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시

까닭 / 정호승

백삼/이한백 2016. 6. 23. 10:15



까닭 / 정호승

내가 아직 한 포기 풀잎으로 태어나서
풀잎으로 사는 것은
아침마다 이슬을 맞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견디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 한 송이 눈송이로 태어나서
밤새껏 함박눈으로 내리는 것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싸리빗자루로 눈길을 쓰시는
어머니를 위해서가 아니라

눈물도 없이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고이 남기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도 쓸쓸히 노래 한 소절로 태어나서
밤마다 아리랑을 부르며 별을 바라보는 것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를 사랑하기엔
내 인생이 너무나 짧기 때문이다


 

 


Butterfl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