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역사, 소식

조천성 전투 : 7C 중반 신라와 남부여간의 최대 화약고

백삼/이한백 2013. 12. 2. 16:12

조천성 전투 : 7C 중반 신라와 남부여간의 최대 화약고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고분

 

 

655년 남부여와 고구려는 신라를 일시에 공격한다. 일종의 군사공조였다. 이때 신라는 33성이 함락되어 위기를 맞는다. 무열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한다. 당나라는 화답하고 곧바로 고구려를 공격한다. 이에 신라는 대 고구려 전선에서 평화를 찾고, 곧바로 남부여에 대한 보복전을 전개한다. 그것이 바로 조천성 싸움이다.

 

 <삼국사기> 본기에는 조천성 전투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다만 <삼국사기> 열전에 그 단편이 흩어져 있을 뿐이다.

 

영휘(永徽) 6년(655) 태종대왕(太宗大王)이 백제가 고구려와 더불어 변방을 막자 분하게 여겨 이를 치고자 도모하였다. 군사를 출동할 때에 흠운을 낭당(郎幢) 대감(大監)으로 삼았다. 이에 집안에서 자지 않고 비바람을 맞으며, 병사들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하였다. 백제 땅에 도달하여 양산(陽山) 아래에 군영을 설치하고, 나가 조천성(助川城)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삼국사기 김흠운 열전>


태종대왕(太宗大王) 때 백제가 조천성(助川城)에 쳐들어오자, 대왕이 군사를 일으켜 출전하였으나 결판이 나지 않았다. 이때에 도옥이 그 무리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승려가 된 자는 ‘위로는 학술에 정진하여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다음은 도(道)의 쓰임을 일으켜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나는 모습만 승려와 비슷할 뿐이고 한 가지 좋은 것도 취할 만한 것이 없다. 차라리 종군하여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함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승복(法衣)을 벗어 던지고, 군복을 입고 이름을 고쳐 취도(驟徒)라고 하였다. 달려가서 보병(徒)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병부에 나아가서 삼천당(三千幢)에 속하기를 청하였고, 마침내 군대를 따라 적지에 나갔다. 깃발과 북소리의 진격 명령에 따라 창과 긴 칼을 가지고 돌진하여 힘껏 싸워 적 몇 사람을 죽이고 죽었다. <삼국사기 취도열전>


 <김흠운 열전>과 <취도열전>을 보면, 남부여와 고구려에게 33성을 빼앗기고 난 후 무열왕이 우선적으로 조천성을 공격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대 남부여 전선 중에서 조천성 지역이 최대의 화약고임을 유추케 한다. 그렇다면 당시 신라와 남부여 간의 최대 화약고인 조천성은 어디인가?


영동군(永同郡)은 본래 길동군(吉同郡)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 영현이 둘이다. 양산현(陽山縣)은 본래 조비천현(助比川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 황간현(黃澗縣)은 본래 소라현(召羅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1 영동군 조>


 <삼국사기 잡지 지리 영동군 조>에 보면 길동군의 영현인 조비천현이 나온다. 조천성은 바로 조비천성의 약자이다. 약자의 한자도 같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지명중에 이렇게 명확한 것도 드물다. 더욱이 <삼국사기 김흠운 열전>에 보면, ‘백제 땅에 도달하여 양산(陽山) 아래에 군영을 설치하고, 나가 조천성(助川城)을 공격하려고 하였다.’는 구절이 나온다. 양산이라는 지명이 나오는 걸로 보아 조천성이 조비천현의 치소임에는 분명하다. 양산은 지금의 영동군 양산면 일대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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