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선조의 의병장 김덕령 탄압 사건의 전말

백삼/이한백 2015. 8. 6. 09:17

전 징비록을 보지 않아 내용을 잘은 모르지만, 

인터넷에서 후기들을 보아하니 드라마의 컨셉 자체가 선조까기 류성룡 빨기의 흐름인 거 같더군요.

류성룡은 김덕령을 살리고 싶어했지만, 결국 모진 고문에 죽는다는 그런 내용이었다고 하네요.


인터넷에서도 선조의 의병장 탄압이 마치 진실처럼 퍼져있고, 

거기에 선조까기가 더해져 김덕령은 선조의 의병장 탄압의 대표적 사건처럼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십니다.

그럼 김덕령이 어떤 과정으로 인해 죽었고, 과연 선조는 그의 죽음에 얼마만큼의 책임이 있을까요.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김덕령은 유명한 의병장 출신이 북인이 많아서 그런지 가끔 북인 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굳이 당파를 나눈다면 서인 계열에 속하는 인물입니다.

광주 태생으로 성혼의 제자로 알려져 있고 의병도 고경명과 같이 일으키며, 이귀와 이정암이 추천한 인물입니다.



임진년엔 선조도 김덕령에 대한 용력 이야기를 듣고 관심을 두자, 기다렸다는 듯 김덕령에 대한 추천이 쏟아졌고 

김덕령의 군대엔 충용군이란 이름까지 내려집니다.

이때 비변사에선 이름만 내리는 건 부족하니 교사충용군(敎賜忠勇軍)이란 깃발을 내려 조정에서 표창한다는 뜻을 전하자 권유합니다.


이에 선조는 


“김덕령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그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우리 나라는 인심이 본디 경박한데 어찌 조정에서 경솔히 믿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가 아직 공을 세운 일이 없으니 중대한 거조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상의하여 시행하라.”


라며 일단은 거절합니다.


하지만 세운 전공에 비해 김덕령에 대한 명성은 날로만 높아졌는데, 현감이나 만호까지 김덕령과 함께하며 무공을 세우려고 했을 정도였죠.

김덕령이 스스로 5~6리 밖에 진을 치고 혼자서 적을 섬멸 할 수 있다는 식의 말을 떠드는 걸 보고 선조는 이 사람에게 큰 일을 맡겨서는 안 된다 생각했으나,

그래도 최소한의 믿음은 있는지 진해, 고성 등의 방어를 담당하게 합니다.


이러던 와중 선조 27년 1월, 전쟁이 점점 고착화되고 휴전에 대한 논의가 한창 나올 시점 역모 사건이 터집니다.

송유진이란 인물이 충청도에서 난을 일으켜 도성을 공격하려다 실패한 사건입니다.

문제는 이 송유진의 세력이 의병을 자처하며 군세를 모았고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겁니다.

다행히 도성에 당도하기도 전에 간단히 진압되었고 이 때문인지 이몽학의 난에 비해 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비변사는 선조에게 우두머리는 다 잡았으니 그 밑의 일반 백성은 용서해주고 다시 회개할 기회를 주자 건의합니다.

다행히 선조도 이를 받아들였습니다만, 직접 가담자를 국문을 해보니 송유진의 입에서 이산겸이 우두머리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산겸은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의 서자로 조헌이 죽기 전까지 그의 밑에서 의병에 가담 했던 인물입니다.


정황상 이산겸은 난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은 거 같고 선조 역시 이산겸이 송유진의 말처럼 우두머리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의병을 모아놓고 왜군과 대적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 때문에 조정에서 상당한 의심을 사게 되고,

이후 결국 사형을 당하게 되는데... 문제는 국문 중 이산겸에게서 김덕령이 군사를 모으라고 한 편지가 발견 된 것입니다.

선조가 그 편지가 이번 역모와 관련이 있나 물어보지만 류성룡은 없다고 말하여 일단은 넘어가게 됩니다.

(여담으로 이산겸의 국문에 가장 크게 개입한 게 류성룡입니다.)



개인적으로 선조가 의병(정확히는 의병장에 대한)에 극단적인 반응을 보인 건 이때가 유일하다고 봅니다.

본인조차 이산겸이 문제가 없다 생각하면서도, 차후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어떠한 두려움에 격한 반응을 보였죠. 

그리고 재미있는 게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인데 선조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의병장에 대해선 극단적으로 좋게 기록하는 선조실록의 경우,

의병장 이산겸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단 한 마디의 부정적 서술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반대로 엥간하면 선조를 까지 않는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이때의 기록을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산겸이 의병을 장악하고 해체하지 않은 그 정상이 의심스럽다.”

하여, 마침내 형추(刑推)하도록 명함으로써 형장 아래에서 죽으니, 사람들이 대부분 원통하게 여겼다. 


‘어떤 사람’이라는 대상이 불분명하지만 누가 봐도 이 말을 한 것이 선조라는 느낌이 들도록 기록하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지요. 


여하튼 이때 많은 사람들이 취조를 당했으나 그 안에 김덕령은 포함되지 않았고, 

선조 역시 김덕령을 의심하진 않았지만 이 일은 선조에게 의병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역모사건에 간접적이나마 김덕령의 이름이 올라버린 사건이었습니다.




비록 역모사건에서 이름이 한 번 올랐던 김덕령이었지만 특별한 권율 아래 소속되어 특별한 문제 없이 시간은 지나갑니다.

세력은 박진, 이시언 등에 비하면 군사가 그래도 많은 편이고, 일반 군인들조차 과거엔 중국군에 의지하더니,

최근엔 김덕령만 바라볼 뿐이다..할 정도로 그의 직위나 공적에 비해 사람들에게 김덕령에 거는 기대감은 상당히 높았습니다.


실제로 선조 27년 9월에는 권율의 명으로 군사 200명을 데리고 일본군이 데리고 있었던 조선인 포로 50명을 구출하는 성과를 내기까지 합니다. 



원균조차 조정에 올리는 장계에


신(臣)은 다시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육병장(陸兵將) 곽재우(郭再祐),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에게 상의하여 수륙(水陸)으로 합동 공격할 것을 계획하고… (후략),


이순신과 곽재우와 함께 상의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인물로 김덕령을 꼽았을 정도이니 

당시 김덕령에 대한 느낌이 어땠는지는 말을 안 해도 느껴지시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능력에 비해 명성이 너무 높으면 언젠가 그 밑천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때는 전시이고 김덕령은 장수였으니 그 밑천이 드러나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선조 27년 10월 권율의 주도하에 거제를 공격했을 때 선봉장으로 임명되었음에도 병이 났다며 전투를 피하여 군대 전체 사기를 꺾이게 만들었으며,  

후에 이항복이 김덕령을 만나고 조정으로 와서 말하길, 


들리는 바와 다르게 외모는 일반 선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술을 마시고 실수하는 일도 많았다,

조정에서 그에 대해 너무 포장을 한 거 같다. 라고 선조에게 보고합니다.

이런 일이 거듭하여 일어나자 과거와 다르게 김덕령에 조정과 선조의 기대감은 한없이 낮아집니다.


여기서 더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선조 28년 10월쯤 김덕령은 세 사람을 살인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선조는 사람을 죽였는데 관청이며 수령이며 죄를 묻지도 못하는 게 말이나 되냐고 우려를 표시하지만,

류성룡이 그가 죄가 있음은 분명하나 전시라는 특별한 상황이니 일단은 넘어가자며 설득합니다.


처음엔 선조도 그의 죄를 용서하고 방면하자는 결정을 하였으나, 

그에게 죄를 주어야 한다는 사헌부의 끈질긴 설득으로 선조는 그에게 죄를 주는 방향으로 마음을 돌립니다.

이 사건이 한창일 적 그를 수하로 두었던 권율 조차도 그에 대해 


“덕령은 본래 광주(光州)의 교생(校生)으로 용력이 뛰어나 쓸 만한 인재입니다. 그러나 늘 군율(軍律)이 엄하지 못한 것을 분개하여, 

휘하 사람 중에 범죄자가 있으면 귀를 자르거나 혹은 곤장을 치기도 하므로 휘하 사람들이 점차 도망한다고 합니다.”


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좌의정 김응남이 살인은 용서할 수 없는 중죄이지만, 그가 용력이 뛰어나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고

만약 지금 그를 용서해주면 감격하여 목숨을 다해 보답할 거라 설득하여 결국에 선조 29년 2월, 선조의 명으로 말도 한 필까지 받으며 사면됩니다.


이전에 간접적이긴 했으나 역모사건에 이름이 거론됐음에도 아무런 일 없이 넘어갔고,

살인사건으로 사헌부에서도 몇 번이나 문제시하며 죄를 주어야 한다고 했지만 선조는 이번에도 넘어갔습니다. 


이산겸과 다르게 눈에 보이는 직접적인 죄가 있었던, 죽이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던 그를 선조는 결국 용서합니다.

하지만 한 번 더 문제가 생긴다면, 어쩌면 선조도 더 이상은 참지 못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역모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살인죄로 김덕령을 풀어주고 채 3개월도 지나지 않은 선조 29년 7월, 춘청도 어사 이시발이 급히 보고를 합니다.

7월 7일 군사 1천명이 홍산에 모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이몽학의 난입니다.


이몽학은 한현이란 인물의 지원으로 세력을 키웠는데, 송유진의 난 때처럼 의병을 모집한다는 핑계로 군대를 모았고 

어사 이시발 밑에 소속되어 군사를 훈련 시킵니다.  

이때 한현은 이몽학을 끌어들여 그를 무량사에 들어가 승려들과 인연을 이었고 동갑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세력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휴전 중 난을 일으키는데 이전 송유진의 난 때와 다르게 5~6개의 고을을 합락하였고, 

현감과 군수를 사로잡았을 정도로 세력이 컸습니다만....홍주 목사 홍가신의 군대에 의해 섬멸하게 됩니다. 

난이 진압되면 당연히 관련자들의 처벌이 이루어져야 할 터인데, 문제는 그들이 난을 일으키며 떠든 이름들이었습니다.


조정대신으로는 병조판서 이덕형의 이름이 나왔고, 의병장들의 이름으로 곽재우, 홍계남, 고언백 그리고 김덕령의 이름이 거론됐던 것이죠.

의병장들이야 전장에 있으니 이런 보고를 들을 수도 없었겠지만, 조정에서 보고를 다 듣는 이덕형은 매우 당황해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무관하더라도 역적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왔으니 체직시켜 달라 6번이나 부탁하는데 

선조는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다 알고 있으니 걱정 말고 직무나 잘 수행하라 합니다.(3번 넘어서는 굉장히 귀찮아 할 정도입니다.)

또한 같이 이름에 나왔던 의병장들도 모두 불문에 붙이라고 명하지만 단 한 명은 예외였습니다.


예상하셨듯 김덕령입니다...


권율은 김덕령을 바로 체포하고 서울로 압송합니다. 

수사 내용을 보니 가담자의 모든 입에서 한 목소리로 나오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역시 김덕령이었습니다. 


“역적 한현(韓絢)·이몽학(李夢鶴) 등과 결탁하여 몰래 통하여 모의(謀議)하여 성세(聲勢)를 만들고, 국가가 위태하고 

어지러운 때를 당해 불궤(不軌)를 도모한 사실이 모든 역적들의 공초에서 셀 수 없이 나왔다. 


한현의 공초 내에는 ‘장수는 김덕령이다.’ 했고, 또 ‘이몽학과 박승립(朴承立)이 김덕령을 찾아가 만나보고 함께 거병(擧兵)하는 일을 모의했다.’ 하였으며, 

유규(劉赳)의 공초 내에는 ‘전라도에 김 장군이 있는데 장군의 명칭은 익호 장군(翼虎將軍)이다.’ 했고, 

이업(李業)의 공초 내에는 ‘장후재(張後載)가 김덕령에게 왕래했는데, 덕령이 「사세를 보아가며 하라. 」고 했다.’ 하였다."

고 증언이 나옵니다.



이에 김덕령은 소스라치며, 자신이 능력 이상의 허명을 얻어 역적들이 국가에서 자신을 쓰지 못하게 하려 한 적의 흉계이며,

자신은 역적들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권율의 명에 따라 역적을 토벌하러 갔으나 이미 진압되어 다시 돌아왔을 뿐이라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이미 그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류성룡은 송유진의 난 때에도 역적들의 공초에서 김덕령이 언급됐음에도 그 때는 넘어갔으나 이번에 또 나왔으니

그가 살 방법은 없을 거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후 김덕령은 6차례의 형문을 받고는 결국엔 형장에서 사망합니다. 



이 사건에서 재미있는 건 김덕령이 고문을 받았을 시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이 완전히 상이하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선조실록에서는 선조가 

“김덕령은 사람을 죽인 것이 많은데 그 죄로도 죽어야 한다." 라고 말해 마치 김덕령을 무조건 죽여야 할 것처럼 묘사합니다.


반면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은 내용이 정 반대인데, 기록을 그대로 가져오겠습니다.


(전략) 덕령이 순순히 체포되어 하옥되었는데 상이 직접 국문하였다. 이에 덕령은 사실대로 답변했으나 증거는 없었다. 

그는 갑자기 유명해진 까닭에 이시언(李時言) 등의 시기를 받았으며 조정 또한 그의 날쌔고 사나움을 제어하기 어려울지 모른다고 의심하였으므로 

기회를 타서 그를 제거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놓아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였다. 

선조의 뜻도 역시 그러하였는데 대질하여 심문하고는 오히려 그를 아깝게 여겨 좌우에게 묻기를,


“이 사람을 살려줄 도리가 없는가?”

하니, 


대신 유성룡 등이 아뢰기를,

“이 사람이 살 도리는 없습니다. 다만 아직 그대로 가두어 두고 그의 일당들을 국문한 뒤에 처리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였고, 판의금 최황(崔滉) 등은 즉시 형신(刑訊)할 것을 청하였다. 


선조는 재삼 난색을 지었으나 아무도 구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그는 살인을 많이 했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며 조금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하기도 하였다. 


정언 김택룡(金澤龍)은 아뢰기를,

“국가가 차츰 편안해지는데 장수 하나쯤 무슨 대수입니까. 즉시 처형하여 후환을 없애야 합니다.”

하여 사람들의 웃음을 샀다.



드라마 징비록과 정 반대의 내용입니다.

선조는 그래도 김덕령이 아까워 살려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는데 류성룡 외 조정 대신들이 모두 그를 죽이려 드는 모양새입니다. 


선조실록과 수정실록은 각각 북인과 서인의 주도하에 편찬됐기에 인물의 평이나 누락되어 보충하는 것은 모를까

사건에 대해 이렇게 정 반대의 내용을 담는 경우는 의외로 드뭅니다. 

하지만 사실 선조실록을 잘 살펴보면 반드시 상이하기만 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정실록에서 김덕령을 바로 형신할 것을 청하고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다고 말했던 판의금 최황의

선조실록의 졸기에 사신의 평이 하나 들어가 있습니다. 


(전략) 호남에 김덕령(金德齡)이라는 자가 있었다. (중략) 뒤에 역적의 무함을 받아 금부(禁府)에 나치(拿致)되니, 

사람들이 누구나 그 정상을 억울하게 여기고 용맹을 아까워하였으며 상도 풀어주려는 뜻이 있었으나, 

최황이 상에게 그 용맹 때문에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여 목에 칼을 씌우고 손에 수갑을 채워서 끝내 옥중에서 죽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 억울함을 가엾이 여기고 최황에게 눈을 흘기고 있다.


수정실록과 거의 완벽히 똑같은 내용입니다. 

선조는 김덕령이 아까워 풀어주려고 했던 뜻도 있었으나, 최황 등의 모함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김덕령을 살려준 것으로 묘사된 류성룡의 모습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두 실록의 기록이 거의 흡사합니다.

그가 살 방법은 없다는 것이지요. 


두 번의 역모사건과 한 번의 살인 사건...그리고 너무 심한 군율 적용과 본인도 감당못할 허명을 가졌던 김덕령.

그는 본보기가 되어 희생된 것도 아니었고 선조의 시기로 죽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가 살 방법은 없다 여겼습니다.

그리고 결국엔 죽었습니다.



.....


여기까지가 선조가 의병장을 시기하고 두려워하여 탄압한 사건으로 알려진 김덕령의 죽음의 전말입니다.


정말 선조는 알려진 것처럼 의병에 대한 두려움에 쌓여 불안감에 떠는 왕이었을까요.

오히려 꾸준히 그에게 큰 일을 맡겨서는 안 된다 말하고 때로는 용서치 않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그래도 그라면... 이라는 느낌으로 김덕령을 놓지 못하는 모습을 가진 왕이었을까요...


또 정말 김덕령은 모두의 안타까움에 억울하게 죽은 의병장이었을까요.

아니면 모든 조정 대신들이 그가 그 상황에서는 살아날 방법이 없다 생각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렇게 죽은 것일 뿐일까요..


어떠한 선입견에 근거하여 그럴듯하게 연출되어진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들어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김덕령의 죽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