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경복궁을 일본군이 불태운 증거는 없다

백삼/이한백 2015. 5. 4. 10:37

 

지난 글에  중대한 왜곡을 발견하였고 이에 사과합니다.


부제:  "일본군이 증언한 조선 전기 경복궁의 찬란한 모습"

 http://cafe.naver.com/booheong/111176

글의 오류 수정.



1. 본 글 요약.

주장: 경복궁은 일본군이 태웠다

근거: 고니시가 최초로 왕궁입성 후 그 아름다움을 찬미하며 흐느껴 울었다는 기록 (휘하 장수인 오제키의 "조선정벌기")과 왕성의 조각품까지 세세히 열거한 기록 (종군승 제타쿠의  "조선일기")

http://www.palaceguide.or.kr/gb4/bbs/board.php?bo_table=gnu_bbs&wr_id=648



2. 이를 반박하는 주장

주장: 상기 글은 홍순민저 우리궁궐이야기에 나오는 것이나, 전혀 사실이 아님

근거: 휘하 장수라는 오제키 사다스케 는 임란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거나 유아였음. 그의 조선정벌기는 군담소설류일 뿐 공식 기록이거나 참전회고록도 아님. 종군승 제타쿠 역시 1592년 5월의 일본군 입성시 현장에 있지도 않았음.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ohoja&logNo=50143471823



3. 특히 문제가 된 오제키 사다스케의 조선정벌기 원문을 검색하여 사실 여부를 확인함


3.1. 조선정벌기에 대한 작품과 저자 조사

增補 朝鮮征伐記 - 大関定祐 [著] 黒川真道 編

일명 조선군담실록

 

전 13권, 1665년작이다.

 

호리 교안이 지은 조선정벌기 (1635년작,1659년 출간)에 영감을 받아 나온 작품. 도요토미 히데요시보와 기타 다른 작품을 참고하여 저작. 조선과 명의 정보가 부족하여 곳곳에 허구적 서술이 발견되며, 실록체 소설로 분류된다. 권 13의 뒤에 실린 저자 자서를 보면 그는 31세에 풍신수길의 신사를 참배하고 히데요시 공의 업적을 후세에 알려서, 그 은덕을 존경하게 해야겠다는 뜻을 세워 이 책을 썼다.

 

(임진왜란관련 일본문헌 해제 / 최관 김시덕 공저 - 도서출판 문 2010에서 발췌)

 

최관, 김시덕은 임진왜란을 일본의 시각으로 연구함을 전공으로 한 정통 사학자임.



3.2. 조선정벌기 원문을 대조함

http://kindai.ndl.go.jp/info:ndljp/pid/948817


조선정벌기의 표지

 

 

편자인 黒川真道 은 작자가 오제키 사다스케 大関定祐 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권 13 말미의 저자의 후기에는 자신이 31세에 풍신수길의 사당에 방문해서 황폐해진 모습을 보고 비탄하였다는 감상을 남겼다.  "대판난역 (오오사카에서 히데요리가 도쿠가와에 대항한 전쟁) 의 후에는" 이라는 문구까지 있다. 1615년의 병란을 통해 친 풍신수길의 세력은 완전 소멸했으므로, 저자 오제키가 1615년 이후에 31세가 되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오오제키는 최소한 1615년-31세= 1584년생으로 추정된다. 즉, 문록경장의 역에 참전한 베테랑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 따라서 그의 조선정벌기는 그의 종군 참전기일 수가 없다.


3.3.

추가로 석시탁에 대한 일본어 싸이트 역시 검증해 보았다.

http://www.geocities.jp/huckbeinboxer/nabesima.html

http://blogs.yahoo.co.jp/rowmoment_boy/folder/643733.html?m=lc&p=1


泰長院是琢 (?~?)
佐賀泰長院住職。文禄元年四月二十三日、朝鮮に渡海。五月七日、釜山に着く。六月、鍋島直茂に同行するため咸鏡道に入る。同地にて加藤清正の書状の草案を作成。この書状は民衆に朝鮮国王誅殺を禁じ、即座に家に戻り農耕に勤しむよう促すものであった。 (5월 7일에 부산에 도착해서 함경도까지 갔었으며, 조선 민중과 조선국왕을 살해하는 것을 금하는 가등청정의 지령서 초안을 작성했다)



이상을 살펴보면, 고니시의 입경시 궁궐이 온전하였다는 주장을 신뢰할 근거는  없다.  우리가 믿을 것은 여전히 조선의 국가공식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이다.



- 선조수정실록 254월 기록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Tree=0&id=kna

 

도성의 궁성(宮省)에 불이 났다. 거가가 떠나려 할 즈음 도성 안의 간악한 백성이 먼저 내탕고(內帑庫)에 들어가 보물(寶物)을 다투어 가졌는데, 이윽고 거가가 떠나자 난민(亂民)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례원(掌隷院)과 형조(刑曹)를 불태웠으니 이는 두 곳의 관서에 공사 노비(公私奴婢)의 문적(文籍)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궁성의 창고를 크게 노략하고 인하여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다. 경복궁(景福宮창덕궁(昌德宮창경궁(昌慶宮)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는데, 창경궁은 바로 순회 세자빈(順懷世子嬪)의 찬궁(欑宮)이 있는 곳이었다. 역대의 보완(寶玩)과 문무루(文武樓홍문관에 간직해 둔 서적(書籍), 춘추관의 각조 실록(各朝實錄), 다른 창고에 보관된 전조(前朝)의 사초(史草),【《고려사(高麗史)를 수찬할 때의 초고(草稿)이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모두 남김없이 타버렸고 내외 창고와 각 관서에 보관된 것도 모두 도둑을 맞아 먼저 불탔다. 임해군의 집과 병조 판서 홍여순(洪汝諄)의 집도 불에 탔는데, 이 두 집은 평상시 많은 재물을 모았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었다. 유도 대장(留都大將)이 몇 사람을 참()하여 군중을 경계시켰으나 난민(亂民)이 떼로 일어나서 금지할 수가 없었다.>



4. 느낀점

지적 사기는 죄질이 나쁘다. 증거도 없이 하는 선동은 쉽게 가려낼 수 있지만, 권위를 가진 사람이 일편적인 증거를 임의로 조정, 조작하여 제시하면 대중은 속아 넘어가기 마련이다. 세상에 믿을 사람은 없다. 궁금한 건 자신이 직접 확인해 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