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鳥銃 ¶
일반적인 형태의 조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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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 시기 등장한 일본의 6연발 조총. 사용법은 총신 6개를 모두 장전한 뒤, 손으로 총신을 돌려가며 한발씩 쏜다. 페퍼박스 리볼버 초기형과 동일한 구조.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도 '오뢰신기'라는 5연발 조총과 3연발 조총을 개발했으나, 어느 것이든 나중에 다 하나하나 수동으로 장전해야 한다는 고질적인 단점을 극복하지 못해 이런 조총들은 많이 쓰이지는 않았다. 거기다 무겁고 다루기도 불편했다. 다만 중국의 경우 3연발 조총은 서북 지역에서 조금 쓰였는데, 지역 특유의 거친 강풍 속에서 조금이라도 맞출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군대의 무기에 있어 조총(鳥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어린아이도 항우(項羽)를 대적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참으로 천하에 편리한 무기다.”- 숙종 조에 영의정을 지낸 남인(탁남)의 영수 허적.[1]
1.1. 개요 ¶
일본에서는 철포(鐵砲)라고 불렀으며, 무모한 행동을 뜻하는 無鉄砲(무텟포, 한국으로 넘어와 은어가 된 무대뽀)는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참조.
일본의 다양한 조총 발사모습.
일본의 다양한 조총 발사모습 2. 중간에 대조총을 안고 발사하는 모습과 지지대에 올려 쏘는 모습이 보인다.
조총(鳥銃)이라는 이름은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뜻으로 중국 명나라에서 붙인 이름. 다만 뒤이은 청나라 시대에는 조창이라고 했다. 현대 중국에서도 총기 전반을 창으로 부르고 있다. 한국에서는 1591년에 일본 사신이 처음 바친 것을 시작으로 하는데, 당시 중국에서 부르던 이름 "조총"으로 조선에 소개하여 이 이름이 쓰이게 되었다.
일본의 텟포는 포르투갈 상인이 시가 2억엔 정도의 은을 받고 판 얻은 두 자루의 화승총에 기초해서 생산된 총이라고 한다. 다른 설로는 일본인 장인이 자기 딸들을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바쳐가며 제작법을 알아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와카사 충효비가 바로 그 딸들을 기리기 위해 있다. 어찌됐든 이로 인해 이 거래가 진행된 섬인 종자도(타네가시마)는 그대로 조총을 일컫는 별명이 되었다.
조총의 가장 큰 의의는, 중세시절에 갑옷을 무력화하는 용도로 쓰이던 화약무기가 마침내 동아시아의 강력한 활이나 석궁에 버금가는 편의성을 얻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오다 노부나가의 나가시노 전투가 거론되는데, 이와 "삼단 철포" 떡밥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또한 조총이 아시아에 도입된 이후 다양한 개량형이 등장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일본의 대조총, 우리나라의 천보총등이 있다.
일본에서 토막파와 좌막파가 충돌할 당시의 대조총의 모습.#은근히 잘 어울린다는 게 무섭다(...)
여담으로 앉아서도 쏘는 듯 하다.
일본에서 토막파와 좌막파가 충돌할 당시의 대조총의 모습.#은근히 잘 어울린다는 게 무섭다(...)
여담으로 앉아서도 쏘는 듯 하다.
1.2. 사용법 ¶
조총을 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1.세총(洗銃):조총의 총신 내부를 깨끗이 닦아낸다. |
그러한 분들을 위해 업복이가 친절하게 설명해드립니다.(BGM 자동재생)
일반적인 이미지는 심지에 불을 붙여 다 타들어가면 발사되는 무기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불이 붙은 화승을 공이인 용두(龍頭)에 끼운 후, 방아쇠를 당겨 용두의 화승이 화약접시(火皿)에 담긴 점화용 화약에 불을 붙이게 되고, 이것이 다시 추진용 화약에 불을 붙여 총알이 발사되는 방식이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데, 느린 화승이 타들어가기를 기다리면서 타이밍 맞게 조준을 유지하고 있기란 어렵기 때문이다(불씨를 화문에 직접 대어서 발화하는 것은 화승총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소형화기에서 사용하던 방식이다).
선약과 요화문, 폐화문 과정을 화약 과정 이전에 하는 경우도 꽤 자주 보이는데, 특히 페이퍼 카트리지를 사용하는경우 이러한 것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또한 3번과 5번에 해당하는 삭장과정이 생략되는 경우도 있으며, 빠른 사격을 위해서서는 송지와 하지 과정조차 총알을 총구에 뱉고, 바닥에 총을 몇번 내리치는것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다만 이 개념은 오리지널인 화승총의 후계인 플린트록 머스킷 한정으로, 그것도 나폴레옹 전쟁을 전후해서 본격 보급이 된 개념이다.
일본의 조총 발사과정 동영상 링크. 22초경부터 대조총 장전모습이 나온다.
다만 불랑기포의 구조를 도입한 이런 자모총(子母銃)같은 경우 불랑기포처럼 후장식으로 장전/발사하면 된다. 위 그림은 명나라의 병서 <무비지>에 실린 자모총이다.
1.3.1. 위력 ¶
일반 조총 기준으로 유효사거리가 약 50m, 최대사거리는 500~700m. 살상력을 기대할수 있는 거리는 200m. 하지만 조총은 동아시아에서 1~200여년에 걸친 화승총 전반을 이르는 호칭이므로, 사거리와 위력은 시대에 따라서 다르다는 점을 알아두자. 가령 임진왜란 때 왜군이 사용한 조총은 실질적인 살상거리가 4~50m, 유효 타격거리가 7~80m 이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승자총통에 비하면 2배~3배 이상 긴 사거리였으므로 매우 강력했다. 이후에는 조선군에서도 장조총, 천보총과 같은 자체적인 신형 조총을 만들면서 살상거리와 비거리가 본 항목에 기재된 성능, 혹은 그 이상으로 점점 늘어난다.
내부에 강선이 없어 조준이 어렵지만 활에 비해 숙달되는 기간이 매우 짧았다. 덕분에 궁병에 비해 빠른 총병 양성이 가능하며, 기본적으로 높은 운동에너지를 가지므로 살상력과 갑옷 관통능력이 뛰어나다는 이점이 있다. 위력은 화기답게 매우 강하여 석궁 계열보다 강력했다. 특히 화약의 폭발력을 이용한 덕분에 2000J이 넘는 운동에너지를 이용하여, 납탄으로도 50미터 가까운 거리에서도 갑옷을 무력화할 수 있었다.[2]
다만 조총의 가장 큰 의의는 그 위력이 아니라, 기존에 갑주를 관통하는데 사용되었던 화약무기들이 마침내 동아시아의 민첩하고 편리했던 투사 무기들에 버금가는 편의성을 가지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서양에서 화승총이 전래되기 이전에도 동아시아에는 충분히 갑주를 관통할만한 개인화기가 있었지만, 지나치게 불편한 중화기 형태이거나 집단으로 운용하여 파편충격을 주는 형식의 원시적인 소형화기 밖에 없었다. 조총의 위력은 단순히 화력이 강력한 점이 아니라, 중거리 보병끼리의 교전에 있어서 가장 효율적인 매커니즘을 널리 보급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1.3.2.1. 조총이 활보다 열등한 점 ¶
- 탄약을 장전하여 발사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매우 길다는 단점이 있었다. 장전 후 발사에는 빨라야 분당 2발, 비 숙련자의 경우 2분까지도 걸린다. 반면 활은 숙련자의 경우 엄호사격 시 분당 8발까지 발사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이전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분당 12발의 발사속도로 미군을 관광태우기도 했다.
- 화승을 사용해 날씨에 따라 사용 여부가 좌우된다. 비가 오거나 강풍이 불면 우산(…)이라도 쓰지 않는 한 사용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도 우천 시엔 사용 불가능인데, DS2판(무장풍운록 기반)에서는 예외로, 우격(雨擊) 전술을 발동하면 비가 와도 쏠 수가 있다(..) 영화 역린에서도 떡밥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착안해서 일본의 경우 조총의 점화구에 작은 우산을 달기도 했다. 그래봤자 효과는 별로여서 금방 사장되었지만.
- 명중률과 화약낭비 같은 요소로 인하여, 집단운용시 적과의 거리가 50미터 내외가 된 후에야 사격을 시작해야했다. 궁수들이 조총보다 먼 거리에서 분당 3발~10발 정도의 치명타를 쏘아대는 동안, 조총은 지근거리에서의 집단운용이 필수적인 관계로 서양처럼 전열보병마냥 라인배틀을 벌일만한 거리까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으면서 접근해야한다는 상황이 나온다. 즉 사거리가 짧다. 17세기의 조총들은 다른 동아시아의 병종을 보조하기에는 적합치 못했고, 서양처럼 화승총을 위한 보병중심의 부대 편성을 해야 쓸만했던 것이다.
1.3.2.2. 활이 조총보다 열등한 점 ¶
- 활의 강력한 연사력은 일반 활에서나 가능하지, 100파운드를 넘는 전투용 활을 빠르게 쏘는 일은 숙련자도 버거웠다. 실제로 조선의 전투용 활인 정량궁을 쏘려면 당기는 것도 힘들었지만 쏘았을 시 반동이 무지막지했기 때문에 달려가면서 쏘는 사법을 익혀야만 쓸 수 있었으니 속사가 힘들었다.게다가 인력에 의존하는 특성상 시간이 지나면 속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조총은 특성상 장전에 체력을 필요치 않고, 조준할 근력만 있으면 되기에 꾸준한 화력을 기대할 수 있었다.
- 조선의 활인 흑각궁도 습기면에서는 비슷한 약점을 안고 있는 것이, 무소 뿔을 어교[3]로 붙여 이은 활이라서, 습윤한 기후에는 어교가 풀어져서 활이 망가질 확률이 높았다. 때문에 임진왜란 중에도 조총의 위력이 급감하는 장마철은 오히려 활을 주력으로 하는 조선군 측에게 더욱 불리한 계절로 인식되었다.[4] 최영의 요동정벌 당시 이성계의 '4불가론' 중 하나가 여름철이라 활이 불리하다는 논지였음을 기억하자.
- 즉 17세기까지는 활도 쓰기에 따라서 조총에 비교할 수 있었으나, 18세기부터는 훨씬 진보한 조총이 발명되면서 전략적인 훈련비용이나 전술적인 중거리 전투력에 있어서도 조총에 비교해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1.3.2.3. 결론: 조총 우세론 ¶
- 17세기 이후에는 조선군 뿐만 아니라, 활로 유명했던 유목민족과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화승총을 주력무기로 교체했다. 심지어 활에 익숙했던 민족들은 유럽에서 강선이 나타나기 이전까지 화승총의 조준이나 운용면에서 유럽보다 우월한 능력을 보여준 경우가 많았다. 조선군만 해도 경량성과 화력에서 제법 쓸만한 신형 조총들을 많이 개발했으며, 자체개발한 조총들을 아예 저격병기로 사용할 정도로 애용했다. 이는 조선군 조총수들 명중력이 비범한 수준이었던 것도 큰 이유였다. 화약병기의 사거리와 파괴력이 그대로 살상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갑주보병/기병을 상대로 어느쪽이 중요한 살상수단
딜러이 되는지는 명백하다. 실제로 조선의 삼수병체제에서도 총을 먼저 쏘고, 장전시간중에 접근해오는 적을 활이 막고, 포수와 사수를 살수가 방어하는 형태로 운용했다.
- 초기의 조총은 동아시아의 활에 비해서 비거리가 떨어지긴 했으나, 단순히 비행거리만 떨어지는 것이지 방어구를 제대로 착용한 정규군을 상대로한 살상이 가능한 거리는 오히려 우세한 수준이었다. 갑주를 입은 보병에게 살상을 가하려면 활은 20미터~30미터 내에서 쏴야 했지만 조총은 사격실력만 좋으면 40~50미터에서도 제식갑주를 무력화할 수 있었다] 심지어 18세기 중후반에는 대형 화승총의 비거리와 정확성도 전투용 활에 비등해져서, 동양/서양/신대륙을 가리지 않고 150미터 내외에서 저격용 화승총을 쏘는 척후병 부대가 편성되고 있었다.
- 임진왜란 이전에도 동아시아에서는 개인화기를 즐겨 썼는데, 그에 따르면, 총을 먼저 쐈다고 총이 꼭 살상능력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총의 소리로 사기와 진형을 흔들고 보병대열을 붕괴하는 '맞든 안 맞든 충격으로 효과를 볼 수 있는' 제압능력이 탁월했다. 고려시대부터 고효율 화약무기를 썼던 우리나라에서도, 활을 보조하는 포수를 배치할 정도로 즐겨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 위의 열세론에서 나온 기병에 대한 패배는 전황을 오판한 지휘부의 판단실수 및 훈련부족이 일차적인 원인이며, 유럽의 선형진같이 총기에 알맞는 전술을 개발할 시간이 부족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유럽은 지형 때문에 백병전 상황이 많았으며, 수천명 단위의 기병을 단숨에 동원할 수 있는 기마민족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서로 치열한 보병전투를 통해서 총검을 보급하여 총병에 창병을 겸하여, 기존의 창병을 총병으로 전환시켜서 기병을 전쟁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심지어, 동아시아에서도 제대로 된 대기병 전술을 개발한 이후에는, 오히려 화승총이 기마민족을 역사에서 지워버리는 쾌거를 이룩한다.[5] 다만, 이 당시 청나라의 팔기군 기병들은 활을 사용 했으며 결과적으로 청나라가 이기긴 했다.[6]
1.3.2.4. 조선은 어째서 조총보다 궁술을 중시했는가? ¶
- 사실 조총보다 궁술을 중시했다는 명제 자체가 의심스럽다. 승자총통 항목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은 임진왜란 발발 전에도 화력덕후였다.
- 조정이나 일선에서 거론했던 궁시 만능이론과 조총 회의론은 무기 자체의 성능보다도, 구시대적인 군기를 강조하는 정신론의 일환으로 보기도 한다. 즉 "요즘 군인들은 총이나 쏘니까 군기가 빠져가지고 말이야"라는 식의 보수적인 군인관에서 나온 주장으로 보는 것이다. 이게 영 말이 안 되는 주장이 아닌게, 조선은 궁술을 군인 기본능력으로 보아서 활을 못 쏘면 진급도 안 될 정도였고, 궁술을 군인들의 군기/훈련도를 가늠하는 제식 척도로서 챙겼기에, 이런 주장을 반복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조총 개조가 진행된 이후, 오히려 후기에는 활이 조총을 보조하는 역할이었음을 군인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따라서, 보수적인 중신들이나 무신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선진적인 총기 도입 <<<<<< 병사들의 정신무장"라는 사고방식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주장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게 현대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고, 실질적으로 따져봐야하는 것은 어째서 활을 버리지 못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 화살의 사정거리를 근거로 들어 궁시의 잔류를 설명하려고 하는 이론도 있으나 실상 훈련용으로나 쓰인 목전 혹은 숙련된 자들이나 쓸 수 있었던 편전 같은 특수 사례를 제외하면 활이 조총에 비해 사거리가 더 우수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애초에 조선이 조총과 활을 운용한 교리를 살펴보면 조총을 다 쏜 뒤에 적이 더 "가까이" 왔을때 활을 쏘라고 되어있기 때문에 조선인 부터가 이미 활이 조총에 비해 사거리가 앞섰다고 판단하진 않았다. 게다가 갑옷, 방패 , 바리케이트 등을 고려하면 활의 실질적 사거리는 더 축소된다. 이보다 근본적으로 활이 계속 조선에 잔류한 이유는 조총이 계속해서 화승을 쓰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중 적이 언제 어떻게 기습할지 모르는데 화승은 그 특성상 계속해서 유지할 수도 없었고 기습중에 (기습을 방어할 때나 혹은 기습으로 공격을 가할때나) 갑작스레 불을 피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였다. 만약 한창 회전이 이뤄지는 상황을 가정하더라도 역시 화승의 특성상 언제 불이 꺼져버리거나 격발 불량이 일어나는 경우를 대비해야 했으며 이를 보조하기 위해 언제 어느때나 사용할 수 있었던 활이 계속해서 유지되었던 것이다. 또한 기병 역시 고려해야 할 것이다. 비록 조선도 나중엔 총기병을 육성하긴 했으나 화승의 근본적인 한계때문에 기병이 조총을 다루는 건 힘든 일이었다.
- 18세기 이후에는 조총이 활보다 유용한 무기라는 점은 거의 확실하다. 조총이란 말 자체가 동아시아의 화승총 전반을 이르는 호칭이고, 사용기간이나 기술 발전에 따라서 초기형~후기형으로 나뉜 점도 있으니, 활 VS 조총이라는 주제 자체가 이런 무기의 시대상을 이해하지 못한 비교인 것이다. 애초에 조선군에서도 자체 개발한 조총이 활보다 유리한 성능을 가지게 되는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임진왜란까지는 활과 조총이 비등했으나, 이후에는 활이 조총을 보조하는 무기로써 역활이 변경되었으며 실제로 관련 논의에서도 어디까지나 활을 보조하는 무기로써 유지할 것인가? 배제할 것인가? 가 주로 논의되었다는 점 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사실 조선군도 조총의 대형화 혹은 장총신 버전인 천보총을 만드는 등 결코 조총을 천대했던것이 아니었다. 이런 바탕으로 보면 '조선은 조총보다 궁술을 중시했다'는 말도 당대의 일부 시각이었을 뿐이지 결코 대세는 되지 못했음을 알수 있다.
1.4.1. 조선은 임진왜란 당시 조총을 몰랐을까? ¶
임진왜란때 일본군이 쏴대는 조총을 보고 이 '처음보는' 무기의 위력과 폭음에 조선이 크게 놀랐다는 묘사가 많은데, 이는 임진왜란을 묘사하는 역사매체의 대표적인 오류 중 하나다. 다만 조총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건 조선군 장교들이나 그런 것이고, 직업군인이 아닌 일반인들이 조총을 알 리가 없었다는 점은 구분하자(…).
의외로 임진왜란 이전에도 조선은 조총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일본에서 몇 자루 선물로 들어온 적도 있고, 그 전에 중국에서 들어온 기록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일본 사신이 조총을 들여와 시연한 기록이 있는데, 시연 당일날 대신들이 이미 조총의 장단점을 알고 그에 대해 거론하고 있는 걸 보면 그 이전부터 이미 중국을 통해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조선은 조총과는 비교도 안돼는 폭음과 파괴력의 대포를 주력으로 운용하고 있었고 조총과 비슷한 무기인 승자총통을 만들어낸 바 있기에 조총을 보고 놀랄 이유가 없었다. 이 사실 자체가 뒤늦게 밝혀지거나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도 아니다. 실제로 신동우가 그린 '한국의 역사' (금성출판사) 시리즈 임진왜란 편에선 이일이 조총을 처음 본 듯이 번쩍이는 불빛을 내는 막대기라고 부르자 신립이 조총도 모르고 어찌 장군이라 할 수 있겠느냐며 분노하는 게 나온 바 있다.
당시 조선은 당시 조총에 장점이 있음을 인지했지만 그 단점 역시 명확했기에 당장 양산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하고 군기시에 보관해 놓았다고 한다. 실제로 조총은 쓰는 법이 쉽긴 했지만 장전과 조준이 활에 비해 몇배로 느렸고 사거리나 명중률에서 낫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뒤에도 서술하겠지만 조선 군에는 구한말까지 궁병이 남아 있었다. 실록에 나온 대화를 보면 한쪽은 양산이 빠르고 쉽다는 점에 주안점을 둬 일본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주장하고 다른 한쪽은 같은 조건이면 활이 유리한데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있냐는 쪽으로 흘렀다. 그러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효율적으로 조총을 운용한 일본군의 전술에 그 위력을 실감하고 양산에 들어갔다.
1.4.2. 조선의 조총 운용사 ¶
임진왜란 초기에 조총은 조선군에게 큰 인상을 남겼고, 이에 조선군은 바로 조총을 모방하는데 들어갔다. 그 결과 1593년 9월 이순신이 처음 조총을 모방 제작하는데 성공한다. 또한 김충선 등 항왜들이 조총 제작기술을 전수해주면서 조총은 조선군에 빠르게 전파되었다.
조총 다루는 것이 활 쏘는 것보다 훨씬 배우기 쉽다는 이점 때문에 이미 인조대부터 사수 중에서 실력이 떨어지거나 힘이 딸리는 군인들을 조총수로 전환하는 풍조가 지속되어, 나중에 가면 보병에 비해 재력이 좋아[7] 상대적으로 활쏘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기병(한량 계급의 비중이 높았다) 정도만 활로 무장하기에 이른다. 덕분에 17세기에 들어서 보병의 절대 다수가 조총으로 무장하게 된다. 숙종대 충청도 군적부를 보면 개인무기가 명시된 1,300여 명의 속오군 보병 중 76.5퍼센트가 조총수였다.
다만 창병 비율이 매우 낮고 총검도 없어 기병에 대응할 수단이 다소 부실하였고, 때문에 훨씬 다수의 총병을 보유했던 조선군이 청의 기마대에 모조리 털려버리는 쌍령 전투의 병크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 약점은 18세기 말까지 지속적으로 논의 되었다.
그래도 청군은 병자호란 때 고위 지휘관 일부가 저격당했던 경험 때문에, 효종 대 나선정벌당시 조선에게 조선의 조총수를 파견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리고 파견된 조선군 조총수들은 러시아군에 맞서 두 차례의 큰 승리를 거둔다.
이를 통해 조선 조총수가 러시아에서도 꽤 알려졌다. 그 당시의 머스킷으로는 전열보병 항목에서 보듯 대형을 갖추고 일정한 화망을 구성하여 적을 살상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던데 반해, 조선 조총수들은 머스킷으로 사람을 조준하여 죽였다고 한다. 당시 파병했던 조총수들은 전국에서 고르고 고른 특등 사수들로서 일정거리 이내에서 목표를 향해 3발을 쏴서 2번 이상 표적에 맞추어야 파병될 수 있었는데, 이것은 다른 나라의 조총수와 비교해서 2배이상 높은 명중율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활을 잘 쏘는 민족들은 결국 총도 잘 쏘았던 것이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유럽에서 강선을 비롯한 결정적인 화승총의 개혁이 일어나기 이전까지, 오히려 유목민족이나 궁술에 뛰어난 민족들이 비범한 개조조총들을 만들어서 운용한 예도 많았다.
참고로, 18세기까지는 조선군 조총도 유럽식 화승총에 비해서도 일장일단이 있는 정도로 크게는 꿀리지 않았다. 조선군은 장조총, 천보총과 같은 화승총을 개발해 화력과 경량성을 확보하여 18세기까지는 조류에 뒤쳐지지 않았다. 이는 다른 활을 운용한 민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동양의 화승총들은 유럽식 화승총에 비해서 매우 가볍고 이용하기 편하다는 장점이 있다. 심지어 이런 민족들의 조총은 오히려 원판보다도 사거리, 경량화 면에서 뛰어난 경우도 많았던 편이다. 대표적인 것이 파슈툰 족의 저격용 화승총인 제자일 같은 무기들이다.
1.4.3. 중국의 조총사 ¶
중국에는 정확히 언제 들어왔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적어도 16세기 전중반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도 조총을 제식무기로 도입했으며, 명나라 척계광이 왜구를 무리치기 위해 생각해 낸 남병 부대 편성방식에서는 전차부대의 16.5%, 기병부대의 14.5%, 보병부대의 40%를 조총으로 무장하게 하였다.
분명 강력하긴 했지만, 산악지방이며 섬나라인 일본과는 달리 중국은 중장기병이 발달한 나라였고, 유럽의 테르시오와 같은 방식의 전법도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에 명대까지는 기병의 전투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청대에 이르면 대규모로 화포의 사용이 이루어지면서, 준가르 토벌에서는 조창병과 포병이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명나라때는 화포의 활발한 개량과 도입이 이루어졌는데, 오스만이나 포르투갈의 화승총은 물론이고, 차륜식 머스킷 또한 운용하였다. 특기할점은 조사정이 1603년 작성한 조총 교범인 신기보(神器譜)엔 조사정 자신이 개발한 후장식 조총과 착탈식 총검까지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조총의 개량과 개발은 왕조가 교체된후 이어지지 못했다.
1.5.1. 조총은 아퀘버스인가 머스킷인가? ¶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보면, 임진왜란 당시 일본 조총이 머스킷이니 아퀘버스이니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 문제는 쉽게 단정하기가 힘든 것이, 일본 내에서도 16세기 초 유럽의 화승총 같이 비교적 작은 것부터 더 무겁고 구경도 큰 머스킷 이상으로 큰 것까지 다양한 구경의 소총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머스킷이라는 단어 자체가 세월이 지나면서 16세기 유럽에서 창안한 대형 소총 뿐만이 아니라, 그보다 구경이 작은 다른 전장식 소총(화승식, 차륜식, 수석식 포함)을 가리키는데에도 쓰였다. 이는 화기의 위력이 세지면서 갑옷의 두께를 늘리는 것이 비효율적인 방법이 되자 점차 갑옷이 경량화되거나 없어지고, 그에 따라 큰 구경의 머스킷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서 머스킷도 구경이 작아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Bert S. Hall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처럼 경량화된 17세기 중반의 '머스킷'은 16세기 초의 '화승총'과 그 크기나 무게, 구경이 비슷해졌다.
하지만 아퀘버스와 머스킷을 구분할 때는 기본적으로 아퀘버스와 머스킷이 공존한 시기를 기준으로 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정의에 따라서는 분명히 구분이 된다. 구분의 기준은 총 전체의 무게보다는 총의 위력과 구경을 중심으로 한다.
- 조총 = 아퀘버스급 화기
또 하나의 기준은 총의 구경이다. 17세기 이후 머스킷이 경량화되어서 예전의 아퀘버스를 대체하긴 하였으나 구경까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17세기 중반까지 아퀘버스, 머스킷의 구분은 유효했고, 머스킷이 전장식 총 전체의 의미를 가지게 된 18세기 영국의 표준 머스킷이던 브라운 베스의 경우조차 무게는 예전 아퀘버스 정도인 4.5 킬로그램이지만 구경은 19mm로 이전 일반적인 머스킷의 구경과 일치했다. 당시 일본과 조선의 조총은 동시기 유럽의 총과 비교하면 같은 구경에 무게가 절반 정도였으며, 기계장치는 훨신 단순했다. 이 점에서 머스킷보다는 아퀘버스라고 보는 측면이 타당하다.
사실, 이런 식으로 스펙을 놓고 까지 않아도, 아퀘버스라는 단어 자체가 굽은 총이라는 뜻이다. 둥글게 깎은 나무를 총신에 덧대어 만든 동양의 화승총은 모양만 봐도 서양의 아퀘버스를 개조한 무기체계였다.
- 주의 : 머스킷과 아퀘버스는 서양식 체급의 구분일 뿐.
1.5.2. "삼단 철포 혁명"에 대한 논란 ¶
대표적 사례로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이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조총 부대를 유력하게 활용하며 전장의 승기를 잡은 기록도 있다. 오다 노부나가는 조총 부대를 셋으로 나눈 후 그 중 한 부대가 조준하고 발사하는 동안 다른 부대는 장전을 하여 전체적인 공격 중단 시간을 크게 줄임으로써 적 부대를 격파하였다는 것이 널리 퍼진 주장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연구결과에 따르면 삼단철포 혁명으로 나가시노 전투를 이겼다는 것은 사실상 허구로 판명되었다. 여기에 더해 노부나가는 실제로는 이런 3열교대식 사격전술을 사용한 적이 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게다가 삼단철포 자체가 너무나도 당연해서 혁명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애초에 조총 이전에 재장전이라는게 필요한 무기가 없는 게 아니다보니 궁병도 유사한 방법으로 이미 운용하고 있었는데, 중국 송나라 때의 병서에 보면 쇠뇌로 3열교대식 진을 치고 연달아 쏘는 형태의 진형이 등장했고, 일본에서도 이러한 교대 사격 전술은 나가시노 전투 훨씬 이전에도 사용된 바 있다. 1525년 프랑스군과 스페인군이 맞붙은 파비아 전투에서 스페인 소총수들이 이런 전술을 사용하였으며,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 소총수들이 9열로 서서 교대사격하여 헝가리 기사대에 큰 피해를 주었다. 조총보다 점화체제가 뒤떨어진 승자총통을 주력 개인화기로 사용한 조선에서도 승자총통 창제자인 김지가 승자총통수를 3열로 배치해 교대사격하는 전술을 생각해냈다.
1.6. 무대뽀, "무텟포(無鉄砲)" ¶
한국어에서 무대뽀라는 단어는 1990년대 후반부터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1997년 송능한 감독(지금은 은퇴)의 <넘버3>란 영화로 유명세를 탄 단어라는 이야기가 있으며, 실제로 등장 시기가 일치하는 편이다. 하지만 1994년에도 이미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거슬러 올라갔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무텟포"라는 말 자체가 철포에서 유래한 것은 아니다. 흔히 무텟포(無鉄砲)를 의미 그대로 번역해 전투에서 조총 한 자루 없이 개돌한다는 의미로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일본어 "無鉄砲"는 가차(일본어로는 当て字)[8]한 것으로 원래 의미와는 큰 상관이 없다.일본어 읽을 수 있으면 참조 할 것.
1.7.1. 한국 사극 ¶
위에서 다룬 일반적인 편견(심지에 불 붙여 다 타면 발사) 때문에 과거 임진왜란을 다룬 대부분의 사극이 조총에 다들 심지가 끼워져 있었으나 시청자들의 오류지적이 심해서인지 그런 모습은 줄었다.
하지만 다시 '불멸의 이순신'에서 반자동 조총으로 변신했다. 돌격하면서 단발 속사로 조총을 갈겨대는 왜군의 모습에, 무기 관련 지식이 있던 시청자들은 할 말을 잃었다. 덧붙이면 이 작품의 화기 고증 오류는 이것만이 아니라서, 조선에는 심지가 다 타들어가면 발사되는 총통이 등장하기도 했다.
위에서 보듯, '추노'에선 정확하게 나왔다. 다만 여기서는 화승에 연결되는 화문에 화약을 넣는 과정이 생략되었다. 하지만 고증 무시하기를 밥먹듯이 하는 우리나라 사극에서, 이 정도 고증이면 상당히 정확한 편이다.보기
과거 베스트셀러였던 오세영의 '베니스의 개성상인'에서 안토니오 꼬레아가 30년 전쟁에 임해 전쟁 상인으로 활동하면서 타네가시마[9]를 확보하는데 열을 올리는데, 머스킷보다 구조상으로나 위력으로나 그다지 우월하지도 않은 일본 조총을 수입할 이유가 전무하다. 대표적인 고증오류.
2014년 방영된 '조선 총잡이'에서 또다시 심지총이 등장했다.
1.7.2. 게임 ¶
황당하게도 야쿠자 액션 게임 용과 같이 2에서 사용 가능한 총기로 등장한다(...). 센고쿠파 본부(마개조 오사카 성(...))에서 등장하는 조총병들이 들고 나오는 일반 조총("화승총")과 투기장에서 코마키 소타로 할배를 쓰러뜨리면 입수 가능한 유니크 버전인 "코마키 가문 비전 화승총(古牧家伝統火縄銃)" 두 가지가 등장한다.
메탈기어 솔리드 4에선 드레빈 샵에서 구입 가능한 무기로 등장하는데 가격도 비싸거니와 리로드 타임이 무지 길고, 총알도 드레빈 샵에서만 구입 가능하다. 하지만 야외에서 사용시 일정 확률로 카미카제가 발동, 맞은 적은 대량의 아이템을 뿌리고 사망한다. 하지만 노킬 노얼럿 플레이시엔 의미가 없으니 결국 취미&칭호 습득용 무기. 하지만 이 카미카제는 시체에도 적용된다. 즉 이벤트로 어쩔수 없이 죽어서 널부러진 시체를 쏴주면 대량의 탄약과 레이션을 회수할 수 있다. 물론 주변에 적이 있는지 확인은 필수. 해볼려면 ACT.1의 B&B 부대에 학살당하는 민병들 시점이 적당.
메탈기어 솔리드 피스 워커에서도 어설트 라이플(…)류로 등장. 설계도는 EXTRA OPS 121번 혹은 122번을 클리어시 랜덤확률로 등장. 성능은 랜덤 확률로 카미가제 발생 이후 적을 풀톤 회수. 그런데 MSG4에서 보여줬던 카미카제보다는 뭔가 좀 시원찮다. 그리고 적이 끌려올라갈 때 모습이 심히 트라우마틱하다(…). 만약 이총을 공격용으로 사용하려면 포기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한 발 쏠때마다 재장전에 이동도 못한다. 단, 조총 특유의 리로드 모션을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써도 좋다.
혹시 FPS에서 조총을 쏴 보고 싶다면 배틀필드 1942의 전국시대 모드를 설치하여 플레이 해볼 것. 참고로 최대 휴행 탄수는 7발이며(진지 내의 무기상자 찾아가면 충전 가능하다), 한발 쏘고 장전할 때 마다 매우 훌륭한 리로드의 쾌감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배틀그라운드"라는 게임에서도 화승식 조총은 아니지만 머스킷을 쏴볼수 있다.
"배틀그라운드"라는 게임에서도 화승식 조총은 아니지만 머스킷을 쏴볼수 있다.
RTS 게임 중에서는 HQ Team의 임진록 시리즈에서 등장한다. 게임 자체가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지라 일본 진영에서 조총병이 등장하는데, 사거리는 조선 진영의 궁수에 못미치지만 데미지는 원거리 공격형 보병 유닛들 중에서는 단연 으뜸이다. 다만 RTS의 한계상 길고 아름다운 장전은 나오지 못하고 결국 반자동 소총급이 되어버린 문제는 있지만... 활에 비해 사거리가 짧지만 파괴력이 높다는 점에서 나름 고증에는 성공한편...이려나? 참고로 어째서인지 일본 진영에 조총병이 있고, 명나라 진영에 화승총병이라는 유닛이 따로 존재하고 있다. 조선만 활이다. 그러나 구버전인 임진록1때는 화승총병은 조선 유닛이었고, 조총은 활이나 화승총보다 사거리와 위력이 더 뛰어났다. 다만 지대공 능력이 활에 비해 많이 약했고, 이 상성은 조선의 반격까지 이어졌다.
또다른 국산 RTS 충무공전 시리즈에서도 등장한다. 충무공전2에서는 일본의 조총수(총병)이 조선의 기마유닛과 함께 게임의 흐름을 좌우하는 핵심적인 유닛이다. 초반부터 거의 중반 유닛에 필적하는 데미지로 조선군 유닛들을 척살하는 성능을 보여준다. 마이크로 컨트롤식 RTS치고는 조총의 미칠듯한 장전속도도 매우 잘 반영되어 있는데, 얼마나 느리냐면 업그레이드를 하기 이전에는 조선군 궁수가 2~3발쯤 쏠 때도 재장전을 하고 있다. 재장전 중에서는 무빙샷도 안 되서 총신을 청소하다가 활이나 칼에 난자당해서 죽는다(…). 장전 속도 업그레이드를 하면 궁수가 1.5발~2발 쏠 때 한발 쏘는 정도로 변하지만... 그래도 느리다.
토탈워 시리즈의 작품 중 하나인 토탈 워: 쇼군2에서도 모습을 드러넨다. 난반[10]과의 무역을 통해 얻는 방법과, 철포 국산화(Gunpowder Mastery) 기예를 습득함에 따라 얻는 경우가 있다. 철포 계열 유닛들은 전국시대 유닛들 중에서는 사거리 내 화력만은 최강이지만 문제는 그놈의 사거리와 앞의 아군을 넘겨 쏠 수 없다는 점, 결정적으로 그 길고 아름다운 장전속도(...). 제대로 운용하면 파괴력으로 기병이고 보병이고 다 썰어먹을 수 있지만 운용에 미숙한 사람이라면 상당히 사용하기 힘들다. 우리가 아는 조총의 위상과는 달리, 쓰기에 따라 확 달라지는 병과. 그래도 무지 강력하다. 자세한 정보는 여기서 확인하자.
코에이의 전국시대와 관련된 게임에서는 당연히 무조건 나온다. 다만. 이쪽은 조총이 아닌 철포로 언급되는데다가. 철포가 처음으로 도입되는 시기는 태합입지전부터. 대중에 널리 알려진 조총의 시작은 신장의 야망11 천하창세부터 나온다. 다만. 폭설이나 비가 올 때는 사용할 수 없으며. 우철포로 양산이 가능한 군주의 규모는 패자부터이다. 더군다나 접근전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방어수단이 없는데다가. 방어력은 검병이나 창병에 비하면 엄청나게 허접해서. 근접용 부대가 몸빵정도는 해야 된다. 남만 문화가 많이 올라간 상태에서 수성전으로 몰리면. 화살탑이 조총탑으로 강화되면서. 점령하기가 무척 어려워진다. 공격측은 사기가 많이 올라가지만. 그 만큼 점령도 어렵다. 문으로 통하는 입구가 하나인데. 조총탑이 2개 이상이면. 어지간한 군대는 뚫어내지 못하고 퇴각한다.
독자가문 고유기인 삼단구/원당/원규등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신장의 야망12 혁신부터 등장하며. 이 독자 고유기는 타 가문에도 공유되지 않는 가문 전용 최종병기다. 이는 이후 시리즈에서도 그대로 계승이 되며. 철포를 주력으로 하는 시마즈가문이 대부분 우위를 점한다. 깡패 시마즈의 전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선 최종 테크인 왕정 시대에 대학에서 연금술을 업그레이드하면 궁사양성소에서 생산할 수 있다. 다만 엄밀히 말하면 조총이 아니라 핸드캐논이다. 실제로 영문판에서는 'Hand Cannoneer'라고 나오지만 한글판에서 오역하여 조총수가 된 것. 오히려 스페인 특수 유닛인 정복자(콘키스타도르)가 조총수에 더 가깝다.
1.7.4. 기타 ¶
대한민국에서 '옛날 총' 하면 가장 먼저 '조총'을 떠올릴 정도로 상당한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역사 시간에 임진왜란이 상당한 비중을 가지고 언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진왜란은 왜군이 대대적으로 조총을 들고와 그걸로 조선군을 관광보낸 사건인지라[11]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조총과 친숙(?)해지기 마련이다.
세기중 막장 집단인 일본군이 활개치고 다니던(?) 2차 대전 말기 일본에서는[12] 본토 결전용 병기랍시고 학교 책걸상을 분해한 다음 다른 재료들과 함께 대충 호라드릭 큐브에 넣고 융합해서 만든 것처럼 해괴하게 생겨먹은 본토 결전용 조총이 등장한 바 있다... 이 정신나간 인간들은 조총 외에도 알루미늄에 화약을 넣고 위에 성냥을 꽂은 수류탄과 활, 죽창, 대공 투석기를 만들어 지급했다...뭐, 깡통에 화약넣고 촛불심지넣은 수류탄도 있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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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숙종 조는 효종 조에 이은 조선 조총 전성기였는데, 반대당인 서인 노론의 송시열이 여군(!) 창설을 주장한 것도 바로 이 조총의 배우기 쉬운 특성 때문이다.
- [2] 다만 조선에서의 경우에는 다른 국가에 비해 활에다가 화약 뭉치를 붙여서 발사해 화살이 박히는 순간 폭발하게 하거나, 화살에 독을 발라 놓는 등 화살 자체의 살상력을 높이는 노력을 조선초부터 꾸준히 해왔다. 때문에 다른 국가에 비해 오랫동안 활과 총이 병용 가능했다.
- [3] 민어 부레로 만든 것으로, 소의 힘줄 등에서 뽑은 아교보다 접착력과 탄력성이 뛰어났다.
요즘 사람들은 민어 부레 하면 요리 재료로 더 인식하지만 - [4] 종특인 활을 쓰기 불리한데 그렇다고 근접전으로 붙자니 왜군 종특이 단병접전이라...
- [5] 아니 그 기마민족까지 대기병전술을 응용하여 사격전을 벌였다. 강희제의 준가르부 원정도를 보면 나오는데 말들을 책으로 삼아서 총을 쏘는 몽골족이 묘사되어있다.
잠깐 말은 또 다른 식구라매 - [6] 활이 총을 이겼다고 생각하면 곤란한것은 이시기 청나라의 주력은 팔기군인 기병이 아닌 한족보병으로 이루워진 녹영병이었으며 녹영의 주력무기는 조총과 화포였다. 즉 전투양상이 서로간의 총격전위주였다.
- [7] 말을 구하고 키우려면 돈이 많이 드니까.
- [8] 음에 맞춰서 적당히 원 의미와는 상관 없는 한자로 표기, 한국어로 예를 들면 손가락을 한자로 손孫 가家 락樂이라고 쓰는 것
- [9] 작중에서는 일본산 머스킷으로 등장.
- [10] 남만. 포르투갈, 스페인 등의 서양 세력을 지칭한다.
- [11] 물론 익히 알려져있다시피 조선군이 단지 조총 하나 때문에 초반에 그렇게 말아먹힌것만은 아니다. 왜군의 최신식 장비와 전략전술 등 외적 요인과 더불어 개념상실 지도층들과 책상물림 지휘관들과 오합지졸 병사들 등 여러 내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그런 것이다.
- [12] 물론 이때는 처절하게 캐발리고 다니던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