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1948년5월10일 국회의원 첫선거

백삼/이한백 2016. 4. 6. 09:00

1948년 5월 10일 국회의원을 뽑는 첫 선거부터 지금까지, 70년 가까이 이어온 대한민국 선거의 역사는 순탄치 않았습니다. 권력자들은 장기 집권을 위해 선거제도를 이용하거나 왜곡했고 부정한 방법으로 선거운동을 펼치기도 했죠.

하지만, 그때마다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앞장섰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선거에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값진 희생이 담겨있는 것이죠. 소년중앙에서는 오는 13일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맞이해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선거, 민주주의를 키우다’ 특별전을 다녀왔습니다. 특별전에서 대한민국 선거의 역사상, 중요한 사건을 연도별로 뽑아 봤습니다.
1948년 5월 10일 제1대 국회의원 선거 광복을 맞이한 국민들은 곧 멋진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어. 하지만 상황은 좋지 못했지. 세계는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와 소련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로 나뉘어 소리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거든.

1948년 5월 10일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유권자들이 한 표의 권리를 행사하고 있다.
1948년 5월 10일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유권자들이 한 표의 권리를 행사하고 있다.

이제 막 독립된 민주국가를 세우기 위해 첫걸음을 뗀 대한민국은 힘이 없었고 결국 남·북한에 서로 다른 정부가 수립됐어.

남한에선 유엔의 주도로 첫 선거가 치러졌는데, 바로 1948년 5월 10일에 열린 총선거야. 헌법을 만들고 대통령을 선출할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지.

선거가 치러지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투표율이 95.5%나 될 정도로 국민의 관심이 높았어. 이렇게 선출된 200명의 국회의원들은 헌법을 만들고 1948년 7월 20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했어.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국회의원 임기는 4년인데 왜 2년 만에 또 선거냐고? 제1대 국회의원은 국가의 기틀을 만든 제헌국회의원이었거든. 그래서 4년 동안 제대로 활동할 국회의원들을 다시 선출한 거야. 제2대 국회의원 선거는 210명을 뽑는데, 무려 2209명이 등록해 역대 선거 중 가장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어.

결과는 무소속을 포함한 야당 의원수가 많았지. 재선(다시 선거에 나가 당선되는 것)이 어렵다고 느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6·25전쟁 발발로 사회적 혼란이 오자, 대통령 선거를 국민이 뽑는 직선제로 바꿔 재선에 성공해.

그리고 ‘대통령은 중임할 수 없다’라는 헌법을 바꿔 세 번째 대통령 선거에서도 당선되지. 하지만 국민의 마음은 점차 흔들렸어.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야당의 장면 후보가 부통령에 당선됐거든.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부통령 선거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여당은 1958년 열린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이 우세하자,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정을 저질러. 다른 사람이 대신 투표하는 대리투표는 물론이고 투표장·개표장에서 야당 참관인을 쫓아내고 심지어 투표함을 바꿔치기도 했어. 국민들은 분노했고 3월 15일 마산 등지에서 시작된 부정선거 항의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돼 4·19 혁명으로 이어져.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관직·정계에서 물러남)하게 돼.

1963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창설‘부정 없이 떳떳하게 치르는 선거’의 중요성을 알게 된 국민들은 선거를 공정하게 관리하는 기관이 필요하다고 느꼈어. 당시에도 선거를 관리하던 선거위원회가 있었지만 내무부 부속 부서로 권력자들의 개입을 막기 어려웠거든.

그래서 헌법상 독립기구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를 창설해 후보자 등록부터 개표까지 선거의 모든 것을 주도하게 했지.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 선거
4·19 혁명 이후 국민들은 권력이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헌법을 바꿔 국회 의석을 많이 차지한 당이 내각을 구성해 행정을 맡는 내각책임제 정부를 세웠지.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어. 1961년 5월 16일 당시 박정희 소장이 이끈 군대가 군사정변을 일으켜 다시 대통령제로 바뀌거든.

박정희 소장은 1963년 10월 15일 열린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4대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을 15만 표 차이로 제치고 당선돼. 정권을 잡은 뒤 선거법 시행령은 물론 헌법까지 고쳐 6대, 7대에도 대통령이 된 그는 1972년 10월 삼권(입법·사법·행정)을 모두 대통령에게 집중시키는 통치체제인 유신을 선포해. 유신체제에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대통령을 선출해 장기집권이 가능했지.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이 길어질수록 국민들의 불만은 쌓여갔어. 각 분야에서 유신 반대 시위가 벌어졌고, 1979년에는 부산·마산 등지에서 대규모 시위(부마항쟁)가 일어나. 결국 유신체제는 그해 10월 26일 막을 내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의 총격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말거든.

이런 혼란을 틈타 정권을 잡은 사람은 전두환 당시 육군본부 보안사령관이야. 그는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대를 장악해. 이후 유신체제를 바꾸려는 국회와 정부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이에 반대하는 광주 시민들을 잔혹하게 진압하지. 그 사건이 바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야. 국민을 무력으로 탄압한 사람이 어떻게 제11·12대에 이어 대통령에 당선됐냐고? 당시 대통령 선거는 지금과 같은 국민 투표가 아닌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의원들이 뽑는 간접선거였거든.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
무력으로 시위대를 억누를수록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커져갔고 그 바람은 투표로 이어졌어. 1985년 2월 12일에 치러진 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은 야당의 편을 들어줬어.

국민의 지지를 받은 야당은 대통령 선거를 국민이 직접 뽑는 직선제로 바꾸는 것을 추진했고 위협을 느낀 전두환 정권은 모든 논의를 중단하게 했지.
하지만 국민들은 물러서지 않았어. 1987년 5월 전두환 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서울대학교 박종철 학생이 잔인한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이 일어나고 연세대학교에 다니던 이한열 학생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면서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났어. 전두환 정권은 결국 6월 29일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바꾼다는 내용을 담은 선언을 발표해.

1987년 12월 16일. 드디어 유신체제 이후 국민들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처음으로 시작됐어. 선거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연일 뜨거웠고 ‘보통사람’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노태우 후보가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돼.

총·칼이 아닌 선거라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진 것이지. 1990년대에는 지방자치제가 부활하면서 지방의 군수나 의회 의원들도 국민들이 직접 뽑게 됐고 공정한 선거를 위해 선거 제도와 선거법이 강화됐어. 선거법을 위반하면 엄하게 처벌했고 최고 5억원의 신고포상금제도도 도입됐지.

2000년 이후 축제가 된 선거 문화요즘 거리를 걷다 보면 ‘투표하면 설현이 심쿵심쿵’이라는 글귀가 쓰인 현수막이 보일 거야. 이달 열리는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홍보대사 설현이 투표를 독려하는 캠페인이지. 선관위에서는 2002년부터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인기가 많은 연예인을 홍보대사로 위촉하고 TV는 물론 영화·모바일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선거를 독려하고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선거 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투표율은 해마다 떨어지고 있어. 오늘날과 같은 선거가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가 총칼에도 굴하지 않고 권력과 맞서 싸워 이뤄낸 성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야. 돌아오는 선거 날. 혹시 피곤하다며 투표를 미루는 부모님이 있다면 우리가 먼저 나서보면 어떨까. “아빠, 엄마 투표하고 가족끼리 놀러가요” 하고 말이야.

글=황정옥 기자·김송아린(서울 돈암초 5)·윤현성(일산 정발초 5) 학생기자 ok76@joongang.co.kr, 사진=장진영 기자 artjang@joongang.co.kr·중앙포토, 도움말=김수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기록보존소 사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