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신립, 과연 임란 충주전투 때 자결했나

백삼/이한백 2014. 10. 16. 10:15

신립(申砬·1546∼1592)은 과연 임진왜란 충주전투에서 자살을 했을까.
 
지금까지 신립은 금년 기준으로 7갑(1592년) 전인 임진왜란 충주전투 때 패배에 따른 책임을 지고 달천에 뛰어들어 자결했다는 것이 정설로 돼 있다.

이는 선조실록 1592년의 기사 중 '전하를 뵈올 면목이 없다'라는 표현에 근거하고 있다.
 
'적이 복병을 설치하여 아군의 후방을 포위하였으므로 아군이 드디어 대패하였다. 입은 포위를 뚫고 달천 월탄(月灘)가에 이르러 부하를 불러서는 '전하를 뵈올 면목이 없다.'고 하고 빠져 죽었다. 그의 종사관 김여물(金汝山+勿)과 박안민(朴安民)도 함께 빠져 죽었다.'-<4월 17일자 4번째>
 
선조실록 원문은 '賊設伏繞, 出我師之後, 衆遂大潰。 砬突圍至달(수달달)川月灘邊, 召其下曰: "無面目見殿下。" 遂溺死。 其從事金汝山+勿、朴安民, 亦溺死'로 적혀 있다.
 
그러나 신흠(申欽·1566~1628)의 상촌집(象村集)은 같은 전투였지만 약간 다르게 서술하고 있다.
 
조선중기 문신인 신흠은 '상촌집'이라는 시문집을 63권 22책의 방대한 분량으로 남겼다. 이중 '여러 장사들이 왜란 초에 무너져 패한 기록'(諸將士難初陷敗志) 편에 임진왜란 충주전투와 신립에 대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신립이 군사들을 지휘하여 차례로 진격시켰으나 마을 길이 비좁은데다 논밭이 많아 말을 치달리기에 불편하여 머뭇거릴 즈음에 적이 우리 군사의 좌측으로 돌아 나와 동쪽과 서쪽에서 끼고 공격해 오는 바람에 우리 군대가 크게 어지러워지면서 적에게 난도질을 당한 결과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군자와 군기가 일시에 모두 결딴나고 말았다. 신립이 단신으로 말을 타고 강 언덕에 이르렀는데 적이 군대를 풀어 추격하자 신립이 물에 몸을 던져 죽었으며 김여물도 물 속으로 투신하였다. 신립의 군대가 패하자 대가가 서쪽으로 파천하였다.'-<상촌집 제 56권 志>

 
- 신립은 분명히 임진왜란 때 충주 달천의 월탄(타원)에서 숨졌다. 그러나 자살인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다.
비교의 정확성을 위해 상촌집 원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砬麾諸軍以次而進。村街狹隘。且多稻田。不便於馳馬。逡巡之際。賊요(에워쌀 요)出我軍之左。東西挾擊。我師大亂。被賊亂감(벨감)。積尸如山。軍資軍器。一時俱盡。砬單騎至江岸。賊縱兵追之。砬投水死。金汝山+勿亦沒於水。砬軍旣敗。大駕西幸.'

선조실록은 "'전하를 뵈올 면목이 없다'고 하고 빠져 죽었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와 관련 '전하를 뵈올 면목이 없다'라는 표현은 자살을 암시하는 대목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빠져 죽었다'라는 서술에는 자살의 의지가 담겨진 것일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일수도 있다. 한문으로는 '溺死'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에 비해 신흠은 상촌집에서 '신립이 단신으로 말을 타고 강 언덕에 이르렀는데 적이 군대를 풀어 추격하자 신립이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라고 기술했다.

'적이 군대를 풀어 추격했다'는 표현에서는 자살의 분위기가 잘 느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신흠은 바로 이어지는 문장을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라고 표현했다.

'몸을 던졌다'는 점은 자살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한문으로는 '投水死'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신립은 분명히 7갑전이 1592년 임진왜란 충주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이 본인 의지에 의한 자결인지, 그렇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은 면이 있다. 

그리고 두 사료는 표현의 차이를 보이면서도 보완 관계의 모습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