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에서 ‘명-청 교체기’와 ‘2차 국공내전’은 “개미가 코끼리를 이긴” 위대한 승전으로 유명하다.
그만큼 이걸 어떻게 이길 수 있었는지 의아스러울 정도로 전력차가 극심했다. 최종적인 승자가 패자보다 오히려 국토, 인구, 군사력, 재력 등에서 몹시 열악했다.
◆영원대첩
대제국 명나라의 힘은 웅혼했다. 만주족에게 사르후 전투에서 참패하고, 왕화정의 판단 미숙으로 심양, 요양 등 요동을 송두리째 빼앗겼으며, 대기근과 농민 반란으로 나라 안이 엉망진창이 된 가운데서도 명은 굳건히 버텼다.
만주족이 세운 후금,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청나라는 서기 1644년까지 만리장성의 동북방 요해지 산해관을 넘지 못한다.
이처럼 산해관을 난공불락으로 만든 영웅 중 한 명이 원숭환이었다. 원숭환은 본래 과거에 급제한 문인이었으나, 평소 병법에 관심이 많았다. 웅정필과 왕화정이 몰락한 1622년, 원숭환은 적진을 염탐한 뒤 “군마와 경비만 주면, 내가 동북방을 지켜내겠다”고 명나라 조정에 진언했다.
달리 대안이 없었기에 당시 명나라 황제 천계제는 원숭환에게 수만 군대와 은 20만냥을 내준다. 원숭환은 이들을 이끌고 산해관 북방으로 나아가 영원에 높이 3장 2척, 넓이 2장의 성벽을 축조했으며, 그밖에 금주와 송산 등지에도 방어선을 건설했다.
원숭환 덕택에 명나라는 산해관 북쪽 약 106km 지점에 새로운 방어 거점을 지니게 됐다. 이는 갑옷 위에 철갑을 덧씌운 것 마냥 명나라의 방어력을 크게 상승시켜 준다.
다만 원숭환은 당시 천계제의 총애 덕에 절대권력을 누리던 환관 위충현의 파당이 아니란 점이 약점이었다. 위충현의 일당으로서 산해관 방비를 맡게된 고제는 “각개격파의 우려가 있다”며 산해관 바깥쪽의 병력을 모두 철수시키라고 명령했다.
이에 원숭환이 거세게 반발하자 고제는 원숭환의 직속 병력만 빼고 나머지 병력은 모조리 산해관 안쪽으로 철수시켰다. 이제 원숭환이 고작 2만 군사로 강력한 후금군을 상대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럼에도 원숭환의 의기는 꺾이지 않았다. 1626년 후금 태조 누르하치가 16만 대군을 이끌고 영원성을 겹겹이 포위했다. 누르하치는 자신의 군대가 30만이라고 허세를 떨면서 항복을 권했지만, 원숭환은 “죽으면 죽었지 항복할 수 없다”고 단칼에 거절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원숭환의 철저한 대비가 빛을 발한다.
높은 성벽 안에 숨은 명군이 밖으로 나오질 않으니 후금군의 뛰어난 기동성도 의미가 없다. 성벽에 달라붙으면, 즉시 원숭환이 특별히 남방에서 구입해 온 포르투갈의 최신형 대포, 홍이포가 불을 뿜었다. 또 화살과 돌도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결국 후금군은 아무런 전과도 거두지 못한 채 수천의 사상자만 남기고 철수한다. 원숭환은 적을 30여리나 추격해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
무엇보다 홍이포의 포격 때문에 누르하치도 큰 부상을 입었다. 누르하치는 “짐은 군사를 일으킨 이래 단 한 번도 싸워 이기지 못한 적이 없는데, 영원성 하나를 떨어뜨리지 못하니,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하고 원통해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만주족을 상대로 한 최초의 승리에 명 조정은 환호했다. 천계제는 즉시 원숭환을 병부시랑 겸 요동순무로 승진시키고, 막대한 재물을 하사해 치하했다.
이 싸움은 흔히 ‘영원성 전투’ 혹은 ‘영원대첩’으로 불린다.
◆‘철벽’ 동북방어선
원숭환이 설계한 명나라의 동북방어선은 매우 견고했다.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을 정벌하는데 성공했지만, 영원성은 뚫지 못한다.
1627년 청 태종 홍타이지는 빠른 속도로 원숭환을 공략했으나, 상대는 인조나 김경징 따위와는 레벨이 달랐다.
홍타이지가 우선 영원성의 바깥 해자에 해당하는 금주성을 공격하자 원숭환은 재빨리 부하 장수 조대수와 기병 400명을 파견해 금주성을 구원했다. 홍타이지는 영원성의 방어력이 약해졌다고 판단, 군을 돌려 영원성을 공략해봤지만, 원숭환은 직접 성 위를 뛰어다니며 방어전을 지휘했다. 매년 300문씩 생산되는 홍이포도 청군에 큰 타격을 가했다.
결국 성벽을 넘지 못하고, 무더위에도 지친 청군은 스스로 물러난다.
원숭환은 연전연승에 고무돼 적을 얕잡아보지 않았으며, 방어선 강화에 지속적으로 몰두했다. 덕분에 명나라는 금주-송산-행주-탑산으로 이어지는 철통같은 동북방어선을 가지게 됐다.
도저히 이를 뚫기 힘들다고 판단한 홍타이지는 1629년 산해관이 아닌, 내몽골 지역으로 크게 돌아 만리장성을 넘어 명나라 영토로 진격했다. 그는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적 방어선을 우회해 명나라 수도 북경까지 단숨에 달려갔지만, 원숭환도 기민했다.
원숭환은 300여리를 단숨에 주파해 청군보다 앞서 북경성 앞에 진을 쳤다. 이어 10여 차례 교전을 벌여 청군을 물리쳤다.
실로 눈부신 업적이었다. 명나라의 장수들이 원숭환을 ‘만리장성’에 비유해 칭송할 정도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 명나라 황제 숭정제는 조선의 선조만큼이나 의심이 많고 비열했다. 원숭환의 인기가 높아지자 이를 시기한 숭정제는 그에게 반역죄를 뒤집어씌워 체포했다.
수많은 장군과 신하들이 “적이 코앞에 있는데, 스스로 장성을 허물어서는 안된다”며 반대했지만, 충언을 무시하고는 원숭환을 능지처참시켰다.
◆“돈이 없다”
영웅 원숭환은 비참하게 죽었지만, 그가 떠난 뒤에도 명나라의 동북방어 시스템은 남았다. 청나라는 여전히 이 ‘철벽’을 뚫기 힘들어했다.
그런데 외적의 거듭된 침략조차 막아낸 ‘철벽’이 단지 “돈이 없다”는 한 마디 때문에 허물어진다.
원숭환 이후 동북방어선의 책임을 맡은 자는 계요총독 홍승주였는데, 그는 원숭환의 전략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금주, 송산, 행주, 탑산 등 4개의 성채로 기각지세(掎角之勢)를 형성, 지키는데 주력하면서 적이 한쪽으로 힘을 집중하면, 다른 성에서 즉시 이를 구원하는 것이다.
이 전략은 매우 강력한 수비를 자랑한다. 다만 장기전이 불가피하며, 능동적이지 않아 적을 격멸하기는 힘들다는 점이 단점이다.
그런데 명나라 병부에서 이 점을 집요하게 지적하기 시작했다. 병부상서 진신갑은 홍승주에게 계속 속전속결을 요구했으며, 진신갑이 현장에 파견한 장약기도 잇따라 거짓 승전보를 조정에 올려 홍승주를 압박했다.
진신갑은 속전 주장의 근거로 “소극적인 방어전략에서 탈피해 적을 궤멸시켜야 한다”를 내밀었지만, 실상 속내는 돈 때문이었다. 당시 명나라 조정은 동북방어선 유지를 위해 매월 은 40만냥을 지출하고 있었다. 전시에는 평시보다 전비 지출이 급증한다는 것은 군사의 상식이다.
진신갑은 안 그래도 기근 등으로 재정이 어려운 상태에서 전쟁을 오래 끌면, 군사비 지출을 감당하기 힘겨워질까 우려된 나머지 속전속결을 강요한 것이었다.
홍승주는 청군을 상대로 한 야전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거듭되는 내외의 압박을 이겨내기는 힘들었다. 1639년 청군이 다시 금주성을 포위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대군을 이끌고 송산성 밖으로 진격했다.
원숭환처럼 소수의 기병으로 포위군을 괴롭히는 전략이 아니라 13만 전군이 야전을 벌이기 위해 성채 바깥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듣자 홍타이지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는 그야말로 눈썹이 휘날릴 듯 명군을 향해 달려갔다. 행군이 너무 급해 코피까지 나서 주위 신하들이 만류했으나, 홍타이지는 “행군의 유리함은 신속에 있다”며 듣지 않았다.
역시나 야전에서는 바람처럼 빠른 청군 기병대를 명군이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명군은 13만 병사 중 5만3000명이 전사할 만큼 대패를 당했다. 송산성 외 탑산, 행주, 금주 등 다른 성채들도 모조리 함락됐다. 패전 후 조정의 처치에 불만을 품은 홍승주는 청나라에 항복한다.
철통같은 방어선이 단지 돈을 아까워한 관료들 때문에 어이없이 붕괴된 것이다. 명나라에게 더욱 안타까웠던 것은 정말로 돈이 없었던 것도 아니란 점이다.
서기 1644년, 반란군 지휘관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 명나라를 멸망시킨 뒤 국고를 열어보니 그곳에는 있는 은은 겨우 40만냥뿐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황실의 내탕금, 즉 숭정제의 개인재산은 은 3700만냥, 황금 150만냥에 달했다고 한다.
숭정제가 약간의 개인재산만 내놨어도 동북방어선은 무사했을 것이다. 역사가 담천은 “명나라 멸망에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책임이 매우 크다”며 날카롭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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