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시인, 목사, 정치인...친일 후손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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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1년, 경상남도 하동군
1941년 경남 하동군청에 약관 26세의 청년이 군수로 부임해 온다. 한 해 전인 1940년 경성제대 법학과를 졸업한 직후 조선총독부의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한 이항녕이 그 주인공이다.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제대 예과에 들어갈 때만 해도 그는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워갔다. 하지만 문학도의 길을 포기한 뒤 본과에 올라가 법학을 전공하게 되면서 이항녕은 그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타락일로’를 걷게 된다.
후일 그는 자전적 수필집에서 일제 때 법학을 공부하고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해 군수가 된 과정을 이렇게 술회했다.
문학이고 민족이고 이상이고를 모두 거두어 버리고 한 개 속물이 되어 아무 가치도 없는 일본인들의 어용법학을 애써 익혀서 졸업 후에는 그들의 말단 관리가 되어 식민지 착취의 주구가 되어 동족을 괴롭히고도 태연했다.
낙엽의 자화상, 1977
이항녕이 하동군수로 부임한 1941년은 일본 군국주의가 중일전쟁이후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더욱 확대하던 시기였고 이에 따라 식민지 조선을 대상으로 한 군수물자 및 식량의 공출과 수탈이 극에 달했다. 조선인들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 피폐해져 갔다. 이항녕이 ‘말단 관리’라고 표현했지만 당시 군수의 권한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 군수는 공출과 수탈을 위한 일선 행정의 총책임자였다. 이항녕은 이듬해인 1942년 경남 창녕군수로 옮겨갔다가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4년여 동안의 군수 시절, 이항녕은 “출세와 보신에 어두워, 한손에 죽창을 들고 군민들을 위협하며 쌀과 보리의 공출을 강요”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8.15를 경상남도 창녕에서 맞았다. 그 당시 나는 창녕 군수였다. 일제의 침략전쟁의 앞잡이로서 우리 농민들한테서 보리를 강제로 공출하는 데 열성을 쏟다가 해방의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당시의 군수라는 직책은 제대로의 조장행정을 하지는 못하고 군민들을 징병으로 뽑아 사지로 보내거나 징용으로 만리타향에 보내는 일, 쌀과 보리를 공출받는 일이 주된 일이었다. 말하지만 동족을 괴롭히고 백성을 착취하는 것이 그 임무였다.
낙엽의 자화상, 1977
독립운동을 한 대학 동창들과 비교하며 자신의 비굴했던 행적을 반성하기도 했다.
명색이 대학을 나온 지성인이라는 사람이 민족 반역행위를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했다는 걸 생각하면 그 당시 나는 얼마나 지성적 양심이 더럽혀지고 민족정기가 흐려 있었던가 짐작할 수 있다...나의 대학 동창 중에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영어의 몸이 된 사람도 있었고 어떤 이는 세상을 버리고 시골로 들어가서 숨어 살기도 했다. 독립운동을 하거나 세상을 버리지는 못했을망정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면서도 일제에 아부하거나 민족을 배반하는 일이 없이, 말하자면 큰 죄를 짓지 않고 살아온 사람도 많았었는데 하필이면 나의 경우는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고 굽어 땅에 부끄러운 노릇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던지라 기쁨보다는 죄책감이 앞섰다.
낙엽의 자화상, 1977
이항녕은 해방을 맞은 뒤 “자신의 더러운 과거를 참회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기로 결심”하고 관계를 떠나 경남 양산에 있는 한 국민(초등)학교 교사가 된다. 이향녕은 이후 수시로 자신의 친일 행적을 공개 사죄했는데 1977년 낸 쓴 자신의 수필집 ⟨낙엽의 자화상⟩이 대표적이다.
지금 나는 30년 전의 죄책감을 까맣게 잊은 듯 뻔뻔스럽게도 무슨 대교육가나 되어 민족에게 큰 공헌을 하는 양 망상에 젖어있는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가슴에 손을 얹고 나 자신을 반성, 나는 해방전 지은 죄과에 대해 그 뒤에 과연 민족에게 속죄를 했는가, 나 자신에게 반문하다보면 지금도 자책감에 견디기 어려울 따름이다.
낙엽의 자화상, 1977
이항녕은 1991년 자신이 죽창을 들고 군민들을 상대로 공출을 강요했던 경남 하동군과 창녕군을 찾아가 자신의 친일 행적을 공개 사죄하는 등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식민지 시기 자신의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해 반성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 군수 이상의 관직에 있었던 사람은 모두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말했다. “협력없이 지배없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조선인 앞잡이들의 협력이 없었다면 일제의 식민 지배도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이항녕은 해방 이후의 여생 동안 계속 강조했다. 안타까운 것은 해방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 본인이 직접 일제에 협력한 행위에 대해 공개 사죄한 경우는 이항녕이 거의 유일하다는 사실이다.
파인 김동환은 나라 잃은 조선인의 설움을 잘 담아냈던 ⟨국경의 밤⟩의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동시에 김동환은 일제의 선전활동에 동원돼 친일시를 발표하는등 일제의 식민지배 정책에 협력했다. 해방 이후 그는 일제 때 자신의 행적에 대해 반성하지 않았다. 김동환은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진상규명위)가 발표한 1006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됐다. 이에 앞서 1994년 그의 셋째 아들 김영식은 아버지의 친일 행위에 대해 공개 사죄한다.
나는 이제 아버지가 저지른 한때 민족정신에 반하는 친일행위에 대해 아버지와 우리 가족을 대신하여 재삼 국가와 민족 앞에 깊이 깊이 머리숙여 사죄합니다.
2005년에는 일제 강점기 음성군수를 지냈고, 이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이준식의 손자 이윤 씨도 조부의 친일행적을 공개 사과를 했다. 이를 마지막으로 친일 인사와 그의 후손들의 고백과 공개 사과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해방 후 70년이 지나도록 과거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한 사람이 이렇게 적은 것은 이 땅에서 친일청산이 사실상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2. 2015년 6월 초, 뉴스타파 사무실
반민진상규명위가 확정 발표한 친일인사 1,006명. 그들의 후손은 수만 명에 이를 것이다. 뉴스타파 취재진은 이 가운데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거나 중추원 참의로 임명된 사람 등 핵심 친일파 200여 명을 대상으로 그들의 후손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이들과의 만남을 시도했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또 다른 고백을 찾아서.
현재까지 찾은 후손은 900명 정도. 아직 더 찾을 여지가 있다. 하지만 광복절에 맞춘 방송 일정을 생각하면 이제부터 후손들과 접촉도 병행해야 한다. 구글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전화번호는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대부분 사무실 전화번호다. 그래도 이제 연락을 시도해 봐야 한다. 그런데 막상 전화를 하려고 하니 조금 걱정이 된다. 일반 취재 같으면 어떤 상대라도 별 망설임 없이 전화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는 다르다. 친일반민족행위 당사자들이 아니라 그들의 후손이다. 당사자도 아닌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어떤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인가. 이전까지 어떠한 경험이나 노하우도 축적돼 있지 않은 유형의 인터뷰 시도, 긴장감이 밀려왔다.
우선 연락 대상을 나눠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걱정한 대로 냉소적이거나 분노에 찬 반응이 돌아왔다.
제가 친일한 것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내 노력으로 잘 살아온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갖다 붙이면 어쩌라는 겁니까?
왜 이렇게 막무가내로 하는 겁니까?
오늘부터 뉴스타파 계속 지켜보겠습니다. 제가 나오면 알아서 하세요.
전화를 돌리기 시작한 지 이틀째, 대책 회의를 열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논의 결과, 전후 사정 없이 전화를 거는 것보다는 이메일을 통해 우리의 의도를 차분히 전달하고 상대방도 마음의 준비와 성찰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까지 선조의 친일 행적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지도 않은 사람이 태반일 테고, 이들이 선조의 행위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도 별로 없는데 거기서 나아가 고백이나 사죄를 쉽게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심사숙고해서 후손들에게 보낼 이메일을 작성했다.
◯◯◯님 안녕하세요?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 ‘뉴스타파’입니다.
올해는 역사적인 광복 70주년입니다. 뉴스타파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친일 청산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으며 그 주제 가운데 하나는 친일파 후손들의 현재입니다.
◯◯◯님께 이 메일을 보내는 이유는, 지난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1,006명의 가계도를 조사한 결과, 선생님의 (증조) 할아버지 되시는 ◯◯◯님이 1,006명의 명단에 들어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메일이 다소 불편하게 여겨지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희는 선생님께서 친일파의 후손이라고 해서 비난을 하거나 심판을 할 의도는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과거 청산이 없이는 현재를 제대로 알 수 없고 미래를 올바르게 설계할 수도 없기에, 우리의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밝히고자 하는 의도뿐입니다. 역사는 과거의 산물이 아니라 미래의 기억입니다. 과거의 상처와 아픔에 대한 치유없이 우리사회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지금 필요한 것은 지난 100년의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드립니다. ◯◯◯님의 모든 답변은 원하신다면 익명으로 처리될 것이며 보도와 통계를 위한 목적으로만 이용될 예정입니다.
- 선조께서 친일진상규명위가 발표한 1,005명의 명단에 들어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보십니까?
- 만약 올바른 결정이 아니었다고 보신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선조께서 우리 사회를 위해 기여하신 부분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에 대해 설명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현재 선생님의 사회적 지위나 성취는 선조께서 쌓은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자본으로부터 어느 정도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0-100 사이의 점수로 평가해주시고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십시오.
- 선조께서는 그 시대의 사회지도층 또는 엘리트로서 일생을 보내셨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시대적 조건에서 사회 지도층으로서 실행할 수 있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 비록 많지는 않으나 선조의 친일 행적에 대해 공개 사과나 참회를 했던 후손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혹시 교수님께서도 기회가 있다면 그렇게 하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 이같은 내용에 대해 만나 뵙고 자세한 말씀을 해주실 의향이 있으신지 여쭙습니다. 선조의 친일 행적에 대한 소명의 기회로 여기셔도 좋습니다.(원하실 경우 익명으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저희 프로그램의 제작 방향에 대해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지요?
더 궁금하신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오.
뉴스타파 박중석, 심인보 드림
다음은 뉴스타파 제작진이 연락을 한 친일반민족 행위자 후손 현황이다.
이메일 답장 역시 기대했던 것만큼 많이 오지는 않았다. 특히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발표 결정과 후손의 공개 사죄 등을 긍정적으로 보는 답장은 20통이 채 되지 않았다. 다음은 그 중 하나다.
일제시대 때 고위직인 지사를 역임하셨으니 (조부에 대한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발표는) 올바른 결정입니다.
(공개 사죄는)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서규 후손의 이메일 답변 중
반면 대부분의 답장은 선조의 친일 행적을 아예 부정하는 것이거나 친일 행적을 인정한다하더라도 그게 지금의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식이었다.
기자님, 이 사안에 대해서는 드릴 의견이 없네요. 더 이상 연락하지 말아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정진홍 후손의 답변 중
뵌 적이 없는 분이십니다. 따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더 이상 연락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박희양 후손의 이메일 답변 중
말씀하신 서병주 씨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기에 답할 수 없습니다. 미안 합니다. 그 분은 작고한 지 오래 되어 저와는 일면식도 없습니다. 또 들은 바도 없습니다.
서병주 후손의 이메일 답변 중
특히 제작진이 보낸 이메일의 4번 질문, 즉 지금의 사회적 성취가 선조로부터 얼마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후손들이 0점이라고 답했다. 가장 높은 점수를 준 후손은 30점이었다. 그리고 답변을 보내온 후손들도 대부분 자신의 답변을 익명으로 처리해 달라고 요구했다.
증조부께서 큰 부를 이루셨으나, 부를 이룬 과정에서 민족을 수탈한 것이 아니었고, 또 이룩한 부로써 적극적으로 사회사업을 하셨으니, 이 부분은 제가 오히려 존경하는 부분이고 사과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제시대에 중추원 참의를 지내신 사실에 대해서는 일차적 사과는 해야 할 수 있겠으나, 단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는 것 이상은 제가 아는 바가 없고, 증조부님의 다른 행적으로 미루어 그 이상의 사과를 할 일이 크게는 없을 것으로 믿습니다.
손재하 후손의 이메일 답변중
취재진은 전화와 이메일 연락 이외에도 집이나 직장 주소가 파악된 후손들은 직접 찾아가 보기로 했다. 특히 사무실을 찾아갈 때는 접촉 대상이 친일파 후손이라는 사실이 노출되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를 기울였다. 본인이 없을 경우에 대비해 편지도 준비했는데 이 경우 ‘친전(親展)’ 편지임을 강조했다. 이렇게 해서 후손들의 집과 사무실 수십 군데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역시 반응이 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3. 2015년 6월 25일, 서울 ◯◯대학교
한지원(가명) 교수는 동료 교수들과의 점심 약속 때문에 막 연구실에서 나오던 길에 메일 도착 알림 소리들었다. 식사를 하고 난 뒤 열어볼까 하다가 무심코 휴대폰 메일함을 클릭했다.
◯◯◯ 교수님, 뉴스타파 심인보 기자입니다.
무슨 일일까? 궁금증이 생겨 메일을 열어봤다.
교수님께 이 메일을 보내는 이유는, 지난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1,006명의 가계도를 추적한 결과, 교수님의 외고조할아버님이신 이재완님과 외증조할아버님이신 이달용님이 1,006명의 명단에 들어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교수는 동료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함께 식사하기가 어렵게 됐다고 말하고 방금 일어났던 소파에 다시 앉아 나머지 내용을 읽었다. 메일을 보내는 이유와 함께 질문 몇 가지가 들어있었다.
그 때 마침 동생의 전화가 왔다. 동생은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다. 그도 뉴스타파 기자로부터 똑같은 메일을 받았다고 한다. 한 교수는 동생과 상의 끝에 자신이 답장을 쓰겠다고 했다. 점심도 거른 채 자판을 눌렀으나 길게 쓸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심인보 기자님,
의식하며 살아본 적은 없으나, 새삼 깊이 생각할 기회를 주시는군요.
시간을 주시면 고민한 후 연락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짧은 석 줄의 답장만 우선 보냈다. 그리고 한 교수는 주말 내내 답장을 쓰기 위해 여러 차례 책상에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했다. 뉴스타파 기자가 보내 온 메일 속의 한 단어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썼다가 지우기를 여러 번, 첫 메일을 받은 지 엿새 만에 정식 답장을 보냈다. 본인이나 동생의 신원을 밝히고 싶지는 않아서 익명으로 처리해 달라고 당부했다.
심인보 기자님, 안녕하세요. 답장이 늦었습니다.
주말 내내 고민하며 답변을 작성했으나 막상 보내려하니 고민이 앞섭니다.
살아오면서 친일 후손으로서 그다지 시달린 바도 없고, 정신세계에 먼 조상의 존재가 차지하는 부분도 많지 않습니다. 그 이전에도 우리에겐 오랫동안 조상이 존재해왔고, 과오들이 있었고, 업적들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과오와 업적을 토대로 현재를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생각합니다.
지배계급이나 엘리트들은 사회적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실상 도덕적 책임의 무게가 누구보다도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도덕성은 신분과 시대를 막론하고 요구되는 인간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재화와 용역의 가시적인 분배와 그 수량 이전에,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존중과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탕이 되지 않은 자선은 자칫 공허할 수 있습니다. 계급은 시대를 막론하고 불가피하게 생겨나지만, 이러한 존중과 사랑이 실천될 수만 있다면 계급간의 갈등은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왕족의 몰락 이후 나약하고 비현실적인 사회부적응자로서 어렵고 궁핍하게 살다 가신 제 외조부님의 얘기를 적어봤으나, 그 역시 외람되고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자님께서는 진실하고 정의로운 분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사회를 평화롭게 유지하고 다스리는 데 정치가 불가피하다면 권력 또한 불가피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프로그램이 역사의 비가시적인 구조들을 세심하게 파헤쳐 드러내고, 불특정 다수의 피상적인 의견들을 다스리고 인도할 수 있는 하나의 '진정한 권력'이 되길 바랍니다.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연민하는 긍정적인 사회를 기대합니다. ◯◯◯ 드림.
p.s. 대단한 말씀을 드린 것은 아니지만 혹시라도 사용하시게 된다면, 제 의견은 익명으로 처리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4. 2015년 7월 2일, 서울 목동 한국문인협회
7월 2일 오후, 뉴스타타 취재진은 서울 목동에 있는 한국문인협회를 찾았다. 문효치 이사장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 전에 메일을 보냈으나 답신이 없어서 직접 사무실을 찾아간 것이다. 짤은 시간 문 이사장을 만날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증조부 이야기를 꺼내자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취재진의 인터뷰 요청에 문 이사장은 증조부의 기억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며칠 말미를 달라고 했다.
문효치 이사장의 증조부 문종구는 일제 강점기 군산 제일의 부자였다. 옥구를 중심으로 300정보, 즉 290만 제곱미터의 농지를 소유했다. 지금도 군산에는 ‘문종구 가옥’과 ‘문종구 예열비“가 잘 보존돼 있다. 문종구는 조선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그는 2009년 반민진상규명위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에 들어갔다.
문종구 결정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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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구는 1939년 6월 3일부터 1942년 6월 2일까지 3년 동안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이 기간 동안 중추원회의에 참석하여 조선총독의 자문에 응하여 농촌경제 통제와 생산확충의 구현 등을 설명하면서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보급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문종구의 해우이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호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고문 또는 참의 활동한 행위”에 해당한다. 이상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문종구의 행위를 ⟨특별법⟩ 제2조 제9호에서 정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한다. |
친일반만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4권 |
뉴스타파 취재진이 떠난 뒤 문효치 이사장은 증조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 문 이사장은 서울에서 살았다. 그러나 1951년 1.4 후퇴 때 고향 군산으로 피난가서 증조 할아버지 댁에 머물렀다. 그 때 나이가 8살이었다.
문 이사장의 기억엔 증조부는 다정하신 분은 아니었다. 증조 할아버지가 마루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는 날이면, 감히 마당을 가로질러 갈 수 없을 정도로 어린 문 이사장에게 증조할아버지는 엄하고 무서운 분이었다. 문 이사장은 증조부로부터 “사내가 이렇게 허약해서야”라는 말을 종종 듣고 살았다. 그의 증조부 문종구는 한국전쟁이 끝나기 1년 전 세상을 떠났다.
소년과 청년 시절 문 이사장을 가장 괴롭힌 집안 내력은 증조부의 친일 행적이 아니라 아버지의 월북이었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아버지는 6.25 전쟁 당시 인민군에 지원했다. 이 사건은 그에게 큰 상처가 됐다. 또래 무리는 그를 잘 끼워주지 않았다. 길을 가다 보면 뒤에서 ‘쟤가 월북자의 아들이야”하는 수군거림이 들리기도 했다. 여기에 친일행적의 증조부까지...문 이사장은 그 동안 수많은 글에서 아버지를 언급했다. 하지만 증조부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은 없었다.
취재진과의 짧은 만남이 있고 사흘 뒤인 7월 5일 토요일, 문효치 이사장이 약속대로 뉴스타파 사무실을 방문했다. 협회원들의 선거로 선출되는 문인협회 이사장직을 맡고 있기에 그의 입장에선 이번 인터뷰가 무척 부담스러웠다. 문 이사장은 취재진에게 자신의 처지를 조선시대 과거에 나가 조부인 김익순의 역적행위를 탄핵하라는 시제를 받아든 ‘김삿갓’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 이사장은 뉴스타파 카메라 앞에 앉았고, 1시간 30분 동안 증조부의 친일 행적에 대한 생각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마음 속에 켜켜이 담아놓았던 이야기였다. 취재진은 문효치 이사장의 인터뷰를 담으며 최근 ‘나의 삶 나의 문학 문효치’라는 자전적 글에서 그의 시 세계를 설명했듯이 “그 작은 인간의 몸에 담겨 있는 신비스러운 용기와 고백의 힘”을 느꼈다.
5. 2015년 7월 2일, 자그레브에서 온 이메일
한낮의 무더위가 여전히 가시지 않는 밤, 제작진은 이메일 수신함을 확인하다 뜻밖에 메일 한 통이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동유럽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서 온 편지, 이틀 전 보냈던 이메일의 답신이었다. 메일을 보낸 이는 자그레브에서 6년째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목사였다. 메일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말로만 듣던 친일파 후손 중에 저도 포함되어 있다니, 놀랍고, 생소하고, 한편으로는 무거울 따름입니다. 다른 친일파 후손들이 선친의 과거 행적을 인지하고 사는지는 잘 모르나, 저의 경우, 조부 때부터 단절된 가족사를 갖고 있었습니다.
오늘 기자님의 메일을 통해 저의 근대의 뿌리를 처음 알게 되었네요. 보내주신 메일로 인해 불쾌하진 않습니다만.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어서 당황스러울 뿐입니다.
더불어 증조 할아버지의 행적이 조국의 독립과 애국애족에 힘썼던 당대의 많은 애국자들과 그들의 후손들에게 고통이 되었기에 친일파 자손 중 한 명으로서 진심으로 사죄와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자그레브에서 온 편지 중에서
답신을 보낸 목사의 증조부는 김낙헌이다. 그는 증조부의 친일행적을 모르고 있었다.
김낙헌은 대한제국에서 검사와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판사, 그리고 중추원 부찬의를 지냈다. 1912년에는 일제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기도 했다. 특히 김낙헌은 일제에 맞서 의병 활동을 하다 체포된 독립투사들의 재판에 검사로 참여했다. 김낙헌이 참여한 재판에서 의병장 김수민, 정용대, 이교영 등은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했다. 그는 또 105인 사건의 판사로 참여하는 등 많은 독립 애국지사들의 재판에 참여해 중형을 선고한 경력이 있다. 2009년 반민진상규명위는 김낙헌을 사법분야의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했다.
김낙헌 결정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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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헌(1874~1919)은 1909~1910년 경성공소원 검사로 의병(장) 김수민, 정용대, 이교영, 심경섭, 김춘삼 등의 재판에 참여하였으며, 1910~1918년에는 고등법원 판사로서 의병 표창순, 김재생을 비롯해 ‘105인 사건’ 관련자 윤치호, 양기탁, 임치정, 이인환, 안태국, 옥관빈, 그리고 독립운동 인사인 최두영, 윤길, 이학룡 등의 재판에 참여하였다. 김낙헌이 대한제국(1909년 10월 이후 통감부 소속) 경성공소원 검사 및 통감부(1910년 10월 이후 총독부 소속) 고등법원 판사로서 다수의 의병 및 애국인사의 재판에 참여한 행위는 ⟨특별법⟩ 제2조 제15호의 “판사·검사 또는 사법관리로서 무고한 우리민족 구성원을 감금·고문·학대하는 등 탄압에 적극 앞장선 행위”에 해당한다. 김낙헌은 일제가 정미7조약 이후 사법권의 장악을 통해 항일 애국세력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검사 또는 판사로서 적극 협력하였고, 이러한 행위를 바탕으로 한국병합기념장과 다이쇼(大正)대례기념장을 받았으며, 나아가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부찬의까지 역임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김낙헌의 행위를 ⟨특별법⟩ 제2조 제9호, 제15호, 제19호에서 정하고 있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한다. |
친일반만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4권 |
뉴스타파는 김낙헌의 증손자 김경근 목사에게 다시 이메일을 보냈다. 이번엔 조금 더 긴 내용의 질문을 담았다. 한국 문인협회 문효치 이사장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3주 정도가 지났을 무렵 김경근 목사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자그레브에 있던 그가 안식월을 맞아 가족과 함께 잠시 귀국했다는 소식이었다. 이메일 답신에 휴대전화 번호를 남겼다.
박중석 기자님.
수고가 많으십니다.
010 5XXX XXXX로 한번 연락주세요.
김경근 드림.
전화기를 들고 조심스럽게 번호를 눌렀다. 당초 정식 인터뷰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익명을 전제로 해서라도 만나보고 싶었다. 편지 형식이 아니라 그와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선뜻 인터뷰에 응하겠다고 했다. 취재팀은 바로 약속 장소인 경기도 광명의 한 카페로 향했다. 뉘엿뉘엿 해가 지던 오후였다.
김경근 목사와 다소 어색한 인사를 나눈 취재진은 먼저 그의 증조할아버지인 김낙헌의 친일행적을 보여줬다. 그는 반민진상규명위가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이유서’를 받아들고 20여 쪽에 달하는 증조부의 친일 항목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정독했다.
그는 자신이 공인도 아니고 유명인도 아니라면서 “보잘 것 없는, 이름도 없는 내가 선대의 친일행적에 대해 사죄하는 게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지” 물었다. 이어 “제가 사죄를 한다고 해서 증조부로부터 고통 받은 수많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상처가 당장 치유될 리 없겠지만, 백번이라도 사죄하고 싶다며, 부디 용서를 구하고 싶다”고 했다.
1시간 여 동안의 대화 내내 취재팀은 사전에 준비해 간 질문이 별로 필요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실한 자기 고백의 여정에 사전 질문은 동행하지 않아도 되는 법이란 것을.
6. 2015년 7월 17일, 국회
국회 안 뜰에 의자를 놓고 홍영표 의원과 마주 앉았다. 사실 친일파 후손 정치인, 특히 현역 국회의원과 인터뷰 자리를 갖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취재진이 지난 6월 1차로 홍 의원을 포함한 친일 후손 200여 명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며칠 뒤, 홍영표 의원의 보좌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저희 의원님 할아버님의 친일 행적과 관련해서 이메일 주셨었죠? 인터뷰 하겠습니다.”
홍 의원의 할아버지인 홍종철은 조선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일제 강점기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는 것은, 일제의 식민 통치에 조언과 협조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만큼 일제로부터 충성심을 인정받았다는 의미다. 중추원 참의의 권세는 지금의 국회의원보다 훨씬 더 크고 높았다.
홍종철 결정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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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철은 1930년 6월 3일부터 1933년 6월 2일까지 3년간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제10회, 제11회 중추원 회의에 출석하여 조선총독의 자문에 응했다. 이러한 홍종철의 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호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고문 또는 참의로 활동한 행위”에 해당한다. 이상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홍종철의 행위를 ⟨특별법⟩ 제2조 제9호에서 정하는 친일반민족 행위로 결정한다. |
친일반만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4권 |
홍영표 의원은 뉴스타파 카메라 앞에 서기 전까지 많이 망설였다고 한다. 조부의 친일 행적은 사실 그간 여러 경로로 알려졌고, 홍 의원 자신도 그 부분을 씻어내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는데 굳이 언론을 상대로 공식적인 인터뷰를 해야 하나라는 고민이었다. 홍 의원은 실제 인터뷰를 하기로 한 이날 아침까지도 보좌진에게 전화를 걸어 고충을 토로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인터뷰를 시작하자 그의 말은 막힘이 없었다. 평소 ‘카메라 울렁증’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날은 달랐다. 할아버지의 친일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
인터뷰를 마친 뒤 “이젠 후련하냐고?”고 물어봤다. 하지만 홍 의원은 다음 일정이 있다며 대답 없이 급히 떠났다. 국회 매점에서 홍 의원의 보좌진과 음료를 한 잔 마시고 있던 중 보좌관에게 문자 메시지가 왔다. 메시지를 읽고 난 보좌관이 이렇게 전해주었다.
“의원님이 막상 다 털어놓고 나니, 속이 아주 후련하시답니다.”
7. 2010년 봄, 친일재산조사위
2010년 대통령 소속 친일재산조사위원회의 활동 종료를 몇 달 앞두고 위원회 간부들이 모였다. 위원회 활동을 2년 더 연장할지 여부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일본인 명의의 토지에 대한 전수 조사와 국가 귀속은 본격적으로 진행하지도 못했다. 관련 법에는 2년 더 활동할 수 있다고 돼 명시돼 있다.
하지만 2년 전인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면서부터 이미 위원회의 사기는 이미 많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정권 내부에서 친일 청산을 둘러싼 기류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제 이만하면 된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친일재산조사위원회는 활동 기한을 규정한 법 조문을 놓고 연장 여부를 검토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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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조(위원회의 활동기간) ① 위원회는 그 구성을 마친 날부터 4년 이내에 활동을 완료하여야 한다. ②위원회는 제1항의 규정에서 정한 기간 이내에 활동을 완료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재적위원 3분의 2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한 후 대통령의 승인을 얻어 그 활동기간을 1회에 한하여 2년 연장할 수 있다. |
하지만 위원회 활동 연장은 위원회의 의지보다는 청와대의 의중에 달린 문제였다. 연장 요청을 하더라도 과연 청와대가 그것을 승인할까? 이명박 대통령의 평소 언행으로는 쉽사리 판단하기 어려웠다. 결국 우회적인 방식을 택했다. 친일재산조사위는 위원회가 아닌 자문위원회 명의로 청와대에 연장을 건의하기로 했다. 그만큼 조심스러운 의견 개진이었지만, 당시 청와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상 연장 건의를 묵살한 것이다.
청와대는 이에 앞서 친일 청산과 과거사 정리 관련 국가위원회 4곳을 통합하려는 의도를 내비쳤다. 4개 기관은 전임 정부 때 발족한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등이다. 해방 이후 60년 동안 우리 사회의 짓눌렀던 뒤틀린 역사를 분야 별로 바로잡기 위한 기관들이었지만 청와대는 효율적인 업무를 위한 통합이라는 이유를 내세웠다.
그러나 각 위원회 대다수 구성원들은 청와대의 입장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친일재산조사위 장완익 사무처장(변호사)은 청와대의 통합 시도는 위원회의 역할을 축소시키려는 의도라고 해석했다. 장 사무처장은 ‘고사’라는 표현까지 썼다.
결국 활동 기간 2년 연장은 무산되고 친일재산조사위는 2010년 7월 13일, 4년의 활동을 끝으로 공식 업무를 종료하게 된다. 장완익 변호사는 4년으로 그친 친일재산조사위의 활동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득한 옛날 같습니다. 4년 동안, 열심히 했죠. 맡은 일 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사회가 얼마나 변했을까, 별로 변한 게 없는 거 같아요.
8. 2015년 8월, 대한민국
진정한 친일 청산과 과거 극복을 위해 해방 70년을 맞은 지금 우리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학계에서는 무엇보다 나라를 팔고 동족을 배반한 반민족 행위 문제가 더 이상 망각의 어둠 속에 묻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기억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과거의 진상을 정확하게 밝히는 작업을 통해 그 결과물들을 담을 ‘기억의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에서 사회적인 ’기억의 학습’을 이뤄내고, 다시 ‘기억의 일치’를 형성하자는 것이다. 그래야만 현재와 미래에 비극적인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을 방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친일반민족 행위의 당사자들은 이제 대부분 사망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친일파는 다 죽었지만 친일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고 진단한다. ‘친일’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행위, 정확하게 말하자면 매국반역 행위를 제대로 청산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후대에게 그 비극의 역사를 교육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은 “정부는 위원회의 조사결과를 보존, 활용하기 위해 사료관 건립을 지원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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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조(사료관 건립) 정부는 위원회의 조사결과 등을 보존·활용하기 위하여 사료관건립에 필요한 비용을 예산의 범위 안에서 지원할 수 있다. |
그러나 반민진상규명위가 활동을 접은 지 6년이 되도록 친일반민족행위 관련 사료관이나 역사관은 건립되지 않고 있다. 반민진상규명위와 친일재산조사위는 없어졌지만, 특별법은 폐지되지 않았고 여전히 유효하다.
나치 점령과 반역자들의 부역 등 우리와 유사한 민족적 수난을 겪었던 폴란드가 과거사 문제를 다루고 있는 방식은 우리에게도 귀감이 될만하다.
1998년 폴란드는 ‘민족기억연구소 및 폴란드 민족에 대한 범죄기소위원회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이 법에 따라 폴란드 의회 소속 기구인 ⟨민족기억연구소⟩가 공식 출범했다. 연구소 정규 직원은 무려 천4백 명, 한해 예산이 우리 돈으로 500억 원이 넘는다. 4년 간의 한시적 기구였고, 직원은 104명에 불과했던 우리의 반민진상규명위와 비교된다.
폴란드 민족기억연구소는 3가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먼저 교육이다. 나치 독일과 공산 체제 하에서 자행된 범죄행위가 어떤 것이 있고 어떤 기제를 통해 작동해왔는지를 지속적으로 알리고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
또 1944년~89년 공산독재 하에서 사찰과 인권 탄압을 받았던 사람들에게 자신들과 관련 모든 비밀 서류를 열람할 수 있게 한다. 이런 문서를 공개하는 것은 독재의 희생자들에 대한 상징적인 형태의 법적 보상이다.
민족기억연구소는 또 조사 연구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데, 나치와 공산 체제 하에서의 범죄자를 추적해 법정에 세우기도 한다. 지금도 나치 범죄 관련 77건, 공산체제 범죄 300여 건을 조사하고 있다. (출처 : 반민진상규명위 주최 2006년 국제학술회의 자료집)
뉴스타파는 8월 6일, 10일, 12일, 14일 모두 4회에 걸쳐 해방70주년 특별기획 ‘친일과 망각’ 시리즈를 방송했습니다. 많은 시청자들이 뜨거운 반응을 보이셨고, 프로그램에 대해 좋은 의견을 보내주셨습니다.
뉴스타파 ‘친일과 망각’ 디지털스토리는 다음에 연재할 ‘에필로그’ 편에서 이번 기획의 성과와 의미, 그리고 한계를 짚어보고 시청자와 독자 여러분들의 격려와 충고를 모아 전해드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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