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콜럼버스보다 우리가 먼저????

백삼/이한백 2015. 5. 26. 10:49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 1988년 매우 묵직한 자료집을 출간했다. 빙하시대에 얼어붙은 베링해를 넘어서 아시아인이 아메리카로 넘어간 행적을 추적하는 문명사적 보고서였다(Cross the Continental). 유라시아에서 온 아시아인이 아메리카로 건너가 아메리카 원주민의 모태가 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인류가 바닷길을 통해 이동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첫 순위를 꼽는다면 바로 베링해 통과가 아닐까 한다. 초기 인류가 아시아 동쪽의 캄차카 반도와 추크치 반도(추코트카 반도)를 향해 나아간 것은 3만 년 전의 일이다. 이어서 수천㎞가 넘는 베링해를 건너는 빙하 통로가 만들어져 사람들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끌었다.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빙하시대 이전부터 캄차카에는 이미 사람이 살았다. 고대 사냥꾼 유물이 우시콥스키(Ushkovsky)에서 출토되었는데 이 사냥꾼이 캄차카와 추크치를 건너가 북아메리카의 최초 정착민이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포함해 유라시아 동쪽 북방의 제 종족을 고아시안(Paleo Asiatics:Koryak, Chukchi, Yukakir, Itelmen, Nivkhi)이라 호칭한다.

베링해는 오늘날에도 겨울에 강풍이 불면 바다가 평균 두께 1.2~1.5m의 빙판으로 뒤덮인다. 심지어 한여름에도 얼음이 떠다닌다. 화산재가 만들어낸 검은 모래 해변에 서면 북빙양의 검푸른 파도가 장엄하기까지 하다. 저 바다를 건너서 우리 아시아인의 선조들이 용맹무쌍하게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을 것을 생각하면, 훗날 이루어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 운운은 작위적이다 못해 우습기만 하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베링해는 겨울이면 빙판으로 뒤덮인다. 심지어 한여름에도 얼음이 떠다닌다. 얼어붙은 베링해를 건너간 아시아인이 아메리카 원주민의 모태가 됐다.  
ⓒ주강현 제공
베링해는 겨울이면 빙판으로 뒤덮인다. 심지어 한여름에도 얼음이 떠다닌다. 얼어붙은 베링해를 건너간 아시아인이 아메리카 원주민의 모태가 됐다.

해면 높이가 100m 이하로 낮아졌던 빙하기(약 2만~3만5000년 전)에 베링해는 아시아와 북아메리카를 잇는 육교 구실을 했다. 이 거대한 ‘문명의 육교’를 통해 상당수의 동식물과 사람이 이주했다. 빙하시대 베링 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간 고아시아족이 북미와 남미 원주민이 되었기 때문에 동부 시베리아 끝단 에벤(Even)·추크치(Chukchi)·코랴크(Koryak) 등의 제 민족이 베링해 건너편 알래스카 에스키모족과 유전인자가 완전히 동일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북미 대륙으로 넘어간 일부가 북서해안으로 흩어져 태평양 에스키모족을 형성했으며, 다른 일부는 알류산 열도로 들어가 알류트족을 이루었다.

환동해와 사할린을 가운데 놓고서 연결되는 오호츠크해 연안에는 주로 에벤 퉁구스족(Lamut)이 살았다. 아시아 에스키모족은 북극 해안을 따라 코리마(Koryma)강 하구의 동쪽 끝에서부터 태평양 해안을 따라 남동쪽으로 아나디르(Anadyr)강까지 확산·정착해 있었다. 곶처럼 툭 튀어나온 시베리아 동단은 이웃 알래스카처럼 에스키모의 고향이었다. 에스키모가 아메리카 북부에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스미스소니언 제공</font></div>  
ⓒ스미스소니언 제공

좁은 베링 해협은 너무도 가까워서 북방의 아시아와 아메리카인들의 문화는 통일되어 있었다. 아시아 에스키모족은 스스로를 ‘사람’이라는 뜻의 유기트(Yugit) 혹은 유피기트(Yupigit)라고 불렀다. 이들은 해안가에 사는 종족으로 물개·바다코끼리·고래 등의 바다 포유동물을 사냥하며 살아갔다. 반지하 오두막집에서 살았는데 벽은 돌과 고래 갈비뼈 혹은 턱뼈로 만들고 흙과 눈을 덮었다. 일상생활에서 물개·바다코끼리·고래는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주었다. 건너편의 아메리카 에스키모족도 바다 사냥을 하면서 살아갔다.

아시아 에스키모의 제의에는 자연에 관한 정령, 특히 엄한 바다 여신인 미감 아그나(Migam Agna), 그리고 그녀를 보조하는 범고래와 화해하는 의식이 포함돼 있다. 의식은 극적인 사냥 장면 재현이나 제의적 춤, 죽은 고래에게 음식을 먹이는 일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다음 해에도 같은 사냥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행했다. 아그나는 오늘날에도 원주민들의 조각품이나 장식품에 다수 전해오고 있다.

우리 상고사의 비밀을 간직한 고아시아족

유라시아 동단의 해변에는 추크치족이 살았는데, 이들은 캄차카 반도의 안쪽뿐 아니라 해안지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추크치족과 관련 있는 수많은 종족들이 태평양, 즉 베링해의 북서쪽 해안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나디르만으로부터 남쪽으로 캄차카 반도의 목 부분까지, 그리고 오호츠크해 북쪽 해안 부근에는 코랴크족 조상이 살고 있었다. 캄차카 반도 대부분에는 이텔멘(Itelmen)족이 살고 있었다. 캄차카 반도의 남쪽 끝부분과 쿠릴 열도, 그리고 사할린 섬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일본의 아이누족이 살고 있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베링 해협의 에스키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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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링 해협의 에스키모.

북방 시베리아와 북아메리카 북서부 사람들의 유사성은 오랫동안 고고학·인종학·역사학·인류학·민속학 등 여러 학문의 남다른 주목을 받아왔다. 특히 이들이 간직한 샤머니즘은 청동기 시대 이래 오랜 북방의 전통으로 우리의 샤머니즘과 흡사한 측면이 많다.

양 대륙에 걸친 인종과 문화적 유사성은 선사 및 역사 문화에서 오랜 친연성의 결과다. 베링해 연안에서 불과 56마일 거리는 두 대륙이 거래를 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가령 아무르 하구의 고아시아인(니브히족을 포함해서)의 문화는 북아메리카 원주민과 흡사하다. 고아시아족은 북방에 널리 퍼진 공통의 도구 기술과 사용법을 공유한다. 베링 해협을 넘어가는 데 눈신발(Snow Sheos)이 지대한 일을 감당했다. 역사 시대에 접어들어 더 이상 눈신발을 신지 않고 스키를 쓰게 되지만 눈신발이 인류 문명사에서 남긴 족적은 중요하다. 눈신발을 신고 한 발 한 발 대륙을 넘어서 아메리카로 떠났던 고아시아족의 족적이 아메리카 원주민 문명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고아시아족에 관한 관심은 우리 상고사의 풀리지 않는 부분을 해결하는 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부여나 고구려, 발해 등이 순수 한민족끼리 구성되었을 것처럼 착각하기도 하는데 그런 착각이 또 있을까. ‘인종의 용광로’라 할 수 있는 아무르 강 일대나 오늘날의 트랜스 바이칼 지역, 내몽골과 만주 곳곳에는 만주족뿐 아니라 다양한 소수민족이 산재했다. 이들 소수민족이 융합되고 혼혈되어 거대한 집단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독립변수가 되지 못하고 종족 소멸로 귀결되기도 했다. 이들은 홋카이도나 사할린의 아이누와도 연결되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주강현 제공</font></div>알래스카의 원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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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의 원주민.

분단 시대를 너무나 오래도록 살아오면서 우리의 의식 속에 북방 종족에 관한 다양한 추억들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함경도에 여진족이 즐비하게 살았으며 훗날 재가승 집단이라 불렸다. 두만강 바로 건너편에서 건주여진이 발흥해 청나라가 된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가 북방 종족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에는 잘못된 지리 교육의 영향도 크다. 세계를 제패한 나라들이 포진한 북방을 크게 그린 메르카토르 도법 지도는 북방이 과장된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오호츠크 등은 실제보다 크고 멀게 느껴진다. 종족 이동의 궤적을 본다면 한반도와 생각보다 가까운 지역들인데 말이다. 북빙양 지역이 좁고 작게 되어 있음은 당연히 둥근 지구의를 돌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된다.

아메리카 북방과 아시아를 잇는 바닷길이 빙하 시대 소멸과 더불어 사라진 것은 아닐 터이다. 고아시아인들은 빙하를 건너 베링 해협을 통과하면서 떠나온 유라시아에 대한 기억을 유전인자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알래스카의 에스키모와 아시아의 에스키모가 교역에 종사하였음은 여러 인류학 보고서를 통해 입증된다. 알류트족도 캄차카와 연결되었고, 캄차카에서 쿠릴 열도를 통해 홋카이도와 연결되었다.

최근 미국 콜로라도 대학의 고고학자 오언 메이슨은 미국 고고학회지에 재미있는 발굴을 보고하고 있다. 알래스카 에스펜버그 곶(Cape Espenberg)의 라이징 웨일(Rising Whale)에서 청동 버클(허리띠 고정 장치)과 호루라기 비슷한 유물을 발견했다. 탄소연대 측정 결과 1000여 년 전 청동 제품인데 당시 선콜럼비아기(Pre-Columbian)의 알래스카에는 청동 제련기술이 없었다. 보고서는 중국이나 한국, 야쿠티아(레나 강가의 사하공화국)에서 수입된 무역품이라고 밝혔다.

오늘날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은 확고부동한 역사적 사실로 자리 잡고 있으나 여러 측면에서 사실과 다르다. 일찍이 바이킹의 진출이 오늘의 캐나다 뉴펀들랜드에서 확인되었으며, 바스크족이 캐나다 동부 해안에서 대구잡이를 오래도록 행한 것도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알래스카에서 발굴된 온돌 유적이 말해주는 것

청동 버클 발굴은 베링해를 건너서 아메리카와 아시아를 잇는 무역로가 존재했음을 증명해준다. 반대로 알래스카의 해양 포유류 상아 등이 중국 등지로 수출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알래스카에서 발굴된 온돌 유적은 한민족과의 교류도 말해준다. 온돌이야말로 북방에서 형성되어 한반도 남방으로 전파된 한민족 고유의 난방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물론 인구가 희박하고 엄혹한 조건에서 살았던 북방과의 교섭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문명의 장기 지속적 네트워크에 완벽한 단절이 있을 수 없다. 고고학적 발굴이 의미하는 것처럼 간헐적이나마 교류가 이어졌다.

일찍이 유라시아인이 건너갔던 바닷길은 훗날 베링이라는 탐험가에 의해 다시금 ‘재발견’되어 베링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인지하고 습득한 지식체계의 상당 부분이 이들 서구인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임을 알 수 있다. 북방 원주민들의 흔적이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곳은 역시 산이나 강, 바다 등 자연의 지명이다. 러시아식과 미국식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유라시아인이 남긴 오랜 문명의 흔적은 상당 부분 거세되었다. 베링해를 무대로 살던 이들이 믿던 샤머니즘이나 자연주의적 세계관도 미국식 기독교나 러시아 정교회, 혹은 사회주의 독트린에 의한 과학의 이름으로 미신 타파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자그마한 박물관이나 자료관, 또는 아카이브 센터에서 문명 교섭의 자취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네 밥상에 베링해와 오호츠크해에서 잡힌 명태가 오른다. 동해의 명태는 얼마 전 소멸했다. 베링해의 명태가 없다면 우리의 밥상은 쓸쓸해질 것이다. 이들 문명의 바닷길이 이어졌던 바다는 연어의 본향이기도 하다. 양식 연어가 아닌 자연의 품격을 그대로 간직한 연어 떼가 알래스카 해안과 캄차카로 거슬러 올라가며, 남쪽으로 내려가 한반도 동해안까지 온다. 남대천변에서 연어를 먹으면서 북방 바다에서 이루어졌던 아시아 선조들의 오랜 문명사적 궤적을 잠시 상상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