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경주 포석정 (鮑石亭)

백삼/이한백 2015. 5. 4. 10:17

경주 포석정 (鮑石亭)




 이곳은 옛날 신라 왕실의 별궁 터였으며, 포석정은 돌에 홈을 파서 물을 흐르게 하고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자기 앞에 올 때까지의 사이에 시를 지어 잔을 들고 읊은 후, 다시 다음 사람에게 잔을 띄어 보내며 풍류를 즐기던 곳이라고 합니다.




 

 


이런 놀이를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라고 하며, 우리나라뿐 아니라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에도 있었으나 오늘날까지 자취가 잘 남아 있는 곳은 이곳뿐이라고 하며, 전체 모양이 전복 껍질 모양을 하고 있어서 포석정( 鮑石亭 ; 전복 鮑,  돌 石,  기거하지 않는 사방이 틔어 있는 1층으로 된 건물 亭 )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사적 1호로 지정하여 보호되고 있습니다.



 

 

 청남대 오각

 

나주시 성산리 면헌 () ; 귀신이 사는 집 (사당)




이 포석정의 타원 모양의 긴지름은 5.3미터, 짧은 지름은 4.8미터, 수로의 폭은 약 15센티이고, 평균깊이는 26센티, 수로의 전체 길이는 22미터나 되고, 모두 63개의 화강석으로 이루어져 있답니다.

실제로 굽이치며 흐르게 한 물에 술잔을 띄어 본 결과 술잔의 크기 및 술 양에 따라 흘러가는 속도가 다르고, 수로의 굴곡진 곳에서는 물이 돌면서 흐르기 때문에 술잔이 한 순배 도는 시간이 10분

정도 걸렸다고 합니다.


 

 모형시험으로 얻은 와류형성분포 (신라 과학기술의 비밀, 함인영, 1998)


 이 유상곡수에 술잔을 띄었을 때 잔이 흘러가다가 어느 자리에서 맴돌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유체역학적 와류현상(渦流現像)- 주류와 반대방향으로 소용돌이 치는 흐름-이 형성됐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포석정의 물이 흘러가는 경로가 다양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위치에서 출발시킬 경우 술잔은 결코 같은 경로로 흘러가지 않는다. 술잔은 특수 와류구역에서 돌기도 하고, 막혀서 갇힐 수도 있다. 즉 포석정의 이 특이한 설계가 다양한 수로를 만들어서 그 위에 술잔을 띄었을 때 다양한 흐름과 위치의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그림으로부터 술잔이 어느 구역에서 맴돌게 되는지, 어느 구역에서 흐름이 큰 와류가 형성되는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의 유사한 유적에 잔을 띄우면, 떠내려가기는 하지만 와류가 일어나지 않는 것과 비교한다면 신라인들의 슬기와 지혜, 과학기술적인 응용력이 놀랍기만하다.” (신라 과학기술의 비밀, 함인영, 1998)


원래는 돌거북을 만들어 놓고 위쪽에 위치한 배상못 으로부터 물을 끌어다가 거북의 입으로 나오게 하여 수로로 흘러가게 한 것인데, 이 돌거북은 조선 말엽 어느 경주 부윤이 옮겨다가 자기 조상의 무덤 비석 대좌로 사용했다고 전해져 오고 있으나 그 행방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  포석정 유상곡수 체험장


신라 55대 경애왕 4년(AD927)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여 지금의 영천까지 쳐들어 왔답니다. 경애왕은 견훤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고려의 왕건에게 도움을 청하였으나, 고려의 구원병이 이르기 전 불시에 이곳 포석정으로 공격해 온 견훤 앞에 무릎을 꿇어야 만 했고 또한 자결하기에 이른답니다. 그 후 10년도 못되어 56대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줌으로 신라 천년의 사직이 무너져 내리고 만 것입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927년 음력 11월에 견훤의 군대가 왕경을 쳐들어 왔다고 하였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얼음이 꽁꽁 어는 한 겨울에 야외에서 유상곡수연을 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왕이 아무리 정치에 어두워도 적이 쳐들어오는 긴박한 상황 하에서 이곳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왜 경애왕이 추운 겨울에 이곳 포석정에 행차를 하였을까요? 그때에는 국가의 중요 행사 때에 왕이 직접 참여하여 제사를 주관하는 경우가 많았답니다.

적군이 쳐들어오고 있는 다급한 상황 이였기에 나라의 안녕을 간구하기 위해 남산 신에게 기도드리려 온 것이거나, 진흥왕 때부터 내려오던 호국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팔관회 제사가 11월에 지냈기에 그 제사에 참석한 것이 아닌지에 대한 의견도 있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비운의 장소로 기록된 것은 신라 멸망의 당위성과 고려 건국의 정당성을 드러내기 위한 승자 편에서의 기록이 아닌지 추정하고 있습니다.


1998년 이곳 주변에 대한 발굴조사를 하던 중 포석(砲石)이라고 음각된 기와 조각이 발견되어 건물도 있었음이 확인 되었으며,


 


또한 최근에 발견된 화랑세기 신라 성덕왕 때의 학자 김대문이 지은 화랑의 유래에 관해 쓴 책필사본박창화(1889~1962)씨가 일본 궁내청 서릉부(書陵部) 촉탁으로 근무하던 때(1934~1945) 발견하여 필사한 책에 의하면



 

 


 화랑세기 필사본

 화랑세기 본편


 포석정을 포석사(鮑石祠) 즉 사당으로 표시해 놓고 있는 점 등을 미루어 보아 포석정의 기록은 바로 잡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어 집니다.


 

 

포석정 옆 하천에 만든 계욕장 


포석정 바로 옆 동편 계곡에는 제사를 올리기 전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해 목욕을 하는 계욕장(契浴場)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계곡 바닥에 있는 큰 바위에 한명의 사람이 들어가서 목욕을 할 수 있도록 인위적으로 바위를 쪼아내어 판 흔적이 있으며, 동편 산 쪽에서 물이 들어오고 계욕장에 들어 온 물은 서편 개울로 빠져 나갈 수 있게 홈을 파 놓은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계욕은 몸에 배인 부정을 냇물로 씻어내는 일종의 목욕재개 의식으로, 오늘날 제사를 지낸 뒤 음복하는 것처럼 신라시대에는 계욕을 한 뒤 음복행사가 이루어 졌으며, 이 음복행사가 유상곡수연으로 발전된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포석정이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남아있는 기록이 없으나,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49대 헌강왕(AD876~886)이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고 있던 중 남산신이 임금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여러 신하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오직 왕에게만 보였다고 하며, 그때 남산신이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면서 지리다도파(智理多都波)라고 하였는데, 그 의미는 대개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병란을 미리 알고 많이 도망하여 도읍이 장차 깨진다는 뜻으로, 곧 남산신이 나라가 망할 줄 알아 춤을 추어 미리 경계하도록 하였지만, 나라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가 나타났다고 하여 깊이 즐거움을 탐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나라가 망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 후 임금이 손수 남산신이 춤추던 모습을 흉내 내어 보였다고 하여, 이 춤을 어무산신무(禦舞山神舞)라고 하였답니다.

이런 기록으로 볼 때 9세기 중엽 이전에 포석정이 만들어 졌음을 알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