지는 않겠고” 또 “유엔군이 한국의 이익에 배치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 한 한국군을 그 휘하에 남겨두겠다”라고 약속했다.

 

<1954년 11월 17일 변영태 장관과 브리그스 대사 비준서 교환>

 

반면에 로버트슨은 ①휴전 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 ② 한국의 전후복구를 위해 장기간 경제 원조를 제공한다. ③ 한국군의 병력을 육군 20개 사단으로 증강하며 해군과 공군의 장비를 지원한다. ④ 휴전협정에 따라 개최될 국제 정치회담에서 90일이 지나도록 별로 진정이 없을 경우 한미 양국은 이 회담과는 별도로 한국의 통일방안을 협의한다는 등 네 가지를 약속했다. 두 사람은 상호방위조약의 초안을 교환하고 7월 11일에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것으로 회담을 마쳤다.


이렇게 마련된 ‘한미상호방위조약(The Mutual Defence Treaty between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United States)’안은 이대통령이 8월 초에 방한한 미 국무장관 덜레스와의 회담에서 한 번 더 수정 보완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 8월 8일 경무대에서 대한민국 외무부장관 卞榮泰(변영태)와 덜레스 간에 假(가)조인되었다. 그 후 두 사람은 10월 1일 워싱턴D.C.에서 다시 만나 정식으로 조약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이 발효되기까지에는 1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주한미군으로 하여금 유사시 미국 자동개입 ‘인계철선’ 기능 발휘케 보장>

 

왜냐하면 이 조약이 발효되기 위해서는 한국 국회와 미국 상원에서의 비준 절차를 거쳐야했고 또 締約(체약)당사국이 조약에 따라 수행할 경제 및 군사협력에 관한 협정이 추가로 마련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한국 국회와 미국 상원은 1954년 1월과 1월 26일에 각각 이 조약을 비준했다.


군사 및 경제협력에 관련된 한미 간의 협정은 이대통령이 1953년 7월에 워싱턴을 방문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후 양국 실무자들 간 워싱턴과 서울에서의 줄다리기 협상을 거쳐 1954년 11월 17일 ‘경제 및 군사문제에 관한 한미합의의사록(Agreed Minute Relating to Continued Coopera-tion in Economic and Military Matters)’이라는 이름으로 조인되었다. 워싱턴에서 ‘합의의사록’이 조인되던 날 양국을 대표하여 변영태 장관과 브리그스 대사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비준서를 상호 교환함으로써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비로소 발표되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前文(전문)과 6조로 구성되어 있다. 이 조약은 우선 체약 당사국은 양국이 합법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영토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을 자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국제적 분쟁을 유엔의 정신에 따라 가급적 평화적인 수단으로 해결하기로 약속하고 있다(제1조). 그러나 어느 한쪽이 외부로부터 무력공격에 의해 위협받을 경우 상호 협의 하에 단독이든 공동이든 그것을 저지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규정하고(제2조), 그러한 조치를 취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각자의 헌법상의 수속에 따라 행동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제3조).


이 두 조항만을 두고 보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할 경우 양국은 상호 협의를 거친 후 각자의 ‘헌법상 절차를 거쳐’ 군사행동을 취함으로써 미군의 자동개입이 유보되어 있다.


그러나 이 조약에는 ‘상호적 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라는 조항(제4조)이 설정되어 주한미군으로 하여금 引繫鐵線(인계철선:trip-wire)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아 사실상으로 자동개입을 보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 조약은 양국의 헌법상의 수속에 따라 비준되고 그 비준서가 교환된 다음 발효한다고 규정하고 있다(제5조). 마지막으로 이 조약은 한미 양국이 원하는 한 무기한으로 유효하다고 선언하고 있다(제6조). 전체적으로, 이 조약은 남한에 미군의 주둔 권을 허용한 점에서 미 필리핀조약 혹은 ANZUS조약보다 미일 안보조약과 유사성이 많은 조약이다.

 

<“우리 후손들은 앞으로 누대에 걸쳐 갖가지 혜택 누릴 것이다”>

 

1954년 11월에 조인된 ‘합의의사록’에서 “대한민국은... 유엔군 사령부가 대한민국의 방위를 책임지는 한 그 군대를 유엔군사령부의 작전 통제권 하에 둔다”(제2조)라고 규정함으로써 한국은 이대통령의 염원인 ‘북진무력통일’의 꿈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으로부터 1955년 회계년 도에 7억 달러 규모의 군사 경제 원조를 제공받고, 10개 예비사단의 신설과 79척의 군함과 약100대의 제트전투기를 제공받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은 육군 661,000명, 해군 15,000명, 해병대 27,500명, 그리고 공군 16,500명으로 구성되는 총 720,000명의 군대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합의의사록’을 통해 이대통령은 미국과 동맹관계를 수립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會心(회심)의 북진무력통일 구상을 포기하는 대신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할 경우 미국의 자동적 개입을 거의 확실히 보장받았으며, 한국이 ‘70여만 대군’을 보유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무시 못할 군사대국으로 부상하는 기반을 마련했으며, 나아가 戰禍(전화)로 파괴된 남한의 경제시설을 戰前(전전)의 수준으로 복구할 수 있게 되었다.

 

<한미동맹의 보호 우산은 한국의 획기적 발전의 토대이자 촉진제>

 

특히 그는 상호방위조약을 통해 미군의 남한 내 주둔을 의무화시킴으로써 미국이 과거 1882년에 체결해놓고 조약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던 전철을 밟지 않도록 미국의 발목을 단단히 잡아놓았다. 이것은 이대통령이 자기 특유의 ‘벼랑 끝 협상전략”을 발휘하여 달성한 역사상 보기 드문 외교적 위업이었다.
이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가 조인을 한 다음날(8.9) 이 조약의 가치에 대해 아래와 같이 스스로 평가했다.

 

이제 한미방위조약이 체결되었음으로 우리의 후손들은 앞으로 누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혜택을 누릴 것이다. 이 분야에 있어서 한미 양국의 공동 노력은 외부 침략자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여 우리의 안보를 오랫동안 보장할 것이다.

 

한미동맹의 성립으로 남한은 미국의 동아시아 집단안보체제에서 반공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이대통령은 자신의 숙원인 무력통일을 부득이 포기했고 나아가 남한영토 내에 미군의 주둔을 허용하고 국군의 작전통제권을 미군에 예속시킴으로써 우리 민족의 자존심과 국가의 주권을 훼손시켰다. 그러나 이 동맹은 이대통령의 豫斷(예단)대로 625전쟁 휴전 후 지금까지 남한에 갖가지 ‘혜택’을 안겨다 주었다.


한미동맹이 가져온 유형무형의 혜택 가운데에는 ① 한반도 및 그 주변의 장기적 평화, ② 경이적인 경제발전, ③군사강국으로의 발 돋음, ④정치의 민주화, ⑤ 전 세계적 외교망의 구축, ⑥ 해양 국가로서의 탈바꿈 등이 포함된다.

 

<韓美동맹은 김춘추의 羅唐맹약에 비유되는 외교업적>

 

요컨대, 남한은 한미동맹의 ‘보호우산’아래 군사, 정치, 외교,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면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발전은 바로 19세기 말~20세기 초 조선의 개혁가들이 추구했던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이라는 국민적 이상의 성취를 의미했다.


이대통령이 실현한 한미동맹은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조선/대한제국 위정자들이 갈망했지만 성사시키지 못했던 聯美(연미)의 꿈을 실현시킨 것으로서 역사적으로 647년에 신라의 金春秋(김춘추:태종무열왕)가 唐(당)나라 太宗(태종)과 맺은 맹약에 비교되는 외교적 업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