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어느 친일파 후손의 기억 친일과 망각
어느 친일파 후손의 기억
1. 2015년 7월 14일, 서울
미국 유명 대학교 MBA 출신의 글로벌 투자회사 임원 김준호(가명) 전무는 평소와 다름없이 회사 이메일 수신함을 확인하다 낯선 메일 한 통을 발견했다. 발신인은 심인보, 처음 보는 이름이다. 제목은 “김준호 본부장님, 뉴스타파 심인보 기자입니다.”
‘뉴스타파 기자라?’ 그는 메일을 열었다.
저는 한국 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에서 일하고 있는 심인보 기자라고 합니다...중략...올해는 역사적인 광복 70주년입니다.
뉴스타파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친일 청산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으며 그 주제 가운데 하나는 친일파 후손들의 현재입니다.
‘이건 무슨 소리지?’ 아래로 더 읽어 내려갔다.
지난 2009년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의 명단에 김 전무의 외증조부(어머니의 할아버지)가 포함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는 내용과 함께 메일을 보낸 이유가 상세히 이어졌다. 어투는 정중하고 공손했다. 편지 말미엔 모두 9가지의 질문이 있었다. 김 전무는 질문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메일을 다 읽고 나서 그는 이 기자가 자신을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졌다.
다음날 오후, 그는 컴퓨터 앞에 앉아 뉴스타파 기자에게 보낼 답장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답변을 쓰는데 꽤 시간이 들었다. 9개 질문에 대한 답변서는 별도 문서 파일로 만들었고, 메일 본문은 간단하게만 적었다.
안녕하세요. 우선 어떻게 저한테까지 연락이 닿았는지 궁금하긴 하네요. 부디 제가 생각하는 의도의 방송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조금 적어 보았습니다.
말미에 답변은 익명으로 처리해 달라는 부탁을 추가했다. 그리고 4쪽 짜리 답변 문서 파일을 메일에 첨부한 뒤 보내기를 눌렀다.
2. 2015.7.15. 뉴스타파 사무실
광복 70주년 기념일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10명 남짓한 뉴스타파 광복 70년 특집 프로그램 제작진은 지난 몇 달 동안 각종 문서와 책자, 인터넷을 밤낮으로 뒤졌다. 그간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친일파 후손들을 많이 찾아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전화를 걸고 이메일 보내기를 수없이 반복해 왔다.
심인보 기자는 이날도 혹시 답장이 온 게 있는지 수시로 메일함을 확인했다. 수신 목록에 ‘RE: 김준호 본부장님, 뉴스타파 심인보 기자입니다’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보낸 메일인데 바로 답장이...’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메일을 열자 네 문장, 두 줄짜리 짧은 본문이 한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 문장엔 밑줄이 쳐져 있다.
답변은 익명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이 사람도 역시 자신이 드러나는 것은 원치 않구나’ 몹시 아쉬웠지만 바로 답장을 보내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메일에 첨부돼 온 워드파일 문서를 열었다.
1. 선조께서 친일진상규명위가 발표한 1,005명의 명단에 들어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보십니까?
전혀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2. 만약 올바른 결정이 아니었다고 보신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솔직히 제가 직접 관련내용을 확인해 본 게 아니기 때문에 주관적일 수는 있을 듯 합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저희 외증조님 이전부터 대대로 관직에 계시던 집안이었고 저희 외증조님은 일제강점기 이전에 성균관 관장을 재임하셨고 일제 강점기 초기에 조선총독부 참의를 지내시다가 낙향 하셔서 나머지 대부분의 기간을 선산이 있었던 이천 부근에서 서당 훈장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앞서 언급하신 친일진상규명위원회라는 게 만들어지기 전에는 이천 부근 면사무소등에 왜정이 싫어서 낙향하신 후에 후학을 위해서 평생을 사신 애국자라는 현판도 달려 있었다고도 들었습니다. 친일파라는 말의 의미가 어디부터인지 규명하기 쉽지는 않겠지만 저희 외조부님이 친일파라면 일제강점기에 직접 독립운동을 하시다가돌아가신 분들 말고는 다 친일파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친일파 결정에 따라 국가에 환수된 선산도 당연히 일제강점기 이전에 보유하고 계셨던 저희 외가 5대가 묻혀 계신 선산이었습니다. 참고로 저희 외고조 외증조할아버지관련 인터넷 자료 아래 첨부해 보았습니다.
1, 2번 질문의 답변부터 정부의 친일진상규명 활동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게 드러났다. 아예 외증조부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도 한다.
저희 외조부님이 친일파라면 일제강점기에 직접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돌아가신 분들 말고는 다 친일파가 아닐까 합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주장이다. 지난해에는 KBS 이인호 이사장이 그의 조부 이명세의 친일 행적에 대해 “그런 식으로 친일을 단죄하면 일제시대 중산층은 다 친일파다”라는 논리를 편 적이 있다.
“친일파의 후손으로 살아오시면서 그 때문에 불이익을 받거나 심리적 위축을 경험하신 일이 있으십니까?”라는 질문에는 이런 답이 달렸다.
전혀 없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저희 외가는 친일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언제부턴가 TV에서 반민족주의자라는 말이 들리기 시작하더니 제멋대로 반민족 특위법을 만들어서 부모님께 물려받을 재산은 없어도 대한민국에서 태어난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온 사람들을 반민족주의자의 후손으로 만들고 또 누군가에게는 애국자라고 믿고 사랑했던 할아버지를 하루아침에 매국친일파로 만들어버린 정치적 이벤트가 불쾌하다고 생각한 적은 있습니다.
‘여전히 건너기 힘든 간극이 있구나’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김 전무의 답변서 마지막엔 자신의 외증조부 관련 자료가 다음과 같이 붙어있었다.
김 전무가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복사해 보내 온 ‘서상훈의 생애 및 활동사항 자료’엔 공교롭게도 1910년 8월까지의 행적만 기재돼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서상훈은 김 전무가 들었던 것처럼 일제 강점기에 왜정이 싫어서 낙향해 서당 훈장을 하며 살았던 애국자였을까?
서상훈 생애 및 활동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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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대구(大丘).자는 군필(君弼).예조판서 정순(正淳)의 아들이다.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고, 1889년(고종 26) 경무대문과시(景武臺文科試)에 병과로 급제, 1891년시강원(侍講院)의 겸설서(兼說書), 이어 설서를 지내고,1893년 한권(翰圈)에 올라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가 되어 동학의 괴수를 처벌할 것을 청하였고, 이듬해 교리가 되었다. 1897년 가자(加資)되어 1900년 정3품으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칙임관4등에 서임되었다. 1905년 3월 성균관장에 임명되었고,1907년 비서감승(祕書監丞)에 칙임관3등으로 승급되었다. 그해 11월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 종사위훈3등(從四位勳三等)으로서 『고종태황제실록(高宗太皇帝實錄)』 편찬위원이 되었다.같은해 종2품에 가자되어 수학원차장(修學院次長)으로 서임되었다.1910년 8월 정2품으로 가자되었으며,중추원참의로 『순종황제실록』 편찬위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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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서상훈 [徐相勛]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
3. 2009년 11월 27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실엔 만감이 교차했다. 제2의 반민특위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국가 차원에서 친일반민족행위를 추적해 온 지 4년 6개월, 이제 해단식과 함께 활동을 마감한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규명위)는 해단식에 앞서서 제 3기(1937년 중일 전쟁~1945년 광복) 친일파 704명을 대한민국 정부공인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최종 확정해 발표했다.
3기, 즉 마지막 명단 확정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1,2기 명단엔 이완용, 송병준 등 이미 사회적 합의가 된 초기 친일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친일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인물들을 정부 위원회가 과연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세간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박정희, 김성수, 방응모 등을 둘러싸고는 격렬한 논쟁과 갈등이 빚어졌다. 친일반민족세력은 여전히 건재했다. 과거청산에 대한 저항도 거셌다. 결국 반민규명위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친일파 명단엔 만주군관학교에 혈서 지원하고 만주군장교로 활동한 박정희는 빠졌고, 일제 때 동아, 조선일보 사주 김성수와 방응모는 포함됐다.
반민규명위는 3기 친일파 704명의 활동 분야를 정치, 통치기구, 경제 사회, 문화, 해외 등으로 나눴는데, 이 중 정치 부문은 다시 매국 수작, 습작, 중추원참의로 분류했다. 3기 명단 중 중추원참의 경력의 친일파는 모두 180명, 서상훈도 여기에 포함돼 있었다.
서상훈 행적: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결정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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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훈은 1901년 10월 1일부터 1943년 7월 31일까지 약 33년 동안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찬의와 참의를 지냈고, 중추원 회의에 참석하여 ‘내선일체의 정신을 한층 강화시키고, 고도국방 국가체제의 확립을 위하여 국민총력운동을 추진하고, 총독과 총감이 이미 조선의 사정에 정통하여 이것을 기본으로 하여 각종 정책을 실행할 것“ 등의 내용으로 조선총독의 자문에 응하였다. (중략) 일본정부로부터 1922년 6월 27일 훈4등 서보장, 1928년 8월 29일 훈3등 서보장, 동년 10월 2일 종4위로 서위되었다. 이와 같은 서상훈의 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9호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하여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자로 일본제국주의에 현저히 협력한 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된다. |
친일반만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4-8권 |
해방 60년을 맞은 2005년 1월 공포된 ‘반민족행위진상규명 특별법’에 근거해 2005년 5월 출범한 반민규명위는 4년 6개월의 조사 활동을 통해 3기 704명 등 세 번에 걸쳐 모두 1006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을 발표했고, 이는 국가 공인 친일파로 확정됐다. 다만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의 경우는 후손들의 이의 제기로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반민규명위가 활동을 마무리한 2009년은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이라는 민족적 염원을 짊어지고 출범한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의 탄압과 친일파들의 역공에 무너진 지 딱 60년이 되는 해였다. 반민규명위는 반민특위가 남긴 미완의 과업, 즉 정의의 회복이라는 과제를 떠안았지만 여전히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제한된 인원과 조사기간으로 러일전쟁 이후 40년 넘게 펼쳐진 친일 행위를 규명해야 한다는 한계가 있었고, 엄격한 증거주의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선정의 폭을 매우 좁게 만들었다. 반민규명위 활동 후반기에 정권이 교체되면서 과거 청산 동력이 크게 약화된 것도 주요 요인이었다. 결과적으로 민간이 주체가 돼 만든 친일인명사전 수록 인물의 1/4 규모 정도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를 확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60여 년 만에 국가 차원에서 처음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의 이름과 행적을 구체적으로 공시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결코 적지 않다. 뉴스타파가 해방 70년을 앞두고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들을 찾아 나선 것도 바로 이 1006명을 기준으로 했다.
4. 1949년 5월 말, 반민특위 위원장 관사
집 안팎이 어수선했다. 어린 정륙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다는 낌새를 챘다. 반민특위 요인 암살음모 사건 이후 관사엔 권총과 카빈 소총 등으로 무장한 경호원들이 아버지를 지켰다. 그런데 그 경호팀이 내쫓기고 못 보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경무대의 대통령 경호원들이었다. 아버지는 가족들을 모아 별도로 부를 때까지 각자 방에서 꼼짝하지 말고 있으라고 했다. 이날 밤 이승만 대통령이 집에 찾아와 응접실에서 아버지와 얘기를 나눴다.
얼마 뒤 이승만 대통령을 대문 밖으로 배웅하고 돌아선 아버지의 얼굴엔 노기가 서려있었다. 아버지는 늘 평온한 표정을 잃지 않던 분이었다. 정륙은 이처럼 굳은 아버지의 얼굴을 이날 처음 봤다.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수행비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특위 위원장인 아버지를 회유하기 위해서 찾아왔다고 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벌의 총책임자에게 장관 자리를 제의하며 흥정을 하려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인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은 친일청산, 민족정기 회복을 흥정의 대상으로 삼은데 대해 그렇게 화를 냈다고 했다. 사실 반민특위와 이승만 정부 사이엔 이전부터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1949년 1월 25일 반민특위 특경대가 서울시경 수사과장으로 변신해 있던 악덕 친일경찰 노덕술을 체포하자 이승만은 사흘 뒤 국무회의에서 정부가 보증해서라도 그를 보석으로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치안기술자가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반민특위는 그러나 6월 4일 역시 일제경찰 출신인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 등을 체포했다. 정부 요직에 포진해 있던 친일파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급기야 6월 6일 아침 서울 중부서장 윤기병의 지휘로 40여 명의 사복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급습해 특경대원들을 연행하고, 각종 증거서류 등을 탈취해 갔다. 이 소식을 듣고 현장에 달려온 권승렬 검찰총장은 경찰에게 몸수색과 권총을 뺏기는 수모를 당했다. 경찰이 하극상을 저지르고, 헌법기구를 유린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사건 직후 AP통신과의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경찰에게 반민특위 습격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김상덕 위원장을 비롯한 반민특위 위원들은 이런 상태에선 더 이상 특위 활동이 무의미하다고 보고 전원 사퇴를 결의했다.
5. 2015년 8월 6일, 국회 의원회관
대한독립 만세! 만세! 만세!
국회 의원회관 2층에서 느닷없이 만세삼창이 울려 퍼졌다. 주인공은 김무성 대표와 김을동 최고위원을 비롯한 새누리당 의원들. 두 사람은 영화 ‘암살’ 국회 초청 특별상영회를 공동 주최했다. 이들은 오후 3시 영화 상영에 앞서 대형 영화 포스터를 배경으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삼창을 외치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김 대표는 기자들과 만나 “광복 70주년을 맞는 심정이 다 다르겠지만 그 시대에 살았다면 과연 어떤 형태로 독립운동 또는 조국을 찾기 위한 애국행위를 했을 것인가를 고민해 보는 것이 바로 이 영화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상영장소인 대회의실에서도 환영사를 하면서 다시 만세삼창을 외쳤다.
그런데 김 대표가 암살에도 나오는 ‘반민특위’의 좌절 과정을 제대로 안다면 과연 만세삼창을 외치며 상영회를 주최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김 대표는 7월 17일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제50주기 추모식에서 참석해 이승만을 국부의 자리에 앉혀야 한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어쨌든 영화의 메시지가 거북할 수도 있는 김 대표와 새누리당이 국회 특별상영회를 주최한 것은 암살의 흥행 돌풍이 어느 정도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암살은 개봉 15일 만인 8월 5일 누적관객이 765만 명으로 천만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식민지 시기를 다룬 영화들이 대부분 흥행에 실패했다는 전례를 감안할 때 암살의 열풍은 놀랍다. 영화의 주인공 안옥윤과 염석진, 하와이 피스톨은 모두 가상의 인물이고 1933년 조선주둔군 사령관 카와구치 마모루와 거물 친일파 강인국를 암살한다는 설정도 허구지만 김구와 김원봉 등 실재 인물과 안옥윤이 소속된 지청천 장군의 한국독립군, 반민특위 등 역사적 사실이 어우러져 단순 오락영화 이상의 ‘물건’이 나왔다는 평이다. 물론 여기엔 감독의 탄탄한 연출과 스타 배우들의 연기가 크게 기여했다.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인 역사학자 이준식 박사는 “천만 관객이 들고 이 중 1%만이라도 김원봉에 대해서, 그리고 반민특위에 대해서 찾아보고 배우게 된다면 그것 자체로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영화의 줄거리가 대부분 허구이지만 일제 밀정인 염석진이 해방 이후 반민특위 재판정에 나와 재판 받는 장면은 실제 역사적 사실을 생생하게 옮겨온 것이다. 염석진 역의 이정재의 연기는 소름끼칠 정도로 압권이다. 염석진은 물론 가상의 인물이지만 이준식 박사는 실존 친일파인 이종형과 노덕술의 캐릭터가 복합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이종형은 일제 밀정 혐의로 1949년 1월 10일 반민특위 특경대에 체포됐다. 박흥식에 이은 반민특위 2호 체포자다. 반민특위 기소장을 보면 “피고인 이종형은...약 5개월 간에 달하여 돈화, 동만 일대를 배회하면서 한인공산당원을 토벌한다는 구실 밑에 길림성 돈화현 왕도하 등 부락에 살고 있는 애국지사 50여 명을 체포하여 그중 17명을 교살 또는 투옥시켰고...” 이종형은 또 대표적인 여성 독립투사 남자현을 밀고해 옥사케 한 혐의도 받았다. 안옥윤의 모델이 바로 남자현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종형은 1949년 3월 29일 열린 반민법 위반 사건 공판에서 자신은 만주에서 공산당을 때려 부수고 민족운동의 체계를 세워서 독립운동의 토대를 닦았다며 이 재판소에 자신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무도한 짓이라고 강변했다. 심지어 그는 법정에서 반민특위 반대 활동을 대대적으로 벌인 것을 스스로 자랑하기도 했다. 암살에서 염석진이 밀정 혐의를 부인하며 자신은 독립 투쟁을 했다고 열변을 토하는 장면과 매우 유사하다.
영화 속 염석진에 녹아든 또 다른 캐릭터는 일제 때 고문경찰로 악명 높았던 노덕술이다. 암살에서 반민 특별재판정을 나와 제복 경찰관의 환대를 받는 염석진의 모습은 일제 밀정이었던 그가 해방 후 경찰의 고위 간부로 등용됐다는 것을 암시한다. 일제 경찰 노덕술도 건국 후 대한민국 국립경찰의 간부가 된다. 하지만 이종형, 노덕술과 염석진의 닮은꼴은 거기까지다. 영화에서 염석진은 16년 만에 김구의 밀명을 집행하는 안옥윤에 의해 처단된다. 반면 이종형은 반민특위가 와해된 후 석방돼 제2대 국회의원이 된다. 노덕술 역시 반민특위에 체포됐으나 공소기각으로 풀려난 뒤 경찰에 복귀했다가 군에 들어가 헌병장교로 변신한다.
암살은 일제 조선군사령관과 친일 거두, 밀정을 처단하는 판타지를 통해 좌절된 역사를 뒤집어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지만 영화의 미덕은 거기까지다. 나머지는 이를 통해 실제 역사를 알아내야 하는 관객들의 몫이다. 역사 속에서 실제 암살은 친일반민족행위자와 그들을 감싸는 권력에 의해 자행됐다.
1948년 말, 전 수도경찰청 총감 노덕술과 일단의 친일 경찰들이 친일 자본가인 박흥식의 자금으로 청부업자 백민태를 끌어들여 반민특위 요인들을 납치, 암살하는 계획을 세웠다. 암살 대상엔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특별검찰관장 권승렬(당시 검찰총장), 특별재판부장 김병로 등이 포함돼 있었다. 친일 경찰들은 백민태에게 실제 자금과 권총, 수류탄 등을 지급했다. 하지만 백민태의 폭로로 반민특위 요인 암살은 미수에 그쳤다. 이처럼 당시 친일청산 및 반민특위 활동과 관련해 이승만 정권과 친일세력의 회유, 협박, 테러가 끊이질 않았고 그 정점에 안두희의 김구 선생 암살 사건이 있었다.
김구 선생은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와 지속적으로 친일파와 반역자 청산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1949년 2월에는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하는 행위는 청소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반민특위에 대한 위협은 계속됐고, 급기야 6월 6일 반민특위 습격사건이 일어났다. 불과 20여일 뒤인 6월 26일에는 김구 선생이 흉탄에 쓰러졌다. 하수인은 안두희였지만 그 배후엔 장은산, 전봉덕, 김창룡 등의 친일파와 권력의 핵심이 있었다.
경찰의 습격이후 반민특위는 사실상 와해되고 만다. 공소시효가 49년 8월말로 앞당겨졌고, 그해 10월 반민특위, 특별검찰부, 특별재판부가 해체됐다. 이승만 정권의 반민특위 흔적 지우기는 집요하게 이어졌다. 전시인 1951년 2월 관련법들을 전부 폐지하고, 폐지된 법률에 따른 판결의 효력도 상실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반민법 위반으로 형을 선고받은 사람들도 모두 복권됐고, 해방 후 우리 민족의 숙원이던 친일 숙청과 과거 청산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해방 전인 1941년 11월 모두 3장으로 이뤄진 건국강령을 선포한 바 있다. 강령 제 3장 ‘건국’ 편에는 친일청산을 다음과 같이 명시했다.
적의 일체 통치기구를 국내에서 완전히 박멸하고... 적에 부화한 자와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와 건국강령을 반대한 자와 정신이 결함된 자와 범죄판결을 받은 자는 선거와 피선거권이 없음... 부적자(附敵者 : 적에 아부한 자)의 일체 소유자본과 부동산을 몰수하여 국유로 함 |
임시정부 건국강령의 정신은 해방 후 제헌헌법 조문으로 이어졌고, 반민족행위처벌법과 반민특위 출범으로 구체화됐다. 하지만 1949년 이승만 정권과 친일세력의 협공으로 반민특위가 해체된 후 50년 이상 친일청산은 한국 사회에서 금기이자 침묵과 망각의 대상이 돼 버렸다.
해방 70년을 열흘 앞둔 2015년 8월 4일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박근령 씨가 일본 인터넷 영상매체 ‘니코니코’의 대담 프로그램에 나와 이승만 대통령 재직 시 과거사 문제, 즉 친일문제를 처결했다는 발언을 했다. 박근령 씨는 A급 전범이자 과거 식민지배의 정점이었던 히로히토를 천황폐하라고 부르는 등 많은 망언을 쏟아냈는데, 특히 이승만 정권 때 친일청산이 마무리 된 것처럼 말한 것은 충격적이었다. 박 씨의 이 같은 발언은 역사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거나, 잘못된 역사를 배웠거나, 제대로 배웠어도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하려 했거나, 셋 중의 하나에서 나왔을 것이다.
전 대통령의 딸이자 현 대통령의 동생 박근령 씨는 이승만 정권 때 일제강점기라는 과거가 청산된 것처럼 말했지만 당시 반민특위의 성과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1949년 상반기, 그 짧은 기간 동안 반민특위는 반민족행위처벌법 위반 혐의자 688명을 조사해 그 중 599명을 특별검찰부에 송치했다. 이중 293명이 기소됐으나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특별재판부가 해체되기 이전에 선고된 사건은 41건에 그쳤다. 친일경찰 출신인 김덕기와 김태석이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징역형은 13명(5명은 집유)이었으나 법 폐지와 효력 상실로 그나마 모두 없던 일이 됐고, 반민법 피의자들은 자유롭게 대한민국 거리를 활보하며 일제 때 보다 더 센 권력과 부를 누렸다.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처리는 다른 나라의 1940년대 전후 처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했다.
다음은 해외 각국의 전후 과거사 처리 사례다.
1940년 6월 독일에 점령당했던 프랑스는 1944년 8월 파리 해방 이후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숙청 작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초기엔 레지스탕스가 이른바 ‘거리의 정의’로 불린 즉결처분을 통해 부역자 등을 최고 만 명까지 처형했다. 드골 임시정부 합법 절차를 통해 반역자를 처벌하기 위해 1944년 6월 ‘협력자 재판소’와 ‘시민재판부’ 설치했다. 1948년 말까지 이들 재판소에서 모두 6,703명의 나치 협력자들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 중 767명이 처형됐다. 또 징역형과 시민권 박탈도 10만 명 수준에 이르렀다. 프랑스는 1990년대까지 과거사 청산 작업을 지속했다. |
폴란드도 나치 협력자와 반역자 처벌을 위한 특별군사재판소를 설치해 3천여 건의 사형선고를 내렸고, 실제 2,500건 가량이 집행됐다. 1944년 8월 나치 치하에서 해방된 이후엔 반역자 등을 처벌하기 위한 통일적 법령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1946년부터 10년 동안 18,166건의 유죄가 선고됐고 이 중 사형은 1,212명, 무기형은 392명에 달했다. |
네덜란드는 해방 후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엄격한 처벌을 위해 1870년 폐지됐던 사형제도를 특별 형법을 통해 부활시켰다. 특별법원이 다룬 사건은 모두 14,562건인데 사형이 선고된 154건 중 39건이 실제 집행됐다. 무기징역은 148명, 나머지 징역형 등을 받았다. 상대적으로 경미한 사건은 별도의 인민재판소에서 다뤘는데 징역형 35,615건, 재산몰수 11,489건, 권리박탈 37,493건에 이르렀다. |
중국 국민당 정권은 일본 패망 후 일제와 협력한 이른바 한간(漢奸: 중국에서 적과 내통한 사람을 이르던 말)을 처리하는 ‘한간처리안건조례’ 등의 특별법을 제정해 1945년부터 1947년 7월까지 국민당 관할 지역에서 모두 25,000여 건의 한간 사건을 처리했다. 그 중 369명이 사형, 979명이 무기징역, 13,570명이 유기징역을 받았다. 당시 중국 공산당도 관할 지역에서 인민재판 형태로 한간을 처벌했고, 그 규모가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 |
출처: 외국의 식민지, 점령지 과거사 청산 법령-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어느덧 해방 70년이다. 사람들은 영화 ‘암살’을 통해 스크린 속에서나마 못다 이룬 친일파 청산의 아쉬움을 달랜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이미 세상을 떴다. 이제 정의와 민족정기를 회복하고, 과거청산을 넘어 과거를 극복하는 길은 올바른 기억과 교육, 그리고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다.
6. 2015년 7월 17일, 뉴스타파 사무실
뉴스타파 취재진은 김준호 전무가 보내온 이메일을 읽고 다시 편지를 썼다.
보내주신 메일 잘 받아보았습니다.
우선 성의있는 답장을 보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본부장님의 가계도는, 저희가 과거 진상규명위 자료와 재산 환수 소송 자료, 반민특위자료, 족보 등을 총 망라해 조사를 하던 중에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혹시라도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그런데 본부장님께서 말씀해주신 외증조부님에 대한 사실 관계가 저희가 확인한 바와 조금 다른 부분이 있어 다시 문의 메일을 드렸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을 보면, 외증조부님이신 서상훈님께서 성균관 관장을 역임하신 것까지는 본부장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행적이 일치합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초기에 낙향하셔서 나머지 대부분의 기간을 선산이 있던 이천 부근에서 서당 훈장을 하셨다"는 말씀은 인명사전에 나온 것과 그 내용이 상당히 다릅니다. 인명사전에 따르면 외증조부님께서는 1921년 4월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셨으며 1943년 7월 작고하시기 전까지 3년 임기의 중추원 참의를 7차례 연임하신 것으로 나옵니다. 혹시 본부장님께서 갖고 계신 자료 중에 인명사전의 서술을 반박할 수 있을만한 것이 있을까요? 만약 본부장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그것대로 저희가 반영할 수 있는 중요한 팩트라는 생각이 듭니다.
(후략)
사흘 뒤인 7월 20일 김 전무로부터 다시 답장이 왔다.
안녕하세요 ◯◯◯입니다
우선 확인해 보니 이전에 다른 분들의 여러 이야기를 제가 편한 부분만 확인도 없이 믿고있었던 모양입니다. 혼선을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말씀하신것처럼 외조부님은 상당히 오랜 기간을 중추원 참의로 계시다가 작고하셨다고 확인했습니다. 다시한번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그외에 실제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정당히 평가해야 한다는 제 생각은 이전에 드렸던 부분과 같습니다. 단 제 생각보다 오랜 기간동안 총독부에 재임하셨다면 실제 어떤 잘못을 하셨었는지 확인하기는 그만큼 어렵겠네요.
한가지 참고로 이번일을 확인하면서 들은 사실 중 하나인데 환수된 선산의 묘지중 일부를 저희 외숙모님이 미국에 가 계신동안 연락이 않된다는 이유로 임의로 공동묘지로 이관했다고 하는군요. 그 안에 있었던 유품이 하나도 남지 않아서 심지어 유골에 대한 확인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민감한 사안인 만큼 보다 조심해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을텐데 그렇지 못하면서 저희쪽에서는 불필요한 부정적인 감정만 커지는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진위 확인도 없이 답변을 해 드렸던 점 죄송하다는 말씀드립니다. 꼭 좋은 프로그램을 만드셔서 모든 사람들이 조금 더 진실이 무었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네요. 이전에 말씀드렸던 것 처럼 제 개인적인 생각은 익명으로 처리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과거를 정확하게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큰 차이이다. 김준호 전무의 두 번째 답장은 첫 번째 답장 때의 간극이 좁혀질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줬다.
뉴스타파 취재진은 김 전무의 외증조부 서상훈처럼 정부가 확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을 대상으로 그들의 후손을 찾아 나섰다. 1006명 중에서도 주로 매국 수작, 습작자, 중추원 참의 등 국권 상실과 일제 강점기의 최고 엘리트 가문의 후손들을 찾는데 집중했다.
취재진은 반민특위 신문조서, 2000년대에 친일파 후손들이 낸 소송 관련 자료와 판결문,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신문에 게재한 친일파 토지 환수 공고문의 토지 지번, 족보와 인명정보 등을 토대로 추적한 결과 모두 1,177명의 후손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선대의 친일반민족행위와 우리 사회의 과거사 청산 문제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지 물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뼈아픈 장면은 나라를 팔아먹고 동족을 배반한 행위를 해방 후 제대로 단죄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70년이 지난 지금 당사자들을 물리적으로 처벌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고 후손들에게 그 책임을 묻는 것은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다만 뉴스타파 취재진은 불의가 정의를 대체한 가치의 전복, 매국이 애국을 이긴 뒤틀린 역사를 망각 속에 계속 방치해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친일반민족행위라는 뿌리가 세월이 흘러 우리 사회에 어떻게 자라나 있는지 확인하고, 친일 후손들이 선대의 잘못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그래서 단순히 과거 청산이 아닌 과거 극복의 길을 모색하고, 치유와 화합으로 나갈 수 있는 단초를 찾아보려 했다.
뉴스타파는 다음 장에서 친일 후손들이 어떤 환경에서 자라, 어떤 교육을 받았고, 우리 사회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실증적으로 분석해 그 결과를 공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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