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조선기생 홍랑이야기

백삼/이한백 2015. 5. 13. 14:58

 

조선시대 함경도 홍원의 기생이다.

천하일색의 미모로 팔도에서도 유명해 도청의 관기였다.

또 시조에도 재능이 있어 손수 시를 짓거나 글을 읽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최경창의 시조를 좋아했다.


어느날 최경창이 함경도의 관리로 부임해오게 되고,

평소부터 최경창을 흡모해오던 홍랑은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최경창이 이듬해 부임지를 떠나면서 생이별을 하게 된다.

홍랑은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시조 한수를 지어 한양으로 보낸다. 

 


<최경창에게 보낸 홍랑의 시>

折楊柳寄與千里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에게
人爲試向庭前種 주무시는 창가에 심어두고 보소서
須知一夜生新葉 간밤 비에 새잎 나거든
憔悴愁眉是妾身 날 인가 여기소서


홍랑과 이별하고 한양에 도착하게된 최경창은 상심으로 인해

시름시름 병을 앓게 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조정의

이주 금지령을 어기고 무려 7일을 밤낮으로 걸어 한양으로 향한다.


그녀의 극진한 간병을 받고 최경창은 완쾌 되었고,

홍랑이 다시 함경도로 돌아가 이별할때 송별이라는 답시를 지어 슬퍼한다.


한편...


당시 조선 시대의 상황은 이 두 사람의 행각을 곱게 보지 않았다.

조정에는 양반의 신분으로 관기와 사랑을 나눈 최경창을 나무라는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이로 인해 최경창은 파직을 당해, 변방의 한직을 떠돌다가

1583년 (선조 3년) 결국 45세의 젊은 나이에 객사하고 만다.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매우 슬퍼하며, 타지에서 객사를 했으니

묘를 돌봐주는 사람이 없을것이라 생각하고 파주에 있는

최경창의 묘를 찾아가 움막을 짓고 살며 3년간 시묘 살이를 시작한다.


하지만 젊은 여인이 홀로 시묘 살이를 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일이었다.


생각끝에 그녀는 자신의 몸을 씻지 않고, 꾸미지도 않았으며

다른 남자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천하일색인 자기 얼굴을 칼로 그어 추녀로 만들고,

커다란 숯덩어리를 통째로 삼켜 스스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벙어리가 되었다. 



<최경창의 유고집>


그렇게 3년간의 시묘 살이를 마치고...


최경창의 묘를 떠나지 않고 그 옆에서 살다 죽으려했던 홍랑이지만

조선에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된다. 그녀는 남겨진 최경창의 글과 글씨를 지키기 위해

그것들을 들고 최경창의 고향인 함경도로 향했고, 이후 종적을 감춘다.



<경기도 파주 최경창과 홍랑의 묘>


그렇게 한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것을 불살랐던 홍랑은

왜란이 끝난 후 해주 최씨 문중에 최경창의 유작들을 건넨 후

다시 그의 묘로 돌아와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 진다.


훗날 해주 최씨의 문중들은 홍랑의 의를 기리며 그녀를 족보에 올렸고,

문중 선산, 최경창의 곁에 묻어 오늘날까지 제사와 시제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