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한경희통일평화상” - 민족적 양심과 동족애의 뜻이 담긴 상 - - 이름 없는 수많은 시민활동가들이 함께 받는 상 -
박찬남 기자ㅣ기사입력 2016.3.30
‘여간첩’ 한경희의 이름으로 주는 이 상은 분단으로 고통 받은 수많은 어머니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여간첩’ 한경희의 이름으로 주는 이 상은 모진 고문에 의해 자신을, 어머니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간첩이라고 허위 자백해야 했던 수많은 ‘조작된 간첩’들을 함께 기억하기 위해서다. ‘여간첩’ 한경희의 이름으로 주는 이 상은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하여 간첩으로 만든 자들이 아직도 이 땅에서 애국자라 고 행세하고 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고(故) 한경희 여사는 누구인가 1919년 OO월 OO일 충북 청주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고 한경희 여사는 청주여고와 공주사범학교를 마치고 교사로 일하며 어린 아이들을 가르쳤다. 성악에 남 다른 소질을 가진 고(故) 한경희 여사는 꿈을 이루기 위해 도쿄 무사시노 음악학교(武臧野音樂學校)에 유학할 무렵, 니혼대학(日本大學) 법학과에 유학 중이던 동향 출신 한 살 연하 송창섭을 만나 사랑에 빠져 1941년 송창섭과 고향 청주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수많은 청년들이 그랬던 것처럼 송창섭은 사회주의에 빠져들었고, 전쟁 중 북으로 떠나버렸다. 월북했던 남편 송창섭은 1960년 4월 혁명 후 절친한 친구 김영선이 민주당 정권의 장관이 되자 그를 통해 통일문제에 대한 입장을 타진할 목적으로 남파되었는데, 이 때 아내와 당시 고등학생이던 큰 딸 송기복을 잠깐 만나고 갔다. 당국은 송창섭이 부인 등 가족을 만났을 것으로 추측하고 고 한경희 여사를 여러 차례 연행하여 신문했다. 고 한경희 여사는 1977년 음력 2월 22일 고혈압으로 큰 딸 송기복의 집에서 갑자기 숨을 거두고 말았다. 57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을 갑자기 마감 한 것이다.
고 한경희 여사의 고난은 그의 별세 후 오히려 증폭되었다. 1982년 안기부는 서울-충 북을 거점으로 하는 고정간첩단 29명을 일망타진했다고 발표했다. 간첩단의 총책은 이미 5년 전 세상을 떠난 고 한경희 여사였으며, 큰 딸 송기복, 큰 아들 송기홍, 작은 아들 송기수 등 자식 넷 중 셋도 간첩이라는 어마어마한 누명을 쓰게 되었다. 빨갱이 자식이라고 손가락질 받고 자란 송기복, 송기홍, 송기수는 전두환 군사정권에 잡혀가 조작간첩 역사에서도 기록적인 최장 4개월간 불법 구금되어 모진 고문에 의해 간첩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고문은, 이들 남매를 홀로 고생하며 대학까지 졸업시키고 한많은 세상을 떠난 어머니마저 간첩으로 만든 것이다.
송씨 일가 간첩단사건이란? 10·26사건으로 권력 내부에서 위상이 실추된 중앙정보부는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로 이름을 바꾸고 옛 영화를 되찾기 위해 여러 간첩 사건을 조작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82년 9월 10일 발표된 서울-충북 거점 고정간첩 단 사건(송씨 일가 간첩단사건)이다. 안기부는 ‘한경희는 정계, 송지섭은 군사, 송기준은 산업계, 송기섭은 공무원 층, 한광수ㆍ송기복은 학원 등에 침투케 하여 국가기밀을 수집 보고하는 등 25년간 고정간첩단으로 장기 암약했다’고 발표했으나, 정작 공소장 어디에도 이런 사실은 나오지 않는다.
1심에서 이들은, 기소 내용은 모두 안기부의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1심재판부는 공소장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여 사형 2명 등 중형을 선고했고, 2심은 사형을 징역 25년으로 감경했으나 여전히 중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에서는 유일한 증거 인 자백이 불법구금에 의한 것이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파기환송심은 '상급심은 하급심을 기속한다’는 법원조직법 원칙을 무시하고 이례적으로 하급심이 상급심을 치받아 유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이 다시 무죄를 선고했지만 서울고법의 재파기환송심은 또 다시 유죄를 선고했고, 세 번째 대법원에서 열린 재재파기환송심에서 유죄로 형이 확정되었다.
공안사건으로는 드물게 총 7차례의 재판이 진행 되어 '핑퐁재판’으로 많은 논란을 빚었으며, 이 사건은 2007년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의 재조사에서 조작된 것으로 규명되었고, 2009년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이름 없는 수많은 시민활동가와 함께 받는 상입니다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세상에 둘은 없을 것 같은 특별하고 아름다운 상을 받으라는 연락이 왔습니 다. 눈물이 났습니다. 하지만 맞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처럼 말석에서 보잘 것 없는 활동이나 하는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다가 한경희통일평화상의 성격과 수상대상, 공적사항 등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됐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저와 똑같은 많은 시민활동가들 속에서 수상자를 뽑기로 했다는 말씀에, 나이 많은 제가 대표로 상을 받아도 되겠다는 용기를 냈습니다. 실은 얼마 전 옥살이를 한 고 한경희 여사님의 자제분들이 어머니를 기리는 상을 제정한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 상을 제가 받게 되고 이렇게 어려운 수상소감을 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먼저 군사독재 정권시절, 이른바 ‘송씨일가 고정간첩단’ 조작사건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신 고 한경희 여사님 가족들에게 깊은 위로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 이 미 세상을 떠났음에도 ‘간첩수괴’로 조작돼 영혼까지 부관참시를 당한 고 한경희 여사님의 영전에 해원을 비는 마음과 함께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저는 지난 2008년 광우병 수입쇠고기 반대를 위해 청계광장에 나와 촛불을 든 평범한 시민입니다. 지난 9년여 동안 저는 시민의 목소리는 외면한 채 물리력으로 대처해 온 국가에 분노해 거리와 광장에서 저와 같은 사람들과 함께 한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상을 받는 기쁨보다 부끄러움과 반성할 게 더 많은 사람입니다.
2008년 촛불을 들고 시청 앞에 나올 때 만해도 이렇게 오랫동안 거리와 광장, 또 여러 투쟁 현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의 민주주의 역량을 믿었다고나 할까요. 정부가 시민의 목소리와 여론을 수용해 사회를 안정시킬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제 기대는 너무 컸습니다. 정의는 무너지고 시민은 곳곳에서 모욕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이명박 정권은 촛불민심을 강제로 제압한 것도 모자라 국토의 곳곳을 참절하는 4대강 공사를 강행하고 이에 반대하는 시민사회와 전문가들을 탄압으로 일관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여러 부조리한 사회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금방 집으로 돌아가리라는 처음 생각은 멀어져 갔지만, 사회의 잘못을 속속들이 알아가며 이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촛불시민 들과의 연대활동은 새로운 기쁨이었습니다.
박근혜 정권 들어서는 더욱 극악해졌습니다. 세월호 참사와, 사경을 헤매고 있는 백남기 선생이 증명하듯 국가는 갈수록 자신의 무능을 드러내고 있을 뿐입니다. 국론은 분열되어 서로 치고받는 일이 일상화되고 정부는 이를 부채질 하는 듯합니다. 현실은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해고노동자들은 고공농성을 하고, 세월호 진실은 햇빛을 보지 못하고 있으며, 백남기 선생은 식물인간 상태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움직이는 만큼 세상은 좋은 쪽으로 달라진다는 믿음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 일단 열심히 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사실 모든 일은 성공보다는 실패가 훨씬 많습니다. 성공은 실패 뒤에, 실패하는 과정에서 옵니다. 제가 본 지난 9년여 동안의 한국 사회는 언뜻 민주주의와 이를 떠받치는 시민사회가 계속 실패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패 속에서 성공이 오듯 시민사회는 조금씩 이기는 길을 걷어왔다고 생각합니다. 전국 곳곳의 4대강에서, 강정에서, 세월호의 광화문과 안산에서, 밀양과 수많은 골프장 반대 투쟁에서 시민사회는 지면서 이겨왔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앞으로도 이 믿음 위에서, 오늘 저와 함께 수상하는 전국의 수많은 시민활동가들과 함께 뚜벅뚜벅 전진하겠습니다. 저는 지난해 말부터 종로에 ‘문화공간 온’ 설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온은 조합형식으로 종자돈을 모아 추진하고 있으며, 시민사회 활동가들의 둥지가 될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시민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함께 공부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획을 마련할 생각입니다. 오늘 주신 상금은 ‘온’이 출범하는 데에 소중한 디딤돌로 쓰겠습니다. 사실 의외로 돈이 많이 들어가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고 한경희 여사님께서 그 사실을 아시고 천국에서 내려 주신 특별후원금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방법이야 말로 고 한경희 여사님의 유지를 가장 확실히 받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한 번 더 말씀드립니다. 이 상은 지금 이 시간에도 시민사회 곳곳에서 헌신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활동가들과 공동으로 받는 상입니다. 그분들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한경희 통일평화상 수상이 한국 시민사회 운동의 성장에 큰 보탬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우리사회 곳곳의 위대한 시민들과 함께 세상을 바꿔나가는 데 매진하겠습니다. 시민 이 주인인 세상, 시민이 만들어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년 3월 29일 제1회 한경희통일평화상 수상자 이요상 이력 2008년 언소주 (언론소비자주권국민캠페인) 회원 - 조중동 광고주 불매운동(조중동 왜곡보도 항의) - 희망씨앗 팀장 (한겨레,경향,시사인 등 학교 외 다중이용업소 보내기 운동) - 언소주 사무총장 2년 역임 (2011~2012) - 미디어악법 반대. 조중동 종편 설립 반대운동 2013~2014 ‘한겨레신문발전연대’ 대표 2년 역임 - 19대 대선 국정원 개입 규탄. 진상규명 운동 -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운동 - ‘교육자치지키기범시민연대’ 상임대표/조희연교육감 무죄판결 운동 - 국가정보원 사이버사찰 피해자대표/헌법소원 제기 2015~현재 - 동학 121주년 기념제 ‘신만민공동회’ 결성 (2015.5.9) - 동학혁명실천시민행동 운영위원장 - 한겨레주주통신원회 전국위원장 선임 - 강정국제평화영화제 집행위원 - 종로시민사랑방 <문화공간 온:> 창립 추진위원장
최종입력: 2016.3.30 Ⅰ 편집: ⓒ 마로니에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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