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임진왜란과 조선두부

백삼/이한백 2017. 1. 20. 14:13

소문난 조선 두부는 그 맛 때문에 임진왜란 때 어려움을 겪는다. 구원병으로 도착한 명나라 병사에게 두부를 만들어 먹여야 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온 명나라 군대는 중국에서 군량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조선 현지에서 양식을 조달했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체계적으로 식량 공급이 이뤄지지 않다 보니 명나라 병사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약탈하고 조선 관아에 쌓아놓은 양식을 빼앗아 먹는 등 피해가 작지 않았다.

 결국 조선 조정에서 명나라 병사에 대한 식량 지급 기준을 마련해 식량을 공급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함부로 백성을 때리고 밥을 빼앗아 먹는 것을 금지하고 재물과 가축을 노략질하면 법에 따라 처단하며 그 대신 식량을 제공한다’면서 장교와 사병에게 제공할 식사 기준을 정했다.

 고급 장교에게 지급하는 식사는 천자호반(天字號飯)이라는 이름의 식단으로 고기 한 접시, 두부, 채소, 절인 생선 한 접시, 밥 한 그릇, 술 석 잔을 지급하고 초급 장교에게는 지자호반(地字號飯)의 식사를 제공하는데 고기와 두부, 채소, 그리고 밥 한 그릇을 제공한다. 그리고 군병들에게는 인자호반(人字號飯)이라는 식사를 지급하는데 두부, 절인 새우 한 접시, 밥 한 그릇으로 차려진 식단이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허술하지 않은 밥상이고, 조선 시대 특히 전쟁 상황에서는 오히려 풍족한 식단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중에서도 고급 장교에서부터 병사에 이르기까지 빠지지 않았던 식품이 바로 두부였다. 조선의 두부가 그만큼 맛있었기에 두부를 빼놓지 않았던 것이지만 그 뒷면에는 전쟁 와중에 두부를 만들어 공급해야 했던 백성의 피눈물이 배어 있다. 조선 백성과 군사는 이렇게 먹을 것 못 먹어가며 명나라 군사에게 과도한 음식을 제공했다. 얼마 전, 중국 시진핑 주석이 방한해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명나라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왜군에 맞서 싸웠다는 발언에 우리가 공감만은 할 수 없는 이유다. 

 조선의 명물, 두부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일본의 두부 발전에도 기여했다. 지금 일본에서는 고치 시의 특산물인 당인(唐人) 두부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두부는 표면이 까칠까칠하고 단단하며 맛이 독특하고 향기가 좋은 것으로 유명하다.

 당인은 당나라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외국인이라는 뜻이니 당인 두부는 외국에서 전해진 두부라는 의미인데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간 조선의 두부 기술자가 만들었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다.

 임진왜란 때 고치의 영주였던 조소카베 모토치카가 자신의 병사를 이끌고 전쟁에 참전했다. 조선에 상륙한 조소카베는 전투 중에 일단의 조선 장수와 병사를 포로로 잡았는데 생포된 사람 중에 박호인(朴好仁)이라는 이가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진주성 혹은 지금의 진해인 웅천(熊川) 전투에서 포로가 됐는데 박호인의 할아버지가 진주 현감이었다고 하니 두부를 만드는 기술자라기보다는 장수였을 것이다. 조소카베는 임진왜란이 끝나 철수할 때 박호인과 일행 20명을 고향인 고치로 데려가 그곳에서 두부를 만들게 했다. 그리고 두부조합을 만들어 두부를 독점적으로 제조, 판매하는 권한을 주었다. 이렇게 20년 동안 고치에 머물며 두부 제조를 감독하던 박호인은 1617년 조선통신사 일행이 일본에 억류된 조선인 포로를 두 번째로 데려올 때 귀국했다. 이때 만들었던 두부가 일본의 명물, 당인 두부의 뿌리다. 두부 하나에도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고, 우리의 힘이 약했을 때 겪은 수난의 흔적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