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역사

명량해전

백삼/이한백 2014. 10. 18. 12:35

명량 해전

근대에 그려진 명량해전도[1]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必生則死 必死則生)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5일

지금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
전선은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戰船雖寡 微臣不死則 不敢侮我矣)
─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

최소한의 물리적 군사력으로 최고의 승리를 거둔 희대의 명승부. 뛰어난 지휘관과 군율을 통해 기술적 우수성이 어떻게 전황을 뒤집는지 여실히 보여준 드라마보다도 더 드라마틱한, 영화보다도 더 영화같은 전투. 그리고 누란지세의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하고 일본군의 칼날에 내 던져진 조선의 백성들을 구해낸 기적적인 전투.

짧게 요약하면, 어떻게 졌는지 이해가 안 되는 패배를 어떻게 이겼는지 이해가 안 되는 승리로 갚아준 전투다. 하지만 너무나도 기적과 같은 전투였기에 대중들에게 많은 왜곡된 사실로 알려진 전투이기도 하다.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패배하여 정유재란 내내 삼남에서 발이 묶인 채 한양까지 올라오지 못하는 결정타를 맞게 되었다.



명량해전
날짜
선조 30년 정유년 9월 16일
그레고리력 1597년 10월 25일
장소
전라남도 해남군과 진도군 사이 명량해협
(세칭 울돌목)
<:> 교전국 1 교전국 2
교전국 조선 왕국 쇼쿠호 일본
지휘관 이순신 
김응함 
조계종 
우수 
안위 
정응두 
김억추 
배흥립 
민정붕 
소계남 
송여종
도도 다카토라 
구루시마 미치후사† 
와키자카 야스하루 
하타 노부토키† 
간 마타시로 마사카게† 
모리 다카마사 
이하 미상
병력 8~900여명 가량[2] 
판옥선 13척 
초탐선 32척 
어선 100여 척
133척 이상 
전체 병력 불명
피해 규모 기함 사망자 2명 
부상자 수명 
전체 피해 불명
31척 격침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조선 수군의 결정적 승리 
조선 수군의 재집결. 일본군의 서해안 진출 무산
기타
이순신 장군이 치른 해전 중 가장 아군이 열세인 상황에서 벌인 해전
방어군이 극도로 열세였다는 점에서 테르모필레 전투와 비슷하지만, 테르모필레 전투는 결과적으로 방어에 실패하고 군대가 전멸했다. 하지만 명량 해전은 배를 한 척도 희생시키지 않고 적군을 막아냈으며 결과적으로 전쟁의 흐름 자체를 뒤집었다는 점에서 이 전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3]

생각보다 잘못 쓰는 사람이 많은데, 명량(梁) 해전이 올바른 표기다. 명랑(朗) 해전이 아니다. 리그베다 위키에서는 명랑 해전이라 검색해도 이 항목으로 리다이렉트되기는 하지만 이는 엄연히 잘못된 명칭이므로 잘 알아두자. 명량해협에서 명랑하게 왜군을 무찌르신 우리 장군님 명량의 순 우리말이 널리 알려진 울돌목인데, 명량은 그것을 그저 한문으로 번역한 것에 불과하다. 울 명자에 들보 량자를 썼다. 왜 들보 량자를 썼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는데 량자는 제방 등 좁은 수로를 표현하는 데에도 쓰인다. 그리고 진도 대교가 건설되면서 다리라는 뜻도 옳게 되었지만 그건 한참 후 대한민국의 일이고.

Contents

1. 배경
1.1. 칠천량 이후
1.2. 울돌목으로
2. 전개
2.1. 전투의 시작
2.2. 군법에 죽고 싶으냐
2.3. 기적 같은 승리
3. 결과
3.1. 조선 수군의 후퇴
3.2. 반전된 전황
4. 전과
4.1. 조선 수군 규모
4.2. 일본 수군 규모
5. 분석
5.1. 군율과 신뢰의 승리
5.2. 함선, 화기, 지리의 압도적 시너지
5.3. 피해를 받지 않는 일방적인 상황
5.4. 명량철쇄설
5.5. 거북선의 등장?
5.6. 결론
6. 미디어 창작물
7. 기타

1. 배경 

1.1. 칠천량 이후 

18일 정미, 맑다.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길 "16일 새벽에 수군이 대패했습니다. 통제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와 뭇 장수들이 다수 살해당했습니다."라고 하였다. 통곡을 이기지 못했다. 잠시 있으니 도원수가 와서 이르길 "사태가 이에 다다랐으니, 어찌할 수가 없소이다."라 하였는데, 대화가 사시(巳時)에 이르러도 대책을 정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뢰어 내가 해안으로 가서 보고 듣고서 정하겠다고 하니 도원수가 기뻐하였다. 내가 송대립, 유황, 윤선각, 방응원, 현응진, 임영립, 이원룡, 이희남, 홍우공과 함께 길을 떠나 삼가현에 다다르니, 수령이 새로 부임하여 나아와 기다렸다. 한치겸도 왔다.
─ 이순신, 『정유일기』 7월 18일.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은 궤멸되었다. 이 참담한 소식을 접한 선조는 어쩔 수 없이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켰지만, 정작 돌아온 이순신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휘하에 전함 한 척 없는 이름만 제독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절망하거나 좌절해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교서가 내려오기도 전에 행동을 개시했다. 수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그날로 이순신은 백의종군하며 머무르고 있던 초계를 박차고 나와 각지를 돌아다니며 흩어진 병사들을 모으고 군량과 무기들을 입수했다. 다행히 칠천량 해전 이후 곧바로 밀려들 것만 같았던 일본 수군이 남해안 약탈 등에 신경쓰다가 8월에는 해상 작전에서 철수한 때문에 시간도 어느 정도 생긴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하늘이 도운 셈이었으니, 이때 이순신의 행적은 난중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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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8일
칠천량 전투의 소식을 듣다. 도원수 권율과 대책을 의논하고 초계를 출발하여 삼가에 도착.

7월 19일
단성에서 숙박.

7월 20일
진주 굴동에서 이희만의 집에 숙박.

7월 21일
곤양을 지나 노량에 도착, 거제현령 안위 등 패잔병을 수습. 거제현 소속 배 위에서 숙박.

7월 22일
경상수사 배설이 합류. 곤양에서 숙박.

7월 23일
진주 굴동으로 돌아와 이희만의 집에 숙박. 배흥립이 합류.

7월 24일
이홍훈의 집에 숙박. 배경남이 합류.

7월 27일
손경례의 집에 숙박.

이후로도 한동안 진주 굴동에 머무르고 있던 이순신은 8월 3일 아침에 비로소 자신을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선조의 교서를 받든다. 조정에서 22일에야 칠천량 패전의 소식을 접하고 내린 교서가 비로소 도착한 것이었다. 선조실록에는 단지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경상·전라·충청 삼도통제사로, 권준을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삼았다는 짤막한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지만, 이충무공전서에 실려 있는 삼도통제사 복직교서의 내용은 이러하다.

왕은 이른다. 오호라! 국가가 의지하여 방패로 삼는 것은 오직 수군이거늘, 하늘이 재앙을 거두지 않으사 흉악한 칼날이 다시 번뜩여 마침내 삼도의 대군이 한 번 싸움에서 다하고 말았도다. 이후로 바다 가까운 성읍은 누가 지키겠는가? 이미 한산을 잃었으니 적이 무엇을 꺼리겠는가? …… 지난번에 경의 직책을 빼앗고 그대로 하여금 죄를 짊어지도록 한 것은 역시 과인의 모책이 미덥지 못함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무슨 말을 하리오. 무슨 말을 하리오. …… 그대는 충의로운 마음을 굳건히 하여 우리의 나라 건지길 바라는 소망에 부합하라. 고로 이 교지를 내리니 그대는 헤아려 알라.
─ 『이충무공전서』, 「상중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하는 교서(起復授三道統制使敎書)」

조선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이 실현된 국가에서 왕이 신하한테 저 정도 표현을 쓰는 것 자체가 파격적이다. 그만큼 국가 차원에서도 나라의 존망이 목전에 달린 급박한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없어봐야 아쉬운 줄 알지? 그리고 품계는 파직 이전보다 깎았다는 함정이 있지만이제 '수군 없는' 수군절도사 겸 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8월 3일
새벽에 복직교서가 도착. 권관 등 10여 명을 거느리고 진주 굴동에서 이홍훈의 집을 출발하여 종일 움직인 끝에 구례에 도착.

8월 4일
곡성에서 숙박.

8월 5일
옥과에 도착.

8월 6일
옥과에서 숙박. 송대립 등이 일본군을 정탐.

8월 7일
순천으로 가던 중 패잔병으로부터 말 3필과 약간의 활과 화살을 탈취(!). 곡성 강정에서 숙박.

8월 8일
순천에 들어가 달아나려는 수령들을 잡고 방치된 군기를 처리. 순천에서 숙박.

8월 9일
낙안을 거쳐 보성 조양창에 도착, 이 과정에서 순천부사 우치적이 합류. 김안도의 집에 숙박.

8월 11일
임란 초부터 보좌해왔던 송희립이 최대성과 함께 합류.

8월 13일
패전 직후 가족을 데리고 달아났던 경상우후 이몽구가 합류, 본영의 군기를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곤장을 침.

8월 14일
장계 일곱 통을 송부. 보성에 도착, 열선루에서 숙박.

8월 15일
교지가 도착. 보성의 군기를 처리.

8월 16일
보성군수와 군관 등을 보내 피난했던 관리들을 데려옴, 궁장인 지이와 태귀상 등이 들어왔고 김희방과 김붕만 등도 합류.

8월 18일
회령포에서 배설이 끌고 도망쳤던 전선 10척을 입수하여 그나마 수군의 구색을 갖춤.

그러나 여기에서 그나마 구색을 갖추었다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선조실록에 이때의 군함 수가 나오는데...

근래 또 배신(陪臣) 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보낸 장계에 의하면,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 전선과 무기가 흩어지고 사라져 거의 다하였습니다. 신은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김억추 등과 더불어 전선 13척, 초탐선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의 바닷길에서 요충지를 지키고 있었는데……"
─ 『선조실록』 권94, 30년 11월 정유(10일) 5번째 기사

모두 합쳐도 전선이 13척에 초탐선 32척이 전부였고, 이는 명량해전 당시에 동원했던 전선만 최소 133척에 이르던 일본군과 비교하면 대단히 안습한 숫자였다. 이순신이 거느린 수군이나 조정 내에서는 당장이라도 수백 척의 배가 들이닥칠 거라는 공포가 만연해 있었다. 누가 보기에도 당시의 조선 수군은 상황이 안습을 넘어서 처절한 수준이었다.

이런 가운데 조정 일각에서는 배도 없는데 수군 없애고 육군이랑 합치져?라는 의견이 나왔고 선조 또한 이런 의견에 동의하여 이순신을 육전으로 돌리려고까지 했다. 이 일은 선조실록과 난중일기에는 나오지 않고 행록에만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토록 전력비가 기울어져 있으니 조정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사실상 조선의 길을 버리는 엄청나게 멍청한 짓이다. 조선은 일부러 도로를 정비하지 않고 강을 길로 삼아서 물자와 인원을 유통시켰고, 실제로도 행주 대첩에서 적절한 순간에 한강을 통한 보급이 들어와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수군 폐지령은 13척의 배를 보존하고 수군의 전력을 육군에 편입시켜서 육군의 전력이라도 향상시키고자 의도한것도 아니었다. 병력이란 적절한 집중과 지휘체제가 있어야 의미를 가지는 법인데, 선조의 대변인 노릇을 열심히 한 윤두수는 칠천량 해전 직후에 있던 어전회의에서 통제사를 임명하지 말고 각지의 수사들이 고을 단위로 방어하게 하자는 정신나간 주장을 했는데, 이건 까놓고 말해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수임하기 싫으니 단일한 지휘관을 임관시키기를 포기하고 병력을 분산시켜 왜군의 병력에 각개격파 당하자는 소리나 다름없다.

임진년부터 5·6년 간 적이 감히 호서와 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 아직 열두 척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내어 막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

그러나 이순신은 위와 같이 아직 열두 척 캐리어전선이 있다는 패기가 흘러넘치는 명언으로 장계를 올리며 동요하는 여론을 잠재웠다. 이순신은 힘들더라도 제해권을 되찾아야만 반격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힘든 게 아니라 불가능한 수준인데? 이순신의 이런 뚝심은 정유재란의 흐름을 바꾸게 되었다.

1.2. 울돌목으로 

사흘 동안 회령포에 머무르면서 가까스로 수군과 전선을 수습한 이순신은 8월 20일에 그보다 조금 더 큰 이진포로 진을 옮겼다. 하지만 여전히 조선 수군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칠천량에서 겪은 패배로 장졸[4]들의 사기는 바닥을 치고,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이 임박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공포가 모두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이순신이 보기에 경상우수사 배설은 교서에 절하길 거부하는 등 공공연히 조정과 전쟁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었으며(제대로 싸우지도 않았지만PTSD 라는 주장도 있다), 전라우수사 김억추는 사람됨이 미덥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이순신 자신도 21일부터 토사곽란[5]으로 사흘 내내 몸져누워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다음날이 되자 다시 어란진으로 이동했고, 이곳에서 적이 왔다는 헛소문을 퍼트린 이들을 처형해서 통상대감의 군율이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27일 을유, 맑다.
배설이 와서 만났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수사는 어찌 피하려고만 하시오!"라고 하였다.
─ 이순신, 『정유일기』 7월 27일.

이처럼 터질 듯한 긴장감이 가득한 가운데 8월 28일, 드디어 일본군이 나타났다.

28일 병술, 맑다.
적선 8척이 생각지도 못하게 들어왔다. 뭇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는 피하여 물러나고자 하였다. 나는 동요하지 않고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몰아내도록 명하였다. 적선이 퇴각하자 추격하여 갈두(葛頭)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저녁에 진을 장도(獐島)로 옮겼다.
─ 이순신, 『정유일기』 7월 28일.

28일에 어란진에 나타난 일본군은 고작 8척의 수색대에 불과했지만 이미 겁을 잔뜩 집어먹은 조선 수군은 그저 무기력한 모습만을 보여줄 따름이었다. 수색대를 물리친후 [6] 이순신은 29일에 다시 벽파진으로 이동하여 이곳에 진을 치고 결전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9월 2일에는 마침내 고위 지휘관인 경상우수사 배설이 도주해버리는 사태까지 벌어졌고, 이순신은 이 일을 단지 '배설이 달아났다'고만 담담하게 적고 있다.[7]이렇게 이순신이 조선 수군을 재건해가며 싸울 준비를 하는 동안, 일본 수군은 전라도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서해를 거쳐 한양을 공격하자는 구상을 하게 된다. 일본 수군은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궤멸시킨 자신감으로, 이번 기회에 이순신을 무찌르고 전쟁에서 이기자는 생각이었다. 일본군의 장수들 사이에서는 그동안 당한 원한을 갚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객관적으로 봐도 12척으로 300여 척 이상을 갖춘 함대를 막아낸다는 것은, 항우가 살아 돌아와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고 당사자인 조선 수군과 조정에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일본 수군은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 수군은 9월이 되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9월 7일에 어란진으로 들어와 벽파진의 이순신과 대치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일본군 수뇌부는 이미 이순신에게 배가 13척 밖에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이를 조롱하듯 처음 13척의 배만을 보내서 벽파진에 주둔한 조선 수군에게 시비를 걸기도 했다. 칠천량 해전 이전까지 조선 수군의 판옥선이 한 번도 격침된 적이 없지만 수전에서 이토록 일본군이 유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시작한 것이 거의 최초임을 감안하면 일본군은 한 척의 대장선을 상대로는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 낙관한 것으로 보인다.[8] 참고로 배설이 도주한 이후의 난중일기 기록을 보면...

9월 3일 신묘, 비오다.

9월 4일 임진, 북풍이 세게 불다.

9월 5일 계사, 북풍이 세게 불다.

9월 6일 갑오, 바람은 잠시 잠잠하나 파도가 가라앉지 않다.

9월 7일 을미, 바람이 비로소 그쳤다.
탐망군관 임준형이 적선 55척 가운데 13척이 이미 어란진에 들어왔다고 보고. 미리 경계하고 있다가 신시(申時)에 적선 13척이 접근하자 구축, 이후로도 야습을 경계하다가 이경(二更)에 적선이 야습하자 뭇 배들이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 같아 다시 엄명을 내리고 대장선이 직접 선두에 나서서 적선을 구축.

9월 8일 병신, 맑다.
적선이 오지 않다. 장수들과 함께 계책을 논의.

9월 9일 정유, 맑다.
적선 두 척이 아군을 정탐. 영등포만호 조계종이 추격하나 놓침.

9월 10일 무술, 맑다.
적선들이 멀리 달아남.

9월 11일 기해, 흐리고 비오다.

9월 12일 경자, 비가 내리다.

9월 13일 신축, 맑다. 북풍이 세게 불다.

이런 상황으로, 맑은 날엔 계속해서 일본 수군이 시비를 걸고 있었다. 이어지는 14일에는 임준영의 보고가 들어왔는데, 일본군 200여 척 가운데 55척이 어란진에 입항했고, 일본군에게서 탈출한 포로가 전한 바에 따르면 일본군은 단숨에 이순신 함대를 격멸시킨 다음 서해를 따라 한강을 타고 올라가려는 대담한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고 한다! 만약 이게 실현되었다면 정유재란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다음날인 9월 15일, 전투가 임박했음을 안 이순신은 전투 준비를 서둘렀다. 오익창의 사호집에 의하면 이순신은 사대부들의 솜이불 백여 채를 걷어다가 물에 담가 적신 뒤 12척 배에 걸었는데, 왜군의 조총 탄환이 이것을 뚫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장기전을 예상해서인지 동아를 배에 가득 싣고 군사들이 목마를 때마다 먹였더니 갈증이 해소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렇게 조선 수군은 오랫동안 상대의 화력을 견디며 싸울 준비를 했고, 적은 수의 함선으로 울돌목을 등지고 싸울 수는 없다고 판단한 이순신은 진영을 울돌목 너머의 우수영으로 옮긴 뒤 장수들을 불러 모아 다음과 같이 다짐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했으며, 또한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그대들 뭇 장수들은 살려는 마음을 가지지 말라.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법으로 다스리리라!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5일[9]

이날 밤에는 이순신의 꿈에 신인이 나타나 이기는 방법과 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KBS에서 방송했던 한국사전에서는 밤에 이상한 징조도 많았다고 언급함. 주인공 보정

2. 전개 

2.1. 전투의 시작 

운명의 9월 16일 아침, 날씨는 맑았다. 이윽고 초병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왜선들이 접근해 온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이에 이순신은 기함까지 13척의 배를 이끌고 요격에 나섰다. 이것이 바로 명량 해전의 시작이었다. 이순신에 탄 배에서는 일기기록에서 "왜군 규모를 봐서 그것에 겁을 먹어서 얼굴빛이 많이 질렀다고 하였고 그들이 조심스레 부드럽게 타일렀다고 하였다."

9월 16일, 맑다.
이른 아침에 별망(別望)이 나아와 보고하길, "수없이 많은 적선들이 곧장 우리 배를 향해 옵니다."라 하였다. 바로 뭇 전선에 명하여 닻을 들고 바다로 나아가니, 적선 130여 척이 아군의 뭇 전선을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저마다 중과부적이라 판단해 돌아서 피할 궁리만 했고, 우수사 김억추는 물러나 아득히 멀리 있었다.
내가 노질을 재촉해 앞으로 돌격하며 지자포 현자포와 각종 총통들을 어지러이 쏘아대니 마치 바람과 번개 같았고, 군관들이 배 위에 서서 화살을 비처럼 어지러이 쏘아대니 적도들이 감히 대적하지 못하여 다가왔다가 물러나고는 했다. 그러나 몇 겹으로 포위되어 있어서 전세가 어찌 될 것인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6일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다른 인물들의 기록이나 여러 가지 정황을 보면 울돌목에서 전투가 일어났을 개연성이 크다. 지형이 좁고 조류가 거친 울돌목은 전장으로서는 최악의 환경이지만, 당시 절대적으로 열세인 조선군의 입장에서 그나마 유리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지형과 환경의 제약은 그 수가 많은 쪽에 더욱 불리하기 때문이다. 적선이 아군의 전선들을 몇 겹으로 에워쌌다는 난중일기의 표현으로 미루어 전투가 협소한 울돌목이 아니라 전라우수영 앞바다에서 일어났다는 주장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배들이 겁을 먹고 멀찌감치 물러나 있었음이 확인되므로 이는 전 함대가 아니라 이순신의 대장선과 그를 호위하던 초탐선들을 묶어서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2.2. 군법에 죽고 싶으냐 

이렇게 이순신이 탄 대장선과 그 함대가 가장 먼저 앞으로 나아가 적선을 막아서고 화포와 화살을 난사하며 분전했으나, 이미 적의 숫자와 거센 조류에 압도당한 다른 장수들은 여차하면 도망갈 생각부터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제 막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난중일기에는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특히 명량 해협이 한눈에 보이는 망금산에서 명량 해전을 지켜보는 백성들이 통곡을 하였고 이순신은 그 광경을 보고 부하 장수들에게 분노하였다.

뭇 장선(將船)들을 돌아보니, 물러나 먼 바다에서 관망하며 나아가지 않고 배를 돌리려 하고 있었다.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6일

전라우수사 김억추는 수 마장 뒤로 물러나서는 아예 전투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었으며,[10] 거제현령 안위, 녹도만호 송여종, 조방장 배흥립, 해남현감 류형, 가리포첨사 이응표 등 그간의 활동으로 보아 절대로 전투를 주저하지 않을 듯하던 역전의 용사들까지도 적에게 압도당한 나머지 후방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심지어 이때에는 조류마저 왜군에게 유리하게 흐르고 있었는데, 이민서가 쓴 명량대첩비문에서는 '때마침 밀물이라 파도가 거세고 적들이 상류로부터 밀물을 타고 덮쳐와서 그 기세가 산이 찍어누르는 듯했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이는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었다. 링크 그러니까 이순신은 홀로 울돌목의 미친 물살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압도적인 숫자의 적들을 막아서고 있었던 것이다. 통제공무쌍

이순신은 바로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 다른 장수들이 뒤에서 꽁무니를 빼는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이순신은 먼저 한 사람의 목을 베어서 매달고, 호각을 불며 초요기를 걸어서 중군장과 여러 전선들을 소집했다. 이에 1리허 밖에서 달아나려던 장수들이 슬금슬금 다가왔는데, 이순신은 배 위에 서서 가장 먼저 도착한 거제현령 안위의 배를 향해 외쳤다.

안위야, 싸우다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달아난다고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6일

이에 안위가 황급히 적진으로 돌입했고, 또한 이순신은 뒤이어 도착한 중군장 김응함에게도 다음과 같이 외쳤다. 김응함은 중군장으로서 대장선의 호위와 대장선의 전투 지휘 명령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하였으나, 그마저도 방기하고 후방에 물러나 있었으며 심지어 특별한 함대편제상 직책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안위보다도 늦게 대장선과 합류했으므로 그에 대한 이순신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11]

너는 중군이 되어서 멀리 피해만 있고 대장을 구하지 않았으니, 죄를 어찌 면하겠느냐! 당장이라도 처형하고 싶지만 적의 기세가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6일

안위와 김응함이 나서자, 차츰 잦아들어가는 밀물 위에서 명량해전은 난전으로 바뀌었다. 왜선 세 척이 안위의 배에 달라붙었고, 급기야 안위의 배 위에서 접전이 벌어져 안위의 안위가 위태로운 상황이 되자어? 이순신은 대장선을 이끌고 나아가 왜선 세 척을 내리 부수면서 안위를 구하기도 했다. 이후 마침내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대장 정응두를 필두로 다른 전선들도 합세하면서 비로소 지금까지 이순신 혼자서 이끌어오던 전세가 뒤집히기 시작한다. 이것이 또한 물살의 흐름이 조선군에 유리하도록 바뀌는 12시 즈음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위의 내용을 근거로 한 포스팅.

2.3. 기적 같은 승리 

어느새 난전으로 바뀐 전투의 와중에 일본군 측에서는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대장선이 격파되고 구루지마가 사망했다. 더욱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안골포에서 투항했던 항왜 준사가 과거 자신의 상관이었던 마다시(馬多時)[12]의 시체를 알아보았다. 이순신은 부하 김돌손을 시켜서 마다시의 시체를 건져냈고, 준사가 마다시의 얼굴을 보고 그가 맞다는 것을 확인하자 이순신은 그 시체를 토막내어 걸어서 일본군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수군을 총지휘하던 도도 다카토라는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조선 수군이 패망하는 것을 확인하라고 파견한 감독관 모리 다카마사는 물에 빠지는 촌극을 빚었다.

오후 1시 경, 완전히 조수가 바뀌어 물의 흐름이 역전되면서 조선 수군은 이를 타고 공세로 전환했다. 판옥선조차도 뒤로 밀릴 정도로 강한 물살과 조선군의 포격으로 전열이 무너진 일본 수군의 전함들은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본 수군은 이 과정에서 11척이 추가로 격침되었고, 결국 5시 경 일본 수군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퇴각함에 따라 전투는 종료되었다. 조선 수군 또한 전장을 수습한 뒤 당사도로 후퇴하였다.

적선 30척을 깨부수자 적선들이 물러나 도망치니, 다시는 아군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이는 실로 천행이었다.(此實天幸)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6일

3. 결과 

3.1. 조선 수군의 후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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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조선 수군도 보급 문제와 전력의 열세 때문에 서해로 물러나야만 했다. 조선 수군은 지속적으로 후퇴하여 9월 21일에는 고군산도(선유도)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명량 해전의 승첩을 알리는 장계를 써서 27일 조정으로 올려보냈다. 이에 따라 일본군도 서해로 북상하여 이 과정에서 간양록을 남긴 강항이 일본군에게 잡혔고, 일부 왜장이 배로 전북 부안까지 다다랐음을 기록에 남겼다.[13] 즉 엄밀히 말해 일본군이 서해로 진입하는 데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목표를 놓고 보았을 때 일본 수군은 서해안으로 세력을 확장하거나 서해안에 상륙하여 육군과의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 당초 일본군의 목표였던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을 격퇴하는 위업을 이루면서 멀쩡하게 남아 있었고, 이 둘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일본 수군은 서해안으로의 실질적인 진출 기대를 접어야만 했던 것이다.

일본 함대는 명량에서 '20% 이상'이 손실되었고, 이는 전투력 측면에서 실질적으로 '전멸'에 가까운 치명적인 상황이다. 게다가 이순신 함대는 손실이 전혀 없고 오히려 승전으로 자신감을 얻었으며, 후퇴하기는 했으나 충분히 요격전을 벌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후퇴라기 보다는 차라리 기동방어를 펼칠 공간을 마련한 것에 가깝다.

더 이상 서해로 북상한다면 다시 이순신 함대가 공격해왔을 때 그나마 남은 일본 함대 전력 조차도 문자 그대로 궤멸당할 것은 자명하다. 명량의 승리가 지형의 영향이 크다고는 판단되지만, 서해 역시 해안선이 복잡하고 조수간만의 차이가 커서 요격전을 펼치기에 적당한 시기를 충분히 잡을 수 있다. 그리고 전력이 최소 70% 정도로 떨어진 상황에서, 이전에 이미 100%의 전력을 동원하고도 이기지 못한 적과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발상은 설사 일본 장수들이 돌대가리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한려수도 구경을 하고 돌아간 걸로 만족한 것이 당시 상황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다.

일본 수군이 육군과의 공동 작전을 펴기 위해서는 최소한 수군이 독립적으로 금강 하구, 가능하다면 한강 하구까지 진출했어야 했는데 이것에 실패하였으므로 사실상 일본 수군은 서해안으로 진출하지 못한 것과 별로 다를 게 없는 결과였다.

또한 이때의 전투 결과로 숨어있던 수군 장수들이 병력과 전선들을 이끌고 다시 이순신과 합류한다. 칠천량 해전 이전만큼의 군세를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조선 수군의 부활을 알린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임진년의 침공이 한산도 대첩으로 막힌 것과 마찬가지로, 정유년의 일본군도 명량 해전으로 인해서 수륙병진 작전에 발목이 잡혔다.

3.2. 반전된 전황 

일본에서는 명량 해전이 전쟁의 전체적인 국면에 영향을 주지 못한 국지적인 전투라고 주장한다. 일본 수군이 서해에 진입했고 이순신이 이를 피해 북쪽으로 퇴각했으므로 명량 해전은 전술적인 작은 패배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9월부터 시작되는 일본군의 후퇴 이유도 단순히 월동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위 항목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일본군은 한양까지 치고 올라가겠다는 당초의 작전계획을 이 패배로 전면 수정해야만 했다. 또한 일본군이 물러난 것도 한겨울에 계속 밀려가는 양상이었음이 조선과 일본 양측의 개인 기록들에서 확인된다.

실제로 이 시기의 조선 조정은 적이 직산까지 다다랐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한강을 방어선으로 삼으려 하고 있었고, 한양의 주민들은 모조리 피난을 떠난 상황이었다. 일본 측 종군승이던 케이넨의 일기에도 한양을 치기 위한 회의를 했다거나 한양으로 가는 길이 즐겁다는 말이 나온다. 일본군이 실질적으로 한양을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9월 10일 안성을 거쳐 죽산까지 북상했던 일본군은 명량해전 직전에 돌연 남쪽으로 철수하는데, 케이넨의 일기에 의하면 이는 '항구'로 가기 위한 것이었다. 즉 당시 일본군의 후퇴에는 해상으로의 보급이라는 이유가 있었고, 보급만 잘 된다면 한양을 노릴 수 있는 전력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보급 계획이 명량해전으로 박살난 것이다.
이런 걸 보면 명량 해전의 진정한 전략적 의미는 왜군의 한양 점령을 막았다는 것 보다는, 아예 일본군이 삼남을 지배하겠다는 기본 전략 자체를 무산시켜버린 좀 더 근원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일본군의 입장이 단순히 월동 차원에서 철수할 정도로 여유로운 것이었다면, 일본군은 굳이 한겨울에 고생해가면서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쌓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국지적인 전투라기에는 일본 수군의 피해 규모가 상당히 큰 것도 사실이다. 전쟁은 전황에 일정한 영향을 끼칠 때 비로소 전략적 목표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일본 수군은 전략적 목표가 아무 것도 없다.

애초에, 명량해전에서 이순신과 조선수군을 끝장내고 충청도에 상륙했으면 임진왜란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현실적으로 조선 전체를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최소한 명나라와의 교섭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순신을 처치하지도 못하고, 조선 수군을 격파하지도 못하고, 서해안에 진출하지도 못한 명량 해전은 전술적인 측면과 전략적인 측면 모두에서 완벽한 일본군의 패배였다.

4. 전과 

내 배에서는 순천감목관 김탁과 본영의 종 계생이 총알에 맞아 죽었다. 박영남, 봉학과 강진현감 이극신도 총알에 맞았으나 중상을 입지는 않았다.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8일

놀랍게도 난중일기에 조선 수군의 피해는 대장선에서 사망자 2명, 부상자 3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것이 전체 피해자인지, 아니면 대장선의 피해자만을 기록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대장선만의 피해로 보더라도 대단한 전과인데, 전투 중반까지 대장선 혼자서 두세 시간을 싸웠는데도 이런 결과라면 일방적인 학살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이외에도 실제로 접전이 벌어진 안위의 배에서는 사상자가 다수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난중일기에는 격군 5~6명이 물에 뛰어들었다고 하는데, 울돌목의 거센 물살로 보아 사실상 사망.(...)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이날 적선 30척을 부수었다고 하였고, 조정에 올린 장계에서는 전투 전반부에 20척, 후반부에 11척을 각각 격침시켰다고 썼다. 일반적으로는 일본 수군의 피해는 이렇게 단순히 31척으로 알려져 있다. 실록에도 '적선 31척을 격침하고 수급 8개를 취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명확하게 확인된 전과만 적은 것이고, 다른 사료들을 종합해보면 실제 전과는 더 컸을 가능성이 크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에서는 '패배하여 도망치는 적병의 뒤를 쫒아 목을 베어 죽인 것이 수백여 급이며, 무사히 탈출한 적선이 겨우 10여척 뿐이었고, 아군의 배는 모두 무사하였다'고 적고 있다. 연려실기술에서도 '적의 배는 겨우 10여척이 도망쳤을 뿐이고 우리 배는 모두 무탈하였다'라고 기록했다. 10여척만이 도망친 것은 다소 과장의 여지가 있을 수는 있으나 그만큼 일본측의 피해가 컸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결정적으로 이는 당시 일본 수군의 피해 상황에 대하여, 일본 군에게 사로잡혀 명량해전까지 종군한 조선인 포로의 증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진해(鎭海)에 사는 정병(正兵) 전풍상(全風上)이 왜적의 진중에서 도망해 와서 아뢰었다. 저는 지난 임진년 8월 산골로 피란했다가 왜적에게 잡혔는데 왜장 산도(山道)의 진중에 소속되어 안골포(安骨浦)에 한달 남짓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산도를 따라 바다를 건너 일본의 국도(國都)에서 동쪽으로 하룻길인 진역군리(鎭域軍里)에 도착했는데 진역군리는 바로 산도가 다스리는 고을이었습니다. 또 산도에게 딸린 부장(副將) 우다능기(尤多凌其)의 종이 되어 복역하면서 이따금 문서(文書)를 선소(船所)에 송달하기도 했는데 대체로 우다능기는 바로 산도가 관할하는 전선(戰船)의 장수였습니다. 선척의 숫자는 1백 20여 척으로 지난해 6월 산도가 재차 자기 소속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부산포(釜山浦)에 정박하였고, 7월 사이에는 한산도(閑山島)에서 접전한 뒤에 하동(河東) 앞 포구에서 하륙(下陸)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구례(求禮) 지방을 거쳐 남원(南原)을 함락시키고 전주(全州)에 도착했다가 즉시 하동으로 돌아왔는데 대개 갔다가 돌아온 기간이 20여 일이었습니다. 또 하동에서 열흘 간 머문 뒤에 산도(山道)가 선척을 다 거느리고 수로(水路)를 따라 순천(順天)·흥양(興陽)을 거쳐 우수영(右水營) 앞바다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통제사(統制使)와 접전을 하여 왜적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습니다. 그리하여 무안(務安) 지방으로 후퇴하여 정박하면서 날마다 분탕질을 한 뒤에 다시 순천으로 들어와서 왜교(倭橋)에다 성을 쌓고 주난궁(走難宮)에게 지키도록 한 다음 산도는 즉시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우다능기를 따라 광양(光陽) 지방의 장도(獐島)에 옮겨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또 우다능기가 일본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기별을 듣고 고향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밤을 타서 도망와 현감(縣監)에게 자수(自首)해 온 것입니다.” 
ㅡ 『선조실록』 97권. 선조 31년. 명 만력 26년 (1598년) 2월 11일 -

선조 실록 선조 31년 2월 11일의 기사에는 정유년에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이듬해 탈출한 전풍상의 증언이 실려 있다. 이 증언에 의하면 전풍상은 산도라는 일본 무장의 부장인 우다능기의 종으로 생활했는데, 산도는 정유년 6월 적선 120여척을 이끌고 부산에 상륙하여 칠천량 해전과 남원성 전투에 참전했고, 9월에는 휘하 전선들을 이끌고 명량해전에 참가했다. 여기서 전풍상은 '거기서 통제사와 접전을 하여 왜적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의 반이 산도라는 무장의 부하 중 반인지, 전체 일본군의 반인지는 불확실하다. 산도의 배가 120여척이라고 해도 이것은 전투선만이 아니라 사후선을 포함한 비전투선을 합한 수치일 수도 있다. 산도가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실록의 해당 기사만으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명량에서 죽지는 않았으니 구루지마 미치후사일 리는 없고, 일본의 한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로서 120척의 함대를 이끌었으니 구루지마 미치후사 휘하의 장수일 리도 없다.

강항의 간양록에도 칠천량 해전과 명량해전을 직접 목격한 조선인 포로의 기록이 나온다. 그 포로가 증언하기를, '왜장 여럿이 서해를 따라 올라가 우수영으로 향했는데, 이순신이 전선 10여척을 이끌고 용맹하게 싸워 승리했다. 왜장 내도수[14]가 죽고, 민부대부는 바다에 떨어져 간신히 목숨을 구했으며, 그 나머지 휘하 장수들도 죽은 사람이 여럿이었다'라고 했다. 강항은 정유년에 쳐들어온 왜장들의 명단을 보면 진도까지 왔다가 배에서 사망한 자가 있다고 했으니, 그의 증언으로도 구루지마 휘하 병력 이외에도 일본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일본군 총대장인 도도 다카도라의 기록인 고산공실록을 살펴보자.

선수의 배들은 적선에 노 젓는 사공이 너무 많다. 그 중에 구루지마 장군도 앉은 채로 전사해 있다. 그밖에 선수(船手)와 가로(家老)[15]의 과반수가 사망했다. 모리 장군은 세키부네(関船)에서 경비선으로 옮겨 탔다. (적은) 경비선에 열십자의 낫을 걸고 활과 철포를 마구 쏘아대며 먼 바다로 몰았다. 위험한 상황에서 두명의 도도장군이 이끄는 배로 적선을 쫒아내고 목숨을 구했다. ...(생략)... 도도장군도 손에 두 군데 부상당했다.
ㅡ 『고산공실록(高山公實錄)』

일본군 총대장인 도도 다카도라의 기록인 고산공실록도 명량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선수와 가로의 과반수가 사망했다고 적고 있다. 참고로 히데요시를 대리하는 군감인 모리 다카마사까지 물에 빠졌다가 구출되었다는 것을 보면 후방에서 보호받아야 할 인물들까지 위험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감이 선봉에 나서는 군대도 있는가? 임란 시기 일본의 군감은 정치 장교가 아니다(...).

따라서 격침을 확실하게 확인한 적선의 수만 31척이고, 명량해전의 패배로 인한 일본군의 전체 손실은 그 이상으로 컸다고 봐야 한다. 완침은 면했다고 하더라도 승선 인원이 대거 몰살 당하거나 큰 부상을 당하여 전투 불능에 빠진 선박이 많았을 것이다. 명량 이후 조선 수군이 전력을 재건하는 동안 일본 수군이 정면으로 조선 수군에 대응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따져보면 더욱 그러하다.

근래 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치계하길, "한산도에서 패배한 이래로 병선과 무기가 흩어져서 거의 사라졌는데, 신이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김억추 등과 전선 13척, 초탐선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의 바닷길에서 길목을 지키고 있자니 전선 130여 척이 이진포 앞바다로 들어왔습니다. 신이 수사 김억추, 조방장 배흥립, 거제현령 안위 등을 거느리고 각기 병선을 정돈하여 진도 벽파정 앞바다에서 적과 교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웠는데, 대포로 적선 20여 척을 깨부수고 쏘아 죽인 것이 매우 많아 적들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고 머리를 벤 것도 8급이었습니다. 적선 가운데 큰 배 1척이 있어서 우보(羽葆)와 홍기(紅旗)를 세우고 푸른 비단 장막을 둘렀으며, 적들을 지휘하여 아군 전선을 에워싸므로 녹도만호 송여종과 영등포만호 정응두가 잇따라 와서 힘껏 싸워 또 적선 11척을 격파하자 적이 크게 꺾이어 남은 적들이 멀리 물러났습니다. 진중의 항왜가 홍기를 단 적선을 가리켜 안골포의 적장 마다시라고 하였습니다. 획득한 적의 물건은 화문의(畫文衣), 금의(錦衣), 칠함(漆函), 칠목기(漆木器), 장창(長槍) 두 자루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소방(小邦)의 수군이 다행히 작은 승리를 거두어서 적의 예봉을 조금 꺾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적선이 서해에는 진입하지 못할 것입니다. ㅡ 『선조실록』 94권, 30년 11월 10일 5번째 기사

선조가 명나라 측에 명량해전의 소식을 알릴 때의 기사이다. 선조의 작태가 잘 드러난다. 분명히 명량해전을 두고 '작은 승리'를 거두어서 적의 예봉이 '조금' 꺾였다고 하면서도, 뒤이어서는 적선이 서해에 진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실히 말하는, 앞뒤가 안 맞는 언행을 보여준다. 뭐, 이 발언 자체는 꼴에 예의 차린다고 겸양하는 걸로도 볼 수 있지만,자기 공도 아닌데 뭘 멋대로 겸양하냐 이 시기 선조는 명의 장수들을 찾아다니며 이순신의 명량해전의 전과를 폄하하고 다니기 바빴다. 오히려 명의 경리 양호가 선조를 타이르고 이순신은 뛰어난 장수라고 이야기 하며, 선조에게 명량해전 이듬해까지 이순신의 품계를 올려주라고 끈질기게 압박하여, 이전의 정2품 정헌대부의 품계를 되찾게 도와주기도 한다.


4.1. 조선 수군 규모 


기본적으로 선조실록과 충무공의 일기, 그리고 행장에 근거한다.

  • 삼도수군통제영
    •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 - 전선 1척 (일기/선조실록)
  • 전라좌도수영
    •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임)
    • 조방장 배흥립(裵興立) - 전선 1척 (실록)
    • 회령포만호 민정붕 - 전선 1척 (일기)
    • 발포만호 소계남(蘇季男) - 전선 1척 (일기)
    • 녹도만호 송여종(宋汝悰) - 전선 1척 (선조실록)
  • 경상우도수영
    •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배설은 회전 직전 도주.
    • 미조항첨사 중군장 김응함(金應諴) - 전선 1척 (일기)
    • 영등포만호 척후장 조계종(趙繼宗) - 전선 1척 (일기/선조실록[16])
    • 안골포만호 우수(禹壽) - 전선 1척 (일기)
    • 거제현령 안위(安衛) - 전선 1척 (일기/선조실록)
    • 평산포대장 정응두(丁應斗) - 전선 1척 (일기/선조실록[17])
  • 전라우도수영
    •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김억추(金億秋) - 전선 1척 (일기/선조실록)
    • 가리포첨사 이응표(李應彪) - 전선 1척 (선조실록)
    • 해남현감 류형(柳珩) - 전선 1척 (일기/행장)
장수 및 일반 병졸 총합 900여명 가량[18]

4.2. 일본 수군 규모 

조선역진법표에 기재된 일본 수군의 규모에 따른다.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간 미치나가는 참전이 불확실하다. 다만 간 미치나가의 아들 간 마사카게가 이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보아, 간 미치나가 본인의 참전 여부와는 별개로 그 군대는 참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 이요 국
    이요 국 우와지마 번 8만 3천 석 다이묘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 2800명
    이요 국 마쓰마에 번 10만 석 다이묘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 2400명
    이요 국 무라카미 씨 1만 4천 석 당주 구루지마 미치후사(来島通総) - 600명
    이요 국 무라카미 씨 소속 하타 노부토키(波多信時)
  • 아와지 국
    아와지 국 스모토 번 3만 3천 석 다이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 1200명
    아와지 국 이와야지 번 1만 석 다이묘 간 헤이에몬 미치나가(菅平右衛門達長) - 250명
    아와지 국 이와야지 번 소속 간 마타시로 마사카게(菅又四郞正陰)
  • 메츠케
    분고 국 사이키 번 다이묘 모리 다카마사(毛利高政)

    총합 전선 133/200여 척, 수군 3650/7250여 명
전투에 참가한 일본군의 전선 수는 조선왕조실록에 130여 척, 징비록에 200여 척, 이분의 행록에 333척으로 각각 다르다.

일단 이순신의 난중일기 초판본에는 전투 초반에 적선 133척이 아군을 에워쌌다고 되어 있어 최소한 전체 수와는 별개로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함선은 133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도도 다카토라의 다카야마공 실록(高山公實錄)에는 명량에 돌입한 배들이 세키부네나 고바야로 구성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를 근거로 아주 대략적으로 추산해보면 세키부네의 전투원은 30여 명(수부 포함 약 6~70), 고바야의 전투원은 10여 명(수부 포함 약 30)이므로 한 척당 전투원 약 25명이 탑승했다고 치면 130여 척은 이 가운데 참전이 확실한 도도 다카도라, 구루지마 미치후사, 간 헤이에몬 미치나가의 수군 3600명에 대응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19] 마찬가지로 300여 척은 여기에 가토 요시아키와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포함한 수군 7200명에 대응하는 것이니, 얼추 비슷하다. 다만 이 계산은 어디까지나 근거가 되는 조선역진법표가 비전투원을 집계하지 않았다고 가정할 때의 이야기이고, 수부가 포함된 집계라면 오히려 가토와 와키자카를 포함한 7250명 수준이 되어야 133척을 구성할 수 있다.

더욱이 조선역진법표는 하치스카 이에마사 같은 육군 다이묘들의 함대도 계산한 것이 아니라 편제상 수군인 다이묘들만 따진 것이기 때문에 병력 상한선이라고 보기도 어려운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일본은 총사령관의 병력을 작전에 나서는 예하 지휘관에게 요리키(與力)로 충원시키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요리키를 무시하고 이런 식으로 해전 참가 병력을 계산한다면 한산도 대첩에 참가한 일본군은 고작 와키자카의 수군 1500명만이 된다. 더욱이 가토 요시아키와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전투에 불참했는지도 확실하지는 않기에 이 문제는 더욱 심화된다. 마찬가지로 개연성은 있다 할지언정, 하치스카 이에마사 함대의 참전도 단언할 수는 없다.

즉 조선역진법표에 명시된 저 병력이 수부나 짐꾼이 포함된 것인지 순수 전투원인지, 명량해전에 모두 참전했는지 일부만 참전했는지, 하치스카 함대와 같은 육군 함대가 추가로 참전했는지 확실히 알지 못하는 이상 이것으로 교차검증이 완료되었다고 단정하는 논리는 전제와 가정 위에 선 사상누각일 뿐이다. 일단 기록상으로 참전이 확인되는 무장은 도도 다카도라, 구루지마 미치후사, 간 마타시로 마사카게이며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같은 무장은 이후 모리 가문 문서에서 이름 확인이 가능하지만 이들이 직접적으로 참전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어란진에 들어온 배가 200여 척인데 명량 해전에 참전한 배는 133척이므로, 이들은 그대로 어란진에 주둔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결론적으로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맞닥뜨린 함선의 수는 알 수 없으며, 참전 병력의 수는 더더욱 알 수 없다. 다만 교전을 개시한 함선의 숫자가 133척이라는 것은 이순신이 직접 쓴 난중일기에 나오므로 거의 확실하다 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강항이 마주한 5~600척의 배가 전투선이 아니라 수송용 변재선(弁才船)에 불과하다고도 하지만, 모든배가 수송용 변재선이라는 것도 아니고 이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물론 이 600척 모두가 전투선은 아니었을 것이다.

5. 분석 

5.1. 군율과 신뢰의 승리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법으로 다스리리라!(小有違令 卽當軍律)
─ 명량 해전을 앞두고

그야말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말을 그대로 실천한 전투이며, 이순신이 무엇 때문에 엄격한 군율을 강조했는지 보여주는 전투였다.

위에서도 나왔지만, 12척의 전함을 이끌던 장수들은 이순신이 타고 있던 대장선을 버려두고 후방으로 물러나 있었다. 이들이 나중에 갑작스럽게 돌격하면서 전황이 확 바뀌었던 것도 일본 수군의 퇴각의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전투 개시 이후에도 쫄아서 움직이지 않던 안위와 김응함이 단지 초요기가 올라왔다는 이유로 죽을 수도 있는 자리로 나아간 이유는 명백하다. 일본군과 싸우면 살아남을 수도 있지만, 통상대감을 거스르면 살아남는다는 선택지 자체가 없다.(...) 즉 평소의 엄격, 엄정한 신상필벌에 따른 군기의 시행이 위급한 때에 얼마나 적절한 효과를 불러일으키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명량의 전훈을 엄격한 군율로만 보고 곡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이순신 본인에 대한 신뢰감이야말로 그가 실질적으로 부하들을 통제하는 데 성공한 요인이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순신이 평소 권위를 이용해서 사익을 챙기거나, 승리를 위해 희생을 강요하거나, 부하들을 도구로 여기거나, 편의에 따라 원칙을 곡해하는 상관이었다면 그가 이처럼 도박과도 같은 무모한 승부수를 띄웠을 때 부하들은 '일본군에게 죽으나 이순신에게 죽으나 마찬가지'라 생각하고 기꺼이 그를 버리고 달아났을 것이다.[20]또한 원균과 대비되는 존재로서 이순신이 담지하고 있던 희망이라는 상징성도 무시할 수 없다. 사실 이게 원균의 유일한 업적이다

그러므로 고위 지휘관이 탈영할 정도로 사기가 바닥을 친 조선 수군을 단결시키고, 마침내 그들을 기적으로 이끈 이순신의 리더십을 단지 엄격한 군율만으로 보는 것은 분명한 오독이다. 유명한 한신의 배수진도 그저 아군을 사지에 몰아넣은 것이 아니라, 동시에 아군의 별동대가 적의 배후에서 적의 본진을 빈집털이할 것이라는 복안과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승리였던 것처럼 말이다. 마음은 필사(必死)에, 몸은 필생(必生)에 둔다는 것은 용병의 기본이며, 이순신은 그가 치루었던 모든 전투에서 그 누구보다도 이 전훈을 뚜렷이 실천한 전략가였다.

그렇다면 명량에서 이순신은 무엇을 가지고 몸을 필생지지(必生之地)에 두었는가? 다시 말해 이 승리에 대한 이순신의 실재적, 물리적 복안은 무엇이었던가?

5.2. 함선, 화기, 지리의 압도적 시너지 

워낙 사기적인 승리라서 다양한 설이 많지만, 그냥 조선 수군의 우위가 환상적이었다고 요약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위에서 언급한 다카야마공 실록에 따르면 일본군이 전투에 투입한 함선은 해협의 크기 때문인지 대부분 세키부네(80)나 그 이하의 고바야 급(30)이었는데, 이에 반해 조선 수군의 기본 전함인 판옥선(130)은 해상의 성이라 불리던 아타케부네(290)와 비슷한 크기였으니 조선군이 가뜩이나 격류인 울돌목에서 질적 우위를 담보하고 전투를 펼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판옥선의 구조 자체가 철저하게 한 가지 기능, 즉 연안에서 화포를 쏘기 위한 장벽으로 사용하려는 목적만을 위해서 설계된 구조였다. 애당초 물목에서 통행세를 걷기 위해 치고 빠지는 전략을 목적으로 설계된 일본군의 세키부네보다 몇 배는 더 튼튼할 수밖에 없다.[21] 즉 일본군이 자신들의 함선보다 월등히 큰 조선의 판옥선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난데없이 바다 위에서 공성전을 치러야만 했던 것이다.

더불어 천자총통과 승자총통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조선의 화포들은 매우 강력한 무기였다. 천자총통[22]은 격목 위에 백여 개의 조란환(산탄용 쇠구슬)을 넣고 다수의 적들에게 뿌려대거나, 혹은 대장군전을 쏴서 적선을 격침시키는 용도였다. 비뢰포를 사면 대함 미사일을 드려요! 당시부터 이미 저평가되고 있던 승자총통마저도 장대에 달아서 조란환을 쏘는 구조 덕분에 방어전에서 아군에게로 다가오는 적들에게 상당한 성능을 발휘했을 것이다. 샷건 겸 모닝스타(...) 다만 이러한 화포들은 접현이 이루어진 초근접전에서는 그 활용이 제약되었을 것이나[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 미터 밖에서 다가오는 적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기 충분했다.스타크래프트 공성전차

더불어 결정적으로 울돌목은 해류가 바뀔 때 갈매기도 앉지 못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물살이 거센 곳이라는 사실도 작용한다. 이런 곳에다 세키부네급 이하의 배를 몰아넣어 보았지만 자신들의 속도를 이기지 못해 떠내려가면서 자기들끼리 부딪쳐서 타격을 입거나, 튼튼한 판옥선에 들이박아 자기가 박살나거나, 혹은 조선군 화포의 좋은 표적이 되거나 할 따름이다. 대장선을 피했다 해도 저 뒤에 12척이나 더 있다. 운 좋게 판옥선에 접현했다 할지라도 그들을 기다리는 건 머리 위에서 빗발치듯 쏟아붓는 화살 따위의 투사무기다(...). 그럼에도 안위의 배에 일본군 전함이 세 척이나 달라붙어서는 뱃전을 아득바득 개미떼처럼 기어올라 백병전을 치렀다는 사실을 보면 그 근성 하나만큼은 인정해 주어야 할지도... 게다가 전투 후반에는 화포와 역물살로 일순간에 역습을 당했다.

크기상 판옥선의 대항마라고 할 만한 아타케부네는 애당초 주로 대장선으로 사용되었지 전력상으로 의미를 가질만큼 수효가 충분하지는 않았으며, 다카야마공 실록에는 좁은 해협을 보고 아예 편성하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다만 이순신이 장계에서 붉은 깃발과 푸른 휘장을 두른 대선을 격파했다고 하고, 총대장인 도도 다카도라가 화살에 맞은 것으로 보아 전투 후반에 적진을 헤집던 판옥선들이 후방에 있던 어립선에 당도하여 직접적으로 교전에 휘말리는 상황이 벌어졌을 수는 있다. 이 경우에는 운신이 어려운 좁은 지형[24]에서 한두 척만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고 있으니 대함 미사일 격인 대장군전의 효용성을 검증하기 딱 좋은 표적이었을 것이다.

솔직히 여기까지읽으면 판옥선은 사기적인 그것과 같은데 칠전량에서는 이 좋은거 많이 가지고 왜 개발살이 났죠

5.3. 피해를 받지 않는 일방적인 상황 

Power Overwhelming 그래도 쉴드는 닳았다 카더라

명량 해전의 전황을 상세히 기록한 오익창의 사호집(沙湖集)에 의하면, 이순신이 왜군과 싸울 때 사대부들의 솜이불 백여 채를 걷어다가 물에 담가 적신 뒤 12척 배에 걸었더니 왜군의 조총이 그것을 뚫지 못했다고 한다. 왠지 조선 후기에 개발되는 면제배갑이 떠오르는 장면이긴 한데, 솜이불을 뱃전에 걸어봐야 어차피 조총에서 발사되는 탄환은 두꺼운 소나무 판재로 제작되는 판옥선 선체에 전혀 타격을 주지 못한다.[25] 따라서 3층 상갑판에서 아래로 이불을 걸었을 리는 만무하고, 그렇다고 이걸 실용적으로 써먹자니 3층 상갑판 위로 걸쳐서 방패판 대용으로 써야 승선 인원을 보호하는 구실로라도 써먹을 만 할텐데, 이불을 3층 상갑판 위에 주렁주렁 건 상태에서 시야 확보 및 난중일기에서 묘사되는 치열한 근접전을 어떻게 치렀는지가 문제고, 게다가 현장 지휘관인 이순신의 기록에는 이러한 기록이 전혀 없어서 의구심을 갖게 한다.[26]

또한 장기전을 예상해서인지 동아(박의 일종)를 배에 가득 싣고 군사들이 목마를 때마다 먹였더니 갈증이 해소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건 또 이순신의 어릴 적 일화가 떠오르는 장면(...). 즉 조선 수군은 오랫동안 상대의 화력을 견디며 싸울 준비를 끝낸 상황이었다.

더불어 조선 수군이 사용하는 대형 총통들의 운용기록을 보면 지상보다 사거리가 매우 짧은 편이었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일본군의 사격무기도 해상에서는 본래 스펙보다 훨씬 약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사람이 들고 쏘는 조총만 해도 물살로 인한 흔들림으로 조준이 어려워져 유효 사거리가 줄어들었을 터인데, 아예 천장에 매달아서 쐈다는 화포는 당연히. 특히 일본군의 조총은 화승총이었기 때문에 물살이 거세면 화승이 젖기도하고 긴 격발시간동안 롤링과 요잉같은 배 자체의 움직임때문에 유효한 조준이 몹시 힘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포좌로 어느정도 고정된 조선군의 화포는 이에 반해 배 자체의 움직임에만 맞춰 사격을 가할 수 있었던 반면 일본군은 그 당대 해군들이 쓰던 접근전 이후 나포를 썼다고 볼 수 있다. 반면 화포가 아무리 사거리가 짧아도 100미터 200미터에서는 유효한 타격이 나오는데 이 거리는 지상의 조총도 맞히기 힘들고 해상에선 사실상 안전거리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 다시말해 현대인의 생각보다 거리비가 축소되었을뿐 원거리에서 일본군이 화포에 썰린뒤 성채같은 판옥선에서 미니공성전을 겪다가 털린게 맞다.

5.4. 명량철쇄설 

명량철쇄설이란 조선 수군이 울돌목에 쇠사슬(철쇄)를 깔아서, 울돌목의 급류에 밀려 쇠사슬에 걸린 일본의 전선들이 대파되었다고 하는 설이다. 1971년 영화 '성웅 이순신'에서 이미 철쇄를 사용한 것으로 그려졌으며, 1999년 KBS 역사스페셜 방송을 통해 본격적으로 조명되었다. 2005년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철쇄로 일본군의 진격을 막으면서 조류가 바뀔 때까지 시간을 끈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아무리 드라마라도 좀 억지스러운 것이, 분명히 굉장히 무거울 사슬에 매우 빠르고 거친 해류에 휩쓸리고 일본 함선 수 척이 걸린 상황인데 그 사슬을 당겨서 버티는 것은 오로지 수 명의 인력이다. 최소한 말이라도 쓰지.

그러나 여러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2000년대 이래로 철쇄로 적선을 부수었다는 설 자체는 많이 수그러들었고, 대신 철쇄를 전투에 보조하는 형태로 사용하여 전투의 효율을 끌어올렸다는 주장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승전 장계, 선조실록, 난중일기, 징비록 등 당대 1차 사료에는 철쇄가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적어놔서 찌라시 취급도 종종 받는 난중잡록에도 철쇄에 대한 말은 없다.

  • 기록된 근거는?
    • 김억추의 행적이 기록된 호남절의록(1799)과 현무공실기(1900)에 '충무공께서 공에게 철쇄를 설치하게 하셨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때 철쇄를 설치하고 관리해야 하는 관할실무자는 전라우수사인 김억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여전히 문제가 되는 호남절의록과 현무공실기의 과장된 묘사[27]와 함께 김억추의 이런 중요한 공적을 이순신이 기록하지 않은 점에서 의문을 사고 있다. 오히려 김억추는 명량해전 당시 가장 후방에서 꽁무니를 빼고 있었다고 이순신이 난중일기에 친히 적어주셨다.(...). 무엇보다 현무공실기는 1900년 물건으로 당대에서 한참 뒤의 시기에 쓰인 것이므로 신빙성이 없다.
    •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되었으므로 적어도 1795년 이전에 작성되었을 '해남현지'를 보면 '공이 철쇄로 물속을 가로질러 막았는데, 양변 바위 위에 철삭을 박은 자국이 지금도 완연하다. 사람들은 모두 그곳을 이충무공께서 철삭을 쳐서 왜군을 죽인 곳(李忠武設索殺倭處)이라 부른다'고 되어 있다. 일단 해남현지 자체는 당시 국가관청에 의한 실사 확인 기록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여전히 구전에 의거한 것이며, 철쇄가 아니라 철삭(鐵索)이라 하고 있어 철쇄설을 방증하는 다른 자료들과 상충된다. 또한 당시의 1차 사료에는 어디에도 명량해전의 철쇄와 관련된 언급이 등장하지 않는다.
    • 1751년에 편찬된 택리지에도 '이순신이 쇠사슬을 뻗쳐놓고 기다리니 왜선 5백 척이 걸리고 물살에 휩쓸려 모두 가라앉았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미 해전으로부터 150년이 지난 뒤의 사료인 것과, 왜선이 5백 척이라는 표현 등 정확도가 떨어져서 그대로 신빙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 어떻게 만들 수 있었을까?
    • 이전부터 조선 수군이 철쇄를 설치하여 항구를 봉쇄했던 사례가 왕왕 발견된다. 중종실록 5년 5월 24일 4번째 기사를 보면 삼포왜란 이후 왜구의 습격을 막기 위해 '큰 나무를 박아 세우고 쇠사슬로 차례차례 연결하는데, 칡동아줄로 무거운 돌을 나무에 달아 그 나무를 물밑으로 한 자쯤 잠기게 하여 적선이 걸려 넘어오지 못하고 찍어서 끊지도 못하게 하며, 중간에 쇠갈고리를 설치하여 잠그기도 하고 풀기도 하는' 방법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에 합치되는 나무들이 진해와 통영 등지에서 발굴되고는 하며, 이순신 또한 난중일기에 임진왜란에 앞서 철쇄 공사를 한 기록들을 남겼다.[28] 이러한 노하우가 명량 해전의 철쇄 제작에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 하지만 항구를 봉쇄하는 철쇄와 명량을 가로지르는 철쇄는 의미가 다르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전자는 섬 사이를 가로막아 배의 진입을 일차적으로 저지하는 단순한 방어시설이었고, 그것도 전함이 정박할 소포 인근에 간략히 설치된 임시 구조물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명량에 설치되어야 할 철쇄는 시속 14㎞에 달하는 급류에 말려든 수십 척의 배를 저지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 이는 아래에서 후술한다.
      • 판옥선은 흘수선이 낮고 바닥이 평평해 일정한 높이의 쇠사슬 위를 지나갈 수 있지만, 일본의 군선은 흘수선이 깊고 바닥이 뾰족해서 높은 확률로 쇠사슬에 걸릴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위에서 익히 살펴보았듯 일본의 군선인 세키부네가 구축함이라면 판옥선은 전함이다. 그것도 배에 화포와 포탄을 잔뜩 싣고 있으니 과연 흘수선이 세키부네보다 낮았을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긴다(...). 게다가 그 험한 환경에서 설치 중에 이것까지 계산하고 있었다면... 가히 세계 공병사에 길이 남을 업적.
    • 최소 4톤에 달하는 철을 어디에서 공수해와서 누가 어떻게 가공하였는지도 문제로 제기된다. 6천 근에 달하는 쇠를 입수했다면 분명 난중일기에 기록을 남겼을 것이거니와,[29] 이순신은 전투 하루 전까지도 명량에서 적을 막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음이 난중일기로 확인된다. 따라서 그전까지 명량에 미리 철쇄를 설치해 놓겠다는 생각 자체를 할 수가 없는 것인데, 그렇다면 하루도 아니고 한나절만에 6천 근에 달하는 쇠를 그만한 강도의 쇠사슬로 가공해냈다는 말이 된다(...).
  • 준비된 철쇄는 튼튼한가?
    • 사실 쇠사슬을 걸어서 배를 부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며, 현대의 제작 기술로도 그만한 강도를 가진 쇠사슬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대에도 불가능에 가까운데 당대에는 오죽하랴. 목선이라고 해도 사람 수십 명이 타는 이상 무게가 톤 단위는 될 것이고, 수적인 면에서도 한번에 열 척에서 스무 척 정도는 달려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울돌목의 조류를 타고 있으므로 속도까지 빨랐을 것은 당연지사. 비유하자면 열차를 쇠사슬로 막는 꼴이다. 최근에도 현대그룹에서 만든 1350톤짜리 구조물이 떠내려 간 해류가 흐르는 곳이 여기다.
      • 적을 막는 데 철쇄를 이용했다가 실패한 사례로 오나라가 있다. 오나라의 건평태수 오언이 장강을 가로지르는 쇠사슬을 쳐서 뱃길을 막아 두었는데, 왕준이 배를 타고 내려오면서 기름 먹인 큰 뗏목 수십 개를 떠내려보낸 뒤 여기에 불을 놓아서 쇠사슬을 녹여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화염은 보조적인 역할을 하고, 실제로는 뗏목의 중량을 버티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 적을 막는 데 철쇄를 이용했다가 성공한 사례는 비잔티움 제국이 있다. 수도를 지키기 위해 금각만을 가로질러서 친 쇠사슬은 효과적이었는데, 실상 금각만의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해류[30]와 세키부네만큼이나 빈약한(...) 오스만 제국 함선의 규모에 힘입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메흐메트 2세는 배를 끌고 산을 넘어서 금각만에 진입해야만 했다. 그냥 어쌔신을 고용하지
    • 해남현지의 기록에 따라 당시의 철쇄는 쇠사슬이 아니라 철삭, 즉 철사를 꼬아 만든 와이어로프라는 주장도 있다. 이 경우 외부의 힘에 의해 끊어질 위험이 현저하게 줄어드는데다 무게 또한 줄어든다. 다만 난중일기나 실록 등에서 당시 항구를 봉쇄하는 데 쓰이던 도구는 일관되게 철삭이 아닌 철쇄로 표기되고 있으므로 철삭을 사용했다는 주장에는 근거 자체가 부족하다. 그리고 이런 구조물의 강도라도 그 정도로는 함선을 정면에서 가로막기에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 철쇄 없이는 이길 수 없었나?
    • 고려시대 여몽연합군이 진도에 웅거한 삼별초를 공격했는데, 고려사 김방경 열전을 보면 이 당시 진도 주위를 지키던 삼별초 수군의 배가 날아다니듯 움직였다고 적혀 있다. 삼별초군은 이 물살을 이용해 고려군을 지휘하던 김방경의 기함을 해류가 거센 곳으로 몰아서 포위함으로써 거의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은 적도 있었다. 물론 김방경은 분전 끝에 무사히 빠져나오긴 했지만 조류를 이용하면 글자 그대로 공격 측을 관광보낼 수 있을 정도로 물살이 강했던 곳이 바로 울돌목이다.
    • 기본적으로 난중일기를 보면, 명량 해전의 첫 단계부터 적선이 아군 선단을 둘러쌌음을 명시하고 있다. 만약 철쇄가 설치되어 제대로 효용을 발휘하고 있었다면 처음부터 이러한 상황이 벌어질 수가 없다. 그리고 상황이 철쇄설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여유롭지 않았음은 이미 위에서 서술하고 있는 바와 같다.
    • 전투가 시작되던 시점에 일본군은 울돌목의 빠른 해류를 타고 있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일본군에게 불리하게 작용했을 수도 있다. 숫자가 적은 조선 수군은 별 지장 없이 전진과 후퇴가 가능하지만[31] 좁은 지형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수의 일본 수군으로서는 자연스럽게 축차투입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이 상황에서 빠른 물살은 말 그대로 '조선 수군을 밟고 가려'했던 일본 수군에게 쥐약이었던 것. 조선 수군으로서는 그저 쓸려내려가지 않기 위해서 애를 썼지만, 일본 수군은 깔대기 흐름에 사로잡혀 배의 속력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그저 다닥다닥 붙어서 쓸려 내려오기만 했던 것이다. 물살에 밀려 한 뭉텅이씩 우르르 내려오는 일본의 소형 보트 세키부네들은 조선 수군에게 그저 밥이었던 것. 애초에 그러려고 선택한 명량 아니었던가.
      • 하지만 말이 쉬울 뿐, 이렇게 싸운다고 해도 대장선(과 호위선단) 하나로는 몇 척의 전선도 상대하기 힘들었을 것이며, 혼자서 그것을 상대한다는 암담함을 난중일기에서 둘러싸였다고 묘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전투 중에 초요기를 올려 다른 전선들을 부르거나 다른 배에 있는 안위나 김응함에게 문책을 하는 묘사가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상황이 약간의 여유마저 없을 정도로 난감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본 수군의 투입과 투입 사이에 간격이 있었을 것이고, 상선이 적들을 상대하려고 한 마장이나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첨저형 전선의 구조상 단숨에 완벽하게 기동하여 대장선을 포위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기동을 방해할 뭔가가 있었다거나.
    • 이렇게 보면 아무리 좁다 하더라도 수백 미터가 넘는 명량 해역에서 판옥선 혼자 적선을 상대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아울러 초장에 재빠르게 울돌목을 빠져나온 수 척의 일본군 전선을 시작으로 일본 수군들이 조선의 대장선에 걸려서 하나씩 개피를 본 셈이 된다. 비유하자면 러커가 자리잡고 있는 길목에 마린이 일렬로 다가가는 모습.[32]

5.5. 거북선의 등장? 

철쇄설에 비해 빈도는 적지만 가끔 등장하는 떡밥으로, 명량 해전 당시 거북선이 있었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 거북선은 일반인들에게는 조선 수군의 결전병기 수준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명량 해전이라는 최악의 위기 상황에 거북선이 등장했다는 것은 대단히 드라마틱한 설정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철쇄설과 마찬가지로 해전 당시 거북선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 거북선 자체가 판옥선을 보조하는 함선으로 중요성이 낮은데다, 이전부터 건조한 거북선들은 모두 칠천량 해전 당시 손실하였고, 명량 해전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난중일기 및 실록의 보고서 등에는 거북선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명량 해전 당시 거북선이 존재했다는 기록 중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있는 내용은 이순신의 행적을 조카 이분이 기록한 '이충무공 행록'에 등장하는 부분이다. 이 기록에선 회령포에서 이순신이 잔여 함대를 인수한 뒤, 장수들에게 전투선을 거북선 모양으로 꾸미도록 명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 외에 명량해전에 대한 일본의 기록 중엔 조선 수군의 전선이 모두 거북선이라서 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과장이 너무 심해서 신빙성이 없다.

5.6. 결론 

지휘관의 역량이 승패에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 전투.솔직히 납득이 안되는 승리 대체 뭘로 이긴거냐 패왕색패기

당시 조선 수군이 명량 해전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장 압도적인 화포와 난공불락의 판옥선을 대량으로 보유했으면서도 참패한 칠천량 해전의 선례가 있다. 패잔병들로 이루어진 13척의 배와 도망가고 싶어서 안달하는 중간 지휘관들, 물자 부족에 시달리는 함대, 모함을 당해 건강을 해치고 모친상까지 당했으며 임금으로부터는 노골적인 박대를 받는 총지휘관, 한 척의 배도 보내주지 않는 조정, 그리고 대승을 거둬 사기가 하늘을 찌르며 수백 척의 배를 끌고 오는 적군까지. 이길 수 없는 이유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뒤집어서 승리를 거둔 것은 오로지 이순신의 역량 덕분이었다. 막강한 판옥선도 강력한 화력도 결국 제대로 된 지휘관이 있었기에 위력을 발휘한 것이고, 부족한 물자를 긁어모으면서 싸울 준비를 갖춘 것도 이순신이며, 울돌목을 싸움터로 정하고 조류의 흐름을 이용해서 전황을 유리하게 이끈 것도 이순신이고, 겁먹은 부하들을 다그치면서 전선을 유지하며 끝까지 싸운 것도 이순신이었다.

결국 승리의 요인은 이순신 그 자체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자 한 마리가 지휘하는 염소 무리가, 염소 한 마리가 지휘하는 사자 무리보다 강하다'고 하는 비유의 가장 극적인 사례.

6. 미디어 창작물 

  • 임진왜란의 전투 중에서도 대단히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 혈전이었으나 이 전투만을 소재로 한 창작물은 많지 않은 편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긴 거지?
  • 2001년에 출간된 김경진, 안병도 공저의 역사전쟁소설 '격류'에서 명량해전의 전말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절판된 지 오래고, 대신 그 내용은 김경진, 안병도 공저의 '임진왜란'에 그대로 들어가 있다. 명량 해전에 시마즈 요시히로가 등장하는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묘사가 고증에 합치된다.
  • 2005년에는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96회 전체를 명량해전의 묘사에 할애하였다. 다른 전투의 경우에는 한 회에 여러 전투들을 잇달아 묘사하거나 전투를 전후아여 다른 장면들을 집어넣는 데 반해, 순수하게 전투 묘사로만 한 회를 채운 것은 명량해전이 유일하다. 기존의 철쇄설을 답습하고 이순신이 직접 백병전을 치르는 등[33] 고증 오류가 많이 존재하기는 하나, 이순신 이하 전체 조선 수군이 마치 악귀로 변한 듯한 처절한 전투신[34]은 불멸의 이순신의 모든 회차 중에서도 상당히 훌륭하다. 조선 수군 전원은 사실 소드 마스터라 카더라 처절함 이후 시작되는 조선 수군의 역관광 세리머니에서는 절로 희열을 느끼게 된다. 그와 대비되게 일본 수군 무장들이 '이럴 리가 없어!'라며 멘붕하는 장면이 나와서 당시 일본군이 맛봤을 절망을 조금이나마 간접체험하게 해준다.보러가기
  • 영화 '천군'의 마지막 장면이 이 명량해전 직전 상황으로, 이순신이 병사들을 격려하면서 칼을 뽑는 간지나는 장면이 연출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때 나오는 음악은 그야말로 장관. 오오 황상민 오오
  • 다나카 요시키의 소설 '은하영웅전설'에 등장하는 회랑의 전투나 마르 아데타 성역 회전이 명량 해전과 다소 흡사하다는 주장이 있다. 조류와 기타 장애물로 인해 함대 기동이 어려운 전장에서, 해당 함대가 진영의 마지막 전력이라는 점 등이 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 전투들은 명량 해전과는 달리 방어측에게 별다른 전술적 우위[35]가 없는 상황에서 전술적 우위가 아닌 전략적 행동을 통해 벌어졌으며, 후자의 경우에는 반대로 패전한 점 등이 너무 다르다. 이는 오히려 테르모필레 전투를 참고했다고 보아야 할 듯.

  • 2014년 7월 30일 명량 해전을 다룬 영화 명량이 개봉했다. 감독은 최종병기 활의 김한민이 맡았고, 최민식이 이순신, 류승룡이 구루지마 미치후사를 연기한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 은하!의 작가가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 기념으로 올린 만화.# 명량해전 직전 조선 수군이 느꼈을 공포, 그리고 그 이상으로 조선 수군과 일본군 모두 공포에 떨게 만드는 최종보스 이순신의 포스가 백미다. 용감무쌍하게 공격에 나섰다가 오체분시돼서 나무막대에 꽂힌 구루미자 미치후사와 이순신을 사람이 아닌 귀신 취급하며 재앙과는 싸울 수 없다며 제대로 멘붕한 일본군들이 처절하게 유린당하는 장면이 절정.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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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년 11월 29일에 울돌목 부근 해저에서 명량 해전 당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소소승자총통 3점과 대연자탄환이 발굴되었다. 소소승자총통은 구리로 만들어졌으며, 길이 57.8㎝에 무게 2㎏이다. 3점에 모두 "만력 무자년 4월에 전라좌수영에서 만든 소소승자총통. 무게는 세 근 아홉 냥. 장인 윤덕영."이라는 동일한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만력 무자년은 1588년으로 명량 해전에서 사용되었다는 추측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첫 발견은 도굴꾼이 했지만, 현재는 국립해양연구소가 후속 발굴 중이라 기대해 볼 만하다. 어느 것 같은 간지나는 문구는 없지만 역시 투박한 게 제일이다.
  • 숙종 14년(1688)에는 이 해전을 기념하는 명량대첩비가 전라우수영 근처에 건립되었다. 위치는 현대의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일제강점기인 1942년에 철거되어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가, 광복 후 경복궁 근정전 근처에서 발견되어 1950년 해남으로 복원했다. 다만 이 복원이 완전하지는 않았는데, 원래 자리인 우수영 일대에 건물들이 들어서서 비석을 세우기가 곤란하자 근처의 충무사에 비석을 세운 것. 그러다 2011년에 다시 본래의 위치인 우수영 마을로 이전했다. # 이민서가 쓴 명량대첩비의 전문은 이충무공전서에도 수록되어 확인할 수 있다. #
  • 명량 해전이 있던 정유년 9월 16일의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쓴 모든 일기 중에서 가장 길고 상세하게 쓴 일기다. 아마 이순신 장군 본인이 느끼기에도 이 하루가 평생 가장 긴박하고, 가장 길었던 시간이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 일본어 위키백과에서 기술한 명량 해전 문서는 꽤나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전술에선 졌지만 전략에선 이겼다는 것. #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위에서 이미 논술했으므로 생략한다.
  • 영어판 위키피디아나, 여러 글에 구루지마가 임진왜란 중 전사한 유일한 다이묘라고 나오는데 사실이 아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선에서 매사냥 도중 조선군의 습격으로 전사했다고 알려진 나카가와 히데마사가 존재한다.
  • 명량 해전의 패배로 제대로 분노한 일본군은 이를 보복하기 위해 이순신의 생가인 아산을 습격했다. 이때 이순신의 셋째 아들 이면은 이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이순신은 이를 상당히 애통해했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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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위 그림의 출처는 알 수 없으나 당대에 그려진 그림은 확실히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 명량해협의 폭은 484m로, 절대 판옥선 한 척으로 틀어막을 수 있을 정도로 좁지 않다. 물론 정유재란 당시 암초 등의 이유로 폭이 더 좁았을 가능성은 있으나, 최소 300여 미터의 폭만 되더라도 판옥선은 물론 일본 수군의 안택선 여러 척도 무리 없이 드나들 수 있는 넓이다. 명량해협이 망망대해보다야 좁은 건 당연하지만, 저 그림은 그런 지형적 특성을 심히 과장하고 있다는 것. 결정적으로 지명이 왼쪽->오른쪽으로 적혀 있다. 최소한 50년대 이후에 그린 것.
  • [2] 비전투인원 및 사후선 포함 약 2200명 가량.
  • [3] 현대 사가들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7만~30만 정도의 페르시아군이 동원되었다고 추정하며, 테르모필레의 그리스군이 몇 명인지는 애매하지만 대체로 최소 5천명 이상, 2만까지도 바라보고 있다. 뭐 병력이야 어쨌든 명량이나 테르모필레나 일본군과 크세르크세스가 각각 패배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완벽하게 동일하다?
  • [4] 장졸이라고 하나 패잔병과 노병이 대부분이었다. 임진왜란 초부터 이순신을 따르던 정예수군들은 이순신이 재부임 했을 당시 칠천량 바다 아래에 있었다.
  • [5] 이순신은 만성위염을 가지고 있었다.
  • [6] 이때 교전을 어란포 해전이라고 부르며 백의종군 후 이순신의 첫번째 승전이었다.
  • [7] 배설은 결국 1599년에 선산에서 잡혀 효수되었다. 별 다른 말 없이 한 줄 쓰여져있어서 평소 이순신은 배설을 준수하게 평가했고 도망간 데에도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경우도 있으나, 실제로는 그 전부터 배설에 대해 이순신이 안 좋게 봤던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명량해전 직전 거의 유일한 전력인 전선을 인계해주는 것도 미적거렸으며, 한 번은 이순신이 나왔을 때 타고 올 배도 주지 않는 등.
  • [8] 조선 수군의 기본 전함인 판옥선은 일본 수군의 기함인 아타케부네(안택선)와 비슷한 크기였는데, 일본 수군에서는 아타케부네를 해상의 성(海上之城)이라고 부를 정도로 안택선이 거대한 전함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주 전투함인 세키부네는 아타케부네의 반 정도 크기였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고속정 13척이 대형 구축함 13척에게 시비를 건 셈.(...) 다만 일본군이 판옥선을 이토록 유리한 상황에서 공략해본 적이 없음은 감안할 만하다. 여기에 칠천량의 전훈이 있으니 13척이 꼭 오만이라 단언할 수는 없는 셈.
  • [9] 이순신이 병법에서 인용한 말은 모두 오자병법에 나오는 말이지만, 오자에 나오는 경구과 이순신의 인용문은 차이가 있다. 오자병법의 원문은 치병(治兵)편의 '죽고자 하면 살고, 살기를 바라면 죽는다(必死則生 幸生則死)'와 여사(勵士)편의 '한 사람이 목숨을 걸면 천 사람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人投命 足懼千夫)'이다.
  • [10] 미스테리한 점은 김억추는 이후 전황이 반전되어 조선 수군이 완벽하게 승리를 거두어 가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전투에 끼어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후에 김억추가 육군으로 보직 변경을 신청하여 옮겨간 걸 보면, 해전에 익숙하지 않아서 소극적으로 굴다가 전투가 끝날 때까지 쫄아서 못 움직였을 가능성도 높다(...).
  • [11] 당시 안위는 수군 편제에도 속해 있지 않은, 단순한 고을 수령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순신의 명에 따라 가장 먼저 전투에 복귀한 공으로 일개 현감(종6품)에서 이순신의 추천을 받아 전라우수사(정3품)로 파격 승진한다.(현대로 치면 면장, 계장 급에서 관리관 급으로 승진) 하지만 김응함은 그대로 미조항 첨사에 머무르게 되었다. 말을 들었어야지(...)
  • [12] 마다시의 정체에 대해서는 마타시로(又四郞)라 불리던 간 마사카게라는 설과 구루지마 미치후사를 마다시로 보는 설이 있다.
  • [13] 쵸소카베 모토치카의 부하인 노부시치로라고 적었는데, 누구인지 명확하게 확인되지는 않는다.
  • [14] 구루지마 미치후사를 말한다.
  • [15] 일본에서는 봉건체제에서 다이묘나 소묘의 중신(중요한 관직에 있는 신하)을 가로라 칭한다.
  • [16] 실록에는 정응두로 오기
  • [17] 실록에는 영등포만호로 오기
  • [18] 노를 젓는 격꾼 및 사후선 및 탐망선의 인원을 포함하면 대략 2000여명 가량
  • [19] 수부를 포함할 경우 약 8~9000여 명에 이른다.
  • [20] 조정에서도 이미 '수군 폐지령'을 고려하고 있었으며, 칠전량에서 패배했던 수군 장수들 중에는 이순신 함대에 합류하지 않고 은둔해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적진을 향해서 돌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경우, 부하들은 그대로 도주해도 그렇게 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이순신도 이런 상황을 고려하여 비전투선들을 도주방지용으로 세워놓긴 했지만, 통상대감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시늉만 하다가 통제권을 이양받아서 퇴각하는 식으로 적당히 처리하고 도망치는 선택지도 충분히 나올만한 상황이다.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비록 그전까지 뒤로 물러서 있었더라도 부장 두 명이 이순신을 따라서 돌격하여 분위기를 반전시켰다는건 군율 이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애초에 이순신의 군율만이 이유였다면 그냥 왜군진영으로 가서 항복하거나 애초에 합류를 안 했겠지
  • [21] 물론 세키부네가 소형 보트라고 할 정도로 작아빠진 것은 아니다. 당포 해전의 장계에서는 판옥선과 비슷한 크기의 대(大)세키부네도 확인되고 있다.
  • [22] 다만 위 난중일기 기록에서도 나오듯 실제 명량 해전에서는 지자총통과 현자총통이 사용되었다. 천자총통은 너무 크고 화약을 많이 잡아먹는다는 지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난중일기 등에서는 1593년 이래로 천자총통에 대한 기록이 사라진다.
  • [23] 일본 함선들의 높이가 조선 함선(판옥선)보다 현저하게 낮으므로 접현시 지자총통과 같은 대형화포는 하향사격을 해야 하는데, 이때 대포에 장전한 발사체가 흘러내릴 개연성이 높다. 유럽에서는 하향사격(Depressed Fire)을 할 때 이중 격목을 사용해서 포탄 등 발사체를 흘러내리지 않게 했지만, 현존하는 조선시대 화약무기 관련 문헌에서 이중 격목을 사용한 직접적 증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더구나 현재 학계의 연구처럼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사용한 포가의 형태가 동차라고 간주한다면 초단거리 하향 사격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포가의 앞부분이 높고, 뒷부분이 낮아 17도 이하의 사각을 선택하는 것이 구조상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 [24] 게다가 첨저형 선박은 구조상 제자리회전이 불가능하다. 거센 물살로 주위에 소선들이 어지러이 밀집된 상황에서 이런 선박이 기동하기란 아군을 짓밟는 팀킬을 하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 [25] 구경을 늘린 오오츠즈, 즉 대조총을 동원해도, 판옥선 선체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기엔 역부족이며 판옥선의 3층의 사부들을 보호하는 참나무 방패에 기별이라도 줘 볼 만 한 것이 당시 현실이다. 그리고 이점은 영화 명량에 충실히 반영되어, 이 영화에서 조총은 방패 틈 사이로 날아든 탄환 말고는 노 젓는 격군조차 못 죽이는 위엄(...)을 달성한다. 오죽하면 영화 내에서 총 맞아 죽은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 그런데 문제는 실제 이순신 기함의 전사자는 저것보다도 더 적었다는 것.
  • [26] 전형적인 개인 행장록 특유의 '공훈을 과장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이 외에도 여러 선비들의 행장에 임란 당시 '장군님께 이러저러한 계책을 상신했다'느니, '활을 들고 함께 적을 섬멸했다'느니 하는 식의 글이 기록된 경우가 많다. 특히 행장이라는 것은 그 행장의 주인공이 죽은 후 다른 사람이 그를 찬양하고 기리기 위해 쓰는 글이니만큼 이런 식의 과장된 기록이 남는 건 당연한 일이다.
  • [27] 김억추가 검풍을 휘날리자 왜선 수백여 척이 침몰하였다던가, 화살 한 발로 적장을 잡고 세 발로 전열을 무너뜨렸다던가, 막내동생 김응추가 10여 장을 뛰어올라 20여 급을 베었다던가. 때문에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김억추 이누야사설이 아주 유력하다. 철쇄란 철쇄아라고... 물론 믿으면 골룸.
  • [28] 1592년 1월 17일의 철쇄공석(鐵鎖孔石), 2월 2일의 철쇄횡설(鐵鎖橫設), 2월 9일의 철쇄관장목(鐵鎖貫長木), 3월 27일의 철쇄횡설.
  • [29] 실제로 임진년 2월 13일에 이억기에게 쇠 50근을 보냈다는 기록을 난중일기에 남겼다.
  • [30] 가장 아래에 표시된 역류(빨간색 화살표)가 그것이다.
  • [31] 그래서 겁먹은 장수들이 죄다 달아날 뻔 했지만(...).
  • [32] 그러나 난중일기 부분을 보면 중반부 이후에 안위와 김응함의 배 또한 적선을 향해 뛰어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만약 축차투입으로 인한 각개격파가 맞다면 초반은 둘째치고라도 후반부에 다른 전선들이 적선 무리로 뛰어드는 모습은 나오기 힘들 것이란 의문도 있다.
  • [33] 특히 유명한 '일휘소탕 혈염산하' 문구가 새겨진 칼을 들고 싸우는데, 문구가 있는 실제 칼은 길이가 2m가 넘는 의장용 칼이다.
  • [34] 병사들이 낫을 뽑아들고 달려드는 적들을 한 번도 아니고 두세 번 반복해서 찔러 죽이고 얼굴에 피가 확 튀는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잔인함 보다는 처철함을 배로 느끼게 된다.
  • [35] 판옥선과 세키부네의 체급 차이, 일본 측 화기가 거의 무력화된 상황, 그런 상황에서 발휘된 조선 화포의 뛰어난 화력과 같은 것.
  • [36]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 난중일기, 1597년 10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