년 7월 15일. 환했던 하늘이 갑자기 캄캄해지고 비가 물 쏟아지듯 내리기 시작했다. 큰바람까지 일어 나무가 뽑히며 기와가 날아다녔다. 이날은 유자광이 연산군에게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세조를 비방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연산군이 이를 받아들인 날이다.
`조의제문`은 항우(項羽)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懷王), 즉 의제(義帝)를 추모하는 글인데 이는 세조(연산군의 증조할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을 의제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의 찬탈을 은근히 비난한 것이었다. 유자광의 이간질에 분개한 연산군은 이미 세상을 떠난 김종직의 시신을 꺼내 부관참시했고, 그의 제자인 김일손 등을 참수시켰다.
유자광이 연산군을 이용해 김종직의 명예를 훼손하고 제자를 몰살시킨 것은 김종직이 살아생전 자신을 비난했기 때문이었다. 유자광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27세에 병조판서에 오른 남이(南怡)를 시기해 그가 세조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된 예종을 제거하고 자신이 국왕이 되려 한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남이의 인기가 부담스러웠던 예종은 유자광의 말을 받아들여 결국 그를 사형시켰다. 김종직은 이런 유자광의 음모와 야심을 간파하고 성종 대에 그가 남이를 시기해 역모 사건을 조작하며 그를 죽게 했다고 비난했던 것이다.
이후 유자광은 김종직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갈기 시작했고, 연산군 대에 이르러 조의제문을 트집 삼아 이미 죽은 김종직에 대한 복수를 실행한 것이다. 하지만 두 번의 조작 사건을 통해 자신의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유자광 역시 중종 즉위 후 대간의 탄핵을 받아 경상도 변방으로 유배 간 뒤 장님이 된 채 비참하게 삶을 마감하고 만다.
1991년 5월 노태우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했던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죄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강기훈 씨가 지난주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무려 24년 만의 일이다. 당시 사건을 조작한 이들은 아무도 참회와 사과하지 않고, 어떤 법적 처벌도 받지 않았다. 앞으로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 정신을 훼손하는 이런 조작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김준혁 한신대 正祖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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