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고종 / 이완용

백삼/이한백 2015. 8. 21. 10:15

고종황제는 헐값에 평안북도 운산에 있는 금광산을 미국에 팔았다.

미국이  조선황실에  넘겨준 가격은 대략 7000원 정도다.

그후 미국은 1901년부터 1910년까지 총 10년동안  운산에 있는 그 광산 한곳에만 금을 체굴하면서 총 2000만원이라는 이익을 보았다.

당시 대한제국 1년 예산이 400만원 내외이고,   멸망할 당시 대한제국의 빚이 1750만원 이라는 사실을 비추어 보면 금광에서 체굴한

이익이 얼마나 큰지 알 수가 있다.

그럼, 당시 고종황제가 금광산을 팔아 먹은 돈으로 무엇  했을까?

바로 1903년에  외국으로 자동차 2대를 주문했는데,  자동차를 산 돈 대부분이 운산금광을 판 돈에서 나왔다.

그래서 경제학자가 경복궁 박물관에 가서 그 자동차를 볼때마다 열불난다고 한다.

고작 2개의 자동차를 사기 위해서 동양 최대의 금맥을 가진 운산금광을 헐값에 팔아 먹었다는 사실이 그 경제학자의 가슴에

열불을 지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1910년이후에 그 운산금광에서 더 많은 금이 나왔고, 그 금광이 일본에 넘어가는 1933년까지 미국이 챙긴 이익은 초창기10년과  비교하면  몇배나 더 많다고 한다...

대한제국이 근대화에 실패한 이유중에 하나가 돈이 없어서 였는데, 운산 금광에서 상당히 많은 이익이 생긴 것보면 얼마나 

그 경제학자가 열불난 이유를 충분히 알것이다.


진시황이나 조선의 폭군 연산군이나 고려의 엽기적인 왕 충혜왕, 로마의 네루황제나 명나라 폭군들도 하지 않는

일을  조선의 고종은 했다. 무슨 일일까? 훔친 세금 가지고 정부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한 것이다. 

고종이  측근을 동원하여 나라의 세금을 훔쳤고, 그 결과 나라의 재정은 빵구놨다. 웃긴것

고종이 훔친 세금 가지고  자기 나라에   사채 놀이를 하여 엄청난 이자를  챙긴 것이다.  고종이 훔친 세금때문에 재정이 열악한 조선정부로써는  임금이 훔친 세금을 사채로 빌려서  나라 살림을 운영했던 것이다. 그런일이 반복되면서 고종의 호주머니는

커지기 시작했다. 고종시절은 조선조 최고의 부정부패가 심한 시기였는데, 고종 밑에 있는 신하들도 부정부패에 일가견이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런 부정부패 심한 신하들이 보기에도  왕의 부정부패가 너무 심한 것이다. 신하들이  왕의 세금 착복을 제발

하지 말아달라고 읍소를 계속 했지만, 고종은 무시해버렸다.   결국 왕실 재산은 나라 살림보다 컸고, 정부 재정으로 들어오는 세금보다도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내장원에서 거두어 들이는 세금이 더 많았다.(금고로 들어갈 돈이 내장원에서 가로챈것다.실상은)

고종의 부정부패로 인해서 조선의 재정이 파탄났고, 빚이 엄청나게 증가를 했다.

광무개혁으로 표현되는 조선의 근대화 운동도  재정이 파탄났기 때문에 큰 효과를 보지 못해 실패를 하였다.




결국에  고종황제가 만들어 놓은 어마어마한 황실재산은  1905년 을사늑야부터 일본이 야금야금 먹기 시작하여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시기에 대부분 일본의 손아귀에 다  떨어졌다.  이때부터 광복때까지 조선황실은 

조선총독부에서 나오는 연금으로 겨우 겨우 풀칠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고종황제가 몰래 챙긴 비상금 가지고 독립운동에 지원한 것은 사실이다. 그 돈이 신흥 무관학교에 들어간 것도 있고,

기타 여러 독립운동에 쓴것은 맞다.  하지만 ,   그렇다고 해서 고종이 나라멸망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어찌보면 이완용보다 몇배나 더 나쁜 사람이 고종황제다.  나라를 이 모양 이꼴로 만든 몸통이 고종황제며,

이완용은 꼬리에 불과하다.   이완용은 나라가 넘어갈때에 일본의 편에 서서  조약에 사인 한 것 밖에 없다.

이완용을 두둔하자는 말도 아니다.  그 놈도 나쁜 놈이다.  

다만 , 이완용는 화룡점정일 뿐, 용의 몸통은 고종황제 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