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레스트산 (원래 이름은 초몰룽마) 최초 등정에 도전한 조지 맬로리 스토리

백삼/이한백 2015. 9. 7. 14:57

 

[비디오2 - 에베레스트산에서 행방불명되었던 조지 맬로리 75년만에 발견]

[비디오1 - 에베레스트산 최초 등정에 도전한 조지 맬로리 스토리]


오늘날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루트는 22개나 된다.


이 알려진 루트를 따라 그곳의 정상에 오른 사람들의 수효는 이미 1천명을 넘어선다. 심지어 1993년 5월 5일에는 각기 다른 원정대에 소속된 50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정상을 밟았다. 물론 그 사이에도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들의 원칙은 간단하다. 가능한 한 많이, 그리고 가장 저렴한 수단과 방법으로 등정하는 것. 위험이나 고독 같은 것들의 의미나 가치? 전혀 안중에도 없다. 예전의 등반이 군사작전이었다면 요즘의 등반은 스포츠 이벤트일 뿐이다.

무슨 뜻인가? 그들은 조지 맬로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에베레스트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맬로리는 메스너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그 모든 등정과 죽음은 금방 잊혀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역설적인 표현이 되겠지만 맬로리는 정상에 이르지 못한 채 죽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신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상과 행동이 하나였던 고전적 영웅의 화신이다. 에베레스트는 누구의 이름과 함께 기억될 것인가. 궁극적인 단 한 사람을 꼽으라면 에드문드 힐러리도 텐징 노르가이도 아니다. 바로 조지 맬로리다.


메스너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조지 맬로리는 예언자였다. 예언자가 정복자나 기록보유자보다 역사에 더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계속해서 맬로리는 메스너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안정되고 편안하게 사는 것은 지루하다. 하나의 목표를 위해 살았다는 것이 진정으로 흥분되는 일이다. 그러니 그저 긴 삶이 외로운 수직의 황야에서 이런 불멸의 죽음보다 더 추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에게는 테마가 있었고, 세계 최고봉에 얽힌 수수께끼는 바로 나 자신이다. 나는 산 위에서 실종됨으로써 나의 죽음까지도 초월하여 살아있는 존재로 남아있게 되었다.”

[비디오3 - 에베레스트 등정에 앞서 초몰룽마 여신에게 기원하는 팀원들]


1980년 인류역사상 최초로 에베레스트 무산소 단독 등정을 시도하여 성공한 산악인이자 산악 저술가인 메스너(messner)는 맬로리가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며 단지 1924년 당시의 등반장비와 기술로는 아예 도전 자체가 불가능한 루트였기 때문이다. 등산화는 무거웠으며 입고 있던 옷 재질을 분석하니 얼어 죽지 않은 것이 기적일 정도로 지금과 비교해서 장비가 너무나도 형편 없었다.


그는 그의 저서 <에베레스트의 미스터리>에서 “맬로리와 어빈은 정상에 도달하지 못한 채 실종되었다. 그들은 절망하고 지친 채 두 번째 스텝 아래에서 발길을 돌린다. 밤이 되어 날이 어두워지면서 어려움이 점점 늘어난다. 두 사람은 힘겨운 하강을 계속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발걸음은 점점 더 느려진다. 오로지 ‘성공을 한 후에야 생길 에너지’만이 그들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라고 기술했다.


1999년 맬로리의 시신이 발견된 지점과 그 상태에 대한 확인은 메스너의 주장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조지 맬로리의 정상 등정 여부는 세계등반사상 가장 흥미로운 미스터리로 손꼽혀 왔다. 그의 시신이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 역시 무수한 신화와 소문을 낳았다.


맬로리가 다시 세계적인 화제의 인물로 떠오른 것은 그가 실종된 지 꼭 75년만인 1999년의 일이다. 1999년 5월 1일, 미국의 세계적인 산악인 콘라드 앵커는 8230m 고도에 있는 북동능선 아래 분지의 약 30˚정도 경사진 밴드 위에서 자일을 몸에 감고 바닥에 엎드린 채 숨을 거둔 한 산악인의 시신을 발견했다.

앵커는 시신의 셔츠에 남아있는 이니셜과 손수건에 싸인 채 보관되어 있던 편지들을 들여다보고 조지 맬로리임을 확신한다.


맬로리의 시신을 찍은 사진은 곧 인터넷을 통하여 전세계에 유포되었고 산악계는 다시 에베레스트 초등 논쟁에 휩싸였다.

[비디오2 - 에베레스트산에서 행방불명되었던 조지 맬로리 75년만에 발견]

[비디오1 - 에베레스트산 최초 등정에 도전한 조지 맬로리 스토리]


오늘날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루트는 22개나 된다.


이 알려진 루트를 따라 그곳의 정상에 오른 사람들의 수효는 이미 1천명을 넘어선다. 심지어 1993년 5월 5일에는 각기 다른 원정대에 소속된 50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정상을 밟았다. 물론 그 사이에도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들의 원칙은 간단하다. 가능한 한 많이, 그리고 가장 저렴한 수단과 방법으로 등정하는 것. 위험이나 고독 같은 것들의 의미나 가치? 전혀 안중에도 없다. 예전의 등반이 군사작전이었다면 요즘의 등반은 스포츠 이벤트일 뿐이다.

무슨 뜻인가? 그들은 조지 맬로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에베레스트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맬로리는 메스너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그 모든 등정과 죽음은 금방 잊혀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역설적인 표현이 되겠지만 맬로리는 정상에 이르지 못한 채 죽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신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상과 행동이 하나였던 고전적 영웅의 화신이다. 에베레스트는 누구의 이름과 함께 기억될 것인가. 궁극적인 단 한 사람을 꼽으라면 에드문드 힐러리도 텐징 노르가이도 아니다. 바로 조지 맬로리다.


메스너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조지 맬로리는 예언자였다. 예언자가 정복자나 기록보유자보다 역사에 더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계속해서 맬로리는 메스너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안정되고 편안하게 사는 것은 지루하다. 하나의 목표를 위해 살았다는 것이 진정으로 흥분되는 일이다. 그러니 그저 긴 삶이 외로운 수직의 황야에서 이런 불멸의 죽음보다 더 추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에게는 테마가 있었고, 세계 최고봉에 얽힌 수수께끼는 바로 나 자신이다. 나는 산 위에서 실종됨으로써 나의 죽음까지도 초월하여 살아있는 존재로 남아있게 되었다.”

[비디오3 - 에베레스트 등정에 앞서 초몰룽마 여신에게 기원하는 팀원들]


1980년 인류역사상 최초로 에베레스트 무산소 단독 등정을 시도하여 성공한 산악인이자 산악 저술가인 메스너(messner)는 맬로리가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며 단지 1924년 당시의 등반장비와 기술로는 아예 도전 자체가 불가능한 루트였기 때문이다. 등산화는 무거웠으며 입고 있던 옷 재질을 분석하니 얼어 죽지 않은 것이 기적일 정도로 지금과 비교해서 장비가 너무나도 형편 없었다.


그는 그의 저서 <에베레스트의 미스터리>에서 “맬로리와 어빈은 정상에 도달하지 못한 채 실종되었다. 그들은 절망하고 지친 채 두 번째 스텝 아래에서 발길을 돌린다. 밤이 되어 날이 어두워지면서 어려움이 점점 늘어난다. 두 사람은 힘겨운 하강을 계속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발걸음은 점점 더 느려진다. 오로지 ‘성공을 한 후에야 생길 에너지’만이 그들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라고 기술했다.


1999년 맬로리의 시신이 발견된 지점과 그 상태에 대한 확인은 메스너의 주장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조지 맬로리의 정상 등정 여부는 세계등반사상 가장 흥미로운 미스터리로 손꼽혀 왔다. 그의 시신이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 역시 무수한 신화와 소문을 낳았다.


맬로리가 다시 세계적인 화제의 인물로 떠오른 것은 그가 실종된 지 꼭 75년만인 1999년의 일이다. 1999년 5월 1일, 미국의 세계적인 산악인 콘라드 앵커는 8230m 고도에 있는 북동능선 아래 분지의 약 30˚정도 경사진 밴드 위에서 자일을 몸에 감고 바닥에 엎드린 채 숨을 거둔 한 산악인의 시신을 발견했다.

앵커는 시신의 셔츠에 남아있는 이니셜과 손수건에 싸인 채 보관되어 있던 편지들을 들여다보고 조지 맬로리임을 확신한다.


맬로리의 시신을 찍은 사진은 곧 인터넷을 통하여 전세계에 유포되었고 산악계는 다시 에베레스트 초등 논쟁에 휩싸였다.

에베레스트에 대한 끝없는 도전


조지 맬로리(George Mallory 1886∼1924)는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전형적인 인텔리였고 한때 교사로서도 잠시 일한 적이 있으나 무엇보다도 산악인이라는 자기 정체성이 확고했던 인물이다. 영국 내의 암벽등반이나 알프스에서의 원정등반에서 맬로리는 분명 그다지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에베레스트다. 에베레스트에 대한 끝없는 도전은 곧 자신과 그 산을 동일시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실제로 그가 남긴 편지나 일기를 보면 에베레스트를 ‘나의 산’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세 번째로 에베레스트에 도전한다고 하자 기자들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되물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에베레스트에 오르려 하느냐고. 맬로리는 훗날 영원히 반복 인용되는 명언을 남긴다.


“Because it’s there.(거기에 에베레스트산이 있으니까.)”


그는 세 번에 걸쳐 에베레스트에 도전했고 마지막 등반이 된 1924년의 원정에서 8220m의 제6캠프를 떠난 후 돌아오지 않았다. 맬로리가 보여준 광기에 가까운 열정과 드라마틱한 실종은 세인들의 가슴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53년 4월 29일, 비로소 뉴질랜드인 에드먼드 힐러리(Edmund Hillary, 1919~2006)와 네팔 국적 셰르파인 텐징 노르가이(Tenzing Norgay, 1914~1986)가 에베레스트에 오른 사진을 남기고 무사히 내려오면서 다시 한번 맬로리와 어빈이 먼저 올랐는지 논란이 된다.


우선 영국에서는 뉴질랜드 국적인 힐러리와 네팔 국적인 노르가이가 최초로 등정에 성공했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마치 남극점 첫 정복을 노르웨이인 로알 아문센이 차지한 것을 열폭하며 패배자이자 무능과 여러 논란을 일으키며 죽음을 자초한 로버트 스콧을 더 위대하다고 억지부리던 것과 같았다.


그래서 같은 영국계 백인이었음에도 힐러리는 무시당했으며 줄곧 영국에서는 맬로리와 어빈이 에베레스트에 먼저 도달했으리라고 주장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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