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기의 왜군이 한양 도성에서 철수를 할 때 남아 있던 조선인을 대량 학살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이들은 왜군에게 협력했던 친일 조선인, 즉 부왜자(附倭者)들이 대부분이어서 전쟁의 부조리함을 다시 느끼게 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양국민 사이에 부왜, 가왜(假倭), 항해(降倭)자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전문가들의 연구에 의해 어느 정도 밝혀져 있다. 부왜는 길 안내를 맡는 등 왜군에게 비교적 적극적으로 친일·부역한 임진왜란기 조선인, 가왜는 왜군을 가장해 약탈 등을 자행한 조선인을 일컫고 있다. 항왜는 그 반대로, 왜군이면서 배고픔 등 전쟁의 고초로 조선으로 투항한 왜군을 가리키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영화 '명랑'에 등장하는 '츈사'(俊沙)와 김충선으로 잘 알려진 '사야가(沙也加)' 이다. 이중 부왜는 임진왜란 초기에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많이 발생했으나 이후 한양 도성 등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주된 이유는 탐관오리와 신분제도에 대한 불만때문 이었다. 특히 선조실록에는 충북 충주의 사례도 등장한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접반사 서성의 장계를 보건대, '충주의 사기장 한막동(韓莫同)은 왜놈의 첩자가 되어 중국군을 염탐하였다고 하니, 대단히 흉악합니다. 즉시 목을 베어 효시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선조실록 26년 6월 12일자> | |||||
결국 이들중 상당수는 남쪽으로 철수하는 왜군들에 의해 대량 학살을 당했다. 이는 한국전쟁 때 남북한 정부로부터 희생당한 일반인과 비슷한 일면이 있다. 관련 사례는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개인일기와 연려실기술 등에 등장한다. '왜적이 경성 백성을 대량 학살하였다. 행장(行長) 등이 평양의 패전을 분하게 여긴 데다가 우리 나라 사람이 밖에 있는 명나라 군사와 몰래 통하는가 의심하여 도성 안의 백성들을 모조리 죽였다.'-<선조수정실록 26년 1월 1일자·사진> '흉측한 적(왜군 지칭)의 무리들은 경성으로 음츠려 들어가, 우리나라의 투입한 사람들을 다 죽여 시체를 3곳에 쌓아두니 그 높이가 외성(外城)보다 높았다.'-<고대일록 제 1권 2월 17일 임인> '적들은 (남으로) 물러가게 되자 이들을 모두 찔러 죽일 것을 비밀히 의논하고, 백성들을 결박하여 남문(南門)밖에 열을 지어 세워놓고 윗쪽에서 부터 찍어 내려오는데, 우리 백성 중에는 칼을 맞고 모두 죽을 때까지 한 사람도 탈주를 꾀하는 자가 없었다.'-<연려실기술 제 16권 선조조 고사본말> 왜군의 이같은 살육행위는 부왜 조선인들이 다시 조선으로 귀순하는 배경이 됐다. 특히 정유재란 막바지에 이르러 부왜자들이 속출했다. 이에 조선 조정은 이들은 '적극 부왜자'로 몰아서 처형했고, 또 철군하는 왜군과 함께 일본으로 도망했다가 조선통신사 편으로 되돌아 온 자도 역시 극형에 처했다. '"박수영(朴守永)이 유정(惟政) 등을 따라 대마도에서 나왔습니다. 이 자는 (…) 적에게 빌붙어 나라를 배반한 죄를 나국하여 형벌을 바루지 않을 수 없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윤허한다'고 답하였다.'-<선조실록 38년 6월 17일자> 특히 선조는 자신의 실정은 생각하지 않고 부왜자들을 악감정을 넘어 적개심을 갖고 대했다. '전교하기를, "박수영은 어두운 밤에 처형하지 말고 내일 많은 사람이 보는 곳에서 처형하라" 하였다.'-<〃> 3달후 그의 아들 박충성도 연좌제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진 것으로 선조실록 38년 9월 29일자는 적었다. 청주대 민덕기 교수의 최근 논문 '임진왜란기 부왜 정보와 조선 조정의 대응'(한일관계사연구 제47집)에 이같은 내용이 상세히 실려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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