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한국 고대사 - (1)고구려 국내성이 이상하다

백삼/이한백 2015. 4. 28. 09:33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의 지명 관계는 아래 그림과 같습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을 근거로 삼고 있으므로, 대략 265년부터 297년 사이이며, 고구려 서천왕 시대의 국제 관계를 정리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과서에 봤던 내용이므로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갑니다.

반면, 역사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사람들은 국내성이 어떤 곳인지 한번 살펴보고 싶어합니다.

카론은 후자에 속했기에 인터넷으로 지도 검색을 해 봤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이곳이 과연 고구려의 수도가 맞는지 의심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구글맵처럼 지형을 보여주는 지도로 국내성이 있다는 중국 길림성 집안시(지안시)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온통 산으로 가득한 지역에 국내성이 있는데요.    

산이 뭐 어때서 그러냐고 생각하시는 분들을 위해 카론은 이렇게 질문을 드릴 것입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뭘 먹고 살았을까요? 

 

산에서는 농사를 짓기가 힘듭니다.

이유는 물이 부족해서인데요.

이를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은 통계청 사이트에서 각 지역의 농작물 생산량을 비교해 보시면 됩니다.     

강원도 전체에서 생산되는 양은 태안, 서산 지역에서 생산되는 양과 비슷합니다.

강원도 생산량도 평야 지대에 해당하는 철원, 원주, 강릉을 제외하면 그 양이 1/4로 확 줄어들어 버립니다.   

이는 산지에서는 농사를 할 수 없다는 통계학적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구려 사람들의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좀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산지에서 농사가 힘들다면, 평지에서 단위면적당 농산물 생산량은 얼마나 될까요?  

현재의 농업은 매우 발전되어 있어서 고대의 농업과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농업으로 고구려시대의 농업을 비교해 보려고 합니다. 

조선시대는 토지에 세금을 부과하였기에 생산량에 대한 구체적으로 자료들이 있습니다.   

 

* 1결당 현미 300두~400두, 벼 600두~800두  

 

현미는 도정을 한 쌀이고, 벼는 도정하지 않은 상태로 약 1:2의 비율로 나타납니다.

계산을 쉽게 하기 위해 1헥타르(ha) 단위로 정리하면... (1결 : 약 5천평, 1두 = 1,8리터, 1ha 약 3천평)

1ha 당 현미 320kg~ 430kg 정도입니다. 

조선시대는 대식을 하던 시대로 농번기 3끼, 농한기 2끼씩 하며, 년 평균 2.5끼를 섭취했는데요.

성인 기준, 하루 500g씩, 1년 소비량은 180kg 정도 됩니다.

여기서 다시 몇 인분으로 정리하게 되면, 1ha당 2명~3명의 생산량 정도로 통계학적 이해가 가능합니다.

(통계학적 이해는 근사치를 추정하는 것이므로 실 측정치와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국내성 지역을 살펴보겠습니다.

 

 

 

 

위 그림에서 붉은색은 산지이고, 노란색 부분은 묘가 있는 곳을 나타낸 것입니다.  

10kmx10km 범위 안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지가 어느 정도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10km x 10km 범위는 10,000 ha입니다. 

만약, 네모 안이 모두 평지이면, 통계학적으로 2~3만명이 살수 있는 식량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그림에서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평지가 20~30%는 되어 보이나요?

30%라면 최대 1만명분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살 집도 필요하고... 도읍에 있어야 할 여러 잡다한 시설들도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또한 기록을 보면 환도성에는 병사가 5만이 있었고, 함락된 후에 백성 5만명이나 잡혀갔다고 합니다.

학계에서는 환도성을 국내성으로 정리하고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최소 5만명의 백성이 살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림의 네모가 훨씬 더 많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여기서 잠시,  집안 지역과 다른 지역의 면적을 한번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을 보면...

고구려 지역은 높은 산이 있고, 계곡에서 사람들이 살았으며, 좋은 밭이 없어서 식량을 절약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집안시가 국내성이라면 살던 사람들이 굶어 죽게 됩니다. 

스스로는 자급이 불가능하니까요.

만약, 외부에서 식량을 공급했다면 200킬로 너머에서 가져와야 합니다. 

주변에는 곡식 나올 곳이 없으니까요.   

집안시로 통하는 길은 등고선이 꽤 높은 곳을 지나야 합니다.

그래서 내년 식량을 옮길 때마다 한바탕 난리가 났을 것 같은데요. 

국내성은 무려 400년동안 고구려의 도읍이었습니다.

 

* 옥저 사람들이 수송을 했다는 기록은 있는데 품목이 해산물 종류이지, 오곡과 같은 식량은 아닙니다.  

* 좌식자 1만여명이 있어 이들을 위해 곡식을 날랐다는 기록이 있는데, 좌식자는 국경의 경계병으로 추정됩니다.

  

식량은 인구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식량이 없는 곳에서 어떻게 강력한 왕국으로 발전할 수가 있었을까요?  

게다가 이곳은 산속에 위치해 있어서 상업적으로도 교통이 불편한 곳에 해당합니다.

시골 산골마을 경제력으로 주변 대도시를 집어 삼켰다는 소리인데...

 

 

상식 수준의 인문지리를 이용하여 국내성을 살펴봤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카론은 이상하다 생각되어 문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흥미로운 내용들이 쏟아져 나오더군요.

 

1. 10월 동명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고구려 제천행사 10월 동명에 대한 내용이 나오더군요.

나라 동쪽에 대혈이 있어 사람들이 가서 제사를 지냈다고요.

학계에서는 대혈을 동굴이라고 풀이를 하는데요.

혈은 우리가 익숙하게 듣고 있는 말입니다.

 

한의학에서는 침을 놓는 곳을 혈이라고 합니다. 

풍수지리에서는 무덤을 놓는 자리를 혈이라고 합니다.

명당이라고 하면 이해가 쉬우실까요?

 

집안시 그림(세번째)에서 노란색으로 표시된 곳이 모두 묘자리입니다.

북쪽은 산이고, 남쪽은 물이 흐르고, 좌청룡 우백호가 있는 곳을 사람들은 명당이라고 합니다.

집안시를 살펴보니 바로 명당의 조건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요.

 

2. 광개토태왕비 수묘에 대한 기록

광개토태왕비에 수묘(묘를 지키는 것)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나라가 약해질 것에 우려하여 한과 예의 병사들로 하여금 집안시 지역의 묘를 지키게 했다는 것입니다.

집안시가 국내성이라면 이런 내용이 필요할까요?

국내성은 400년간 나라의 도읍이었고,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많이 살던 곳이어야 합니다.

연남생이 연남건과의 권력다툼이 벌어지자 국내성을 기반으로 버티잖아요.

평양성이 서울이라면 국내성은 부산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은데요. 

장수왕때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겨서 국내성이 텅텅 비었다라고 한다면 정말 말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3. 통설 "국내성은 요동에서 500리 거리에 있다" 

통설에서 국내성과 관련된 거리 개념이 나옵니다.

국내성을 중앙으로 놓고, 서쪽은 염난수가 마자수가 만나 2100리를 흐르고,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는 내용인데.

요동에서 500리를 가면 국내성 남쪽이 나온다고 합니다.

 

집안시가 국내성이라면 학계에서 추정하고 있는 요동의 위치가 난감해집니다. 

직선으로 600리가 넘기 때문입니다. 

 

4. 고구려 멸망 과정을 설명할 수가 없다. 

지도를 보면 국내성은 산속에 고립된 곳입니다.

게다가 당이 국내성을 점령한 후에 평양으로 진격을 하는데 산길로 800리입니다. 

보급 관계를 설명할 수 없고,   

중간에 등장하는 성도 설명할 수 없고,

험준한 산길은 기습이 용의해서 이동로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지도를 보며 내용을 살펴보면 한숨이 저절로 새어나올 정도입니다.   

 

 

5. 산골 마을의 전형적인 모습

집안 북쪽에 신빈 만족자치구가 있습니다.

이곳은 지형적으로 집안시 주변보다 훨씬 좋은 환경이므로 사람이 많이 살 수 있는데요.

이 지역의 풍경을 담은 청나라 때 그림이 있어 소개를 하려고 합니다.     

그림에 표시된 범위는 약 3~4km 정도, 가옥이 100여채 되는 것 같습니다.

 

 

한 나라의 도읍이 되려면 최소한의 크기의 평지가 필요합니다.

왕궁과 관청 전각은 물론 사람들이 쾌적하게 살수 있는 도심의 공간이 기본적으로 배치되어야 하고...   

그 주변에는 농지와 목축 공간이 필수적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이런 것이 없다면 외부에서 수송하기 적합한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압록강은 하상계수가 상당한 곳입니다.

수풍댐이 건설되면서 물길이 막혀 큰 호수가 생겨난 것이므로 고구려 시대에 강을 통한 수송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문헌에 등장하는 역사 기록들을 집안시를 중심으로 살펴보세요.

동천왕과 관구검의 전투 기록.

고구려 멸망 과정에 대한 기록.

모두 산속에서 이루어지는 실현 불가능한 내용들입니다.    

 

의심이 많이 됩니다.

집안시가 국내성이 아니라면...

그래서 혹시 다른 지역에 국내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지리를 살펴보았습니다. 

기록에서 전하는 대로 산과 계곡이 있고...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적당한 평지가 있어야 하고...

교통의 요충지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내용을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카론이 찾은 곳은 딱 한 곳입니다.  

그곳은 만리장성 동쪽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