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한국 고대사 - (3)위치비정 정확히 하자

백삼/이한백 2015. 4. 28. 09:30

한국고대사 (1) 고구려 국내성이 이상하다   http://cafe.daum.net/kseriforum/HjpU/2840

한국고대사 (2) 요동은 이곳이다 http://cafe.daum.net/kseriforum/HjpU/2853

 

그런데 막상 고구려와 요동을 옮겨놓고 보니, 정리하고 넘어갈 문제가 한둘이 아니더군요.

완전히 역사를 새로 써야 할 수준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등장하는 주변국들의 위치 비정부터 시작했습니다. 

이 부분은 한국 고대사의 핵심이므로 역사를 논하려면 반드시 설명하고 넘어가야 할 내용입니다.  

 

학계의 정설은 아래 그림과 같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와 요동의 위치가 바뀌게 되면 그림이 아래와 같이 변하게 됩니다.  

 

 

지면상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모든 내용을 설명할 수는 없고, 핵심만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1. 한은 4천리이다.

 

한반도 천청강에서 함흥까지 해안선의 길이가 대략 4천리(1600km)입니다.

위치비정을 할 때 확실한 부분은 일단 제외시켜 놓고 시작하는 것이 편리합니다.

그래서 그림처럼 한 지역을 아래쪽으로 일단 분리시켜 놓았습니다.

 

 

부여.

1.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夫餘在長城之北)

2. 현토군에서 북쪽으로 천리 떨어져 있다.

3. 부여의 남쪽에 고구려가 있다.

4. 읍루의 서남쪽 천리에 부여가 있다. 

5. 넓은 평야가 가장 많다.

6. 부여는 방 2천리이다.

 

부여(夫餘)의 의미는 "넉넉한 곳에 사는 상투 쓴 사람"이란 뜻입니다.

상투를 쓴다는 것은 한 가정을 이끄는 가장(어른)을 뜻하지만,

당시 사서를 기록한 중국의 시각은 만이(蠻夷)라고 불렀던 오랑캐의 특징으로 상투를 말한 것입니다.

당시 중국 문화와 다른 형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여는 만이에 속하는 부족 중 하나로 이해하고 역사를 해석해야 합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부여의 위치를 알려주는 중요한 문장은 있습니다.

"장성 북쪽에 있다"라는 내용이 그것인데요.

장성은 만리장성을 의미하므로 만리장성 북쪽에 부여가 있어야 합니다.  

* 학계에서 말하는 정설대로라면 한반도까지 만리장성이 있어야 합니다. 

* 중국이 만리장성을 한반도까지 연장시키는 작업도 이와 무관치 않습니다. 

 

다음은 현토군에서 북쪽으로 천리 떨어진 곳에 부여가 있습니다.

현토군은 요동군의 요산 북쪽에 위치해 있으므로 400km를 떨어진 곳을 찾아보면 

대략, 대흥안령산맥 동쪽, 시레무렌강 북쪽 땅에 부여의 도읍이 있었을 것입니다.

 

교통로를 따라 그림을 그려 보았습니다. 

추정지역 주변에는 현재에도 큰 도시들이 있습니다.  

 

 

부여의 영역은 대흥안령산맥에서 강을 따라 동진하여 다시 북쪽인 읍루까지 연결되는 2천리 땅이 될 것입니다.   

이 지역은 넓은 평야 지역으로 부여의 이름처럼 모든 것이 넉넉한 지역입니다.  

부족함이 없으니 사람들의 성품도 온화해서, 침략 전쟁도 즐겨하질 않습니다. 

 

부여 동북쪽 천리에는 읍루가 있어야 하고, 부여 남쪽에는 고구려와 옥저가 있어야 합니다.

단, 동옥저는 부여와 읍루를 동시에 접해 있어야 합니다.

 

부여 서쪽은 선비가 위치해 있는데, 선비는 대흥안령산맥 서쪽, 동호 지역에 위치해 있어야 합니다.

동호가 멸망하면서 선비와 오환으로 나뉘어졌기 때문입니다. 

 

옥저

1.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에 있다.

2. 남옥저, 북옥저, 동옥저가 있다.

3. 서남으로 길고, 동북으로 좁다. 천리쯤에서 꺾인다. 

4. 대해에 접하고, 북쪽으로 읍루와 부여가 위치해 있다.  

5. 남쪽에 예맥이 있다.

 

옥저(沃沮)의 뜻은 기름지고, 축축하게 젖어 있는 곳을 말합니다. 

이는 옥저 지역이 호수나 강가 주변 지역임을 말해주고 있는데요.

이 내용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옥저의 생산품인 맥포(貊布)가 있습니다.  

 

맥포는 맥 지역에서 사용하는 천(옷)입니다.

맥은 부여를 뜻하므로, 부여인들이 즐겨 입었다는 흰 옷이 맥포인 것입니다.  

부여인의 흰옷은 누에에서 뽑은 하얀색 생사로 만든 비단옷입니다.

생사는 누에에서 나오고, 누에는 뽕나무를 먹고 자랍니다.

뽕나무는 쌀보다 두배나 많은 물이 필요한 작물이어서 땅이 축축하게 젖어 있어야 합니다.  

다만 뿌리가 완전히 물에 잠기면 썩어버리므로 나무 주변에 도랑을 깊게 파줘야 합니다.

북옥저를 치구루라고 하는데 치구루가 바로 깊은 도랑을 의미합니다.  

또한 옥저에 민며느리 제도가 있는데요.

교과서에는 조혼 풍손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게 아니고 누에에서 뽑는 생사 생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누에실이 워낙 얇아서 어른들보다 어린 소녀들이 실을 더 잘 뽑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가서 일하고 어른이 되면 돌아오는 구조였던 것입니다.

인터넷으로 양잠, 생사를 검색하면 어린 소녀들이 일하는 사진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에 있다고 합니다. 

개마는 말이 뒤덮여 있다라는 뜻으로 말이 많은 곳, 혹은 말을 키우는 곳입니다. 

개마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지역명으로 서개마현와 개마국이 있는데 모두 개마대산과 관계가 있는 곳입니다.

이를 정리하면, 현토군 동쪽에 개마대산이 있고, 그 다음부터 옥저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옥저는 호수나 강가 주변의 땅이 축축한 지역이라는 것과 현토군 동쪽에서 시작하므로... 

대략 대릉하와 소릉하 지역이 옥저가 시작되는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옥저는 남옥저, 북옥저, 동옥저로 나뉘어지는데, 구분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옥저는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 한나라에 속하게 된 옥저 땅을 말합니다.

북옥저는 고구려 주몽이 획득한 옥저 땅입니다. 

동옥저는 한나라에게도 고구려에게도 소속되지 않은 옥저 땅입니다.    

 

남옥저 내용이 다소 복잡한 것 같은데 막상 정리하면 매우 쉽습니다.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남옥저 지역은 현토군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맥(오환, 구려)이 침입하자 현토군이 구려지역인 요산 북쪽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여기서 잠시...

현토군은 쫓겨난 것은 아니고, 이맥 지역의 국경에서 분쟁이 자주 일어나자

남옥저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를 구려가 있는 요산 북쪽으로 옮긴 것입니다. 

이 내용은 북부여와 연결이 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북부여 이야기에서 다룰 것입니다)

 

현토군이 빠져나가고, 남옥저 지역은 잠시 낙랑군 동부도위에 속하게 되는데, 관리가 힘들었나 봅니다.

남옥저 지역의 소속현들을 후국으로 삼아 독립시켰으니까요. 

그리고 독립했던 남옥저 지역은 모두 고구려에게 흡수됩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과 후한서에서 옥저와 관련된 흥미로운 구절이 있습니다.

삼국지 : 其地形東夾, 西南長, 可千里

후한서 : 其地東西夾, 南長, 可折方千里

 

같은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데 내용이 완전히 다릅니다.

뭔가 바뀌고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삼국지의 내용에 후한서의 절방(折方)을 삽입해 보았습니다.  

 

其地形 東西夾, 南北長, 可折方千里

그 지역의 형상은 동북으로 협소하고, 서남으로 길다. 천리쯤에서 꺾인다.

 

이렇게 해석했더니 모든 것이 명확해집니다.    

거리를 측정해보면 위 그림처럼 천리쯤에서 꺽이는 것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여와 옥저를 통해 기본틀을 잡았지만 아직 큰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옥저, 읍루등에 등장하는 대해 때문입니다.   

대해 = 큰 바다

사실 이 부분은 학계의 정설을 떠받치고 있는 논리의 핵심입니다. 

옥저가 대해에 접하려면 한반도 동해안에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카론 역시 이 부분을 오랫동안 설명하지 못했는데요.  

그러던 중에 대해가 내륙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어 만주 지역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양 북쪽의 300km짜리 타민차칸 사막을 살펴보았고, 송원시 주변의 호수지역을 살펴보았습니다.   

다행히 서기 1000년의 거란지리지도에서 송원시 주변에 초대형 호수가 있었다는 단서를 발견하였습니다.  

 

 

거란지리지도의 내용을 구글지도로 표현해 보았습니다. 

 

 

 

송화강의 형태가 거란지리지도의 것과 비슷함을 알 수 있습니다.

흥안, 대경, 송원시로 연결되는 지역은 주변보다 저지대에 해당합니다. (사방에서 물이 모이는 곳)

해당 지역은 퇴적지역으로 현 중국의 기름진 곡창 지역입니다. (예전에 호수였다는 사실을 뒷바침하는 단서) 

 

2천년 전. 그곳은 가운데에 섬이 있었던 하나의 초대형 호수였습니다.

천년 동안 대륙의 건조화가 서서히 진행됩니다. 

1천년 전, 그곳은 두 개의 거대한 호수가 있었습니다.

천년 동안 대륙의 건조화가 서서히 진행됩니다.

2015년 현재 해당지역은 수많은 호수가 있습니다.

 

대해의 물이 2천년 동안 서서히 줄어들어 현재에 이르렀다면...  

수백km에 달하는 호수가 있다는 사람들은 그곳을 무엇이라 부를까요? 

천년전에도 북해라고 했는데, 2천년 전에는 더 큰 호수였으니 당연히 대해(=큰 바다)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대해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에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1. 고구려와 옥저의 남쪽에 있다.

2. 조선의 동쪽에 있다.

 

예는 조선의 동쪽 땅이 모두 예라고 하였습니다. 

예는 고구려와 옥저의 남쪽에 있습니다. 

예의 범위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은 상당히 넓은 지역에 걸쳐 살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예, 맥, 한으로 지역을 구분한 것으로 보아 예는 한과 비교해서 결코 좁지 않을 면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면, 예는 인구가 적기 때문에 좋은 환경의 땅은 아닐 것입니다. (쉽게 정복을 당할 수 있는 곳)

 

 

읍루

1. 부여에서 동북쪽으로 천리에 위치해 있다.

 

읍루는 흥경과 백성시 동쪽 부분으로 대해가 이곳에 있었다면 물길로 남하하여 북옥저 지역을 약탈하였을 것입니다.   

 

한국 상고사의 위치 비정은 대해를 규정하는 일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옥저의 대해를 동해라고 규정하면 이후 역사 해석은 이해할 수 없는 환타지가 된다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