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
전선은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戰船雖寡 微臣不死則 不敢侮我矣)
─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
명량해전 | |||
날짜 | |||
선조 30년 정유년 9월 16일 그레고리력 1597년 10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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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
전라남도 해남군과 진도군 사이 명량해협 (세칭 울돌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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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전국 1 | 교전국 2 | |
교전국 | 조선 왕국 | 쇼쿠호 일본 | |
지휘관 | 이순신 김응함 조계종 우수 안위 정응두 김억추 배흥립 민정붕 소계남 송여종 |
도도 다카토라 구루시마 미치후사† 와키자카 야스하루 하타 노부토키† 간 마타시로 마사카게† 모리 다카마사 이하 미상 | |
병력 | 8~900여명 가량[2] 판옥선 13척 초탐선 32척 어선 100여 척 |
133척 이상 전체 병력 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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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기함 사망자 2명 부상자 수명 전체 피해 불명 |
31척 격침 피해 규모 불명 | |
결과 | |||
조선 수군의 결정적 승리 조선 수군의 재집결. 일본군의 서해안 진출 무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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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
이순신 장군이 치른 해전 중 가장 아군이 열세인 상황에서 벌인 해전 |
1.1. 칠천량 이후 ¶
18일 정미, 맑다.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길 "16일 새벽에 수군이 대패했습니다. 통제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와 뭇 장수들이 다수 살해당했습니다."라고 하였다. 통곡을 이기지 못했다. 잠시 있으니 도원수가 와서 이르길 "사태가 이에 다다랐으니, 어찌할 수가 없소이다."라 하였는데, 대화가 사시(巳時)에 이르러도 대책을 정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뢰어 내가 해안으로 가서 보고 듣고서 정하겠다고 하니 도원수가 기뻐하였다. 내가 송대립, 유황, 윤선각, 방응원, 현응진, 임영립, 이원룡, 이희남, 홍우공과 함께 길을 떠나 삼가현에 다다르니, 수령이 새로 부임하여 나아와 기다렸다. 한치겸도 왔다.
─ 이순신, 『정유일기』 7월 18일.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은 궤멸되었다. 이 참담한 소식을 접한 선조는 어쩔 수 없이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켰지만, 정작 돌아온 이순신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휘하에 전함 한 척 없는 이름만 제독일 뿐이었다.
7월 18일 7월 19일 7월 20일 7월 21일 7월 22일 7월 23일 7월 24일 7월 27일 |
왕은 이른다. 오호라! 국가가 의지하여 방패로 삼는 것은 오직 수군이거늘, 하늘이 재앙을 거두지 않으사 흉악한 칼날이 다시 번뜩여 마침내 삼도의 대군이 한 번 싸움에서 다하고 말았도다. 이후로 바다 가까운 성읍은 누가 지키겠는가? 이미 한산을 잃었으니 적이 무엇을 꺼리겠는가? …… 지난번에 경의 직책을 빼앗고 그대로 하여금 죄를 짊어지도록 한 것은 역시 과인의 모책이 미덥지 못함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무슨 말을 하리오. 무슨 말을 하리오. …… 그대는 충의로운 마음을 굳건히 하여 우리의 나라 건지길 바라는 소망에 부합하라. 고로 이 교지를 내리니 그대는 헤아려 알라.
─ 『이충무공전서』, 「상중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하는 교서(起復授三道統制使敎書)」
조선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이 실현된 국가에서 왕이 신하한테 저 정도 표현을 쓰는 것 자체가 파격적이다. 그만큼 국가 차원에서도 나라의 존망이 목전에 달린 급박한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8월 3일 8월 4일 8월 5일 8월 6일 8월 7일 8월 8일 8월 9일 8월 11일 8월 13일 8월 14일 8월 15일 8월 16일 8월 18일 |
근래 또 배신(陪臣) 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보낸 장계에 의하면,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 전선과 무기가 흩어지고 사라져 거의 다하였습니다. 신은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김억추 등과 더불어 전선 13척, 초탐선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의 바닷길에서 요충지를 지키고 있었는데……"
─ 『선조실록』 권94, 30년 11월 정유(10일) 5번째 기사
모두 합쳐도 전선이 13척에 초탐선 32척이 전부였고, 이는 명량해전 당시에 동원했던 전선만 최소 133척에 이르던 일본군과 비교하면 대단히 안습한 숫자였다. 이순신이 거느린 수군이나 조정 내에서는 당장이라도 수백 척의 배가 들이닥칠 거라는 공포가 만연해 있었다. 누가 보기에도 당시의 조선 수군은 상황이 안습을 넘어서 처절한 수준이었다.
임진년부터 5·6년 간 적이 감히 호서와 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 아직 열두 척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내어 막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
그러나 이순신은 위와 같이 아직 열두 척
1.2. 울돌목으로 ¶
27일 을유, 맑다.
배설이 와서 만났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수사는 어찌 피하려고만 하시오!"라고 하였다.
─ 이순신, 『정유일기』 7월 27일.
이처럼 터질 듯한 긴장감이 가득한 가운데 8월 28일, 드디어 일본군이 나타났다.
28일 병술, 맑다.
적선 8척이 생각지도 못하게 들어왔다. 뭇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는 피하여 물러나고자 하였다. 나는 동요하지 않고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몰아내도록 명하였다. 적선이 퇴각하자 추격하여 갈두(葛頭)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저녁에 진을 장도(獐島)로 옮겼다.
─ 이순신, 『정유일기』 7월 28일.
28일에 어란진에 나타난 일본군은 고작 8척의 수색대에 불과했지만 이미 겁을 잔뜩 집어먹은 조선 수군은 그저 무기력한 모습만을 보여줄 따름이었다. 수색대를 물리친후 [6] 이순신은 29일에 다시 벽파진으로 이동하여 이곳에 진을 치고 결전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9월 2일에는 마침내 고위 지휘관인 경상우수사 배설이 도주해버리는 사태까지 벌어졌고, 이순신은 이 일을 단지 '배설이 달아났다'고만 담담하게 적고 있다.[7]이렇게 이순신이 조선 수군을 재건해가며 싸울 준비를 하는 동안, 일본 수군은 전라도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서해를 거쳐 한양을 공격하자는 구상을 하게 된다. 일본 수군은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궤멸시킨 자신감으로, 이번 기회에 이순신을 무찌르고 전쟁에서 이기자는 생각이었다. 일본군의 장수들 사이에서는 그동안 당한 원한을 갚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객관적으로 봐도 12척으로 300여 척 이상을 갖춘 함대를 막아낸다는 것은, 항우가 살아 돌아와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고 당사자인 조선 수군과 조정에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일본 수군은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9월 3일 신묘, 비오다. 9월 4일 임진, 북풍이 세게 불다. 9월 5일 계사, 북풍이 세게 불다. 9월 6일 갑오, 바람은 잠시 잠잠하나 파도가 가라앉지 않다. 9월 7일 을미, 바람이 비로소 그쳤다. 9월 8일 병신, 맑다. 9월 9일 정유, 맑다. 9월 10일 무술, 맑다. 9월 11일 기해, 흐리고 비오다. 9월 12일 경자, 비가 내리다. 9월 13일 신축, 맑다. 북풍이 세게 불다. |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했으며, 또한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그대들 뭇 장수들은 살려는 마음을 가지지 말라.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법으로 다스리리라!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5일[9]
이날 밤에는 이순신의 꿈에 신인이 나타나 이기는 방법과 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KBS에서 방송했던 한국사전에서는 밤에 이상한 징조도 많았다고 언급함.
2.1. 전투의 시작 ¶
9월 16일, 맑다.
이른 아침에 별망(別望)이 나아와 보고하길, "수없이 많은 적선들이 곧장 우리 배를 향해 옵니다."라 하였다. 바로 뭇 전선에 명하여 닻을 들고 바다로 나아가니, 적선 130여 척이 아군의 뭇 전선을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저마다 중과부적이라 판단해 돌아서 피할 궁리만 했고, 우수사 김억추는 물러나 아득히 멀리 있었다.
내가 노질을 재촉해 앞으로 돌격하며 지자포 현자포와 각종 총통들을 어지러이 쏘아대니 마치 바람과 번개 같았고, 군관들이 배 위에 서서 화살을 비처럼 어지러이 쏘아대니 적도들이 감히 대적하지 못하여 다가왔다가 물러나고는 했다. 그러나 몇 겹으로 포위되어 있어서 전세가 어찌 될 것인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6일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다른 인물들의 기록이나 여러 가지 정황을 보면 울돌목에서 전투가 일어났을 개연성이 크다. 지형이 좁고 조류가 거친 울돌목은 전장으로서는 최악의 환경이지만, 당시 절대적으로 열세인 조선군의 입장에서 그나마 유리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지형과 환경의 제약은 그 수가 많은 쪽에 더욱 불리하기 때문이다. 적선이 아군의 전선들을 몇 겹으로 에워쌌다는 난중일기의 표현으로 미루어 전투가 협소한 울돌목이 아니라 전라우수영 앞바다에서 일어났다는 주장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배들이 겁을 먹고 멀찌감치 물러나 있었음이 확인되므로 이는 전 함대가 아니라 이순신의 대장선과 그를 호위하던 초탐선들을 묶어서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2.2. 군법에 죽고 싶으냐 ¶
뭇 장선(將船)들을 돌아보니, 물러나 먼 바다에서 관망하며 나아가지 않고 배를 돌리려 하고 있었다.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6일
전라우수사 김억추는 수 마장 뒤로 물러나서는 아예 전투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었으며,[10] 거제현령 안위, 녹도만호 송여종, 조방장 배흥립, 해남현감 류형, 가리포첨사 이응표 등 그간의 활동으로 보아 절대로 전투를 주저하지 않을 듯하던 역전의 용사들까지도 적에게 압도당한 나머지 후방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심지어 이때에는 조류마저 왜군에게 유리하게 흐르고 있었는데, 이민서가 쓴 명량대첩비문에서는 '때마침 밀물이라 파도가 거세고 적들이 상류로부터 밀물을 타고 덮쳐와서 그 기세가 산이 찍어누르는 듯했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이는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었다. 링크 그러니까 이순신은 홀로 울돌목의 미친 물살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압도적인 숫자의 적들을 막아서고 있었던 것이다.
안위야, 싸우다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달아난다고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6일
이에 안위가 황급히 적진으로 돌입했고, 또한 이순신은 뒤이어 도착한 중군장 김응함에게도 다음과 같이 외쳤다. 김응함은 중군장으로서 대장선의 호위와 대장선의 전투 지휘 명령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하였으나, 그마저도 방기하고 후방에 물러나 있었으며 심지어 특별한 함대편제상 직책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안위보다도 늦게 대장선과 합류했으므로 그에 대한 이순신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11]
너는 중군이 되어서 멀리 피해만 있고 대장을 구하지 않았으니, 죄를 어찌 면하겠느냐! 당장이라도 처형하고 싶지만 적의 기세가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6일
안위와 김응함이 나서자, 차츰 잦아들어가는 밀물 위에서 명량해전은 난전으로 바뀌었다. 왜선 세 척이 안위의 배에 달라붙었고, 급기야 안위의 배 위에서 접전이 벌어져 안위의 안위가 위태로운 상황이 되자
2.3. 기적 같은 승리 ¶
적선 30척을 깨부수자 적선들이 물러나 도망치니, 다시는 아군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이는 실로 천행이었다.(此實天幸)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6일
3.1. 조선 수군의 후퇴 ¶
3.2. 반전된 전황 ¶
이런 걸 보면 명량 해전의 진정한 전략적 의미는 왜군의 한양 점령을 막았다는 것 보다는, 아예 일본군이 삼남을 지배하겠다는 기본 전략 자체를 무산시켜버린 좀 더 근원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4. 전과 ¶
내 배에서는 순천감목관 김탁과 본영의 종 계생이 총알에 맞아 죽었다. 박영남, 봉학과 강진현감 이극신도 총알에 맞았으나 중상을 입지는 않았다.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8일
놀랍게도 난중일기에 조선 수군의 피해는 대장선에서 사망자 2명, 부상자 3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것이 전체 피해자인지, 아니면 대장선의 피해자만을 기록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대장선만의 피해로 보더라도 대단한 전과인데, 전투 중반까지 대장선 혼자서 두세 시간을 싸웠는데도 이런 결과라면 일방적인 학살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이외에도 실제로 접전이 벌어진 안위의 배에서는 사상자가 다수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난중일기에는 격군 5~6명이 물에 뛰어들었다고 하는데, 울돌목의 거센 물살로 보아 사실상 사망.(...)
진해(鎭海)에 사는 정병(正兵) 전풍상(全風上)이 왜적의 진중에서 도망해 와서 아뢰었다. 저는 지난 임진년 8월 산골로 피란했다가 왜적에게 잡혔는데 왜장 산도(山道)의 진중에 소속되어 안골포(安骨浦)에 한달 남짓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산도를 따라 바다를 건너 일본의 국도(國都)에서 동쪽으로 하룻길인 진역군리(鎭域軍里)에 도착했는데 진역군리는 바로 산도가 다스리는 고을이었습니다. 또 산도에게 딸린 부장(副將) 우다능기(尤多凌其)의 종이 되어 복역하면서 이따금 문서(文書)를 선소(船所)에 송달하기도 했는데 대체로 우다능기는 바로 산도가 관할하는 전선(戰船)의 장수였습니다. 선척의 숫자는 1백 20여 척으로 지난해 6월 산도가 재차 자기 소속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부산포(釜山浦)에 정박하였고, 7월 사이에는 한산도(閑山島)에서 접전한 뒤에 하동(河東) 앞 포구에서 하륙(下陸)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구례(求禮) 지방을 거쳐 남원(南原)을 함락시키고 전주(全州)에 도착했다가 즉시 하동으로 돌아왔는데 대개 갔다가 돌아온 기간이 20여 일이었습니다. 또 하동에서 열흘 간 머문 뒤에 산도(山道)가 선척을 다 거느리고 수로(水路)를 따라 순천(順天)·흥양(興陽)을 거쳐 우수영(右水營) 앞바다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통제사(統制使)와 접전을 하여 왜적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습니다. 그리하여 무안(務安) 지방으로 후퇴하여 정박하면서 날마다 분탕질을 한 뒤에 다시 순천으로 들어와서 왜교(倭橋)에다 성을 쌓고 주난궁(走難宮)에게 지키도록 한 다음 산도는 즉시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우다능기를 따라 광양(光陽) 지방의 장도(獐島)에 옮겨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또 우다능기가 일본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기별을 듣고 고향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밤을 타서 도망와 현감(縣監)에게 자수(自首)해 온 것입니다.”
ㅡ 『선조실록』 97권. 선조 31년. 명 만력 26년 (1598년) 2월 11일 -
선조 실록 선조 31년 2월 11일의 기사에는 정유년에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이듬해 탈출한 전풍상의 증언이 실려 있다. 이 증언에 의하면 전풍상은 산도라는 일본 무장의 부장인 우다능기의 종으로 생활했는데, 산도는 정유년 6월 적선 120여척을 이끌고 부산에 상륙하여 칠천량 해전과 남원성 전투에 참전했고, 9월에는 휘하 전선들을 이끌고 명량해전에 참가했다. 여기서 전풍상은 '거기서 통제사와 접전을 하여 왜적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선수의 배들은 적선에 노 젓는 사공이 너무 많다. 그 중에 구루지마 장군도 앉은 채로 전사해 있다. 그밖에 선수(船手)와 가로(家老)[15]의 과반수가 사망했다. 모리 장군은 세키부네(関船)에서 경비선으로 옮겨 탔다. (적은) 경비선에 열십자의 낫을 걸고 활과 철포를 마구 쏘아대며 먼 바다로 몰았다. 위험한 상황에서 두명의 도도장군이 이끄는 배로 적선을 쫒아내고 목숨을 구했다. ...(생략)... 도도장군도 손에 두 군데 부상당했다.
ㅡ 『고산공실록(高山公實錄)』
일본군 총대장인 도도 다카도라의 기록인 고산공실록도 명량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선수와 가로의 과반수가 사망했다고 적고 있다. 참고로 히데요시를 대리하는 군감인 모리 다카마사까지 물에 빠졌다가 구출되었다는 것을 보면 후방에서 보호받아야 할 인물들까지 위험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감이 선봉에 나서는 군대도 있는가? 임란 시기 일본의 군감은 정치 장교가 아니다(...).
근래 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치계하길, "한산도에서 패배한 이래로 병선과 무기가 흩어져서 거의 사라졌는데, 신이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김억추 등과 전선 13척, 초탐선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의 바닷길에서 길목을 지키고 있자니 전선 130여 척이 이진포 앞바다로 들어왔습니다. 신이 수사 김억추, 조방장 배흥립, 거제현령 안위 등을 거느리고 각기 병선을 정돈하여 진도 벽파정 앞바다에서 적과 교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웠는데, 대포로 적선 20여 척을 깨부수고 쏘아 죽인 것이 매우 많아 적들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고 머리를 벤 것도 8급이었습니다. 적선 가운데 큰 배 1척이 있어서 우보(羽葆)와 홍기(紅旗)를 세우고 푸른 비단 장막을 둘렀으며, 적들을 지휘하여 아군 전선을 에워싸므로 녹도만호 송여종과 영등포만호 정응두가 잇따라 와서 힘껏 싸워 또 적선 11척을 격파하자 적이 크게 꺾이어 남은 적들이 멀리 물러났습니다. 진중의 항왜가 홍기를 단 적선을 가리켜 안골포의 적장 마다시라고 하였습니다. 획득한 적의 물건은 화문의(畫文衣), 금의(錦衣), 칠함(漆函), 칠목기(漆木器), 장창(長槍) 두 자루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소방(小邦)의 수군이 다행히 작은 승리를 거두어서 적의 예봉을 조금 꺾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적선이 서해에는 진입하지 못할 것입니다. ㅡ 『선조실록』 94권, 30년 11월 10일 5번째 기사
선조가 명나라 측에 명량해전의 소식을 알릴 때의 기사이다. 선조의 작태가 잘 드러난다. 분명히 명량해전을 두고 '작은 승리'를 거두어서 적의 예봉이 '조금' 꺾였다고 하면서도, 뒤이어서는 적선이 서해에 진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실히 말하는, 앞뒤가 안 맞는 언행을 보여준다. 뭐, 이 발언 자체는 꼴에 예의 차린다고 겸양하는 걸로도 볼 수 있지만,
4.1. 조선 수군 규모 ¶
4.2. 일본 수군 규모 ¶
- 이요 국
이요 국 우와지마 번 8만 3천 석 다이묘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 2800명
이요 국 마쓰마에 번 10만 석 다이묘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 2400명
이요 국 무라카미 씨 1만 4천 석 당주 구루지마 미치후사(来島通総) - 600명
이요 국 무라카미 씨 소속 하타 노부토키(波多信時)
- 아와지 국
아와지 국 스모토 번 3만 3천 석 다이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 1200명
아와지 국 이와야지 번 1만 석 다이묘 간 헤이에몬 미치나가(菅平右衛門達長) - 250명
아와지 국 이와야지 번 소속 간 마타시로 마사카게(菅又四郞正陰)
- 메츠케
분고 국 사이키 번 다이묘 모리 다카마사(毛利高政)
총합 전선 133/200여 척, 수군 3650/7250여 명
5.1. 군율과 신뢰의 승리 ¶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법으로 다스리리라!(小有違令 卽當軍律)
─ 명량 해전을 앞두고
5.2. 함선, 화기, 지리의 압도적 시너지 ¶
5.3. 피해를 받지 않는 일방적인 상황 ¶
5.4. 명량철쇄설 ¶
- 기록된 근거는?
- 김억추의 행적이 기록된 호남절의록(1799)과 현무공실기(1900)에 '충무공께서 공에게 철쇄를 설치하게 하셨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때 철쇄를 설치하고 관리해야 하는 관할실무자는 전라우수사인 김억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여전히 문제가 되는 호남절의록과 현무공실기의 과장된 묘사[27]와 함께 김억추의 이런 중요한 공적을 이순신이 기록하지 않은 점에서 의문을 사고 있다. 오히려 김억추는 명량해전 당시 가장 후방에서 꽁무니를 빼고 있었다고 이순신이 난중일기에 친히 적어주셨다.(...). 무엇보다 현무공실기는 1900년 물건으로 당대에서 한참 뒤의 시기에 쓰인 것이므로 신빙성이 없다.
-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되었으므로 적어도 1795년 이전에 작성되었을 '해남현지'를 보면 '공이 철쇄로 물속을 가로질러 막았는데, 양변 바위 위에 철삭을 박은 자국이 지금도 완연하다. 사람들은 모두 그곳을 이충무공께서 철삭을 쳐서 왜군을 죽인 곳(李忠武設索殺倭處)이라 부른다'고 되어 있다. 일단 해남현지 자체는 당시 국가관청에 의한 실사 확인 기록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여전히 구전에 의거한 것이며, 철쇄가 아니라 철삭(鐵索)이라 하고 있어 철쇄설을 방증하는 다른 자료들과 상충된다. 또한 당시의 1차 사료에는 어디에도 명량해전의 철쇄와 관련된 언급이 등장하지 않는다.
- 1751년에 편찬된 택리지에도 '이순신이 쇠사슬을 뻗쳐놓고 기다리니 왜선 5백 척이 걸리고 물살에 휩쓸려 모두 가라앉았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미 해전으로부터 150년이 지난 뒤의 사료인 것과, 왜선이 5백 척이라는 표현 등 정확도가 떨어져서 그대로 신빙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 어떻게 만들 수 있었을까?
- 이전부터 조선 수군이 철쇄를 설치하여 항구를 봉쇄했던 사례가 왕왕 발견된다. 중종실록 5년 5월 24일 4번째 기사를 보면 삼포왜란 이후 왜구의 습격을 막기 위해 '큰 나무를 박아 세우고 쇠사슬로 차례차례 연결하는데, 칡동아줄로 무거운 돌을 나무에 달아 그 나무를 물밑으로 한 자쯤 잠기게 하여 적선이 걸려 넘어오지 못하고 찍어서 끊지도 못하게 하며, 중간에 쇠갈고리를 설치하여 잠그기도 하고 풀기도 하는' 방법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에 합치되는 나무들이 진해와 통영 등지에서 발굴되고는 하며, 이순신 또한 난중일기에 임진왜란에 앞서 철쇄 공사를 한 기록들을 남겼다.[28] 이러한 노하우가 명량 해전의 철쇄 제작에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 하지만 항구를 봉쇄하는 철쇄와 명량을 가로지르는 철쇄는 의미가 다르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전자는 섬 사이를 가로막아 배의 진입을 일차적으로 저지하는 단순한 방어시설이었고, 그것도 전함이 정박할 소포 인근에 간략히 설치된 임시 구조물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명량에 설치되어야 할 철쇄는 시속 14㎞에 달하는 급류에 말려든 수십 척의 배를 저지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 이는 아래에서 후술한다.
- 판옥선은 흘수선이 낮고 바닥이 평평해 일정한 높이의 쇠사슬 위를 지나갈 수 있지만, 일본의 군선은 흘수선이 깊고 바닥이 뾰족해서 높은 확률로 쇠사슬에 걸릴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위에서 익히 살펴보았듯 일본의 군선인 세키부네가 구축함이라면 판옥선은 전함이다. 그것도 배에 화포와 포탄을 잔뜩 싣고 있으니 과연 흘수선이 세키부네보다 낮았을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긴다(...). 게다가 그 험한 환경에서 설치 중에 이것까지 계산하고 있었다면... 가히 세계 공병사에 길이 남을 업적.
- 최소 4톤에 달하는 철을 어디에서 공수해와서 누가 어떻게 가공하였는지도 문제로 제기된다. 6천 근에 달하는 쇠를 입수했다면 분명 난중일기에 기록을 남겼을 것이거니와,[29] 이순신은 전투 하루 전까지도 명량에서 적을 막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음이 난중일기로 확인된다. 따라서 그전까지 명량에 미리 철쇄를 설치해 놓겠다는 생각 자체를 할 수가 없는 것인데, 그렇다면 하루도 아니고 한나절만에 6천 근에 달하는 쇠를 그만한 강도의 쇠사슬로 가공해냈다는 말이 된다(...).
- 이전부터 조선 수군이 철쇄를 설치하여 항구를 봉쇄했던 사례가 왕왕 발견된다. 중종실록 5년 5월 24일 4번째 기사를 보면 삼포왜란 이후 왜구의 습격을 막기 위해 '큰 나무를 박아 세우고 쇠사슬로 차례차례 연결하는데, 칡동아줄로 무거운 돌을 나무에 달아 그 나무를 물밑으로 한 자쯤 잠기게 하여 적선이 걸려 넘어오지 못하고 찍어서 끊지도 못하게 하며, 중간에 쇠갈고리를 설치하여 잠그기도 하고 풀기도 하는' 방법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에 합치되는 나무들이 진해와 통영 등지에서 발굴되고는 하며, 이순신 또한 난중일기에 임진왜란에 앞서 철쇄 공사를 한 기록들을 남겼다.[28] 이러한 노하우가 명량 해전의 철쇄 제작에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 준비된 철쇄는 튼튼한가?
- 사실 쇠사슬을 걸어서 배를 부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며, 현대의 제작 기술로도 그만한 강도를 가진 쇠사슬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대에도 불가능에 가까운데 당대에는 오죽하랴. 목선이라고 해도 사람 수십 명이 타는 이상 무게가 톤 단위는 될 것이고, 수적인 면에서도 한번에 열 척에서 스무 척 정도는 달려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울돌목의 조류를 타고 있으므로 속도까지 빨랐을 것은 당연지사. 비유하자면 열차를 쇠사슬로 막는 꼴이다. 최근에도 현대그룹에서 만든 1350톤짜리 구조물이 떠내려 간 해류가 흐르는 곳이 여기다.
- 적을 막는 데 철쇄를 이용했다가 실패한 사례로 오나라가 있다. 오나라의 건평태수 오언이 장강을 가로지르는 쇠사슬을 쳐서 뱃길을 막아 두었는데, 왕준이 배를 타고 내려오면서 기름 먹인 큰 뗏목 수십 개를 떠내려보낸 뒤 여기에 불을 놓아서 쇠사슬을 녹여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화염은 보조적인 역할을 하고, 실제로는 뗏목의 중량을 버티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 적을 막는 데 철쇄를 이용했다가 성공한 사례는 비잔티움 제국이 있다. 수도를 지키기 위해 금각만을 가로질러서 친 쇠사슬은 효과적이었는데, 실상 금각만의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해류[30]와 세키부네만큼이나 빈약한(...) 오스만 제국 함선의 규모에 힘입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메흐메트 2세는 배를 끌고 산을 넘어서 금각만에 진입해야만 했다.
그냥 어쌔신을 고용하지
- 해남현지의 기록에 따라 당시의 철쇄는 쇠사슬이 아니라 철삭, 즉 철사를 꼬아 만든 와이어로프라는 주장도 있다. 이 경우 외부의 힘에 의해 끊어질 위험이 현저하게 줄어드는데다 무게 또한 줄어든다. 다만 난중일기나 실록 등에서 당시 항구를 봉쇄하는 데 쓰이던 도구는 일관되게 철삭이 아닌 철쇄로 표기되고 있으므로 철삭을 사용했다는 주장에는 근거 자체가 부족하다. 그리고 이런 구조물의 강도라도 그 정도로는 함선을 정면에서 가로막기에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 사실 쇠사슬을 걸어서 배를 부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며, 현대의 제작 기술로도 그만한 강도를 가진 쇠사슬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대에도 불가능에 가까운데 당대에는 오죽하랴. 목선이라고 해도 사람 수십 명이 타는 이상 무게가 톤 단위는 될 것이고, 수적인 면에서도 한번에 열 척에서 스무 척 정도는 달려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울돌목의 조류를 타고 있으므로 속도까지 빨랐을 것은 당연지사. 비유하자면 열차를 쇠사슬로 막는 꼴이다. 최근에도 현대그룹에서 만든 1350톤짜리 구조물이 떠내려 간 해류가 흐르는 곳이 여기다.
- 철쇄 없이는 이길 수 없었나?
- 고려시대 여몽연합군이 진도에 웅거한 삼별초를 공격했는데, 고려사 김방경 열전을 보면 이 당시 진도 주위를 지키던 삼별초 수군의 배가 날아다니듯 움직였다고 적혀 있다. 삼별초군은 이 물살을 이용해 고려군을 지휘하던 김방경의 기함을 해류가 거센 곳으로 몰아서 포위함으로써 거의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은 적도 있었다. 물론 김방경은 분전 끝에 무사히 빠져나오긴 했지만 조류를 이용하면 글자 그대로 공격 측을 관광보낼 수 있을 정도로 물살이 강했던 곳이 바로 울돌목이다.
- 기본적으로 난중일기를 보면, 명량 해전의 첫 단계부터 적선이 아군 선단을 둘러쌌음을 명시하고 있다. 만약 철쇄가 설치되어 제대로 효용을 발휘하고 있었다면 처음부터 이러한 상황이 벌어질 수가 없다. 그리고 상황이 철쇄설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여유롭지 않았음은 이미 위에서 서술하고 있는 바와 같다.
- 전투가 시작되던 시점에 일본군은 울돌목의 빠른 해류를 타고 있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일본군에게 불리하게 작용했을 수도 있다. 숫자가 적은 조선 수군은 별 지장 없이 전진과 후퇴가 가능하지만[31] 좁은 지형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수의 일본 수군으로서는 자연스럽게 축차투입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이 상황에서 빠른 물살은 말 그대로 '조선 수군을 밟고 가려'했던 일본 수군에게 쥐약이었던 것. 조선 수군으로서는 그저 쓸려내려가지 않기 위해서 애를 썼지만, 일본 수군은 깔대기 흐름에 사로잡혀 배의 속력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그저 다닥다닥 붙어서 쓸려 내려오기만 했던 것이다. 물살에 밀려 한 뭉텅이씩 우르르 내려오는 일본의
소형 보트세키부네들은 조선 수군에게 그저 밥이었던 것. 애초에 그러려고 선택한 명량 아니었던가.
- 하지만 말이 쉬울 뿐, 이렇게 싸운다고 해도 대장선(과 호위선단) 하나로는 몇 척의 전선도 상대하기 힘들었을 것이며, 혼자서 그것을 상대한다는 암담함을 난중일기에서 둘러싸였다고 묘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전투 중에 초요기를 올려 다른 전선들을 부르거나 다른 배에 있는 안위나 김응함에게 문책을 하는 묘사가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상황이 약간의 여유마저 없을 정도로 난감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본 수군의 투입과 투입 사이에 간격이 있었을 것이고, 상선이 적들을 상대하려고 한 마장이나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첨저형 전선의 구조상 단숨에 완벽하게 기동하여 대장선을 포위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기동을 방해할 뭔가가 있었다거나.
- 이렇게 보면 아무리 좁다 하더라도 수백 미터가 넘는 명량 해역에서 판옥선 혼자 적선을 상대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아울러 초장에 재빠르게 울돌목을 빠져나온 수 척의 일본군 전선을 시작으로 일본 수군들이 조선의 대장선에 걸려서 하나씩 개피를 본 셈이 된다. 비유하자면 러커가 자리잡고 있는 길목에 마린이 일렬로 다가가는 모습.[32]
5.5. 거북선의 등장? ¶
명량 해전 당시 거북선이 존재했다는 기록 중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있는 내용은 이순신의 행적을 조카 이분이 기록한 '이충무공 행록'에 등장하는 부분이다. 이 기록에선 회령포에서 이순신이 잔여 함대를 인수한 뒤, 장수들에게 전투선을 거북선 모양으로 꾸미도록 명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 외에 명량해전에 대한 일본의 기록 중엔 조선 수군의 전선이 모두 거북선이라서 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과장이 너무 심해서 신빙성이 없다.
5.6. 결론 ¶
6. 미디어 창작물 ¶
- 임진왜란의 전투 중에서도 대단히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 혈전이었으나 이 전투만을 소재로 한 창작물은 많지 않은 편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긴 거지?
- 2001년에 출간된 김경진, 안병도 공저의 역사전쟁소설 '격류'에서 명량해전의 전말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절판된 지 오래고, 대신 그 내용은 김경진, 안병도 공저의 '임진왜란'에 그대로 들어가 있다. 명량 해전에 시마즈 요시히로가 등장하는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묘사가 고증에 합치된다.
- 2005년에는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96회 전체를 명량해전의 묘사에 할애하였다. 다른 전투의 경우에는 한 회에 여러 전투들을 잇달아 묘사하거나 전투를 전후아여 다른 장면들을 집어넣는 데 반해, 순수하게 전투 묘사로만 한 회를 채운 것은 명량해전이 유일하다. 기존의 철쇄설을 답습하고 이순신이 직접 백병전을 치르는 등[33] 고증 오류가 많이 존재하기는 하나, 이순신 이하 전체 조선 수군이 마치 악귀로 변한 듯한 처절한 전투신[34]은 불멸의 이순신의 모든 회차 중에서도 상당히 훌륭하다.
조선 수군 전원은 사실 소드 마스터라 카더라처절함 이후 시작되는 조선 수군의 역관광 세리머니에서는 절로 희열을 느끼게 된다. 그와 대비되게 일본 수군 무장들이 '이럴 리가 없어!'라며 멘붕하는 장면이 나와서 당시 일본군이 맛봤을 절망을 조금이나마 간접체험하게 해준다.보러가기
- 영화 '천군'의 마지막 장면이 이 명량해전 직전 상황으로, 이순신이 병사들을 격려하면서 칼을 뽑는 간지나는 장면이 연출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때 나오는 음악은 그야말로 장관. 오오 황상민 오오
- 다나카 요시키의 소설 '은하영웅전설'에 등장하는 회랑의 전투나 마르 아데타 성역 회전이 명량 해전과 다소 흡사하다는 주장이 있다. 조류와 기타 장애물로 인해 함대 기동이 어려운 전장에서, 해당 함대가 진영의 마지막 전력이라는 점 등이 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 전투들은 명량 해전과는 달리 방어측에게 별다른 전술적 우위[35]가 없는 상황에서 전술적 우위가 아닌 전략적 행동을 통해 벌어졌으며, 후자의 경우에는 반대로 패전한 점 등이 너무 다르다. 이는 오히려 테르모필레 전투를 참고했다고 보아야 할 듯.
- 2014년 7월 30일 명량 해전을 다룬 영화 명량이 개봉했다. 감독은 최종병기 활의 김한민이 맡았고, 최민식이 이순신, 류승룡이 구루지마 미치후사를 연기한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 은하!의 작가가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 기념으로 올린 만화.# 명량해전 직전 조선 수군이 느꼈을 공포, 그리고 그 이상으로 조선 수군과 일본군 모두 공포에 떨게 만드는
최종보스이순신의 포스가 백미다. 용감무쌍하게 공격에 나섰다가 오체분시돼서 나무막대에 꽂힌 구루미자 미치후사와 이순신을 사람이 아닌 귀신 취급하며 재앙과는 싸울 수 없다며 제대로 멘붕한 일본군들이 처절하게 유린당하는 장면이 절정.
7. 기타 ¶
- 2012년 11월 29일에 울돌목 부근 해저에서 명량 해전 당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소소승자총통 3점과 대연자탄환이 발굴되었다. 소소승자총통은 구리로 만들어졌으며, 길이 57.8㎝에 무게 2㎏이다. 3점에 모두 "만력 무자년 4월에 전라좌수영에서 만든 소소승자총통. 무게는 세 근 아홉 냥. 장인 윤덕영."이라는 동일한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만력 무자년은 1588년으로 명량 해전에서 사용되었다는 추측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첫 발견은 도굴꾼이 했지만, 현재는 국립해양연구소가 후속 발굴 중이라 기대해 볼 만하다.
어느 것 같은 간지나는 문구는 없지만 역시 투박한 게 제일이다.
- 숙종 14년(1688)에는 이 해전을 기념하는 명량대첩비가 전라우수영 근처에 건립되었다. 위치는 현대의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일제강점기인 1942년에 철거되어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가, 광복 후 경복궁 근정전 근처에서 발견되어 1950년 해남으로 복원했다. 다만 이 복원이 완전하지는 않았는데, 원래 자리인 우수영 일대에 건물들이 들어서서 비석을 세우기가 곤란하자 근처의 충무사에 비석을 세운 것. 그러다 2011년에 다시 본래의 위치인 우수영 마을로 이전했다. # 이민서가 쓴 명량대첩비의 전문은 이충무공전서에도 수록되어 확인할 수 있다. #
- 명량 해전이 있던 정유년 9월 16일의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쓴 모든 일기 중에서 가장 길고 상세하게 쓴 일기다. 아마 이순신 장군 본인이 느끼기에도 이 하루가 평생 가장 긴박하고, 가장 길었던 시간이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 일본어 위키백과에서 기술한 명량 해전 문서는 꽤나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전술에선 졌지만 전략에선 이겼다는 것. #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위에서 이미 논술했으므로 생략한다.
- 영어판 위키피디아나, 여러 글에 구루지마가 임진왜란 중 전사한 유일한 다이묘라고 나오는데 사실이 아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선에서 매사냥 도중 조선군의 습격으로 전사했다고 알려진 나카가와 히데마사가 존재한다.
- 명량 해전의 패배로 제대로 분노한 일본군은 이를 보복하기 위해 이순신의 생가인 아산을 습격했다. 이때 이순신의 셋째 아들 이면은 이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이순신은 이를 상당히 애통해했다.[36]
- [1] 위 그림의 출처는 알 수 없으나 당대에 그려진 그림은 확실히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 명량해협의 폭은 484m로, 절대 판옥선 한 척으로 틀어막을 수 있을 정도로 좁지 않다. 물론 정유재란 당시 암초 등의 이유로 폭이 더 좁았을 가능성은 있으나, 최소 300여 미터의 폭만 되더라도 판옥선은 물론 일본 수군의 안택선 여러 척도 무리 없이 드나들 수 있는 넓이다. 명량해협이 망망대해보다야 좁은 건 당연하지만, 저 그림은 그런 지형적 특성을 심히 과장하고 있다는 것. 결정적으로 지명이 왼쪽->오른쪽으로 적혀 있다. 최소한 50년대 이후에 그린 것.
- [2] 비전투인원 및 사후선 포함 약 2200명 가량.
- [3] 현대 사가들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7만~30만 정도의 페르시아군이 동원되었다고 추정하며, 테르모필레의 그리스군이 몇 명인지는 애매하지만 대체로 최소 5천명 이상, 2만까지도 바라보고 있다. 뭐 병력이야 어쨌든 명량이나 테르모필레나 일본군과 크세르크세스가 각각 패배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완벽하게 동일하다?
- [4] 장졸이라고 하나 패잔병과 노병이 대부분이었다. 임진왜란 초부터 이순신을 따르던 정예수군들은 이순신이 재부임 했을 당시 칠천량 바다 아래에 있었다.
- [5] 이순신은 만성위염을 가지고 있었다.
- [6] 이때 교전을 어란포 해전이라고 부르며 백의종군 후 이순신의 첫번째 승전이었다.
- [7] 배설은 결국 1599년에 선산에서 잡혀 효수되었다. 별 다른 말 없이 한 줄 쓰여져있어서 평소 이순신은 배설을 준수하게 평가했고 도망간 데에도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경우도 있으나, 실제로는 그 전부터 배설에 대해 이순신이 안 좋게 봤던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명량해전 직전 거의 유일한 전력인 전선을 인계해주는 것도 미적거렸으며, 한 번은 이순신이 나왔을 때 타고 올 배도 주지 않는 등.
- [8] 조선 수군의 기본 전함인 판옥선은 일본 수군의 기함인 아타케부네(안택선)와 비슷한 크기였는데, 일본 수군에서는 아타케부네를 해상의 성(海上之城)이라고 부를 정도로 안택선이 거대한 전함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주 전투함인 세키부네는 아타케부네의 반 정도 크기였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고속정 13척이 대형 구축함 13척에게 시비를 건 셈.(...) 다만 일본군이 판옥선을 이토록 유리한 상황에서 공략해본 적이 없음은 감안할 만하다. 여기에 칠천량의 전훈이 있으니 13척이 꼭 오만이라 단언할 수는 없는 셈.
- [9] 이순신이 병법에서 인용한 말은 모두 오자병법에 나오는 말이지만, 오자에 나오는 경구과 이순신의 인용문은 차이가 있다. 오자병법의 원문은 치병(治兵)편의 '죽고자 하면 살고, 살기를 바라면 죽는다(必死則生 幸生則死)'와 여사(勵士)편의 '한 사람이 목숨을 걸면 천 사람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人投命 足懼千夫)'이다.
- [10] 미스테리한 점은 김억추는 이후 전황이 반전되어 조선 수군이 완벽하게 승리를 거두어 가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전투에 끼어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후에 김억추가 육군으로 보직 변경을 신청하여 옮겨간 걸 보면, 해전에 익숙하지 않아서 소극적으로 굴다가 전투가 끝날 때까지 쫄아서 못 움직였을 가능성도 높다(...).
- [11] 당시 안위는 수군 편제에도 속해 있지 않은, 단순한 고을 수령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순신의 명에 따라 가장 먼저 전투에 복귀한 공으로 일개 현감(종6품)에서 이순신의 추천을 받아 전라우수사(정3품)로 파격 승진한다.(현대로 치면 면장, 계장 급에서 관리관 급으로 승진) 하지만 김응함은 그대로 미조항 첨사에 머무르게 되었다.
말을 들었어야지(...) - [12] 마다시의 정체에 대해서는 마타시로(又四郞)라 불리던 간 마사카게라는 설과 구루지마 미치후사를 마다시로 보는 설이 있다.
- [13] 쵸소카베 모토치카의 부하인 노부시치로라고 적었는데, 누구인지 명확하게 확인되지는 않는다.
- [14] 구루지마 미치후사를 말한다.
- [15] 일본에서는 봉건체제에서 다이묘나 소묘의 중신(중요한 관직에 있는 신하)을 가로라 칭한다.
- [16] 실록에는 정응두로 오기
- [17] 실록에는 영등포만호로 오기
- [18] 노를 젓는 격꾼 및 사후선 및 탐망선의 인원을 포함하면 대략 2000여명 가량
- [19] 수부를 포함할 경우 약 8~9000여 명에 이른다.
- [20] 조정에서도 이미 '수군 폐지령'을 고려하고 있었으며, 칠전량에서 패배했던 수군 장수들 중에는 이순신 함대에 합류하지 않고 은둔해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적진을 향해서 돌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경우, 부하들은 그대로 도주해도 그렇게 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이순신도 이런 상황을 고려하여 비전투선들을 도주방지용으로 세워놓긴 했지만, 통상대감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시늉만 하다가 통제권을 이양받아서 퇴각하는 식으로 적당히 처리하고 도망치는 선택지도 충분히 나올만한 상황이다.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비록 그전까지 뒤로 물러서 있었더라도 부장 두 명이 이순신을 따라서 돌격하여 분위기를 반전시켰다는건 군율 이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애초에 이순신의 군율만이 이유였다면 그냥 왜군진영으로 가서 항복하거나 애초에 합류를 안 했겠지 - [21] 물론 세키부네가 소형 보트라고 할 정도로 작아빠진 것은 아니다. 당포 해전의 장계에서는 판옥선과 비슷한 크기의 대(大)세키부네도 확인되고 있다.
- [22] 다만 위 난중일기 기록에서도 나오듯 실제 명량 해전에서는 지자총통과 현자총통이 사용되었다. 천자총통은 너무 크고 화약을 많이 잡아먹는다는 지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난중일기 등에서는 1593년 이래로 천자총통에 대한 기록이 사라진다.
- [23] 일본 함선들의 높이가 조선 함선(판옥선)보다 현저하게 낮으므로 접현시 지자총통과 같은 대형화포는 하향사격을 해야 하는데, 이때 대포에 장전한 발사체가 흘러내릴 개연성이 높다. 유럽에서는 하향사격(Depressed Fire)을 할 때 이중 격목을 사용해서 포탄 등 발사체를 흘러내리지 않게 했지만, 현존하는 조선시대 화약무기 관련 문헌에서 이중 격목을 사용한 직접적 증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더구나 현재 학계의 연구처럼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사용한 포가의 형태가 동차라고 간주한다면 초단거리 하향 사격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포가의 앞부분이 높고, 뒷부분이 낮아 17도 이하의 사각을 선택하는 것이 구조상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 [24] 게다가 첨저형 선박은 구조상 제자리회전이 불가능하다. 거센 물살로 주위에 소선들이 어지러이 밀집된 상황에서 이런 선박이 기동하기란 아군을 짓밟는 팀킬을 하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 [25] 구경을 늘린 오오츠즈, 즉 대조총을 동원해도, 판옥선 선체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기엔 역부족이며 판옥선의 3층의 사부들을 보호하는 참나무 방패에 기별이라도 줘 볼 만 한 것이 당시 현실이다. 그리고 이점은 영화 명량에 충실히 반영되어, 이 영화에서 조총은 방패 틈 사이로 날아든 탄환 말고는 노 젓는 격군조차 못 죽이는 위엄(...)을 달성한다. 오죽하면 영화 내에서 총 맞아 죽은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 그런데 문제는 실제 이순신 기함의 전사자는 저것보다도 더 적었다는 것.
- [26] 전형적인 개인 행장록 특유의 '공훈을 과장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이 외에도 여러 선비들의 행장에 임란 당시 '장군님께 이러저러한 계책을 상신했다'느니, '활을 들고 함께 적을 섬멸했다'느니 하는 식의 글이 기록된 경우가 많다. 특히 행장이라는 것은 그 행장의 주인공이 죽은 후 다른 사람이 그를 찬양하고 기리기 위해 쓰는 글이니만큼 이런 식의 과장된 기록이 남는 건 당연한 일이다.
- [27] 김억추가 검풍을 휘날리자 왜선 수백여 척이 침몰하였다던가, 화살 한 발로 적장을 잡고 세 발로 전열을 무너뜨렸다던가, 막내동생 김응추가 10여 장을 뛰어올라 20여 급을 베었다던가.
때문에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김억추 이누야사설이 아주 유력하다. 철쇄란 철쇄아라고... 물론 믿으면 골룸. - [28] 1592년 1월 17일의 철쇄공석(鐵鎖孔石), 2월 2일의 철쇄횡설(鐵鎖橫設), 2월 9일의 철쇄관장목(鐵鎖貫長木), 3월 27일의 철쇄횡설.
- [29] 실제로 임진년 2월 13일에 이억기에게 쇠 50근을 보냈다는 기록을 난중일기에 남겼다.
- [30] 가장 아래에 표시된 역류(빨간색 화살표)가 그것이다.
- [31] 그래서 겁먹은 장수들이 죄다 달아날 뻔 했지만(...).
- [32] 그러나 난중일기 부분을 보면 중반부 이후에 안위와 김응함의 배 또한 적선을 향해 뛰어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만약 축차투입으로 인한 각개격파가 맞다면 초반은 둘째치고라도 후반부에 다른 전선들이 적선 무리로 뛰어드는 모습은 나오기 힘들 것이란 의문도 있다.
- [33] 특히 유명한 '일휘소탕 혈염산하' 문구가 새겨진 칼을 들고 싸우는데, 문구가 있는 실제 칼은 길이가 2m가 넘는 의장용 칼이다.
- [34] 병사들이 낫을 뽑아들고 달려드는 적들을 한 번도 아니고 두세 번 반복해서 찔러 죽이고 얼굴에 피가 확 튀는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잔인함 보다는 처철함을 배로 느끼게 된다.
- [35] 판옥선과 세키부네의 체급 차이, 일본 측 화기가 거의 무력화된 상황, 그런 상황에서 발휘된 조선 화포의 뛰어난 화력과 같은 것.
- [36]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 난중일기, 1597년 10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