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1만 병사 ‘목숨값’ 꿀꺽한 광해군

백삼/이한백 2015. 6. 22. 13:52

인조가 병자호란에서 패한 뒤 청나라 황제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즉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 조아리기를 한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는 바람에 그가 반정을 일으켜 끌어내린 왕,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칭찬하는 의견들이 많다.

실제로 광해군의 외교는 괜찮은 편이었다. 청나라와의 관계를 나쁘지 않게 끌어가면서도 명나라로부터 의심은 전혀 받지 않았으니 말이다. 오히려 명나라 조정은 광해군을 ‘만고의 충신’이라고 칭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사실 광해군은 내정에서는 문제가 많은 왕이었다. 

인목대비를 가두고 영창대군을 살해하는(폐모살제(廢母殺弟)) 패륜적인 행위를 저질렀으며, 대북파만 총애하면서 다른 붕당 소속 신하들을 자주 숙청해 조정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또 ‘왕권 강화’라는 목적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궁궐을 증축하거나 개축해 국가 재정을 탕진하고, 백성들로부터 심한 원성을 들었다. 

특히 가장 치사하고 졸렬한 행위는 명나라 황제가 조선의 병사들에게 하사한 은을 중간에서 착복한 것이었다. 

◆은 1만냥 하사한 만력제 

당시 명나라는 누르하치의 후금(훗날의 청나라)과 대립하고 있었는데, 서기 1619년 후금을 토벌하기 위해 17만 대군을 일으켜 요동으로 진군했다. 광해군도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이 전투에 1만3000명의 군사를 파병했다. 

후금군은 명군의 절반도 채 안 되었기에 명군 총사령관 양호는 승리를 확신했다. 하지만 총병 두송이 공을 탐해 홀로 진격하다가 궤멸당하는 등 명군은 누르하치의 각개격파 전술에 휘말려 사르후 전투에서 참패했다. 때마침 결정적인 순간마다 모래폭풍까지 이는 바람에 힘도 못 써보고 명군 태반이 전사했다. 

조선군도 모래폭풍이 부는 가운데 느닷없이 돌격해온 후금군 기병대에게 무참하게 도륙당했다. 조선군의 전사자만 약 1만명에 달했으며, 지휘관 강홍립은 후금군에게 항복했다. 

비록 패했다고는 하나 1만3000명이나 되는 군사를 파병하고, 이들 대부분이 전사할 때까지 용감하게 싸운 조선군의 의리와 충성에 명나라 조정은 감복했다. 

이에 당시 명나라 황제 만력제는 전사자의 유족들을 위로하고 부상자들을 치료하는데 쓰라며 은 1만냥을 하사했다. 

조선 후기 국정 전반을 총괄하던 비변사는 “황제의 명대로 은 1만냥을 활용해 장사(將士) 이상에게는 전마(戰馬), 갑옷, 투구, 활, 화살 등을 하사하고, 군사들에게는 사람 수대로 나눠줘 겨울을 대비하게 하자”고 진언했다. 

◆은 착복…자기가 필요한 물품 사는데 쓴 광해군 

그런데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비변사의 진언을 광해군은 물리쳤다. 

그는 “수만의 사람들에게 은을 골고루 나눠줘 봤자 한 사람 앞에 얼마나 돌아가겠냐”며 “앞으로 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할 일이 많을 테니 은을 사신 접대에 쓰자”고 주장했다. 

왕정에서는 왕의 말이 곧 법이다. 결국 정의에 맞는 비변사의 간언이 아니라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광해군의 말대로 은은 피 흘리며 싸운 병사들에게 돌아가지 않았으며, 왕궁 깊숙한 곳에 봉인됐다. 

더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광해군이 이 돈을 명나라 사신 접대에 쓴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광해 14년(서기 1622년) 광해군이 “명나라 황제가 내려준 은 1만냥을 단단히 보관하고, 용보(龍補), 겸금(兼金), 주옥(珠玉), 사라(紗羅), 능단(綾緞) 등을 사는데 쓰라”고 명한 구절이 나온다. 

이 물품들은 보석과 비단 등으로 모두 왕실에서 사용하는 것들이다. 결국 광해군은 명나라 황제가 하사한 은을 착복해서 왕실 용품 구입에, 즉 자기가 쓰는 물건을 사는데 전용해버린 것이다. 

실로 일국의 왕이라고 보기 부끄러울 정도로 비열한 행위다. 광해군이 폐위된 데는 ‘폐모살제’ 등의 악덕도 있었지만, 이런 착복으로 대표되는 탐욕 때문에 조정과 백성으로부터 인망을 잃어버린 부분도 단단히 한몫했다. 

여담이지만, 이런 광해군을 끌어내린 인조도 광해군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었다. 특히 외교는 분명 한 수 아래였다.

쓸데없이 청나라를 자극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유발한 것은 물론이요, 반정의 명분으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내세웠음에도 오히려 명나라로부터 의심만 받았다.

인조반정 후 북경(명나라 수도)을 찾아가 인조의 조선 왕 책봉을 요청한 사신에게 명나라 조정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찬탈자!”라고 욕을 퍼부었다. 몇몇 유력한 대신들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해 찬탈자를 몰아내고, 광해군을 복위시키자”고 주장할 정도였다. 

인조는 몇 년 동안 명나라 조정에 애원하고 나서야 간신히 왕으로 책봉받는다. 그러나 명사(明史)에는 여전히 인조가 찬탈자로 기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